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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태화산
최창민 기자
경남일보 기사 승인일 : 2017.02.08.
1455년 단종을 폐한 절대권력 세조는 어느 한 시절 마곡사를 찾았다. 순리를 거스른 죄책감이 있었을까. 세조가 마곡사에 온 이유는 일편단심 단종 편에 섰던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충직하고 강건한 인물이었던 매월당은 1453년 수양(세조)이 왕위를 뺏기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책을 모두 불태우고 태화산에 입산한 뒤 승려가 돼 마곡사에 있었다. 매월당을 자기편으로 돌려세워 조정의 정통성을 확보하려했는지, 아니면 진정 그의 능력을 높이 사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세조는 매월당을 짝사랑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세조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마곡사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 무량사로 피해버렸다. 허탕을 친 세조는 태화산 기슭 마곡사 언덕 군왕대에 올라 자신의 부덕을 탓했다. 그리고 마곡사에 영산전(靈山殿)이라는 편액을 내린 뒤 타고온 가마를 두고 소를 타고 돌아갔다고 한다. 실제 그러했는지는 몰라도 마곡사에 가마가 보관돼 있다.
훗날 생육신으로 이름을 올린 매월당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그는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에 세조의 왕위찬탈과 관련해 이렇게 썼다. ‘홀연히 감개한 일(왕위 찬탈)을 당해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를 행할 수 있는데도 몸을 깨끗이 보전하여 삼강오륜을 어지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마곡사 뒤에 있는 부속암자 백련암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 몸을 바쳤던 또 다른 거장 김구선생이 한때 머물렀던 곳이다. 이런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명찰 마곡사에 태화산이 있다.
▲등산로; 마곡사→백련암→간이 휴게소→활인봉→나발봉→삭발바위·군왕대 갈림길→군왕대→솔숲→마곡사 원점회귀.
▲오전 10시, 마곡사는 하산 후 둘러보기로 하고 안내판을 따라 백련암으로 향한다. 불모비림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부도군을 지난다. 불모는 사찰의 단청·불화·불상을 제작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일찍이 마곡사는 불모승 양성기관으로서 금호, 정연, 보응, 일섭 등 유명한 스님을 배출했다. 마곡사가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비림을 조성한 것이다.
백련암 이정석을 따라 산으로 가면 아담한 암자 백련암이 나타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자 독립운동 지도자인 백범 김구(1876∼1949)선생이 젊은 시절 머물렀던 곳이다.
그는 20대 초반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하자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군 특무장교를 처단한 후 1898년 마곡사에서 계를 받고 수행했다. 훗날 중국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국가 임시정부 주석에 올라 해방 후 귀국하게 된다. 70세의 나이에 다시 마곡사를 찾은 그는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향나무를 심는다. 현재 향나무가 마곡사 뜰에 자라고 있다.
목숨을 다해 일으켜 세운 선인의 발길과 마주하며 느끼는 감정이 묘하다. 작금, 돈과 권력, 명예에 매몰돼 나라를 어지럽혀서 혼돈으로 몰아가고 있는 위정자(爲政者), 아니 그야말로 꾼들의 행태에 분통이 터진다.
공주시가 백련암을 기점으로 태화산 일대에 백범 명상 길을 조성했다. 취재팀의 산행코스는 백범 명상 길 2코스이다.
백련암 뒤 계단을 따라 200m정도 오르면 왼쪽 언덕에 마애불이 나온다. 켜켜이 덧 자란 이끼가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마애불은 정교한 느낌이나 품격과는 거리가 있는 다소 소박한 이미지다. 경배하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이 전하는 영험한 곳이라고.
오전 10시 48분, 제주도 오름 같은 봉우리에 올라서면 개점휴업 중인 휴게소가 나온다. 등산객이 많은 주말에 음료 등 간단한 음식을 파는 곳인데 평일이라 을씨년스럽다. 활인봉(423m) 정상의 팔각정자를 넘어서면 길은 더 이상 가파르지 않고 완만한 오르내림이 연속돼 나발봉까지 간다.
낮 12시 나발봉, 점심과 휴식 후 산행을 계속해 오후 1시 20분께 한국문화연수원 갈림길에 선다. 산 아래 숲속 햇빛에 반짝이는 건물들은 대한불교조계종이 2008년에 설립한 한국문화연수원이다. 약 3만3057㎡(1만평), 연건평 9917㎡(3000평) 규모의 시설에 전통문화체험·명상수행체험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토굴암 앞을 지난다. 쉼터 앞 안내판에 김구 선생이 즐겨 쓴 글귀가 새겨져 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난잡하게 가지 말게나. 오늘 내가 간 발자취는 후인들의 길잡이가 된다네’. 그는 이 산길을 거닐며 수행했다. 난잡하다 못해 시정잡배를 떠올리게 하는 대한민국 정치 모리배들에 대한 일갈로 들린다.
군왕대와 삭발바위 갈림길을 지나면 태화산 최대 솔숲지대가 나온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수령이 수 백년에 달하는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그 사이에 호젓한 길이 나 있다. 마곡사를 찾는 사람들이 태화산엔 오르지 못해도 이 일대 솔숲 길을 걸으며 자연의 정결함에 젖어든다고.
세조가 올랐다는 군왕대는 10여평에 불과한 뜰. 그러나 전국 십승지에 속할 만큼 지기가 뛰어난 곳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이 이곳에다 몰래 시신을 매장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조정에선 나라가 어지러워 질 것을 우려해 암매장한 유골을 모두 파낸 후 더 이상 매장하지 못하도록 돌로 채워버렸다.
세조가 이곳에 올라 내가 비록 왕이지만 ‘만세불망지지’인 이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고 허망해했다 한다. 그래서 군왕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오후 2시 10분, 마곡사는 태극형상의 물길 3개가 모이는 곳에 세워진 절이다. 640년(백제 무왕 41),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1199년, 불일 보조국사가 재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절 앞마당에 우뚝한 5층석탑이 가장 눈에 띈다. 고려 말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세우진 탑으로 두개의 양식이 하나로 어울려 있다. 다보탑이라고도 불린다. 2층 기단 위에 5층의 몸돌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올렸다. 2층 몸돌에는 사방을 지키는 사방불을 새겼다. 머리 장식으로 라마탑에 보이는 풍마동장식을 두었는데 이는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이다. 대광보전 화재 때 훼손돼 원래 탑재가 아닌 화강암으로 보수한 곳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마곡사의 가람구성도 독특하다. 샛강을 사이에 두고 남원과 북원으로 나눠져 있다. 남원은 영산전을 중심으로 배치돼 있고, 북원은 대광보전(大光寶殿)을 중심으로 따로 배치돼 있다. 북쪽의 가람이 본절이고 입구 쪽의 영산전이 있는 곳은 별도의 암자와 같은 모습이다. 교량을 건너 빠져나올 때 뒤돌아본 마곡사, 김구선생이 심었다는 향나무에 유난히 눈길이 갔다. 은은한 향기까지 나는듯 했다.
[문화유산] 신록의 계절에 더욱 좋은 공주 마곡사
연합뉴스 기사 송고시간 : 2019-05-13 08:01
(공주=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공주는 이제 명실상부 세계유산의 도시다. 2015년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과 공산성이 백제역사 유적지구에 포함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후, 지난해에는 마곡사를 포함한 7개 사찰이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세계유산이 됐다.
신록의 계절, 어딘들 좋지 않으랴마는 세계유산 산사를 처음, 혹은 새로 돌아볼 계획이라면 이 계절에는 마곡사다.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 할 만큼 봄의 경치가 빼어나다는 마곡사를 조금 이른 봄에 미리 찾았다.
딱 1년 전인 2018년 5월, 마곡사는 한 차례 '수모'를 겪었다. 세계문화유산 후보지를 사전 심사하는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한국이 신청한 산사 7곳 중 마곡사와 안동 봉정사, 순천 선암사는 '역사적 중요성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며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보은 법주사, 해남 대흥사만 등재를 권고한 것이다.
하지만 외교부와 문화재청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6월 30일 열린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WHC) 회의에서 7곳이 모두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21개 위원국은 만장일치로 '7곳을 모두 합쳐야 유산의 가치가 제대로 드러난다'는 데 동의했다.
◇ 화승 기르고 배출한 남방화소
세계유산이 된 7개 사찰은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종교활동과 의례, 강학, 수행을 지속해서 이어온 한국의 대표적인 종합 불교 승원이다.
도시에 세워진 사찰 대부분이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폐사됐지만, 산지 사찰들은 그 기능을 이어왔다. 자연에 순응해 가람 배치가 비대칭적이고 비정형적인 것이 특징이다.
마곡사 역시 태극 모양으로 휘어 흐르는 마곡천이 남원과 북원으로 나눈다.
대지가 좁은 북원의 중심 건물인 대광보전은 지세 흐름에 맞춰 서남향을 향하고 남원의 중심 건물 영산전은 동남향을 향해 서로 교차한다. 해탈문과 천왕문이 그 사이에서 방향을 적절하게 틀어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다.
마곡사는 많은 화승(畵僧)을 배출한 남방화소이기도 하다. 승병의 집결지였던 마곡사는 일본의 침략으로 막대한 피해를 봤지만 전란 후 대규모 야외 법회가 열리면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이것이 전후 복구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17세기 대규모 야외 법회가 대중화하면서 대형 불화인 괘불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초기 뛰어난 작품들이 마곡사를 중심으로 한 중부 지방에서 제작돼 동남부 지역으로 전파됐다.
조선 말 마곡사에 머무는 승려 300명 중 불화를 배우는 승려가 8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보물 1260호)에는 승려와 일반 신도 등 시주자 명단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 김시습이 떠나고 당도한 세조
태화산(423m) 동쪽 자락에 자리 잡은 마곡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록이 전한다.
우선 '마곡사사적입안'은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다녀온 뒤 643년 선덕여왕의 후원을 받아 세운 7대 가람 중 세 번째 사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기록은 보조선사 체징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신라 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됐다가 고려 중기(1199년)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하고 대가람을 이루었다 한다.
마곡사(麻谷寺)라는 이름은 보철 화상이 법을 얻어 오자 사람들이 삼(麻)처럼 모여든 데서 유래했다 한다.
그러나 중국의 마곡 보철이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신라 말에 보철의 법을 받아온 무염 대사가 스승을 기리기 위해 마곡사라는 절을 개창했다고도 한다.
수행 공간인 남원에는 현재 마곡사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영산전(보물 제800호)이 있다. 천불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이라고도 한다. 영산전 현판은 마곡사에 들른 세조가 써서 남겼다.
영산전 옆 매화당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던 곳이다. 김시습은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 이후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른 뒤 이곳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세조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에 김시습이 먼저 떠나고 없자 세조가 '김시습이 나를 버렸으니 가마를 타고 갈 수 없다'며 두고 간 연(가마)도 마곡사에 있다.
◇ 마곡사의 보물들
극락교 건너 북원에는 가장 높은 곳에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이, 그 아래 앞마당에 대광보전(보물 제802호)과 오층석탑(보물 제799호)이 일렬로 자리 잡았다.
대웅보전은 밖에서 보면 2층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하나의 공간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라 한다.
대광보전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동쪽을 향해 모셔져 있다. 현판은 시문서화(詩文書畵) 사절로 꼽히는 표암 강세황의 글씨다. 바닥 장판을 걷어 올리면 참나무로 짠 삿자리가 깔려있다.
이 삿자리에는 걷지 못하던 자가 백일기도를 드리는 동안 정성으로 삿자리를 짜고 마지막 날에는 제 발로 걸어 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85년(정조 9년) 다시 지었다. 안팎으로 구성과 장식이 풍부하고 건축 수법이 독특해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오층석탑이다. 2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은 일반적인 석탑의 형태지만, 꼭대기 상륜부에 금동보탑이 올려져 있다.
이는 국내에서는 유일하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 말 티베트 불교(라마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 김구 선생의 자취
백범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 군인을 살해하고 옥살이를 하다 탈옥해 삼남 지방을 떠돌다 마곡사로 숨어들었고, 이곳에서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했다.
'백범일지'에는 '사제 호덕삼이 머리털을 깎는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 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고 기록을 남겼다.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백련암과 백범당, 마곡천 옆 삭발 바위와 징검다리, 송림욕장 등을 잇는 백범 명상길을 조성해 놨다.
해방 후 마곡사에 들른 김구 선생은 대광보전 기둥의 주련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라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앞마당 왼쪽에 향나무를 심었다 한다.
백범당에는 이 주련이 똑똑하게 보이는 앞마당에서 찍은 사진, 김구 선생의 진영과 함께 생전 즐겨 쓰던 휘호도 걸려 있다. 휴정 서산대사의 선시로 김구 선생의 친손자인 김양 전 국가보훈처장이 마곡사에 기증했다.
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湖亂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遂作後人程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마곡사에서는 템플스테이(magoksa.templestay.com)를 하며 하룻밤 머물 수도 있다. 전통 한지 공예나 생활 공예 등을 배우는 체험형과 소나무 숲을 걷거나 스님과의 차담을 할 수 있는 휴식형으로 운영된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다시 태어난 '천년 고찰'… 그 장엄한 의식 속으로
대전일보 기사 입력일 : 2014.04.25.
최신웅 기자
마곡사 내일 '영산전 천불 이운 대법회' 개최 복원 기념 전통 불교의식 '어산작법' 등 진행
마곡사가 '천불의 미소! 천년의 나들이'라는 주제로 26일 개최하는 영산전 천불 이운 대법회가 불자들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2011년부터 마곡사 방문객들에게 공개되지 않던 영산전이 3년 만에 이날 공개되면서 참배객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영산전(보물 제800호)은 조선시대 세조 왕이 만세불망지지(萬世不忘之地)라고 극찬했던 천하 명혈인 군왕대의 맥이 흐르는 곳으로 과거 일곱 부처님(過去七佛)과 현겁의 천불이 모셔져 있어 그 위신력으로 전국 각향 각지 기도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불전이다.
하지만 지난 2011년부터 오랜 세월 속에 일부 훼손된 전각의 해체 복원사업이 진행되면서 참배객 및 마곡사 방문객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등 그동안 불교신자를 포함한 국민들에게 아쉬운 발걸음을 내딛게 했다.
마곡사는 올 3월 복원사업을 마무리하고, 영산전에 있던 과거 칠불 및 천불의 개금사업도 원만히 종료함에 따라 이운 대법회를 마련한 것이다.
대법회는 명종 5추를 시작으로 헌향삼배, 찬불가, 불사(경과) 보고, 총무원장스님 치사, 내빈 축사, 천불 이운 등으로 펼쳐진다. 또 천불 이운 중에는 전통 불교의식을 교육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어산학교장인 인묵 스님이 진행하는 '어산작법'이 연출돼 우리나라의 장엄한 전통 불교의식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도 접할 수 있다.
원경 마곡사 주지는 "이번 천불 이운 대법회는 불교계 유일무이의 행사로, 대전·세종·충남 지역의 전통문화를 크게 증진시킬 것"이라며 "지역민은 물론 전국 관람객들이 우리나라 사찰문화를 올바르게 체험할 수 있는 뜻 깊은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법회를 계기로 마곡사의 귀중한 유물들도 주목을 받고 있다.
사찰의 주불전인 대광보전에는 비로자나불이 봉안돼 있다. 또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로 만든 불상 7구가 영산전에 남아있어 마곡사를 목불의 보고라 부르기도 한다.
마곡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백범당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며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이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로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나루에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마곡사에 은거 할 때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잠시 출가해 수도했던 곳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1898년 마곡사를 떠난 후, 근 50여 년 만에 돌아와 과거를 회상하며 한그루의 향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지금도 백범당 옆에서 푸르게 자라고 있다.
마곡사의 역사는 신라시대부터 시작된다. 자장 율사가 창건했다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으나 신라의 보조 체징 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조 체징은 신라 구산선문(통일신라부터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승려들이 중국에서 선법을 이어 와 종풍을 일으킨 9개의 선문)가운데 가지산문의 개창조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통효 범일, 도선, 각순 등이 중창을 계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곡사는 매우 독특한 가람 배치를 이루고 있다. 사역 가운데를 가로 지르는 개울을 중심으로 두 개의 영역으로 구성되는데 영산전을 중심으로 한 남원은 수행 영역이고 대광보전을 중심으로 한 북원은 교화 영역이다.
대광보전의 중정에는 고려 말 원나라 라마 양식을 따라 청동으로 만든 상륜부를 가진 5층 석탑이 놓여 있는데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매우 독특한 탑이라고 할 수 있다. 최신웅 기자
[전법의 중심 ‘교구’] ‘자연 문화 사람’이 어우러진, 태화산 마곡사
[불교신문 3711호/2022년4월12일자]
기자명김하영 기자 hykim@ibulgyo.com
‘3대 불사’ 마곡사의 미래
문화 : 나누다
교구 안정 바탕, 본격 불사 추진
대표적 문화불사 ‘금어원 건립’
올해 첫 삽…2024년 완공 예정
7년 준비한 숙원사업의 시작
마곡사 품은 유서깊은 스토리
기허당 영규대사, 백범 김구…
지역문화 및 발전에 크게 기여
공주 태화산 마곡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춘(春)마곡.’ 이 단어는 거의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봄이 아름다운 사찰로서 우리나라 최고로 손꼽힌다. 또 하나의 이미지는 춘마곡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종단에서 바라보는 마곡사는 화합보다 분열이, 통합보다 갈등이 우선시되면서 사건 사고가 자주 발생해 문제사찰로 낙인이 찍혔다. 불과 10년 전까지도 이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2013년부터 마곡사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현 주지 원경스님은 이른바 ‘문제가 많은 사찰’을 ‘문화가 넘치는 사찰’로 만들어갔다.
4월4일 찾은 마곡사는 아직 ‘춘마곡’을 느끼기에는 일러 아쉬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사찰 초입부터 변화하고 있는 모습을 느끼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거대한 표지석이 눈을 사로잡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찰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더욱 눈길을 끌었던 건, 표지석 옆 현수막 게시대 맨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는 문구였다. ‘다가가고, 나누고, 실천하는 마곡사’, 현재 마곡사를 상징하는 슬로건이자 나아갈 방향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마곡사의 3대 불사 혹은 3대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마곡사의 3대 불사는 원경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부터 정해졌다. 하지만 곧바로 시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교구의 안정이 선행돼야 가능한 일이었다. 수많은 노력으로 교구는 안정화에 접어들었고, 3대 불사를 전개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올해는 3대 불사를 본격 추진하는 원년으로서 마곡사 발전의 큰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여 기대가 높다.
마곡사의 슬로건이자 3대 불사인 ‘다가가다, 나누다, 실천하다’를 다른 말로 바꾸면, ‘자연, 문화, 사람’으로 대치된다. 이 가운데 ‘문화’는 마곡사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불사다. 문화가 풍성한 곳에 사람이 모인다. 마곡사의 ‘문화’ 불사는 단순히 행사나 이벤트를 의미하지 않는다. 미래지향적이고 지속가능하다. 그래서 더욱 이목을 집중시킨다. 마곡사가 현재 가장 방점을 찍고 있는 문화 불사는 ‘금어원(金魚院)’ 건립이다.
벌써 7년째 정성을 쏟고 있는 불사로, 불화를 제작하는 무형문화재를 양성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불화뿐 아니라 탱화, 단청, 불상 조성 등 불교문화 전반을 망라하는 인재를 키우기 위한 공간이다. ‘금어’는 불화를 그리는 스님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마곡사는 조선시대 후기 ‘남방화소(南方畵所)’로 불릴 정도로 금어의 양성소이자 불교미술의 중심지였다. 마곡사가 금어원 건립을 꿈꾸게 된 것은 이같은 역사적 바탕과 함께 금호약효(錦湖若效)스님이라는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근현대를 관통하는 화승(畵僧)들은 약효스님의 뒤를 따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 제3의 약효스님을 배출해 한국불교미술의 대를 잇고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원력이 금어원에 녹아있다.
금어원이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불화를 그리는 스님, 진정한 금어를 키우고자 하는 것이다. 사찰에서 단청을 하고 불화를 그리고 부처님을 조성하는 스님들은, 지금은 많지 않다. 21세기 약효스님을 배출해 한국불교미술을 더욱 융성하고 풍성하게 만들어가겠다는 의지의 장소가 금어원이다. 금어원은 화승을 키우는 교육의 장이자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계승하는 연구소로도 작동하게 된다. 천연의 재료를 사용해 전통 안료를 만들고, 전통적인 기법을 되살려 더욱 발전시키는 일도 금어원의 중요한 역할이다.
7년간 추진한 금어원 건립은 드디어 올해 결실을 맺는다. 이르면 4월에 금어원 건립의 첫 삽을 뜬다. 금어원은 마곡사 대웅보전 뒤편, 한국문화연수원 맞은편의 약 1만㎡(3000여평) 부지에 세워진다. 2024년 완공 예정으로, 한국불교 미술과 문화를 선양하는 독보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마곡사는 문화의 보고(寶庫)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스토리가 풍부하다. 대웅보전, 대광보전, 영산전 등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뿐 아니라 문화재가 상당하고, 1400년이라는 역사가 말해주듯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특히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이 원종(圓宗)스님으로 잠시 출가해 마곡사에 지낸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 공주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며 활약했던 영규대사도 마곡사의 인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의 환희를 문화로 풀어내기도 했다. 이를 기념해 매년 열리는 산사음악회는 시민들의 문화향유권을 보장하고 마곡사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곡사는 이같은 스토리를 놓치지 않았다. 경내에 백범당(白凡堂)을 정비하고 매년 추모다례재를 지내며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인물로 선양하고 있고, 영규대사의 경우, 기념사업회 출범을 주도한데 이어 추모다례재를 지역대표 문화축제로 성장시키는 등 지역발전에까지 이바지하고 있다.
마곡사=김하영 기자 hykim@ibulgyo.com
이시영 충청지사장 lsy@ibulgyo.com
인터뷰 / 마곡사 주지 원경스님
“다가가고 나누고 실천하면, 불교는 중흥된다”
마곡사 주지 원경스님.
마곡사 주지 원경스님.
마곡사의 슬로건이자
불사의 3대 원칙 설정
마스터플랜 마련하고
미래불교 발전 위해 전진
“당연한 책임이자 의무”
스님은 솔직했다. 10년 전 일을 감추고도 싶었을텐데, 스스럼이 없었다. “마곡사는 지난 50년 동안 분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종단과 종도들이 마곡사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마곡사 발전의 밑거름이 과거에 대한 통렬한 반성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마곡사 주지 원경스님의 그 다음 발언에는 더욱 힘이 들어갈 수 있었다. “제가 복이 많아서인지 세 만기째 주지를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교구는 안정됐습니다. 말사 스님들과도 소통이 잘 되고 있습니다. 그 기반으로 교구의 불사들도 매끄럽게 추진할 수 있게 됐습니다.”
2013년 마곡사 주지로 취임한 후 원경스님은 줄곧 교구 안정화에 공력을 집중했다. 시급한 불사들이 산적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안정과 질서의 회복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교구와 지역에 필요한 사업들을 잊거나 등한시하지 않았다. 비근한 예로 ‘금어원’을 들 수 있다. 원경스님은 취임 직후부터 지금까지 금어원 건립을 단 한시도 언급하지 않은 적이 없다.
비록 시기가 늦어질지언정 반드시 해야 하는 불사는 마음에 품고 조금씩이라도 진전시켰다. 5년 전 작성된 마곡사 마스터플랜은 그 결실이다. 마곡사 플랜은 교구 구성원과 관공서 관계자,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고심하고 모색한 결과로, 앞으로 모든 불사는 이 플랜 안에서만 진행할 수 있다. 필수 불가결한 불사인만큼 주먹구구식으로, 기분 내키는 대로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마련한 중장기 계획이다.
여기에 불사의 3대 원칙이 반영됐다. 다가가자, 나누자, 실천하자. “마곡사의 슬로건이면서 제 자신의 슬로건이기도 합니다.” ‘다가가자’는 ‘자연’을 의미한다. 인간도 자연에 속한 하나의 존재일 뿐이므로 조화롭게 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나누자’는 ‘문화’와 통한다. 불교사상과 전통문화를 나누고 퍼뜨려 불국토를 세우자는 의미다. ‘실천하자’는 사람과 그 인성에 해당한다. 불제자들의 바른 실천행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삼박자가 맞아 떨어지면 불교는 중흥됩니다.”
이는 불·법·승과도 각각 연결할 수 있다. 불(佛)은 자연, 법(法)은 문화, 승(僧)은 (실천하는) 사람을 뜻한다는 것이 스님의 설명이다. 요약하면 “조화로운 자연 속에서 문화를 전승하고 인성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불사의 원칙을 바탕으로 마련한 것이 현재 불사의 구체적인 청사진이다. 자연=수목원 조성, 문화=금어원 건립, 사람(인성)=선원 개원 및 대불련 복원 등…이같은 등식이 성립된다.
“사찰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신도가 오기만을 바라면 안됩니다. 먼저 다가가, 부처님 가르침을 나누고, 그 말씀을 실천하도록 하는 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전도선언이 아닙니까. 뭘 바라거나 목적과 목표를 두고 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불교라면 사찰이라면 스님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책임이자 의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김하영 기자 hykim@ibulgyo.com
‘춘’ 마곡에서 ‘사시사철’ 마곡으로
사람 : 실천하다
인성 갖춘 인재를 기르다
일종식 정진하는 대원암부터
상원암에 시민선원 계획까지
공주대에 동아리 개설 목표
내년엔 대전서 학생포교 전념
승려복지제도서도 발군 실력
4개월만에 1600구좌 모연
이른바 ‘잘 나가는’ 교구처럼 마곡사도 가장 중요한 불사는 ‘사람’이다. 사람을 잘 기르고 제대로 교육하고 따뜻하게 보듬어 안으면, 사찰은 지속가능하고 영속성을 부여받는다. 또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 수 있다. 선원을 건립하고, 승려복지를 시행하며, 포교에 매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곡사의 3대 불사 가운데 ‘실천’의 불사에 해당되는 ‘사람’ 사업은 ‘인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인성이 바탕이 돼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야 불사가 뜻대로 이뤄질 수 있고, 변함없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인성을 갖춘 사람을 제대로 기르는 불사의 시작은 선원 건립이다. 마곡사에 새로 세워지는 선원은 두 곳이다. 대원암과 상원암. 대원암은 스님들의 전용 수행공간이다. 대원암은 무문관을 방불케하는 곳이다. 1인 1실이 주어지는데,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종식(一種食)을 해야 한다. 오전10시부터 오후2시까지만 문을 개방하고 마곡사에서 점심 한 끼를 먹는다. 이후 나머지 시간은 자물쇠를 채운 채 정진하게 된다. 대원암은 마곡사에서 가까운 산내암자로, 지난해부터 증개축을 통해 모두 7명의 스님들이 방부를 들일 수 있는 수행공간으로 꾸며졌다. 이르면 올해 겨울안거부터 방부를 들일 계획이다.
대원암이 일대사를 마칠 각오로 용맹정진하는 처절한 수행의 장소라면, 상원암은 출재가자가 함께 수행하는 공간이다. 3개월 안거가 아닌 3일 이상 단기간 수행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곳으로서, 시민선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상원암은 마곡사에서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올해 설계를 마치고 내년부터 건립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르면 2년 후인 2024년 완공돼 선(禪)문화체험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 대불련 복원 프로젝트
마곡사의 ‘사람’ 불사는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지 않는다. 사찰은 사부대중으로 구성돼 있으니, 인재(人材) 불사도 출재가 모두를 망라해야 한다는 것이 마곡사의 방침이다. 눈 밝은 수행자를 양성하는 선원 불사와 함께 마곡사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인재불사는 ‘대불련 복원 프로젝트’다. 교구본사 차원에서 미래의 동량을 기르는 불사에 돌입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대학생 불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곡사는 공주지역 대학생 불자들, 특히 그 모임인 대불련이 쇠퇴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특히 공주대학교에 대불련이 사라진 사실을 접하고, 다시 복원해야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올해 3월 공주대학교 학생 20여명을 초청해 무상으로 템플스테이를 제공한 것이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불교와 사찰과 스님을 가까운 존재로, 필요한 존재로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공주에 위치한 마곡사불교회관에서 대학생들을 위한 법회를 개설하려는 것도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먼저 가까이 다가가 알뜰하게 살피다보면 불자로 마음을 열 수 있으리라는 기대다.
올해 하반기에 공주대에 불교동아리를 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후에는 대전으로 영역을 넓혀 충남대와 한남대, 우송대 등에도 대불련 지부 설립에 적극 나선다는 계획을 세웠다. 진성 불자 양성을 위해서 마곡사불교대학을 확대 재편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올해부터 조계종 신도전문교육기관으로서 1년 과정의 정규 학사를 운영하고 있다. 48명이 입학해 불자로서의 소양을 쌓고 있다.
# 성공 키워드 ‘승려복지’
사람 불사에 미래를 보장하는 것만큼 확실한 성공비결이 또 있을까. 마곡사의 승려복지는 이 불사의 성공 키워드 중 하나다. 의료복지는 기본이다. 장학복지와 연금복지는 마곡사의 자랑이다. 우선 학인 스님에게 장학금으로 매달 20만원을 지급한다. 교재비 구입 명목이다. 여기에 매년 100만원의 장학금이 더해진다. 생활이 어려운 교구 소속 노스님들을 위해 매달 30~50만원의 지원금이 지급되고, 선원 수좌 스님들에게는 안거를 마치면 100만원씩 수행연금을 전달한다.
마곡사는 승려복지를 시행하면서 더욱 큰 자랑거리가 생겼다. 신도들의 적극적인 승보공양 동참이 그것이다. 신도들을 대상으로 모연한 결과, 불과 4~5개월 만에 월 1만원 기준으로 1600구좌를 달성한 것이다. 신도 1600명이 달마다 1만원 이상을 승보공양에 후원하고 있는 셈이다.
마곡사의 승려복지는 비구니 스님들에게로 향하고 있다. 올해 여름안거부터는 선원에 방부를 들이는 비구니 스님에게도 수행연금이 지급된다. 병고에 시달리는 노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공간도 마련된다. 말사가 운영하던 노인전문요양시설을 마곡사가 인수하게 되면서 가능해졌다. 35병상의 요양원의 일부를 비구니 스님 전용공간으로 꾸며 운영할 예정이다. 수요가 많아질 경우, 요양원 전체를 비구니 전문 시설로 활용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와 더불어 비구니 수행관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일종의 주거복지시설에 해당한다. 노후 걱정 없이 수행 정진 전법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본사 차원에서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렇듯 마곡사가 인재불사에 삼보정재와 정성을 쏟아붓는 이유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출가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전하는 이유는 인류의 이익과 세상의 안락을 위해서다. 과거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는 마곡사를 응원하고 기대하는 이유는 오직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불사가 착착 진행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곡사=김하영 기자 hykim@ibulgyo.com
이시영 충청지사장 lsy@ibulgyo.com
자연 : 다가가다
천년을 함께할 파트너
마곡사 3대 불사의 마지막은 ‘다가가다’ 즉 ‘자연’이다. 마곡사는 천혜의 환경을 자랑한다. 춘마곡이라는 별칭은 괜히 생긴 말이 아니다. 그만큼 주변 환경이 빼어나고 자연이 아름답기에 붙여진 ‘자연스러운’ 별명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처럼 세상은 변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마곡사의 자연환경은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마곡사가 ‘자연’을 3대 불사 중 첫 번째에 올린 이유다. 건축불사 인재불사도 중요하지만 당대에만 효력을 미치는 한계가 분명 있다. 하지만 그나마 오래 남는 건 자연이다. 사찰이 있어 자연이 보존되고, 자연이 곁에 있어 사찰도 빛이 나는, 공생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면 자연을 아끼고 보호하는 건 당연한 사찰의 책임이자 의무다.
마곡사는 5년 전부터 ‘자연수목원’을 조성해왔다. 수목원을 조성하는데 매년 최고 3000만원의 재원이 투여된다. 마곡사의 수목원은 별도의 공간이 아니다. 경내 모든 곳이 수목원의 대상이다. 담장 아래, 좁은 길옆, 후미진 모퉁이, 벌거벗은 흙더미도 대상지다. 사찰 경내 곳곳에 나무를 심고, 야생초를 키우고, 꽃밭을 가꾼다. 특히 마곡사는 우리 환경에 맞는 토종식물 심기에 앞장서고 있다. 전통사찰에 어울리는 우리 야생화는 보는 이의 마음까지 꽃을 피우게 한다. 이같은 노력으로 마곡사는 더 이상 ‘춘’마곡이 아니다. ‘춘하추동’ 마곡, ‘사시사철’ 마곡으로 변모하고 있다. 계절마다 꽃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사시사철 마곡은 결코 아니다.
사시사철 자연과 문화와 사람이 어우러지는 곳, 이제 마곡사는 사시사철 맑고 밝은 곳이라는 의미의 ‘사시사철 마곡’으로 바꿔 불러야 하지 않을까.
김하영 기자 hykim@ibulgyo.com
마곡사 2022년 연간 주요일정
4월 14일~16일 산신기도
5월 7일 신록축제
5월 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
5월 15일 하안거 결제
6월 25일 백중 입재
6월 26일 백범당 원종스님(김구) 제73주기 다례재
7월 2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제4주년 산사음악회
7월 14일 취담당 일현스님 제31주기 다례재
8월 12일 하안거 해제 및 백중 회향
8월 20일 금호당 약효대종사 다례재
9월 6일 마곡사불교대학 2학기 개강
9월 25일 기허당 영규대사 제430주기 추모다례문화제
10월 9일~11일 산신기도
10월 22일~30일 군왕대재
11월 8일 동안거 결제 100일 기도 입재
12월 16일 용음당 법천대선사 제72주기 다례재
12월 31일 새해맞이 타종식
※수행프로그램
-천수다라니 33독 기도 : 매주 월요일 오후7시 영산전
-금강경 독송회 : 매주 금요일 오후7시 영산전
마곡사의 스님들
지역에 자비와 문화를 베풀다
❏ 대전 고산사 주지 규봉스님
고산사는 대전광역시의 마곡사 말사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전통사찰로,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는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서 시민들에게 친숙한 절이다. 여러 매체에서 대전에서 꼭 가봐야 할 장소이자 부처님오신날 찾아가야 할 사찰에 반드시 언급될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고산사는 도심사찰이자 전통사찰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갖추고 있어, 도심포교당으로서의 현대적인 위상과 산사(山寺)의 전통적인 매력이 공존한다. 고산사 주지 규봉스님이 대전충남파라미타청소년협회 회장이자 대전경찰청 경승의 직함을 가진 이유다. 한국철도공사불자회 지도법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도, 도심포교를 담당하는 주지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주지 규봉스님은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많은 제약이 있었다”며 “그럼에도 주어진 환경 안에서 청소년 등 계층포교와 관공서 등 직장직능 불자회의 활성화라는 원력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규봉스님은 본사인 마곡사에서는 부주지 직책을 맡고 있다. 교구장 스님을 보좌하면서 교구 행정과 사업 전반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살피는 중요한 자리다. 이전에는 본사 호법국장으로서 교구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기여했다.
❏ 공주 갑사 주지 탄공스님
‘춘마곡’과 함께 널리 불려지는 ‘추갑사’의 주인공 사찰이다. 가을이 특히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대표적인 관광사찰이었던 갑사는 현 주지 탄공스님이 취임하면서 변화의 바람을 맞이했다. 신도와 불자들이 기도와 신행생활을 언제나 할 수 있는 열린도량으로의 탈바꿈이 그것이다. 주지 스님이 직접 목탁을 잡고 매일 기도하자 초하루법회에만 겨우 찾던 신도들이 사찰을 자주 방문하며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변화는 템플스테이. 갑사의 특별한 템플스테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도 변함없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비결이다. 매달 200명이 넘는 참가자가 템플스테이를 체험하기 위해 갑사를 찾는다. 갑사 대자암의 전통을 계승하는 ‘무문관 템플스테이’는 갑사만이 가진 프로그램. 불교의 전통 수행법인 무문관을 체험하려는 발길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갑사는 이에 화답하고자 2020년 12월 수행체험관을 새로 문 열었다. 이름하여 ‘고경원(古鏡院).’ 이곳은 무문관 템플스테이 전용공간으로 사용하게 된다. 주지 탄공스님은 “탐방객은 불교를 느끼며 부처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불자들은 편히 쉬면서 기도하고 수행하는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 공주 신원사 주지 중하스님
계룡산 신원사는 지역을 대표하는 기도도량이다. 조선 태조가 무학대사에게 명하여 건립했다는 ‘중악단’은 계룡산 산신에게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조선 효종 때 없앴다가 고종 대에 명성황후에 의해 복원된 역사를 갖고 있다. 신원사 주지 중하스님은 기도도량으로서의 역할에만 만족하지 않고, 사찰에 새로운 원력을 불어넣었다. 전법도량으로서 신원사를 만들어나갔다.
2011년 취임하자마자 중하스님은 장학기금을 모연했다. 기와 불사를 하고, 불교용품점을 통해 얻은 수익금 전부를 모았다. 신도들에게 포교의 중요성을 호소했다. 그 덕분에 바로 그해부터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할 수 있었다. 공주시청이 운영하는 장학재단에도 매년 1000만원 이상 기탁하는 등 해마다 2000여만원의 장학금을 쾌척하고 있다. 추석 등 명절과 연말에는 소외이웃을 위해 쌀 등 생필품도 나눈다.
지난해 10회를 맞이한 ‘고종황제·명성황후 천도·추모재’는 신원사의 지역사랑을 보여주는 사례다. 문화행사를 새로 만들어 지역 활성화까지 도모하고 있다. 주지 중하스님은 “사찰 주지라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포교를 중히 여겨야 한다”며 “특히 천혜의 환경을 갖추고 있는 사찰이라면 이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포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부여 무량사 주지 정덕스님
부여 무량사는 조선 최고의 사상가인 매월당 김시습으로, 또 보물이 많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량사에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8점이나 있고, 유물 800점이 있는 그야말로 보고(寶庫)다. 무량사를 눈여겨보게 하는 것은 김시습, 곧 설잠스님이다. 설잠스님(김시습)은 이곳 무량사에서 말년에 주석하다가 입적에 들었다. 2017년 설잠스님의 사리가 부여박물관에서 환지본처하면서 무량사는 더욱 주목받게 됐다.
무량사 주지 정덕스님은 설잠스님 선양사업에 천착하고 있다. 설잠스님 사리가 돌아온 2017년부터 다례재 및 호국영산재를, 2019년부터는 아미타 학술심포지엄을 열며 설잠스님의 사상과 행적을 재조명하는 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정덕스님의 사업은 설잠스님의 정신문화를 선양하는 영역에까지 뻗어있다. 무량사 영산재의 무형문화재 등록이 목표다. 이같은 불사는 지역주민과의 상생에도 연결된다.
지난해 12월 3000만원 상당의 자비의 쌀을 부여군에 내놓고, 산사문화체험 행사를 지역주민과 함께 개최하고 있다. 주지 정덕스님은 “사찰의 자산을 활용해 지역에도 도움이 되는 방법을 계속 찾고 있다”며 “주민과는 상생하고, 불자들에게는 편안함을 주는 사찰로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충남 공주 태화산 마곡사, 사계절 아름다운 태화산 동쪽자락…백범 김구선생도 한때 은거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영남일보 발행일 2022-09-16 제16면
사하촌의 상점가를 지난다. 곧 화려한 다포양식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육중한 일주문이 나타난다. 처마 아래에 '태화산마곡사(泰華山麻谷寺)' 현판이 걸려 있다. 이곳은 예부터 '춘마곡'이라 불렸던, 봄의 신록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마곡사의 첫 산문이다. 마곡사는 공주시 사곡면(寺谷面) 태화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다. 사곡면은 택리지나 정감록에서 '난을 피해 숨어 살기 좋다'는 이른바 '십승지'의 하나로 꼽은 땅이다. '사곡'은 절이 있는 골짜기를 뜻하니, 사곡면의 상징적 중심이 곧 마곡사다. 일주문 현판에 '여초거사(如初居士)'라는 방서가 있다. '여초'는 고(故) 김응현(金膺顯) 선생의 호로, 그는 '추사 이후 여초'라는 찬사를 받는 근현대 한국서단의 대가다. 산문을 여는 여초거사의 반듯한 글씨와 함께 산사로의 길이 시작된다.
640년에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
정조 때 큰 화재로 소실 됐다가 재건
조계종 6교구 본사로 100여 말사 관할
세계유산 '한국 산지승원'으로 지정
마곡사 북원 5층석탑·대광·대웅보전
일직선상으로 중심축 이뤄 주변 압도
◆마곡사
길은 계곡과 나란히 나아간다. 계류는 마곡천으로 태화산 구간을 특별히 태화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매표소를 지나면 비로소 사하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길은 한층 조붓해진다. 옛날 마곡사는 아주 오지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왔고, 백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 살해범을 암살하고 인천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탈옥한 뒤 숨어든 곳이 바로 마곡사였다. 지금은 아스팔트길과 데크길이 매끈하게 놓여 있다. 숨소리는 평온하고 도르르대는 물소리와 맑은 산새 소리만이 고즈넉하다. 천변을 따라 벚나무가 이어진다. 계곡 주변으로는 온갖 낙엽수가 무성히 자라고 능선에는 장령의 소나무 숲이 넓게 분포한다. 수목들이 저마다의 연두로 새로워지는 '춘마곡'을 상상할 수 있다. 물길이 크게 돌자 계곡 너머로 마곡사 암자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인 640년에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통일 신라 말기인 9세기경에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중창했고 고려시대에는 보조국사 지눌과 그의 제자인 수우(守愚)가 대대적으로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마곡사라는 이름은 신라의 보철화상이 마곡사에서 설법을 펼칠 때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삼밭의 삼대(麻)와 같이 빼곡했다고 하여 마곡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임진왜란 전의 마곡사는 1천50여 칸의 대찰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폐허가 되었다가 효종 2년인 1651년에 중건되었고, 정조 때인 1782년에 큰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오늘날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다. 공주, 천안 등 충남 8개 시·군과 대전 및 세종 등지의 100여 개 말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지정됐다.
마곡사의 정문은 해탈문이다.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두 번째 문은 천왕문이다. 악귀의 범접을 막고 중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잡념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천왕문을 지나면 앞을 가로막는 마곡천과 길을 이어주는 극락교를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마곡천은 태극 모양으로 굽이치며 마곡사를 남원과 북원으로 나눈다. 남원은 해탈문과 천왕문 왼편에 긴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영산전을 중심으로 한 수행의 공간을 이루고, 북원은 극락교 너머 대광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화의 세계로 펼쳐져 있다. 해탈문과 천왕문은 공간적으로 남원에 속해 있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북원과 연결되어 있다. 즉 이들 산문을 통과하면서 세속의 때와 번뇌를 모두 벗은 뒤 최종적인 정화의 절차로 물을 건너는 의식을 치른 후에야 대광보전 영역으로 들어설 수 있도록 한 가람 배치다.
◆마곡사 남원과 북원
남원의 중심 법당은 영산전이다. 마곡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650년에 중수돼 현재 보물 제800호로 지정되어 있다. 편액은 조선 세조 임금의 글씨라고 한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뒤 매월당 김시습을 찾아 마곡사에 온 적이 있다. 왕의 행차 소식을 미리 안 김시습이 몸을 피해버려 둘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영산전 편액은 그때 쓴 것으로 편액 왼편에 '세조대왕어필(世祖大王御筆)'이라는 작은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영산전 뒤편 산자락에는 군왕대(君王垈)가 있다. 세조가 마곡사에 왔을 때 '만세 동안 없어지지 않을 땅(萬歲不亡之地)'이라 끝없이 감탄했다는 곳이다.
극락교 건너 마곡사 북원에 들어서면 5층 석탑과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일직선상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공간의 중심축을 이루는 수직과 수평의 조화가 주변 모두를 압도한다. 축선의 왼쪽에는 응진전과 조사전, 그리고 김구 선생을 기리는 백범당이 위치한다. 백범당 앞에 김구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성성하게 자라나 있다. 오른쪽으로는 범종각과 요사인 심검당, 2층 규모의 고방 등이 자리한다. 날씬하게 솟은 오층석탑은 고려시대 탑으로 보물 제7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의 상륜부에는 '풍마동'이라 부르는 청동제의 공예탑이 얹혀있는데 라마식 보탑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원나라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광보전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보물 제80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부에는 화엄사상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데, 불전 가운데가 아니라 법당의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앉아 계신다.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 이런 위치에 앉아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1782년 대광보전이 완전히 소실되는 화재 속에서도 이 불상은 무사했다고 한다. 바닥의 카펫 아래에는 참나무 껍질로 엮어 만든 삿자리가 깔려 있다. 삿자리를 만든 이는 조선 후기의 한 지체장애인이다. 어느 날 마곡사를 찾아온 그는 백일기도를 올리며 틈틈이 삿자리를 짰다. 그는 부처님의 자비로움을 얻을 수 있다면 이생에서도 다음 생에서도 착한 일을 하며 살겠노라고 맹세했다. 드디어 100일째 되는 날 약 30평 정도의 삿자리를 완성한 그는 부처님께 하직 인사를 올린 뒤 두 발로 걸어 나갔다고 한다.
대부분의 절집에서 정면을 차지하는 대웅보전이 마곡사에서는 대광보전 뒤쪽 높은 곳에 서 있다. 대웅보전은 보물 제801호로 외부에서는 2층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통층이다. 전각의 내부에는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굵직한 싸리나무 기둥 네 개가 서 있다. 마곡사 대웅보전 싸리나무 기둥을 많이 돌수록 극락길에 가까워지고 아니면 지옥 길에 가까워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묻는단다. '그대는 마곡사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 기둥이 참으로 보드라워 손끝이 뜨끔하다. 극락에 간 사람들 모두 모여 싸리기둥 도는 내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경부고속도로 서울방면으로 가다 회덕분기점에서 당진, 세종, 전주 방면 오른쪽으로 간다. 유성분기점에서 당진대전고속도로로 갈아타서 당진, 남세종 방면으로 가다 마곡사IC에서 내린다. 사곡교차로에서 마곡사. 사곡 방향 우회전, 다시 마곡사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된다. 마곡사 입장료는 성인 3천원, 청소년 1천500원, 어린이 1천원이다.
공주 마곡사 백범 명상길
글·사진 │ 조용준 여행칼럼니스트
경기신문 기사 등록일 : 2013.05.08.
백범 발자국 따라… ‘명상의 길’ 3km
마곡사 솔바람길 1코스 ‘백범 명상길’
연둣빛 이파리를 달고 반짝이는 신록의 숲길에 들었습니다. 숲은 저마다 다른 채도로 반짝이는 새 잎으로 온통 초록의 바다를 이루고 있습니다. 신발을 벗어 손에 들었습니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흙은 포근합니다. 솔향을 듬뿍 머금은 바람이 얼굴을 스쳐지나갑니다. 떨어진 솔잎이 발바닥을 간질입니다. 걸음은 한결 더 기운차고 숲은 싱그럽습니다. 눈을 감고 땅의 기운을 느껴봅니다. 온 몸으로 신록의 물줄기가 쏟아집니다. 샤워를 한듯 정신이 맑아집니다. 어느새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도 초록으로 물들었습니다.
春마곡, 秋갑사(봄에는 마곡사가, 가을에는 갑사가 최고로 아름답다)라 했던가. 무르익은 봄날, 충남 공주 마곡사는 갖가지 꽃과 여리디 여린 잎들이 꾸며놓은 신록의 바다다.
마곡사를 찾았다. 제일 좋은 시절에 절을 찾은 셈이니 과연 춘마곡(春麻谷)이란 감탄사가 절로 날만하다.
마곡사는 주차장 입구에서 절까지 1㎞ 정도 걸어야 한다. 처음 가는 사람들은 볼멘소리를 하지만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에 눈길을 주며 곰곰이 뜯어볼 수 있어 좋다. 경내를 흐르는 맑은 계곡은 새 잎 돋아나는 나뭇가지를 그대로 투영해 낸다.
마곡사는 640년 백제 무왕 때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대광보전의 빛바랜 단청이 고찰의 분위기를 돋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의 목적은 마곡사가 아니다. 절집에서 그동안 꼭꼭 숨겨놓은 보물 같은 길, 바로 ‘백범 명상길’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1895년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뒤 마곡사로 도피해 은거생활을 할 때 거닐었던 소나무숲길이다.
백범은 평생 가장 큰 신세를 진 곳으로 마곡사를 꼽았다. 난세를 피해 몸을 의탁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얼마 동안 승복을 입고 생활했다. 큰절은 물론 인근 백련암에도 선생의 체취가 남아 있다.
‘백범 명상길’은 사찰 앞마당 백범당에서 시작된다. 마곡사는 선생과의 인연을 기념해 사찰 앞마당 한쪽에 백범당을 조성했다. 선생이 즐겨 썼던 서산대사의 선시(禪詩)도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한줄기 바람에 풍경소리가 청명하게 울린다. 명상길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백범 명상길’은 태화산 적송들 사이로 난 마곡사 ‘솔바람길’의 첫 번째 코스다. 백범당∼백범 선생 삭발터∼군왕대∼마곡사로 이어지는 3km로 쉬엄쉬엄 1시간가량 걸린다.
백범당을 출발해 냇가로 접어들면 목조 데크가 나타난다. 백범이 출가할 때 삭발했다는 삭발터를 지나 나무다리를 건너면 평평한 산책로가 나온다. 여기서 1코스와 3코스로 갈라진다. 영은교를 지나 불교문화원 쪽으로 가면 3코스다. ‘명상길’은 다리를 건너기 전 태화산으로 접어들면 잘 정돈된 소나무 숲과 단풍나무숲이 나타난다.
숲에 들자마자 저마다 채도가 다른 연둣빛 이파리들이 반짝이는 신록의 숲은 가히 환상이다.
연초록의 신록이 아름다운 게 어디 이곳뿐이겠느냐만, ‘백범 명상길’은 부드러운 능선에 어린 단풍잎과 활엽수, 침엽수가 뿜어내는 신록이 유독 더 아름답다.
순하고 여린 잎들이 그려내는 연초록은 마치 도화지에 번진 수채화 물감의 색감처럼 서정적이다.
숲 아래로는 현호색과 매발톱, 초롱꽃 같은 꽃들이 그야말로 지천으로 피어났다. 길가에는 꽃이 진 민들레 꽃대의 홀씨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부드러운 산길을 20여분 오르자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났다. 신록의 화사함은 없지만 숲속에서 느끼는 기운은 연인의 입김처럼 온화하기만 하다. 이리저리 굽은 노송이 첩첩 겹치며 멀어지는 고요한 숲길은 감동마저 준다.
이마에 땀이 맺힐 무렵 군왕대에 이른다. 군왕대는 산 정상은 아니지만 마곡사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곳이다. 마곡사에서 가장 지기(地氣)가 센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세조가 군왕대에 올라 ‘내가 비록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하지만 만세불망지지(萬世不亡之地)인 이곳과 비교할 수 없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땅의 기운이 세다보니 변란이 있거나 사람이 죽으면 이곳에다 시신을 암매장하는 일이 많았다. 결국 조선 말기에 유골을 모두 파낸 뒤 돌로 채워 암매장을 막았다.” 길 동행에 나선 조옥순 문화관광해설사가 전해준다.
군왕대를 지나면 마곡사까지 0.6km는 내리막길이다. 솔잎이 깔린 흙길과 황톳길이 적절하게 섞였다. 불편함을 조금 감수한다면 이쯤에서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맨발로 걸어볼만하다.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땅의 기운과 흙의 촉감은 도심에선 느껴보지 못한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숲길에서 만난 마곡사 템플스테이 참가자는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그야말로 명상길”이라고 말했다.
삼신각을 지나 3㎞ 남짓한 ‘백범 명상길’의 끝자락을 내려서면 마곡사 명부전이다. 신록으로 샤워를 한듯 온몸이 개운하다. 몸은 물론 마음까지도 초록으로 물든 것만 같다.
◇여행메모
△가는 길=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가다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로 갈아탄다. 이어 당진상주고속도로 공주IC를 나오면 시내다. 마곡사는 마곡사IC를 이용하는 게 편하다.
△마곡사 솔바람길=2코스 ‘명상 산책길’은 마곡사∼천연송림욕장∼은적암∼백련암∼활인봉∼생골마을∼마곡사로 이어지는 5km의 트레킹코스로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3코스 ‘송림숲길’은 마곡사∼천연송림욕장∼은적암∼백련암∼아들바위∼나발봉∼전통불교문화원∼다비식장∼장군샘∼군왕대∼마곡사이다. 11km의 본격 등산코스로 3시간30분가량이 걸린다.
△볼거리=공주는 공산성과 국립공주박물관, 고마나루 등 백제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 많다. 또 자연사 박물관, 계룡산 도예촌 등 체험장이나 마곡사, 갑사, 동학사 등 사찰도 많다. 최근에 조성된 고마나루 명승길(총길이 14㎞)은 4시간30분 정도 걷는 트레킹 길이다. (041)840-2835.
△먹거리=마곡사 입구 식당가에는 맛집들이 여럿 있다. 그중 태화식당(041-841-8020)의 산채비빔밥, 바람처럼 구름처럼(041-841-9959)의 부침개 등이 잘한다고 소문났다. 한옥민박 인근에 있는 새이학식당(041-856-0019)은 65년 전통의 공주국밥으로 유명하다.
△잠잘 곳=한옥마을은 단체숙박동 6동에 37개의 객실을 갖춘 한옥(온돌)숙박시설이다. 한옥마을은 백제 의상(왕·왕비·장군) 입어보기, 진묘수(무령왕릉을 지키는 상상 속의 짐승) 만들기, 백제 전통차 체험 등 다양한 가족 체험이 가능한 다목적 시설도 갖췄다. (041-840-2763, 840-2792)
마곡사와 백범 김구 선생
구한말 독립운동가 백범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군 중좌를 살해하였다. 그 후 살인범으로 낙인 찍혀 인천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 그곳을 탈옥하여 1898년 마곡사에서 은신하게 되었고, 하은당이라 불리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이로써 스님이 된 김구 선생은 삭발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삭발바위와 마곡천을 잇는 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마곡사에서 마곡천 절경을 굽어보는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마곡사 대광보전과 응진전 사이에 김구선생이 광복 후 1946년 마곡사에 들러 심었다고 하는 향나무가 남아 있다.
또한 마곡사 생태농장에서 군왕대로 이어지는<백범 솔바람 명상 길>은 마곡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1시간 가량 산보하기에 좋은 산책로다.
백범일지(白凡逸志)
백범일지1929년(상권)1943년(하권) [白凡逸志一九二九年(上卷)一九四三年(下卷)]
종목 보물 제1245호(1997년 6월 12일 지정)
수량 2권 1책
시대 일제강점기
소유 재단법인 김구재단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9길 10-10 (충정로2가) 재단법인 김구재단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백범일지》(白凡逸志)는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가 쓴 자서전이다. 1929년과 1943년 각각 집필된 두 권의 친필본은 1997년 6월 1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었다. 1948년 발행된 재판과 제3판에 각각 1949년에 친필 서명한 두 권의 책이 인천광역시 한국근대문학관에 소장되어 있다. 백범일지’ 판본은 크게 4가지다. 김구가 1929년과 1942년에 탈고한 친필본과 그것을 옮겨 적은 필사본 2종, 1947년에 공식적으로 출간된 국사원본까지다. 국사원본은 이광수가 윤문한 1947년 책을 말한다. 백범일지는 명문장가인 이광수의 윤문이라는 꽃단장을 통해 재탄생했다. ‘국사원본 백범일지’는 처음부터 유려한 문장, 쉽고 간결한 문체로 출발했다. ‘친필본 백범일지’와는 차이가 너무 많은 작품이다. 1994년 백범의 아들 김신이 친필 원본을 공개함으로써 이광수의 윤문과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요
김구는 17살 때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학에 입문하여 19세에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21살 때는 국모의 원한을 갚는 거사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에 입산,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으며, 안중근과 안명근 의사의 의거에 관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과 내무총장을 거쳐 1926년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 1941년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일기의 상편은 1929년 김구가 53세 되던 해에 상해임시정부에서 1년 정도 독립운동을 회고하며 국한문혼용체로 김인, 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우리집과 내 어릴 적」,「기구한 젊은 때」,「방랑의 길」,「민족에 내놓은 몸」 등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하편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로 인해 상해를 떠나 중경으로 옮겨가며 쓴 것으로,「3·1운동의 상해」,「기적 장강 만리풍」 등의 제목 아래 민족해방을 맞게 되기까지 투쟁 역정을 기록하고 있다. 임시정부 환국이나 삼남 순회 대목의 서술은 1945년말 정도에 첨부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상·하편 뒤에 붙은「나의 소원」은 완전독립의 통일국가건설을 지향하는 김구의 민족이념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백범일지』는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에서 처음 김구의 아들 김신에 의하여 초간 발행된 것을 필두로 오늘날까지 국내외에서 10여본이 출판사를 통해 중간되었다. 더욱이 김구가 상해 이후 중경까지 27년간 임시정부요직을 두루 지내며 틈틈이 써놓은 친필원본이란 것과 임시정부의 1차 사료인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 및 위인전기사료로 귀중한 자료이다.
내용
상권은 백범이 53세 되던 해인 1929년에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서 1년 정도 시간을 두고 지난 독립운동 사실을 회고하며 집필하였고, 하권은 백범이 67세 되던 해인 1943년경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서 집필하였다고 하권 책머리의 서문에서 적고 있다. 상권은 만년필에 국한문 혼용이며, 하권은 모필(毛筆)로 역시 국한문을 혼용하여 적었다.
상권은 첫머리에 『여인신양아서(與仁信兩兒書)』란 제목으로 아들인 인(仁)과 신(信)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려 있는데, 백범의 친필이 아닌 듯하다. 다음 『백범일지상권(白凡逸志上卷)』이란 제목으로 「조선과 가정(祖先과 家庭)」, 「출생급유년시대(出生及幼年時代)」 두 편이 수록되었는데 이는 상권을 집필할 때 쓴 것이 아니라 하권 집필 때 쓴 것으로 추정되며, 이어 일지(逸志)가 시작되는데 첫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임시정부 주석답게 잘 묘사하고 있으나,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언급이 없고, 오히려 고려공산당의 총격 사건만 언급하는 등 사회주의에 대한 편견이 있다는 비평을 받기도 한다.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에서 처음으로, 아들 김신에 의해 초간 발행을 필두로 오늘날까지 국내·외에서 10여 본이 중간(重刊)되었다. 그러나 자료나 보조원 없이 오로지 기억을 더듬으면서 집필한 것으로 치하포 사건 같은 왜곡, 과장 등에 서술내용과 시기가 모순되는 경우가 많고 인명, 지명 등에도 착오가 있다.
〈나의 소원〉
〈나의 소원〉은 백범일지의 본문 뒤에 실려있는 글로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1947년 국사원에서 백범일지를 출판할 때 춘원 이광수가 윤문을 하였는데, 김구가 쓴 백범일지의 서문을 참조하여 부록으로 첨가를 하였다. 이때 이광수의 상상이 혼합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중략)…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 백범 -
공주 마곡사의 보물들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公州 麻谷寺 五層石塔)
종목 보물 제799호(1984년 11월 30일 지정)
시대 고려시대
소유 마곡사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로 966,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公州 麻谷寺 五層石塔)은 충청남도 공주시 마곡사 대웅보전 앞에 있는, 고려 후기의 석탑이다. 1984년 11월 3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799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마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구한말에는 독립운동가 김구와도 인연이 깊었던 사찰이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인 후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로 지냈는데, 지금도 대광보전 앞쪽에는 김구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절 마당에 우뚝 서 있는 이 탑은 탑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基壇)을 2단으로 쌓고, 그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의 몸돌에는 부처, 보살 등을 조각해 놓았고,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보이는데, 현재는 5층 지붕돌에만 1개의 풍경이 남아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이 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으로, 중국 원나라의 라마탑과 그 모습이 비슷하다.
길쭉한 감이 있어 안정감은 적으나 당당한 풍채로 버티고 서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머리 장식의 독특한 모습으로 보아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후기 즈음으로 여겨진다. 즉 고려 후기 당시 원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라마교 계통의 문화도 고려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탑은 그 문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탑 안의 보물들을 거의 도난당하였으나, 1972년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현지 안내문
이 탑은 고려 말기에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탑이다. 높이는 8.7m이며, 높은 이중 기단 위에 높게 서 있는데 지붕돌 폭의 변화가 거의 없어 안정감이 없다. 이층 몸쳇돌에는 사방을 지키는 사방불이 새겨져 있고, 탑의 끝 부분에 라마탑에 보이는 풍마동 장식을 두었다. 다보탑이라고도 부른다. 라마교는 티베트에서 발생하여 원나라 때 크게 융성한 불교의 한 종파이다. 대광보전이 불탔을 때 크게 훼손되었고, 1974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경천사탑, 원각사 탑과 함께 원나라 탑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공주 마곡사 영산전(公州 麻谷寺 靈山殿)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시대 : 조선/조선 후기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마곡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전.
[개설]
공주 마곡사 영산전은 마곡사 안의 불전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수행 가람의 중심 건물이다. ‘영산(靈山)’은 영취산(靈鷲山)의 준말로, 중부 인도 마가다국 왕사성 부근에 있는 산으로서 석가모니가 설법을 한 곳이다.
[형태]
공주 마곡사 영산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배흘림이 강한 원주를 세웠다. 기둥 윗부분에는 창방을 끼우고 주상에만 공포(栱包)를 짜 올린 주심포식 건물이다. 공포와 공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워두었다.
공포는 앞면과 뒷면이 조금 다르게 짜여 있는데, 앞면과 뒷면 모두 이출목 삼익공식이지만 앞면은 제공 끝을 운공 형식으로 조각하였고, 뒷면은 제공 끝을 첨차 형식으로 마무리하였다. 따라서 앞면의 공포는 매우 화려하게 보인다. 양 측면에는 풍판을 달지 않았고, 박공판으로 마감을 하여 측면 구조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지붕은 1고주 5량집 구조이며, 천장은 우물반자를 2단으로 처리한 층급 천정이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내부 불단은 ‘⊓’자 모양으로 조성하였고, 삼존불과 천불을 병렬 배치하였다. 창호는 앞면 모든 칸에 삼분합문을 달았는데, 어칸 살은 교살문이고, 나머지는 ‘정(井)’자살문이다. 측면에는 앞면 쪽으로 출입문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현황]
마곡사의 수행 가람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영산전은 조선 후기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공주 마곡사 영산전은 규모가 그리 작지 않으며, 보물 제8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공주 마곡사 영산전은 조선 후기에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공포를 짜 올린 세부 기법을 살펴보면 조선 중기의 건축적 특징이 드러난다. 조선 중기에 처음 건립한 이후 여러 번 중수를 거치면서 조선 후기의 기법이 가미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4년 11월 30일 보물 제80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마곡사 대웅보전 : 보물 제801호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公州 麻谷寺 大雄寶殿)은 마곡사에 있는 보물 제801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17세기(조선 중기)에 건립된 마곡사의 법당이다.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1.5m 높이의 기단 위에 세운 중층(重層) 다포계(多包系)의 팔작건물로서 다른 건축양식에 비해 구조가 특이한 점이 특징이다. 외부는 일부가 변형되었으나, 내부는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
이 건물은 대광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본전이다.
원래의 건물은 임진왜란(1592년) 때 불타 없어졌고, 현재의 건물은 1651년(효종 2년)에 각순대사와 공주목사 이주연이 다시 지은 것이다. 외관상으로는 2층 건물 형태인 중층이나 내부는 하나의 공간이다. 중심에 석가여래불을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건축양식은 조선시대에 유행하였던 다포식으로서 외관이 화려하면서도 장중한 감을 준다. 팔작지붕으로 된 네 모서리에 처마를 받쳐주기 위한 활주가 세워져 있다.
현존하는 전통 목조건축물 가운데 많지 않은 중층건물로 목조 건축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마곡사 대광보전 : 보물 제802호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公州 麻谷寺 大光寶殿)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로 966, 마곡사 (운암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이다. 1984년 11월 3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02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된 다포계 양식의 단층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자연석 더미 기단 위에 세웠으며, 기둥에는 뚜렷한 배흘림이 보이고, 개구부는 앞면 5칸과 측면 앞칸에만 두었다. 1787년에 만들어졌으며,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 타고 온 어가가 보관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
대웅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본전이다.
원래의 건물은 임진왜란(1592년) 때 불타 없어졌는데, 1823년(순조 13년)에 다시 지었다. 건물 안 바닥에는 참나무로 만든 돗자리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으며, 부처님이 서쪽에서 동쪽을 보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건축양식은 외관이 장대하면서도 화려한 특징을 갖는 다포식이며, 건물의 양쪽엔 다양한 무늬의 꽃살 무늬의 문을 달았다.
건물 내부의 화려한 공간 구성과 함께 조선 후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전통 목조건물이다.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麻谷寺 釋迦牟尼佛掛佛幀)
종목 보물 제1260호(1997년 8월 8일 지정)
수량 1폭
시대 조선시대
소유 마곡사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로 966,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공주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公州 麻谷寺 釋迦牟尼佛掛佛幀)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탱화이다. 1997년 8월 8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60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열 때 사용하던 대형 불화를 말하며, 이 괘불은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그린 것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6대 보살, 10대 제자, 제석천과 범천, 사천왕, 천자, 아수라, 용왕 등이 좌우 대칭으로 화면 가득히 그려진 모습이다. 석가모니불은 용화수가지를 양 손에 받쳐 들고 있는 모습으로 손이 다른 신체 부분에 비해 크게 그려져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둥근 머리광배와 배(舟) 모양의 몸광배로 구분되는데 머리광배에는 작은 부처 여러 구를 그려 넣었다.
석가모니불을 좌우에서 협시하고 있는 제화갈라보살을 비롯한 6대 보살은 관음·대세지·문수·보현보살로 구성되었으며 10대 제자상과 보향·명월천자가 상단 좌우 끝에 그리고 아수라 가루라 용왕들이 배치되어 있다. 남아 있는 글로 보아 시주자를 비롯한 여러 승려와 일반인들이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석가탄신일 외에도 수륙재와 49재에 쓰였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대형화면에 나타난 중후한 형태·화려한 색채 등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으로 본존불을 중앙에 크게 묘사하고 다른 무리들을 주위에 작게 배치하여 석가모니가 일반 대중들을 압도하는 듯한 인상을 전달하고 있다.
삼신불 가운데 석가불을 노사나불과 동일하게 보살형으로 형상화한 독특한 형태의 그림이며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이란 석가의 존명과 함께 각 상들의 명칭도 기록되어 있어 불화 연구에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다.
공주 [태화산&마곡사] 산행지도
마곡사 가람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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