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향해 새로운 길이 열리다
15세기 초반(初盤),
포르투갈 (Portuguese)의 왕자(王子) 엔히크(Infante Dom Henrique de Avis, 1394년 3월 4일~1460년 11월 13일)는 바닷길을 통해 시장(市場)을 개척(開拓)하려 했습니다.
정작 본인(本人)은 평생 포르투갈을 떠나 본 적이 없었지만, 해외 진출(海外進出)에 관심(關心)을 갖고 아프리카(Africa) 서부 항로(西部航路)를 개척하는데 지원(支援)을 아끼지 않아,
이후 항해 왕자(航海王子, Navigator)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순전(純全)히 사익(私益)을 취하려던 그의 시도(試圖)는 세계사(世界史)를 완전히 바꾸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항해왕자로 알려진 엔히크의 관심은 세계사를 바꾼 단초(緞綃)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항로(航路)를 개척하고 이를 통해 충분(充分)히 경제적 이득(經濟的利得)을 취할 수 있음이 소문(所聞)나면서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Spain)을 시작으로 유럽에서는 권력자(權力者)나 권문세도가(權門勢道家)의 후원(後援)으로 미지(未知)의 세계(世界)를 향해 선단(船團)을 보내는 일이 유행(流行)처럼 퍼졌습니다.
이러한 도전(導電)을 통해서 인도(India), 아메리카(America)로 가는 많은 바닷길이 개척(開拓)되었고 그 절정(絶頂)은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선단(船團)의 세계 일주 항해(世界一走航海)였습니다.
↑권력의 후원을 받는 많은 모험가들이 앞다투어 대양으로 나갔습니다
이처럼 서양(西洋)은 바닷길을 이용(利用)해서 본격적(本格的)으로 외연(外延)을 확대(擴大)해 나갔습니다.
이는 흉노(匈奴), 돌궐(突厥), 몽골((Mongolia)처럼 기마대(騎馬隊)를 앞세운 대군(大軍)이 육지(陸地)를 통해 폭풍(暴風)같이 달려가 서양을 위협(威脅)했던 동양(東洋)의 팽창기(膨脹期)와 극명(克明)하게 대비(對備)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세계사(世界史)를 주도(主導)하는 균형추(均衡錘)가 서서히 서양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그 여파(餘派)는 아직도 현재진행형(現在進行形)입니다
↑과거에 동양은 육지를 통해 유럽까지 세력을 넓혔습니다
엄밀히 말해 선박(船舶)만 놓고 보자면 당시 서양(西洋)이 동양(東洋)보다 뛰어난 것은 없었습니다.
수천 년간 동서(東西)를 막론(莫論)하고 배의 주동력(主動力)은 풍력(風力)이었습니다.
또한 목재(木材)로 배의 크기를 무한정(無限定) 키우는 데는 한계(限界)가 있었으므로 운송력(運送力) 또한 그다지 차이(差異)가 없었습니다.
비록 규모(規模)와 업적(業績)에 대해 논란(論難)이 많지만 15세기에 있었던 정화(鄭和)의 선단(船團)처럼 동양도 원양 항해 능력(遠洋航海能力)이 있었습니다.
↑정화가 이끄는 선단이 동아프리카까지 항해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不具)하고 단말마(斷末摩)적으로 끝난 동양과 달리 서양이 적극적(積極的)으로 그리고 꾸준히 바다를 통해 영향력(影響力)을 확대(擴大)하여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동기(動機)가 부여(附與)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항해(航海)를 통해 얻은 이익(利益)의 상당 부분(相當部分)을 직접 참여(直接參與)한 개인(個人)들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걸고 먼 바다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든 대단한 유인책(誘引策)이었습니다.
↑해상을 통한 세계 진출의 시작은 이익 때문이었지만 세계사를 바꾸었습니다
몽골 제국이 몰락(沒落)한 이후 동양(東洋)은 스스로 이룩한 경제(經濟)나 문화 수준(文化水尊)에만 만족(滿足)하며 쇄국적(鎖國的)인 모습을 유지(維持)했습니다.
반면 서서히 강력(强力)한 근대국가(近代國家)들이 하나, 둘 형성(形性)되며 내부 경쟁(內部競爭)에서 더 이상 어느 일방(一方)이 압도적(壓倒的)인 패권(覇權)이나 경제적 이득(經濟的利得)을 취하기 힘들었던 서양(西洋),
엄밀히 말해 서(西)유럽은 바다를 통해 밖으로 나가 새로운 곳에 영향력(影響力)을 확대(擴大)하려 들었습니다.
↑재현된 콜롬부스 선단
이때부터 서양은 항해술(航海術)에서 동양보다 앞서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거대(巨大)한 대양(大洋)을 오가며 축적(蓄積)된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可能)한 것이었습니다.
선박(船舶) 및 항해술과 관련(關聯)한 모든 분야(分野)가 동시(同時)에 발전(發展)하였는데,
예를 들어 오늘날 불확실(不確實)한 미래(未來)의 위험(危險)에 대비(對備)하는 제도(制度) 중 하나인 '보험(保險)'도 바로 이와 관련(關聯)이 많은 부산물(副産物)입니다.
↑대항해 시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적하 보험 증권
↑1600년대 영국 런던의 로이드 커피하우스 전경. (사진=로이드 홈페이지)
장기간 항해(長期間航海) 중에 닥칠 선박(船舶)과 화물(貨物)에 대한 위험(危險)을 분산(分散)시키기 위해 금융인(金融人), 상인(商人), 선박 조합(船舶組合, combination)을 중심(中心)으로 탄생(誕生)한 해상보험(海上保險)이 현대식 보험(現代式保險)의 시작입니다.
1688년 설립(設立) 된 로이드(Lloyd's)가 현재도 세계 최대(世界最大)의 보험 조합으로 존재(存在)하고 이들이 1779년 제정(制定)된 선박보험, 적하(積荷)보험의 표준 약관(標準約款)과 증권(證券)이 최대한 원형(最大限原型)을 유지(維持)하며 아직도 사용 중(使用中)일 정도입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