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창
어느 84학번의 추억과 2023년 뉴트로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42호(2023.05.15)
이광표
고고미술사학84-88
서원대 휴머니티교양대학교수
얼마 전 회의차 서울대 박물관에 들렀다. 10여 년 만의 학교 방문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박물관 전시를 둘러본 뒤, 대 운동장과 미술관 사이를 걸어 정문을 빠져나왔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1980년대 중후반, 나의 대학시절 기억을 하나의 전시로 꾸며 본다면….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영화 ‘1987’의 몇 장면이 떠올랐다.
하나둘 되짚어 보았다. 입학 직후, 캠퍼스에서 만났던 사람들. 사복경찰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월간지 ‘시사영어연구’와 ‘창작과비평’ 영인본을 판매하는 외판원들이었다. 처음엔 잘 피해다녔지만, 그들의 능숙한 입담에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책은 샀지만 예상대로 거의 읽지 않았다.
학교 정문을 나서면 ‘광장서적’, ‘그날이 오면’ 서점이 있었다. 가끔 종로에 나가 종로서적과 교보문고에 들렀다. 종로서적과 교보문고 포장지는 교양(?)있는 대학생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서점에는 자주 들렀으나 돈은 술집에서 더 많이 쓰고 말았다.
생맥주와의 만남. 그때 500cc는 500원이었고 안주는 김, 땅콩, 오징어포, 이런 것들이었다. 대개 한 봉지에 100원이었고 땅콩만 200원이었던 것 같다. 학사주점 같은 막걸리집과 소줏집이 대세였지만, 4학년 때엔 녹두거리에 작지만 깔끔한 호프집이 생겼다. 이름이 ‘파랑새’였다. 그 집은 작고 촉촉한 노가리가 인기였다. 마음씨 좋은 주인 아줌마는 노가리를 바구니에 담아 기둥에 걸어놓았다. 우리는 마음대로 가져다 먹었다. 그 추억 때문일까. “맥주 안주 노가리는 작고 부드러워야 한다”고 지금도 나는 주장한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지난해 겨울, 춘천의 강원대 박물관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특강 주제는 ‘근대 유산과 뉴트로(New+Retro) 열풍’이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유튜브 영상 몇 개를 수강생들과 함께 보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1981년 9월 어느날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의 일부 내용이었다. 귀에 익숙한 시그널 뮤직(프랭크 푸르셀 악단의 ‘Adieu Jolie Candy’)이 흘러나오고 이종환 특유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50~60대 수강생들은 모두 탄성을 질렀다. 추억이 몰려온 것이다. 나 또한 대학 시절 이 프로그램을 자주 들었다.
어느 겨울방학, 한 후배가 하숙방에 찾아와 그룹 ‘들국화’의 테이프를 틀어주었다. “형, 노래 괜찮지? 들국화는 뜰거야!” 그 후배는 지금도 자신의 예지력을 자랑하곤 한다. 그 테이프는 신림사거리 리어카에서 구입한 해적판이었다. 아마 1000원쯤 했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며 대학시절 흔적이 좀 남아 있는지 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시집 몇 권이 눈에 들어왔다. 황동규의 ‘삼남에 내리는 눈’과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김광규의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대학시절 한 때, 시를 쓴 적이 있다. 몇몇과 어울려 동인(同人) 활동도 했다. 동인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2, 3년 지나고 나서 ‘시
해체’라고 이름을 지었다. 시를 해체한다니, 멋진 이름 아닌가. 그런데 작명과 거의 동시에 동인은 해체되었다. 지금은 시를 잊었지만 가끔 이들의 시를 중얼거린다.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언제나 가슴에 와닿는다.
볼품없는 추억 몇 조각을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말았다. 요즘 젊은이들이 즐기는 뉴트로 분위기와 조금이나마 어울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기대를 가져본다.
*이 동문은 모교 졸업 후 동아일보 문화부에서 문화재 담당 기자와 정책사회부장, 오피니언팀장, 논설위원을 지냈다. 홍익대 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 고려대에서 문화유산학 협동과정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문화재학, 박물관·미술관학, 한국미술사를 강의했다. 현재 서원대 휴머니티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왕들의 길, 다산의 꿈 - 조선 진경 남양주’, ‘근대 유산, 그 기억과 향유’, ‘명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문화재 가치의 재발견’,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