첫댓글"금송(金松)"은 "일반적으로 날려진 소나무(松)가 아닌, '낙엽송'계통으로 알려쟈 있고, 일본에서 한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류(誤謬)"로 "금송(金松"이라는 이름이 되었다라는 웃기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日本 : 列島)"에서의 "금송(金松)"은 아주 고가(高價)의 나무로, 정원수로 많이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위의 영상에서 보는 "금송(金松)"과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금송(金松)'과 같은 것인가? 이게 포인트라고 보여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정원수로 많이 키우고 있는 금송은 원산지가 절겅성과 복건성지역"이라고 전해지는데, 그렇다면 이 나무는 아열대지방이나 따뜻하고 온화한 땅에서 자라는 나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영상"을 잘 보았습니다.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세요!
첫댓글 "금송(金松)"은 "일반적으로 날려진 소나무(松)가 아닌, '낙엽송'계통으로 알려쟈 있고,
일본에서 한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류(誤謬)"로 "금송(金松"이라는 이름이 되었다라는 웃기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日本 : 列島)"에서의 "금송(金松)"은 아주 고가(高價)의 나무로, 정원수로 많이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위의 영상에서 보는 "금송(金松)"과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금송(金松)'과 같은 것인가? 이게 포인트라고 보여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정원수로 많이 키우고 있는 금송은 원산지가 절겅성과 복건성지역"이라고 전해지는데, 그렇다면 이 나무는 아열대지방이나 따뜻하고 온화한 땅에서 자라는 나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영상"을 잘 보았습니다.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세요!
문무님께서 장문의 댓글을 올려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문암 연구의 핵심은 황해도 단흥군에 존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송곡'의 실체를 규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미 관련 칼럼도 소개한 바 있지만 무슨 이유인지 단흥군의
유래를 소개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규장각을 비롯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 홈피 등 실로 주요 연구기관을
총망라한 것인데 무슨 이유인지 '단흥군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리지와 관련해 규장각에 조선시대 후기에 편찬된 각군지가
총망라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단흥군지'가 누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단흥군이 본래 없었던 군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400년대 지도상으로 제가 아는 湍興郡''과 한자가 다르기는 하지만
'端興郡' 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단흥군을 소개한 자료가 없다는 것입니다.
문무님도 군지의 시스템을 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 군의 연혁을
비롯해 지명들의 유래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자료를 보고 싶은 것인데, 그 어느 기관에도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오늘 어떻게 해서든지 돌파구를 찾고 싶은 마음으로
'金松谷'으로 검색하여 전혀 예상치 않았던 영상을 발견하였습니다.
지역은 중국으로 추정됩니다만 놀랍게도 단흥군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金松谷'곡'과 일치되는 한자가 나온 것입니다.
바로 이 영상에 있는 '금송'이 문무님께서 중국 절강성과 복건성이
원산지라는 그 '금송'이 아닌지 짐작되는 순간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문암이 찾고자
하는 '금송곡'의 지명이 일본이 아닌 중국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문암은 오늘 영상을 통해 금송의 본래 원산지가 일본 이전에
중국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금송곡'을 해석하면 금송 골짜기라 할 수 있는 영상에서 금송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문암이 판단하기에 단흥군에 있는 금송이 일본이 아닌 중국에 있는
금송과 일치하는 나무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알려진 바로는 우리나라에 금송이 처음 도입된 것이
1920년대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조선시대부타 있었을 것으롱 추정되는
단흥군의 '금송'의 실체는 과연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요?
그러한 금송이 단순히 몇그루 정도가 아닌 하나의
골짜기를 이룰 정도라면 과연 이 금송곡은 그 유래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이지
생각할수록 미스테리입니다.
바로 이러한 유래의 단서를 찾기 위해 기본적으로 그 역사를 소개한 자료를
확인하고 싶은 것인데, 현재 오리무중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문무님이 좀더 이해하시는데 참고가 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문암
가문의 역사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겠습니다.
거슬러 올라가서 2024년 5월 9일부터 시작된 박여해 선조의 연구가 11월 9일로써
연구 6개월이 되어 그동안 조사한 것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결정적인 자료가 도출되지 않았고, 팩트가 아닌 추정을 바탕으로
글을 올리는데 한계를 느껴서 일시적으로 연구를 중단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망의 2025년 을사년 새해를 맞이하여 불현듯 임진왜란 때
탄생하셔서 호군을 지내시고 향년 55세로 별세하신 11대조부가 떠오르면서
그 선조가 안장되어 있는 묘소가 바로 '금송곡'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 습니다.
다시 연구하는 과정에서 묘소가 안장된 지역이 그동안 알고 있었던 '서흥군'이
아닌 '단흥군'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기에 이르렀습니다.
박여해 선조께서 감찰의
벼슬을 제수받으신 이후 정확히 언제 별세하셨는지 모르며,
어느 지역에 묘소를 안장하셨는지 여부도 전혀 모릅니다.
족보에 근거하여 감찰공 선조의 손자까지는 묘소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가 비로소 동정의 벼슬을 지내신 증손대에
처음으로 평산의 월고리에 묘소가 위치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몇대가 평산으로 내려오다가 15대조부 때부터 비로서
'단흥금송곡'에 묘소가 있는 것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여러대 내려오면서 9대조까지 직계와 방계 선조를
포함애 10여기 이상이 '금송곡'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8대조부터 '봉산군'에 묘소가 위치한 것으로
등장하고 6대조부터 강원도 철원에 묘소가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여기서 어떠한 유래인지 모르겠으나 '금송곡'에 10여기 이상
선조들의 묘역이 있다는 것인데, 그 위치가 '금송곡'이라는
것이 생각할수록 신기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15대조의 묘소가 처음에 어떤 경위로 '금송곡'에
안장된 것인지 그 내력을 알고 싶은데 알 수 있는 단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 지역에 어떤 유래로 '금송곡'이 존재할 수 있었는지
여부도 궁금한 대목입니다.
한편 10여기 이상의 묘역이 형성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면적이
있어야 하는지 여부도 궁금하네요.
단흥군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송곡'이 과연 현재도 존재하는지
여부는 실로 베일에 싸여 있으나 놀랍게도 지명이 중국에 있는
'금송곡'과 일치한다는 점인데, 바야흐로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이 또한 궁금한 대목입니다.
또한 중국에 있는 '금송'이 단흥군에 있었던 '금송'과 같은 품종의
나무인지 여부도 앞으로 밝혀야 할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발견한 영상을 카페에 올리면서 내심 문무님이 관심을
보여 주시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문암 예상대로 댓글을 올려
주셔서 문암 또한 영감을 받아서 장문의 댓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2025년 1월 17일(금) 문 암 올 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