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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광활한 서부 시베리아 벌판에 빙한 지옥이 펼쳐졌다.
얼음과 눈보라로 뒤덮인 천지.
이토록 혹독한 한파는 이곳 원주민들조차도 처음이라 했다.
토한 숨결이 허공에서 빠지직 얼어붙는 엄청난 추위.
그 혹한 속의 눈벌을 느리게 걸어가는 긴 대열이 나타났다.
앞 사람 발자국을 따라 한발 한발 내딛는 군상들은
각색의 천으로 얼굴을 싸매고 있었다.
숨 쉴 때마다 날카롭게 폐를 찔러대는 매서운 냉기를
조금이나마 걸러보려는 필터 겸 보온용이었지만
이 혹한 속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미 제대로 걷는 사람이 드물었다.
반쯤 얼이 나가버린 허깨비들은 저마다 비틀댔다.
허공을 찢은 칼바람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푸르뎅뎅한 얼굴들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또다시 꾸역꾸역 눈을 토해내는 회색 하늘.
한도 끝도 없이 토해낸다.
고이는 순간 바로 얼어붙어 렌즈가 되어버린 눈물로
시야가 흐릿하다.
사물이 온통 뒤틀려 있었다.
일그러진 거울 속 세상처럼...
눈 닿는 곳까지 끝없이 펼쳐진 묵직한 회색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검붉게 노을 진 구름 아래로
불티처럼 흩날리는 붉은 눈가루.
노루꼬리만큼 짧은 겨울 낮이 빠르게 저물면서
기나긴 북국의 밤이 내리고 있었다.
졸리다.
눈꺼풀의 고드름이 너무도 무겁다.
작년 11월 14일,
옴스크를 함락시킨 붉은 군대에 쫓겨난 수십만의 인파,
끝도 보이지 않던 긴 대열도
이젠 눈에 띄게 줄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눈밭에 쓰러진 말들은
네 굽을 움츠리며 죽어갔고
그 많던 마차들도 땔감으로 사라졌다.
이젠 더 이상 땔감도 없다.
오, 주여. 낙오자들은 어찌 되었을까요?
그러나 매순간순간 제 한 몸 추스르기도 급급한 그들에게
그런 여유는 사치였다.
출발 며칠 뒤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동사자 행렬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서로를 격려하던 사람들도
서서히 표정이 굳어져가면서
묵묵히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씩 힘겹게 내딛을 따름이었다.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어지는 순간이
곧 버림받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지난 자리에 널브러진 주검들은 갈수록 많아졌고
머지않아 그렇게 되어갈 웅크린 인간형상의 눈덩어리들 역시
늘어만 갔다.
하루 밤에 수천 명이 동사한 날조차 있었다.
“타냐, 자면 안 돼, 타냐”
얼어 죽은 말 대신에 힘겹게 썰매를 끌던
장교복의 청년 삐에르가 애타게 아내를 불렀다.
이 추위 속에서 잠들면 다시는 깨어나기 어렵다.
모피를 겹겹이 깔고 덮은 썰매 속에 축 늘어진 여인,
푹 눌러쓴 샤프카(모피 털모자) 밑으로 긴 목도리로 감싸
청회색 눈만 빼꼼히 보인다.
썰매는 이미 사람과 모피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눈에 뒤덮여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어찌... !“
삐에르는 피난가자는 아내를 펄쩍 뛰며 만류했었다.
하지만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붉은 군대가 가장 증오하는 제국군 대위의 신분.
나 때문에 이 이를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지 않은가!
다급해진 타티아나 로스토바는 남편을 어르고 닦달했다.
그리고 결국 삐에르를 몰아세워 피난길에 나섰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다.
이 지옥 속에서 아기가 나오려하지 않는가!
체코 군단
16c 초에 식민지로 전락한 체코인들은
종주국 오스트리아를 뼛속깊이 증오했다.
때문에 1차 대전 당시, 독오 獨奧 동맹군으로 끌려나온
동부전선의 체코출신 장병들은
기회만 생기면 러시아로 귀순했고
일단 포로가 되면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그래서 러시아 측은 체코출신 귀순자와 포로들로만
1개 중대를 따로 편성해주었다.
이에 고무된 그들은 독립의 꿈에 부풀어 의용군을 조직했다.
재在 러시아 체코 동포들까지 모여들어
삽시간에 5만의 대병력을 이룬 그들에게는
「체코군단」이라는 자랑스러운 이름도 생겼다.
제정러시아 정부의 전폭적 지원 하에 출전준비를 마친 이들,
체코군단이 사기충천해 서부전선의 요충지인 키에프로 집결한 것은
1918년 1월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달,
새로 들어선 볼셰비키 정부는
느닷없이 독일과의 휴전을 선포했다.
레닌이 이끄는 혁명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혁명의 완수.
그들로서는 동맹국과의 전쟁보다는
러시아 제국의 망명정부 토벌이 더 시급한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주문제작한 최신형 모신나강 소총을
가장 먼저 공급받을 만큼 호의적인 지원을 받아오던 체코 군단은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낙담한 그들은 가장 우호적이던 프랑스로 가서 동맹국들과 싸우려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그들 사이에는
치열한 전투 중인 서부전선과 독일이 턱 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그건 애시당초 될 일이 아니었다.
우호관계인 동맹국들(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등)의 심기를 건드리는 체코군단은
그 존재 자체가 레닌의 골칫거리였다.
정전협정 이래 두 달 가까이
체코군단의 거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없이 침묵하던
레닌정부의 2인자이며 군사인민위원 트로츠키는
3월 말이 되어서야
“시베리아로 우회해 블라디보스톡까지 가서 배편을 이용하라.”
는 매정한 지시를 내렸다.
거기서 유럽까지는 다시 지구를 반 바퀴쯤 더 돌아야 한다.
게다가 블라디와 연해주 일대는
혁명정부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
하바롭스크에는 망명정부를 세운 짜르가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이쯤 되면 난 모르겠으니 알아서 가시라는 얘기나 진배 없었다.
그러나 체코군단으로서는 더운 밥 찬밥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방향이 정해진 것만도 감지덕지하며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키에프를 출발했다.
1918년 4월 1일이었다.
이동은 원래 5월 중순까지 마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6월 초까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것은
60여개 부대로 편성했던 5만여 명중 1만 4천명에 불과했다.
당시의 시베리아는 곳곳에 무장 세력들이 출몰하는 무정부상태.
치안은 극도로 불안했고 철도는 수시로 습격 받아 운행이 끊기곤 했다.
그래서 체코군단은 서부 러시아의 소도시, 뺀쟈에서
극동의 블라디까지 철도노선을 따라 8천km에 걸쳐 늘어선 상태에서
짧은 이동과 긴 대기를 지루하게 반복하고 있었다.
볼거리라곤 없는 삭막한 시베리아 벌판은 터무니없이 넓기만 했다.
하지만 그 광대한 넓이만큼이나 여유로운 러시아인들은
가혹한 자연조건마저 넉넉한 유머로 받아넘겼다.
“시베리아에서 400km는 거리도 아니다.
영하 40도는 추위도 아니고 섭씨 40도는 더위도 아니다.
그리고 40도 이하짜리 보드카는 술도 아니다.”
거북이처럼 느려터진 이동이 지겨웠던 장병들은
열차 내에서 체코어 신문을 발행하고 우체국을 운영했다.
심지어는 은행도 개설했는데
이건 의외로 큰 환영을 받았다.
전 재산을 휴대할 수밖에 없던 장병들은
언제 불상사를 당할지 몰라 불안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은행에 맡기면 도난이나 강도 걱정이 사라진다.
게다가 예금약관에는
본인 유고시 가족을 찾아 전달해주는 친절한 조항도 들어있었다.
그래서 열차은행은 인기리에 성업 중이었다.
이 열차은행은 훗날 프라하 은행으로 발전한다.
군대모집이라면 상상불허의 탁월한
- 실은 무지막지한 - 수완을 발휘하는 트로츠키였지만
막상 그들을 무장시킬 무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골머리를 앓던 그의 독수리눈이
체코군단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녀석들이
5연발의 신형 모신나강 소총과 맥심 기관총 등
최신식 무기로 잔뜩 무장하고 있다.
이 골칫거리들의 무기로 적군赤軍을 무장시킨다면...?
일거양득의 묘수였다.
음흉한 심보로 꼬투리를 찾던 트로츠키는
서부 시베리아의 첼랴빈스크 역에서 어느 날 벌어진
사소한 소동(1918년 5월, 헝가리 포로와 체코군단의 난투극)을 빌미삼아
체코군단의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는 상대를 너무 만만히 여긴 오판이었다.
동맹국들과 한 판 붙을 요량으로
단단히 준비해온 체코군단이었다.
이따위 명령에 호락호락 응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무장해제를 한답시고 겁도 없이 나타난
오합지졸 수준의 적위대를 간단히 제압해버렸다.
그리고 체포된 동료들 구출에 나섰는데
그게 도를 넘어 첼랴빈스크 시가지를 온통 휩쓸어버렸다.
"음, 이건... 조금 과했나?"
뜻밖의 사태에 난처한 얼굴로 갸웃대던
28세의 참모장 가이다 대령은 이내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에라, 이왕 저지른 김에...!"
시베리아 철도를 장악한 그들은
내친 김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서부 시베리아의 주요 역들(첼랴빈스크 ~ 옴스크 ~ 이르쿠츠크)까지 몽땅 점령해 버렸다.
이 사건으로 체코군단은
시베리아 최강의 무력집단임을 과시했지만
소비에트와는 확실히 등을 지고 말았다.
따라서 블라디를 통해 귀국한다는 희망 역시 불확실해졌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생기는 게 세상사.
고립무원의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체코군단은 자신들이 연합국 측임을 천명했고
연합국(영,불,미국, 일본 등)은 쌍수를 들어 이들을 환영했다.
조국 독립을 꿈꾸며 광활한 시베리아를 떠도는
체코군단의 드라마는 당대 서구지식층의 호기심을 부풀리고
로맨티시즘을 자극했다.
이윽고 머나먼 이국 땅, 시베리아에 고립된
체코 청년들을 돕자는 감상적 여론이
서구사회에 광범하게 형성되어 갔다.
드세진 여론의 등쌀에 떠밀린 연합국측은
울며 겨자먹기로 국제연합군을 편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각국의 파견병력은 시늉만 내는 수준의 수백 명 규모에서
많게는 수천 명 정도에 그쳤다.
다만 언제나 그 속내를 짐작키 어려운 신흥국 일본만은
무려 7만 명이나 파견했다.
덕분에 연합국들은 일본의 진의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느라 한 동안 분주해졌다.
명분은 일단 체코군단 구출이었지만
꿍꿍이는 제각각인 국제연합군과 백계 러시아군의
복잡한 동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블라디에 이미 도착해있던 체코 선발대는
원래 7월 1일이면 유럽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베리아에 고립된 동료들을 구출한다며
국제연합군까지 몰려온 마당에
동포라는 자들이 모르쇠로 떠날 수는 없는 노릇.
국제연합군에 동참한 그들은 적백내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볼셰비즘 확산을 우려한 연합국은
하바롭스크의 제정 러시아 망명정부를 지지했고
그 지지는 옴스크의 백군지원으로 이어졌다.
깔끔한 군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국제연합군에 비해
산적처럼 지저분한 복장의 체코군단은
옴스크의 백군 사령관인 고상한 귀족 콜챠크의 기분을 잡치게 했다.
그래서 연합군은 예우 받은 반면에
떨거지 용병집단으로 취급된 체코군단에게는
불편한 잠자리에 부실한 보급이 돌아갔다.
시베리아 최강의 무력집단을 괄시한 그 어리석음은
수개월 후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자신이 체코군단에 체포되어
붉은 군대로 넘겨지는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터이니....
갈등은 연합군 진영 내부에도 싹트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보다 현격히 많은 병력을 보낸
일본의 저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 하바의 망명 정부를 장악해 괴뢰국을 세우려는 속셈 아닐까?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꿰뚫어 본 나름 예리한 통찰이었다.
연합국 외교관들 역시 개연성 있다며 끄덕였다.
그래서 옴스크 공방전에 나선 연합군은 소극적이었다.
연합군 참모부는 심지어 체코군단을 전투에서 열외시켜 버렸다.
보다 못한 일본군이
“왜 체코군단을 투입하지 않는가?” 항의하자
“체코군단을 콜챠크와 바꿀 수는 없다.”는
싸늘한 답변만 돌아왔다.
출병목적은 어디까지나 체코군단 구출이지
적백내전에 끼어들어 백군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원칙을 재확인한 셈이었다.
그 동안 옴스크의 백군이 상대해온 것은
혁명 초기의 허약한 적위대에 지나지 않았다.
파르티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그들은
중화기로 무장한 러시아 정규군과 막강 코사크 기병대로 편성된 백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연히 백군은 승승장구했고
사령관 콜챠크에게는 불패의 제독이라는 찬사가 바쳐졌다.
그 명성에 혹한 귀족들과 정교 사제단, 지주들은
가족과 패물을 챙겨 옴스크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망명정부가 있는 극동의 하바롭스크는 너무나도 멀었기에
막강 백군의 아성, 옴스크는 붉은 재앙의 피난처였고
믿음직한 노아의 방주였다.
덕분에 호황을 맞은 옴스크 시가지는
소비에트의 박해를 피해 몰려든 제정러시아 고위인사들로 성시를 이루며
연일 흥청대고 있었다.
그러나 10월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프룬제 장군의 붉은 군대가 옴스크를 포위한 것이다.
볼셰비키의 독보적 군사이론가 프룬제는 트로츠키와 함께
부실한 적위대를 재편해 붉은 군대를 창설한 핵심당원이었다.
그리고 1개월 남짓한 공방전 끝에 옴스크는 붉은 군대에 함락된다.
국제연합군 8만과 체코군단이 가세해 한층 막강해진 진용에도 불구하고
지휘체계 혼란이라는 자중지란을 맞은 백군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체코군단이 장악한 시베리아 열차덕분에 간신히 옴스크를 탈출한
백군 고위층과 연합군 수뇌부는 이르쿠츠크로 피신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패전책임이 거론되면서
연합군과의 관계가 사뭇 불편해진 콜챠크는
일본군의 보호를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군 역시 믿기 어려운 상대일 뿐이었다.
그래서 군자금인 황실금화를 실은 마차는
기차를 타지 못한 백여만 명의 피난민, 그리고 25만의 장병들과 함께
한파가 밀어닥친 시베리아 벌판으로 떠났다.
또 하루의 지옥 같은 밤이 지났다.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던 피난대열은
이윽고 바이칼호 기슭에 이르렀다.
마차가 다녀도 끄떡없을 만큼 두텁게 얼어붙은 호수는
갈라진 구름 사이로 쏟아진 아침 햇살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반짝였다.
묵묵히 멈추어 선 사람들은
드넓게 펼쳐진 투명한 얼음벌판 너머로 두려움에 찬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삐에르는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지나온 벌판들은 온통 눈으로 뒤덮였었다.
그런데 왜 호수에는 쌓이지 않았을까?
다음 순간 호수에서 몰아친 사나운 광풍에
얼굴을 한 차례 얻어맞자 의문은 바로 풀렸다.
드센 바람이 쓸어낸 것이었다.
바다처럼 드넓은 호수를 휩쓰는 바람이
맹렬한 눈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눈더미에 쓸려
반들반들 해진 빙판은
톱밥으로 닦아낸 뻬쩨르부르그의 무도회장처럼 매끄러웠다.
그 위를 걷기는 아마도 땅보다 배는 힘들 것이리라.
호수에 서린 사나운 냉기는
옴스크를 떠난 이래 겪어온 어떤 추위와도 달랐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의 기운이 아니었다.
악의에 찬 사신死神이 뿜어내는 독하고 음습한 저승의 냉기였다.
과연 이 속을 지나 호수를 무사히 건널 수 있을까?
서리로 하얘진 눈썹과 고드름이 주렁주렁한 수염으로 덮인 얼굴들에
절망과 두려움이 서서히 번져갔다.
그러나 지난 한 달간 지옥을 경험해온 그들에게는
이제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자라나 있었다.
설마...!
지금까지 겪어온 그 지독한 고난보다 더 심한 고난이
설마 또 있으랴!
“아악...!!”
두려움에 찬 침묵을 깨뜨리며 새된 비명이 귀청을 울린다.
타티아나였다.
화들짝 놀란 삐에르가 썰매를 들여다보며 외쳤다.
“겁내지 마, 타냐. 나 여기 있어.”
“아으~ 흐흐흐 여보, 아기가... 아기가 지금 나오려고 해요.”
고통과 두려움에 지친 타티아나는 아이처럼 소리 내 엉엉 울고 있었다.
드디어...!
내내 두려워하던 순간이 드디어 닥치고 말았다.
혹한 속에서 맨살을 드러내면 바로 동상.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아기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삐에르는 절망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사람들은 안타까운 표정만 지을 뿐 말을 아꼈다.
저만치 떨어져있는 짐마차 부대가 삐에르의 눈에 확 들어왔다.
나무궤짝을 잔뜩 실은 마차 호위대의 코사크 기병들은
출발 이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마차 주변에는 얼씬도 못하게 막아서곤 했다.
삐에르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불을 피워야 한다. 불을...! 저 궤짝들을 태운다면,“
코사크 기병에게 다가갔다.
“따와리쉬(동무), 6 연대의 삐에르 대위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아내가 산통을 겪고 있소이다.
어떻게 땔감을 좀 구할 수 없을까요...?”
눈만 껌벅이던 코사크 장교는 난처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애원하는 삐에르와 통곡하고 있는 타티아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코사크 지휘관 이반 대령이 뚜벅 말했다.
“막심, 짐마차 하나를 비워라.
땔감으로 해체한다.”
놀란 표정의 장교가 나서려하자
손을 들어 제지한 대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책임은 내가 진다.”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들 이보다 더 반가울까?
“고맙습니다. 대령님”
감격한 삐에르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순식간에 해체된 짐마차는 땔감이 되어
타냐의 썰매 옆에 쌓였다.
“상자들로 바람막이 벽을 쌓아라.”
이반이 지시했다.
모닥불을 본 사람들은 먹이를 본 아귀 떼처럼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진통을 겪는 산모가 있어요.
제발 좀 물러서주세요.”
삐에르가 호소했지만 군중들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병사들이 공포까지 쏘며 위협하자 겨우 물러섰다.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모닥불에 겨우 몸을 녹인 타티아나는
모피외투를 벗겨달라는 시늉을 했다.
이미 말조차 어려운 중태였다.
“출산을 도와주실 분이 계시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삐에르가 외치자 병사들에게 밀려났던 군중 속에서
주춤거리며 부인 두 명이 나섰다.
잠시나마 곁불을 쬘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그녀들의 얼굴에는 희색이 돈다.
“철모에 눈을 담아 와라. 물을 끓여야 한다.”
막심이 코사크들에게 일렀다.
산통은 좀체 끝나지 않았다.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하며 추위에 시달린 탓이리라.
아니, 어쩌면 아기는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으로
나오기 싫은 것인지도 모른다.
짐마차 한 대를 부순 땔감이 바닥날 때까지도
아기가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무 궤짝들을 땔 수는 없을까?
하지만 아마도 귀중한 무엇이 들어있겠지.’
절망에 빠진 삐에르는 대령을 힐끗 했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반 대령도 차츰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윽고 신음하듯 명령했다.
“막심, 짐마차 한 대를 더 비우게.“
“대령님!”
지켜보던 부관 드미트리가 비명처럼 외쳤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대령님.”
이반은 부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봐, 책임은 내가 진다 하지 않았나?”
그러나 차돌처럼 야무지게 생긴 드미트리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형식상 그의 직책은 부관이지만
진짜 임무는 콜챠크의 심복장교들로 편성된 직할대를 인솔해
수송대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대령님, 저는 특명을 받았습니다.
이 임무에는 제국군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이반 대령은 허탈하게 웃었다.
“콜챠크의 특명... 이란 말이지?
수십만의 인민들을 얼어 죽게 만든 콜챠크 각하의... 흐흐흐”
존칭조차 붙이지 않으며 자신의 우상인 콜챠크를 비아냥대자
격분한 부관은 대뜸 권총을 뽑아들었다.
“이반 대령,
사령관 콜챠크 각하의 이름으로 당신을 체포한다.”
기병총을 장전한 제국군 장교들이
순식간에 이반을 에워싸며 총구를 겨누었다.
동토 속의 가녀린 희망처럼 타오르던 작은 모닥불 주변은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귀청을 쩌렁 울리는 노성이 터져 나왔다.
“어떤 곰 투가리 새끼가
감히 우리 아타만을 체포한다는 거냐!”
덮개가 벗겨진 짐마차에서 모습을 드러낸 맥심 기관총이
드미트리와 장교들을 겨누고 있었다.
그 뒤로 5연발의 모신나강 소총을 꼬나든 막심과 코사크 대원들이
살기를 뿜으며 버티고 서 있다.
짐마차의 궤짝들은 짜르의 군자금인 로마노프 금화였다.
보안유지에만 급급했던 콜챠크는
정규군 대신에 코사크 병들을 수송대로 차출했다.
그러나 이는 코사크들의 기질에 무지한 해군제독 콜챠크의
치명적 실수였다.
코사크들은 주로 강을 낀 마을에 거주했기 때문에
강 이름 또는 강 근처 도시이름으로 부족을 구분한다.
우크라이나에는 자포로제 코사크들이 살았고
러시아에는 돈 코사크, 볼가 코사크, 예니세이 코사크, 시비르 코사크 등이 있었다.
인근 또는 같은 마을출신인 부대원들은
거의가 친인척 아니면 친구 사이기 마련.
따라서 유사시에는 조직보다
혈연이나 지연을 더 우선시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부대장 이반을 대령이라는 계급대신
아타만(두목)이라고 불렀다.
이 또한 끈끈한 정으로 결속된 코사크식 문화의 표현이었다.
살아온 배경과 문화가 판이한 그들과
정규군의 귀족장교들은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았다.
게다가 옴스크 출발 이래 벌어진 참상을 목격한 코사크들의 마음은
이미 백군 수뇌부로부터 천리만리나 멀어져 있었다.
기관총을 겨누며 포위한 험악한 기세에 질린
직할대 장교들은 얼어붙었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항명은 군법회의 감이다.
너희는 돌아갈 곳마저 사라진다.”
막심은 가소롭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건 댁네들 사정이지.
백군이고 적군이고 우리한텐 다 그놈이 그놈이야.
의리없는 새끼들.
노는 꼬라지를 보니 콜챠크는 싹수가 노래.
인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자식이 무슨...!”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성과 함께
기관총좌의 병사가 썩은 짚단처럼 폭삭 무너졌다.
다음 순간 날쌔게 달려든 직할대 장교들이
쓰러진 병사를 밀쳐내고 기관총좌를 차지했다.
“수미노프!!”
몇몇 병사들이 절규했다.
개머리판을 어깨에 붙인 코사크들이
기관총좌의 장교를 겨누는 순간 맥심이 불을 토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댓 명의 병사들이 말굽에 걷어차인 것처럼
펄쩍 튀며 쓰러졌다.
격분한 병사들의 대응사격.
그러나 엄폐물 하나 없는 벌판에 노출된 그들이
분당 8백발을 쏟아내는 기관총에 맞서기는 무리였다.
다급해진 코사크들이 마차 뒤로 몸을 숨기자
우박처럼 쏟아진 총탄이 짐마차의 궤짝들을 박살냈다.
삽시간에 산산조각이 된 나무파편들과 함께
반짝이는 노란 금속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다음 순간...
총성이 뚝 그치며 벌판에는 정적이 잦아들었다.
무더기로 쌓이고 사방으로 흩어진 금화들을
본 사람들은 입을 딱 벌렸다.
천천히 짐마차로 다가간 이반이
허리를 굽혀 금화 한 닢을 집어 들었다.
“흠, 로마노프 금화로군.
그러니까 이걸 옮기는 게 아기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지?”
이반은 드미트리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대령님.
하지만 이건 군자금입니다.
반드시 이르쿠츠크에 전달해야 합니다.”
이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군자금이라... 그런 게 왜 필요하지?
지켜야 할 인민들은 이미 다 얼어 죽지 않았는가...!?”
무골호인처럼 늘 미소가 감돌던 이반 대령의 얼굴에 분노가 확 피어올랐다.
코사크 병사들은 숨을 죽였다.
돈이나 규칙 따위보다 인간과 의리를 내세워 온 아타만.
여간해서는 화내지 않는 자애로운 아타만,
하지만 일단 분노하면 악귀처럼 무섭다는 소문이었다.
“지금 우리한테는 말야,”
버럭 하는 것과 동시에 빼어든 이반의 권총에
기관총좌의 두 장교는 단번에 이마를 관통 당했다.
단 두 발로 두 명을 명중시켰다.
코사크 치고 명사수 아닌 자가 드물지만
지금 보인 사격술은 그 중에서도 빼어난 솜씨였다.
아타만의 단호한 태도에 기세가 오른 코사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눈치 빠른 병사 두 명이 잽싸게 뛰어나와 기관총좌를 차지했다.
“금화 따위보단 땔감이 훨씬 더 중요해.”
벌겋게 달아오른 이반이 울부짖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짐마차를 모두 부셔서 불을 피운다. 이의 있나?”
드미트리와 남은 직할대 장교들은 창백해졌다.
“대령님, 그럼 상자들은 어떻게 옮길...”
“옮기지 않는다.” 단호하게 잘랐다.
“필요한 놈이 와서 가져가라지.”
신이 난 코사크 병사들은 일제히 짐마차에 달려들었다.
이윽고 타티아나의 썰매를 중심으로
수많은 모닥불들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워낙 많은 모닥불을 피웠기 때문에
땔감은 이내 동이 나 버렸다.
사람들은 아쉬운 얼굴로 여기저기 흩어진 나무궤짝을
흘낏거리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반의 얼굴에 심술궂은 미소가 슬며시 피어올랐다.
“어이, 자네들.”
불을 쬐던 코사크 병사들을 불렀다.
“저 상자들을 모닥불에 올려봐.”
“예에... ?”
다음 순간 드미트리의 얼굴이 꺼멓게 죽어갔다.
“대령님, 제발..."
“이미 말했잖나? 금이 제아무리 있어봤자 지금은 땔감 한 조각보다도 못하다고.”
이반은 이죽거렸다.
포장도 뜯지 않은 묵직한 궤짝들이 모닥불에 올려졌다.
두터운 나무로 짠 마른 궤짝은
이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시범을 보이자 사람들은
저마다 상자를 모닥불에 올려놓았다.
사방에서 불길이 기세를 올리면서
사람들 얼굴에도 서서히 화색이 돌아왔다.
이윽고 맨 처음 불에 올려진 상자에서
금화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불길 속에서 마법처럼 흘러내리는 반짝이는 흐름에
숱한 시선들이 쏠린다.
그리고 모든 모닥불에서 차례차례로
영롱한 황금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액체가 된 금을 머금은 벌건 숯들이
환상적인 황금색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그 비현실적 광경에 취한 사람들의 귓가로
갑자기 가냘픈 아기 울음이 들려왔다.
그제야 정신이 든 사람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모닥불에 몸을 녹이던 코사크들이 말했다.
“틀림없이 기막힌 녀석일 거야.
황금 모닥불에 둘러싸여 태어나다니.”
“타냐, 수고했어.”
삐에르는 땀에 젖은 타티아나의 창백한 이마에 키스했다.
“산모는 위독한 상태예요”
출산을 도운 아낙이 삐에르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그리고 이 추위 속에선 아기를 씻길 수 없어요.
잘 싸서 보온만 해주세요.”
모닥불들이 꺼지기도 전에 타냐는 숨을 거두었다.
가냘프던 목숨은 마지막 한 톨의 불씨까지 사른
하얀 재처럼 사그라졌다.
이 엄청난 추위 속에서도 아기를 낳고야만
끈질긴 모성에 감동한 코사크 병사들이 나서서 매장을 도왔다.
모닥불에 녹은 대지에 겨우 타냐를 묻은 삐에르는
얼어붙은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신이 지배하는 저승의 입구마냥
불길해보이는 드넓은 얼음 벌판.
‘얼음 호수의 저 음습한 냉기를 아기가 어찌 견디겠는가?
힘들더라도 바이칼을 우회하자.’
타냐를 잃은 마당에 아기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결국 아기를 살린 것은 삐에르의 그 동물적 본능이었다.
모닥불에 몸을 녹이며 한 줌씩의 용기를 되찾은 사람들은
지름길이라는 말에 혹해 얼음호수로 들어섰다.
호면은 반짝반짝 빛나고 두
터운 얼음은 마차도 견딜 만큼 단단하다.
건너편 호안까지는 20km 정도.
그러나 얼음 위를 조심조심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머리가 빠직 쪼개질 것 같은 지독한 한파가 덮쳐왔다.
이어서 눈보라 섞인 광풍이 얼음 벌을 맹습하면서
얼음지옥의 문이 열렸다.
영하 69도...!
그건 두터운 모피를 제아무리 껴입어도 당할 수 없는
저승의 냉기였다.
얼음 호수를 미처 반도 건너기 전에 몸이 굳어진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멈추기 시작했다.
강한 바람에 떠밀려 빙판에 쓰러진 사람들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이윽고 얼음 벌판 위의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비정한 눈 폭풍만이 끝없이 이어진 주검 위를 떠돌며
천지간을 휩쓸고 있었다.
이미 겪은 험난한 고통보다 더 심한 고난이 설마 있으랴 믿었었건만
그 설마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옴스크를 탈출한 피난민 백만 명이 동사했다!
그나마 바이칼까지 왔던 마지막 20여만 명 역시
호수에서 얼어죽었다!
이 끔찍한 소식이 이르쿠츠크를 강타한 것은
바이칼의 참변으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충격으로 넋을 잃고 우왕좌왕 하는
백군과 연합군 고위관리들을
묵묵히 지켜보던 체코군단의 청년장교가 뚜벅 말했다.
“우선 생존자를 구출할 수색대부터 보내야합니다.”
옳은 말이었다.
콜챠크를 비롯한 수뇌부들 역시 끄덕였다.
그러나 콜챠크의 신경은 온통 다른 문제에 쏠려 있었다.
‘피난민들과 함께 떠난 황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만 있으면 재기할 수도...‘
황실 금화의 규모는 그만큼 엄청났다.
그러나 그 존재를 아는 극소수의 측근 장교들은
호송대로 차출한 코사크부대와 함께 떠났다.
'만일 연합군 측이 먼저 발견한다면...?'
황금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했다.
콜챠크는 체코군단의 청년 장교를 은밀히 자기 방으로 불렀다.
“관등 성명은?”
“체코 군단 참모장 라둘라 가이다 대령입니다.”
절도 있게 경례를 붙인 장교가 말했다.
“가이다 대령, 수색대는 자네가 지휘할 예정인가?”
“그렇습니다만...?”
의아한 시선의 가이다에게 콜챠크는 은근한 표정을 지었다.
“조국 독립을 열망하는 체코 군단을
평소부터 난 높이 평가해왔다네.
가이다 대령.
돌아가 조국의 적과 싸우려면 군자금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만...?”
어리둥절한 표정의 가이다에게 콜챠크는
거액의 군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황실금화를 회수해오는 조건으로...
피난민 구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면담을 마치고 나온 가이다의 표정은 어두웠다.
‘저것이 백군의 진면목이고 정체인가?’
아직 순수한 28살의 청년, 가이다의 눈에 비친 콜챠크는
빵을 요구하는 굶주린 군중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는
인간백정 짜르의 잔혹한 모습 그대로였다.
이르쿠츠크 시내의 마차와 짐수레들을
눈에 띄는 대로 모두 징발한 가이다는
수색대를 편성해 바이칼로 떠났다.
두텁게 얼어붙은 바이칼의 빙판은 미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경험 많은 마차꾼들은 말굽에 신길 짚신을 준비하고 있었고
자신들 역시 짚으로 엮은 덧신을 신고 있었다.
허둥대며 고역을 치르는 것은 가이다의 체코병사들 뿐이었다.
호수로 들어서자마자 징을 박은 굽이 미끄러진 말들은
오뉴월 개구리처럼 네 활개를 쫙 펴며
빙판에 퍼져버렸다.
마차꾼들은 머리를 흔들었다.
“말 짚신 없이는 호수를 건너지 못합네다.”
결국 말을 기슭에 남겨두고 걸어서 얼음벌판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윽고 호수 한복판쯤에 이르자 동사자들의 주검이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맞은 편 기슭으로 다가가면서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하나 같이 굶주림과 고통을 호소하는 애절한 표정의 주검들.
처음에는 활기 있게 걸으며 두런두런 잡담도 나누던
수색대 장병들은 차츰 말을 잃어갔다.
그리고 서서히 동작이 굼떠가며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빙판 위를 떠도는 바람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에 눈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옴스크 종자들은 인간도 아냐.”
넋을 놓고 아이들과 부녀자까지 섞인 주검들을 바라보던
소위 한 명이 침묵을 깨뜨리며 내뱉았다.
그 말은 이 순간의 수색대 장병들 모두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그건 가이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 믿고 따라온 인민들은 이 지경이 되었는데
뭐? 황금...!’
“혹시 모른다.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 런지,
한사람 한 사람 철저히 살피도록.”
그러나 가이다 스스로도 이미 그 명령의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굶주리고 지친 인간이 이 얼음지옥 속에서 어찌 살아남는단 말인가?
수색의 초점은 차츰 짐마차 쪽으로 모아졌다.
기슭으로 다가가던 수색대 병사들은
빙판 여기저기에 흩어진 노란 금속쪼가리들을 발견했다.
“대령님, 금화들인데요. 진짜 같습니다”
시커먼 이빨로 깨물어 본 병사가 흥분해서 말했다.
가이다는 갸우뚱 했다.
‘왜 이런 곳에 금화가..?
혹시 이게 바로 콜챠크가 말하던 황실금화가 아닐까?’
그러나 납득하기 어려운 사태였다.
궤짝에 담겨있어야 할 금화가 왜 빙판에 흩어져 있단 말인가?
금화가 발견된 곳 주변의 주검은 모두 코사크 병사들이었다.
그들 옆에는 네 굽을 옴츠리고 죽은 말들이 있었다.
안장의 혁낭과 병사들 외투 주머니는 하나같이 금화로 불룩했다.
가이다는 끄덕였다.
‘말을 잃은 그들은 금화의 무게를 감당키 어려웠을 터.
몸을 가볍게 하려고 주머니를 비웠겠지.’
그러나 욕심을 완전히 비우지 못한 그들은
끝내 금화의 무게에 짓눌리며 죽어갔다.
금화를 지닌 것은 코사크 병사들뿐이었다.
그들의 말과 외투에서 금화를 찾아낸 병사들은
민간인 동사자들 품에서도 지갑과 귀금속을 찾아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병사들 역시 동사자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주검들의 옷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얼음지옥 속에는 또 다른 모습의 지옥이 겹쳐지고 있었다.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놀라 돌아본 병사들은 격분한 가이다 대령이 권총을 빼든 모습을 보았다.
“동작 그만!! ”
버럭 소리 지른 가이다는
분노로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잠시 뜸을 들였다.
“민간인을 그냥 둬라.
우린 비적이 아니다. 죽은 사람들을 욕보이지 말라.”
움찔한 병사들은 뒤지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아쉬운 표정들.
오랫동안 병사들과 함께 해온 가이다에게는
그들의 심리가 유리알처럼 빤히 들여다보였다.
대부분이 가난한 농민들의 자식인 그들이
눈앞에 버려진 재물을 탐내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하지만 이건 지나쳤다.
‘얼어죽은 불쌍한 시체를 뒤지다니...!’
이는 신성모독에 가까운 불경이었다.
“좋다. 다 털어놓겠다.
오늘의 수색목적은 생존자만이 아니다.
제국정부의 금화도 찾는 중이다.
상황으로 보아 근처 어딘가에서 곧 발견될 것이다.”
말을 끊은 가이다는 병사들을 훑어보았다.
동사자들을 동정하며 백군의 만행에 분개하던 순박한 얼굴들이
지금은 물욕에 사로 잡혀 있었다.
‘아, 불쌍한 녀석들...!’
고국에 돌아가 본들 기다리는 것은 움막 속의
가난에 찌든 가족뿐일 것이다.
가이다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지만... 봐라!
믿고 따라온 인민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자들에게
금화를 갖다 바쳐야하는가?
아니다!!
난 절대로 그렇게는 못하겠다.
차라리 우리가 갖자. 공평하게 나누어 갖자.
천 상자도 넘는 금화다.
그러니 그만둬라.
더 이상 저 불쌍한 주검들을 모독하지 마라.
나, 라둘라 가이다의 명예를 걸고
이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다.“
어리둥절하던 병사들은 이윽고 가이다의 말을 이해했다.
동시에 자신들이 저지르려 했던 행위가
얼마나 불경스럽고 파렴치한 짓인지도 깨달았다.
“우우~라아, 우리 참모장님, 우라”
병사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이미 찾아낸 금화만 해도 엄청난 분량이다.
그런데 무려 천 상자라니...!
뒤지려던 주검들에서 찾아낼 재물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많지 않겠는가?
부정한 재물에 잠시 눈이 멀었던 병사들은
차츰 가이다의 분노를 이해했고 이윽고 함께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
“이건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냐.”
“맞아, 콜챠크는 몇 번 죽어도 이 죄를 용서받기 어려워.”
그들의 분노는 차츰 콜챠크라는 구체적인 목표로 모아지고 있었다.
“그 자식을 잡아서 볼셰비키에게 넘겨버리자.”
“옳소”
“옳소”
“꼭 그렇게 하자”
수색현장은 순식간에 볼셰비키식의 인민재판장으로 변해갔다.
병사들은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호수기슭에 도착한 선발대 쪽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오, 세상에... !”
“이럴 수가...!
호수기슭의 벌판에는 수십 개의 모닥불 흔적이 있었다.
그 흔적들마다 하나씩 자리 잡은 큼직한 금속덩어리들이
햇살을 반사하며 눈부신 노란색으로 번쩍이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뒤이어 도착한 가이다와 병사들도 그 장엄한 장면 앞에서 말을 잃었다.
저게 모두 금이란 말인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모닥불 흔적들의 중심쯤에 개머리판에 십자가를 새긴
모신나강 소총이 거꾸로 꽂혀있었다.
그리고 또 한 자루에는 타티아나 로스토바라고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삐에르의 정성이었다.
돌아온 수색대는 곧바로 일본군 특무대를 습격했다.
본대는 진즉에 철수하고 소수병력만 남은 일본군 측은
수천 명의 체코군단 병력이 밀고 들어오자 속수무책이었다.
콜챠크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를 순순히 넘겨준 배경에는
백만 명 넘는 피난민들을 얼어 죽게 만든 사태의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연합군 수뇌부의 암묵적인 합의가 깔려있었다.
다음 날부터 체코군단과 프룬제의 붉은 군대사이로
전령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콜챠크와 황금 일부를 넘기는 조건으로
체코군단의 블라디 이동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협상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르쿠츠크 사람들은 얼음을 녹여 쓴다.
허드레 물은 집근처 눈이나 얼음을 쓰지만
식수만큼은 맑은 얼음이라야 했다.
그래서 얼어붙은 앙가라 강의 얼음을 잘라
집으로 나르는 일은 이르쿠츠크 남정네들의 중요한 일과였다.
얼음 수레를 밀고 가던 최 고려가
비틀거리며 썰매를 끄는 빈사지경의 장교와 조우한 것은
시가지가 붉게 물드는 황혼 무렵이었다.
이르쿠츠크 사람이라면 누구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이는 상부상조하며 살아간 19c의 데카브리스트들이 남긴
명예로운 전통이었다.
수레를 팽개치고 황급히 부축해 집안으로 들였지만
탈진한 사내는 이내 숨을 거두었다.
타티아나 로스토바와 삐에르라는 아기 부모의 이름만 남긴 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 썰매를 끌고 온 지친 생명은
기름이 다한 심지처럼 스르르 꺼져갔다.
이지적이지만 슬픈 눈매의 사내는 수염에 맺힌 고드름이 다 녹기도 전에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눈을 감았다.
썰매 위에 쌓인 모피더미 속에서
아직 피조차 씻지 못한 갓난아기를 발견한 최 고려의 아내는 기
절할 듯 놀랐다.
서둘러 물을 데운 그녀와 최 고려는 아기를 조심스레 씻겼다.
아기를 위해 생명을 바친 젊은 아비의 시신 옆에서 치르는 첫 목욕은
성스러운 세례의식처럼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백군 주력이 무너지고 지휘부의 알력으로 일본군 7만 명이 빠져나간 연합군은
이미 붉은 군대의 상대가 아니었다.
작심하고 막아선다면 체코군단은 물론 연합군 역시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다행히도 이들은 백군이 아닌 연합군이나 체코군단에게는
별다른 적개심을 품고 있지 않았다.
지휘부가 명예로운 후퇴를 위한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가이다는 이르쿠츠크를 수소문해
옴스크 피난민의 생존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바이칼 난민의 아기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람을 알아냈다.
최 고려라는 이름의 조선인은
아기를 찾아온 가이다와 장교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안 그래도 아기의 사연이 궁금했었다는 작달막한 사내,
최 고려는 옴스크 피난민들에게 일어난 비극을 듣더니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낳자마자 죽은 산모의 아기가 빙설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실로 기적이었다. 죽은 사람들 외투를 모아 깔고 덮은 썰매에 실은 아기를
시내까지 겨우겨우 끌고 온 젊은 아버지는
구조되자마자 탈진해 쓰러졌다고 했다.
세상모르고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본 가이다와 장교들 눈에
눈물이 그득 괴여갔다.
하나같이 눈시울이 붉어져 성호를 그은 장교들은 일제히 손을 모아 기도했다.
“아, 마리아님,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
처참한 주검들 사이에서 새 생명을 탄생시킨 오묘한 섭리에 감동한 그들은
하나같이 몸을 떨고 있었다.
죽음 속에서 태어난 가여운 생명의 소식은
향수에 젖은 젊은 병사들의 여린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고향의 가족을 떠올리며 저마다 흐느껴 운 그들은
이심전심으로 자기 몫의 금화에서 한두 개씩을 내놓았다.
순식간에 수천 개의 로마노프 금화가 쌓여갔다.
동사자들 품을 뒤져 지갑과 귀금속을 찾으려 하던 가난한 병사들이
가엾게 태어난 아기를 위해 소중한 금화를 아낌없이 던지는 모습에
가이다는 깊이 감동했다.
그리고 금을 나누어주기 잘했다는 생각에 새삼 뿌듯해졌다.
바이칼에서 가져온 황금은 열차은행이 보관하고 있었다.
가이다는 군자금을 제외한 나머지를 4만여 병사들의 통장에 입금시켰다.
그리고 코사크들이 지녔던 금화들 또한 나누었다.
그래서 모든 병사들이 황금 통장과 함께 댓 개씩의 금화도 가지게 되었다.
가이다와 장교들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다.
모아준 금화를 어떻게 아기에게 전할 것인가?
이미 공산주의 세상이 된 러시아에서 아기의 사유재산인 금화를 지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믿을만한 어딘가에 맡겨 나중에 아기가 갖도록 하자.
근데 어디다 맡기지?
40도짜리 보드카를 끼고 사는 러시아인들은 도무지 믿음이 안 간다.
게다가 살벌한 적백내전의 와중 아닌가?
혹시라도 줄을 잘못 섰다간 언제 잘못될지 모르는 살얼음판 세상이다.
러시아인들끼리 한창 으르렁대는 판국이니 차라리 외국인이 낫겠다.
지금 아기를 보호하고 있는 최 고려는 조선인이다.
그리고 독립투사라 했다.
역시 식민지 출신이며 독립을 꿈꾸는 그들에게
조선이야기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 우리, 그 사람을 다시 한 번 만나보세.”
27세의 최 고려는 이미 아기이름까지 지어놓고 있었다.
덕범, 일부러 ‘범’ 자를 넣었단다.
“바이칼의 얼음지옥 속에서 살아남다니...!
신령님의 가피 없이는 어림도 없지요...암 어림도 없지.
자고로 호랑이란 신령님의 심부름꾼,
그러니 범자는 반드시 넣어야 합니다.”
아기를 위해 목숨을 던진 젊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최 고려의 열변에
말없이 눈길을 교환한 장교들은 끄덕였다.
“좋은 이름이군요.
그런데 러시아 이름도 하나 지어주는 게 어떨까요?
애틋한 부정父情을 생각해서라도...”
‘난 그 양반 성도 모르는데... ’
당황한 최 고려는 망설이며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볼수록 사랑스런 모습.
숨을 거두던 순간 사내가 남겼던 희미한 미소가 그 얼굴에 겹쳐 보인다.
음, 아마도...!
이윽고 최 고려는 주억였다.
그렇게 해서 아기는 세르게이 로스토브 최라는 이름을 얻었다.
가운데 이름은 모친을 따랐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편안히 잠든 아기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한 장교가 뚜벅 말했다.
“백군 장교 아들이라는 건 감추는 게 좋겠습니다.
하도 뒤숭숭 하니... ”
이미 흠뻑 정이 들어버린 조선인 부부는 아기를 키우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오히려 누가 빼앗아갈까 잔뜩 겁먹은 눈치를 본 장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가이다와 장교들은 병사들이 모아준 금화를 최 고려에게 주고 갔다.
체코군단의 선물이라는 말과 함께...
1919년 1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