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는 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무관직으로 병사라고도 한다.
조선초기부터 개칭전에는 병마도절제사라고 불리었다. 유명한 인물로는 설성(雪城)을 쌓은 초대 전라도 병마도절제사(初代兵使) 마천목 장군이 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절도사는 모두 15명으로 충청도 ·경상좌우도 ·전라도 ·평안도 ·함경남북도에 각각 1명씩 모두 7명의 전임 절도사가 임명되었는고, 그들을 단병사라 하였다.
그 밖에 각 감영의 관찰사가 겸직하는 겸병사가 8도에 1명씩 있었다. 경기 ·강원도 ·황해도에는 단병사가 파견되지 않았으므로 관찰사가 겸병사로서 그 도의 군대를 통할하였다. 1593년 선조때부터는 황해도에도 단병사를 두어, 조선 후기에는 16명의 병마절도사가 파견되었다.
각도 겸병사(관찰사) 단병사(절도사)
경기도 경기감사(한양)
충청도 충청감사(충주) 충청병사(해미)
경상도 경상감사(상주) 경상좌도병사(울산), 경상우도병사(창원)
전라도 전라감사(전주) 전라병사(강진)
강원도 강원감사(원주)
황해도 황해감사(해주) 1593년 황해병사 설치(해주)
평안도 평안감사(평양) 평안병사(영변)
함경도 함경감사(영흥(함흥)) 함경남도병사(북청), 햠경북도병사(경성)
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던 종이품(從二品) 서반 무관직이다. 1466년(세조 12)에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고친 이름이다. 정원은 경기도(京畿道)에 1원, 충청도(忠淸道)에 2원, 경상도(慶尙道)에 3원, 전라도(全羅道)에 2원, 황해도(黃海道)에 1원, 강원도(江原道)에 1원, 함경도(咸鏡道)에 3원, 평안도(平安道)에 2원 모두 15원이었다. 1472년(성종 3) 관찰사(觀察使)가 1원씩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겸하면서 제도가 확립되게 되었다.
7명의 전임관(專任官)이 임명되었는데, 그들을 단병사(單兵使)라 하였으며, 그 밖에 관찰사가 겸하는 겸병사(兼兵使)가 8도에 1명씩 있었다. 경기‧강원도‧황해도에는 단병사가 파견되지 않았으므로 관찰사가 겸병사로서 그 도의 군대를 통할하였다. 1593년(선조 26)부터는 황해도에도 단병사를 두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16명의 병마절도사가 파견되었다.
병마절도사는 아래 병마우후(兵馬虞侯: 從三品)와 군관들, 그리고 많은 아전‧노비‧공장(工匠)들을 거느리는 한편 유방군(留防軍)을 통솔하였는데, 병영이 설치된 곳을 주진(主鎭)이라 하였다. 보통 무신으로 덕망을 갖춘 자가 임명되었고, 임기는 2년이었다. 함경남북도의 병마절도사는 각각 북청부사(北靑府使)와 경성부사(鏡城府使)를 겸하였다.
병마절도사는 평상시에는 지방군의 무예훈련과 습진(習陣), 무기의 제작과 정비, 군사들의 군장(軍裝) 점검, 성보(城堡) 등 군사시설의 수축 등을 엄격히 살펴서 국방 태세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여야 했다. 그리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즉각적으로 대응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하였고, 이에 따라 유사시에는 군사를 동원하여 조치를 취한 뒤 중앙에 보고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국방(國防)뿐만 아니라 도민에게 해를 끼치는 맹수를 잡거나, 도적을 체포하고 내란을 방지‧진압하는 일도 병마절도사의 중요한 임무였다.
[출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