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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中日近現代史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19. 하나의 중국 하나의 타이완 - 마지막편
출처: http://blog.naver.com/atena02/220439008781
1964년 10월 16일 오후 3시, 신장 위구르 자치구 동부 사막의 뤄부호(罗布泊) 사막 핵실험장에서 버섯구름이 치솟았다. 중국이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위력은 22kt으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과 맞먹었다. 이로서 중국은 미국과 소련, 영국, 프랑스 다음으로 5번째 핵보유국이 되었다. 2년 뒤에는 탄도 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하는데 성공한데다 1967년에는 수소폭탄 실험에도 성공했다. 명실공히 핵대국이 된 것이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부터 핵개발에 착수했다. 한국전쟁과 2차례의 타이완 해협 위기에서 입으로는 미국의 핵무기는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허세를 부리면서도 늘 공포에 시달렸던 그는 흐루시쵸프에게 중국의 핵개발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소련에서 핵 전문가와 기술자들이 파견되었다. 하지만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이들은 1959년 말까지 모두 철수했다. 중국은 해외의 중국인 학자들을 불러모아 계속 연구하였고 결국 성공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온갖 압박을 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편,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가 끝난 직후 미국은 타이완에 비밀리에 전술 핵무기를 배치하였다. 중공에 대한 압박 카드였다. 1978년 2월에 작성된 미 국방부의 일급 기밀 문서에 따르면 타이완에 배치된 핵무기는 최대 56발에 달했다. 하지만 키신저와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양국의 해빙 무드가 시작되면서 미국은 1975년까지 모두 철수시켰다.
대륙에서 쫓겨난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온 이래 죽는 순간까지도 대륙 반공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950년대 내내 "1년째 준비하고 2년째 본토로 반격하며 3년째 공산당을 소탕하고 5년째 본토수복를 완수한다(一年準備,兩年反攻,三年掃蕩,五年成功)"라는 구호를 떠들며 타이완을 전시 체제로 유지하면서 국민들을 통제하고 전쟁 준비를 일삼았다. 하지만 중공은 이미 세계 3위의 강대국이 되었는데 무슨 수로 싸워 이긴단 말인가. 대륙 수복은 커녕 그나마 장악하고 있던 섬들마저 공산군에게 넘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힘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고 꿈은 멀어져 갔다.
그런데 1950년대 말에 오면서 중공은 대외내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첫번째가 대약진운동의 실패였다. 국공내전에 승리한 직후만 해도 소위 "신민주주의"라 하여 온건적 타협적 노선을 추진하던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을 이용해 본격적인 사회주의 개조를 추진하고 일인독재를 구축하였다. 점진적 개혁을 외치던 사람들은 "보수 우경주의", "우파"로 매도당한 채 숙청당했다. 더 이상 누구도 그의 면전에 대고 이의를 달 수 없었다. 모든 기업은 국영화되고 모든 농민들과 토지는 "인민공사(人民公社)"라고 부르는 집단농장에 편입시켰다.
국공내전 이후 중국은 비교적 빠르게 회복하며 성장했지만 그 정도의 속도로는 마오쩌둥의 눈에 차지 않았다. 그는 더 빨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6년 1월 21일 마오쩌둥은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며 식량 증대와 강철 생산 확대를 지시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기술도 자본도 없고 기반 설비도 없었다. 서구와의 단절로 외부의 원조도 받을 수 없었다. 가진 것은 6억 5천만명의 노동력 뿐이었다. 무리한 계획이 수립되고 허위 보고가 만연하였다. 그는 온갖 선동적인 구호를 앞세워 인민들을 끝없이 내몰었다. 중국 최고의 경제통이었던 천윈(陳雲)은 물론, 저우언라이마저 "너무 성급하다"며 현실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마오쩌둥은 오히려 측근들을 동원해 두 사람을 감정적으로 몰아붙였다. 결국 이들은 꼬리를 내린 채 공개석상에서 몇 차례나 자아비판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중국 공산당 창당 이래 수십년 지기의 동지였으며 쟁쟁한 소련 유학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지도부에 후난의 촌무지렁이에 불과했던 마오쩌둥이 도전하여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저우언라이와 류사오치, 주더와 같은 여러 정치적 동맹자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문학적 소양만 있을 뿐 정치 지도자로서의 교양이나 학식과는 거리가 멀었던 마오쩌둥이 두서없이 내밷는 말을 다듬고 구체화하여 실천하는 것은 바로 이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런 공도 절대 권력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마르크스와 레닌, 스탈린 등과 동격에 놓으면서 자신을 숭배할 것을 요구하고 숭배하지 않는 자는 우파라고 몰아붙였다. 광기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야심찬 대약진운동은 일년도 되지 않아 참담한 결과를 드러내었다. 일선 관료들은 중앙에 식량과 강철 생산을 경쟁적으로 허위 보고했다. 저명한 교수, 지식인, 언론인들도 선전 나팔을 불었다. MIT 출신의 미사일연구원장이었던 첸쉐선(錢學森)은 1958년 6월《중국청년보》에서 "땅 1무(200평)에서 얼마나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가. 보통 2천근이다. 하지만 나는 그 20배, 즉 4만근까지 생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라고 기고하였다. 말도 안되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 글을 읽은 마오쩌둥은 매우 흡족해 하면서 식량 생산을 더욱 늘리라고 지시했다.
측근이 "주석께서는 농촌에서 자라셨는데 그게 가능하다고 믿으십니까?"라고 묻자 마오쩌둥은 첸쉐선의 글을 내밀며 "그가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라고 대답하였다. 첸쉐선은 항공우주분야의 권위자이자 중국의 탄도미사일 개발에 앞장서 "중국 로켓의 아버지"라고 불리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 전체를 휩쓸던 광기 속에서 지도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던 것이지만 어쨌거나 파국에 일조한 셈이 되었고 나중에 두고두고 비난을 받아야 했다.
또한 마오쩌둥은 연간 300만톤 정도였던 강철생산을 1958년에는 1천만톤으로, 1959년에는 3천만톤으로 늘리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중국에는 미국과 같은 거대한 제철소도 용광로도 없고 발전설비도 없었다. 그는 인민들이 조금씩 생산하면 어느 자본주의 국가보다도 더 많은 철을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집집마다 생산량이 할당되고 뒤뜰에 소형 용광로가 설치되었다. 막상 철 생산에 필요한 철광석은 주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할당량을 맞추기 위해 농기구를 녹여야 했다. 용광로에 불을 떼우기 위해 산은 민둥산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가구와 문짝까지도 땔감으로 써야 했다. 게다가 이렇게 생산된 양은 위로 갈수록 터무니없이 부풀어져 마오쩌둥을 잠시나마 흡족시켰지만 품질이 매우 나빠 아무 쓸모도 없었다.
각지에서 유례없는 식량을 생산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언론들은 "사람이 대담하면 땅도 대담해진다"라는 허황된 말을 떠들었다. 중앙에서 현장 점검을 나오면 저쪽에 있는 곡식을 이쪽으로 옮겨놓은 다음, 다음날에는 다시 다른 밭에 재빨리 옮겨놓았다. 보고만 믿고 식량이 포화상태라고 생각한 중앙에서는 추수기가 되자 식량 수매량을 대폭 늘렸다. 당 간부들이 경쟁적으로 실적을 부풀인 덕분에 농민들은 자신이 가진 식량의 거의 전부를 내놓아야 했다. 대중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헌납 운동을 벌이고 반발하는 농민들을 고문하고 살해했다.
철저한 언론 통제 속에서 폭동이 일어나더라도 가차없이 진압되었다. 중국 전체가 거대한 병영이 되면서 농민들은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현장의 실태를 직접 눈으로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총대를 매고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면서 마오쩌둥에게 맞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분노한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에게 자신의 후계자 자리를 내주는 대가로 펑더화이를 숙청시켰다.
당장 1959년부터 대기근이 밀려왔다. 도시보다 농촌이 더 심했고 그 중에서도 허난 성 신양(新陽)이 가장 심했다. 전체 인구 800만명 중 1년 동안 107만명이 아사했다. 1942년의 기근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것이었다. 중국 전체적으로 얼마나 죽었을까. 1990년대 말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 동안 4천만명 정도가 아사했다고 인정하였다. 자연 재난도,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시기에 일어난 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대참사였다. 살아남은 이들도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중공은 매년 수백만톤의 식량을 다른 나라에 원조하였고 흐루쇼프가 제안한 식량 원조를 자존심을 내세워 거절하였다.
1960년의 수확량은 전년대비 12.6%가 감소했고 다음해에는 23%가 감소하는 등 식량 생산이 매년 격감했다. 1960년 중국인들의 식량 소비량은 1957년 대비 80%에 불과했고 특히 돼지고기 등 단백질 공급은 70%나 줄어들었다.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자 마오쩌둥도 더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1961년 1월 11일 베이징에서 전국의 당 간부들이 모두 모여 이른바 "7천인 대회"가 열렸다. 류사오치가 "대약진운동이 실패한 것은 3할이 천재(天災)이고 7할은 인재(人災)"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을 에둘러 비판하는 것이었지만 마오쩌둥도 "첫번째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주석 자리를 류사오치에게 넘기고 2선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것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을 뿐이었다. 당과 군부는 여전히 마오쩌둥의 측근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을 아예 시궁창에 쳐박을 역량이 없었다.
마오쩌둥이 물러난 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천윈의 주도로 파멸 직전에 내몰린 중국 경제는 빠르게 회복하였다. 덩샤오핑은 "흑묘백묘(黑猫白猫, 검은 고양이이든 흰고양이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쓰촨성의 속담)"을 내세웠다. 중국 인민만 잘 살게 되면 이론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의미였다. 해외에서 대량의 식량이 들어오자 대기근은 금새 해소되었다. 무기 생산 대신 인민의 생활을 향상하는데 목표를 두어 농업과 경공업 발전에 주력하였다. 또한 허황된 정치 구호만 난무하던 군중 운동은 중지되었고 농민과 노동자들은 생산에 총력을 기울였다.
1966년 공업 생산량은 1957년 대비 1.7배, 식량은 1.4배 늘어났다. 석유 생산 역시 6배나 늘어나 자급을 이루었다. 중공업의 비중은 50%에서 30%로 줄어들고 대신 농업과 경공업의 비중이 각각 37%, 32%를 차지하는 등 중공업에 편중되었던 산업 구조가 균형을 이루었다. 문맹 또한 퇴치되어 1949년에 80%에 달했던 문맹률이 1960년대 중반이 되면 20%까지 감소했다. 그 동안 억울하게 반 우파로 몰려 온갖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의 명예도 회복되었다. 700만명에 달하는 숫자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한 채 "실패한 지도자"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기를 원치 않았다.
와신상담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던 그의 본격적인 반격은 1966년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경박하고 야심만만한 황후 장칭(江靑)이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장칭을 비롯한 마오쩌둥의 심복들은 류샤오치를 공격하고 나섰다. 마오쩌둥도 직접 포문을 열었다. 그는 류사오치의 정책을 "수정주의"라고 규정하고 "중국의 흐루쇼프"라며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자신이 평생 숭배해 왔던 최고 지도자와 맞설 의지도, 능력도 없던 류사오치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변명하기 급급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번 앙심을 품은 마오쩌둥은 친위 쿠테타를 일으켜 그를 철저하게 무너뜨리기로 결심하였다.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 주최로 열린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 이른바 "5.16통지"가 통과되었다. "당과 정부, 군대, 문화 모든 영역에 난입한 부르조아 세력들을 깨끗이 제거하라!" 소위 문화대혁명의 시작이었다.
베이징 대학을 시작으로 마오쩌둥 식 계급투쟁을 세뇌당했던 10대의 어린 소년소녀들이 마오쩌둥을 외치며 전국에서 들고 일어났다. 소위 "홍위병"이었다. 노동자와 농민, 일반 병사들도 가세했다. 그 숫자는 무려 2천만명에 달했고 이들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의 창끝은 당 간부와 관료들에게 향했다. 지난 대기근 속에서 국민들은 굶주리는데도 부패한 간부들은 가혹한 수탈을 일삼고 사치와 호위호식을 누렸다. 그 정점에는 마오쩌둥이 있었지만 그는 교묘하게 민중의 불만을 자신이 아니라 이들에게 돌렸다. 8월 8일 마오쩌둥의 "사령부를 포격하라(炮打司令部)"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펑더화이, 주더, 허룽 등 평생 마오쩌둥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혁명에 몸을 바쳤던 원로들이 어린 홍위병들에게 거리로 끌려나와 수모를 겪어야 했다.
▲ 마오쩌둥을 둘러싼 홍위병들. 이들 또한 결과적으로 마오쩌둥의 희생자들이었다.
마오쩌둥의 충실한 심복으로 군대를 쥐고 있던 린뱌오가 새로운 후계자가 되었다. 정치와 거리를 두었던 펑더화이와는 달리, 정치적 야심이 넘치던 그는 마오쩌둥 숭배와 류사오치 비판에 앞장섰다. 지도부를 여러 개의 파벌로 만들고 서로 경쟁시켜 권력이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하던 것이 바로 마오쩌둥 식 통치 방법이었다. 마오쩌둥의 칼날이 한번 내리치면 누구도 맞설 수 없었다. 한때 중국의 지도자였던 류사오치는 하루아침에 몰락하여 거리로 끌려나와 폭행과 고문을 당하다 죽었고 그의 시체는 알몸뚱이로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덩샤오핑은 목숨은 건졌지만 모든 지위를 잃고 농촌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린뱌오 역시 마오쩌둥의 후계자가 되지는 못했다. 과도하게 마오쩌둥을 신격화하려다 심기를 건드린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1971년 9월 13일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탈출하던 도중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탑승자 전원이 죽었다.
▲ 문혁시절의 마오쩌둥과 린뱌오, 저우언라이.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를 몰락시켰지만 결국 자신도 똑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중국 사회는 마오쩌둥을 등에 업은 홍위병들이 지배했다. 이들은 부모와 가족, 이웃을 고발하고 폭행하고 살해했다. 문혁 기간 동안 정부의 공식집계상으로는 약 73만명이 박해를 당했고 3만4천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마오쩌둥에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건 상관없었다. 그의 목적은 자신의 권좌를 위협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을 숙청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 중국인들의 정신을 철저하게 개조하는데 있었다.
광기는 1968년 7월 마오쩌둥이 이들에 대해 하방(下放), 즉 농촌에 가서 배울 것을 지시하고 군대가 홍위병들의 진압에 나서면서 단락되었다. 류사오치를 숙청하여 권력을 회복한 그로서는 홍위병들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 일련의 사태는 마오쩌둥의 변덕과 권력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스스로도 "내 마음 속에는 호랑이가 있다"라고 말했던 마오쩌둥의 광기 어린 행동은 그가 죽음으로서 비로소 끝이 났지만 중국 사회에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마오쩌둥의 치세 말기 중국은 말그대로 "잃어버린 10년"이 되어 국가 역량이 엄청나게 퇴보하였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소련과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았다. 흐루쇼프가 집권한 후 대미 평화 공존을 주장하자 마오쩌둥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미 제국주의와 결탁하려고 한다"고 비난하였고, 흐루쇼프 역시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방귀를 뀌려다 똥을 갈겼다"라는 원색적인 표현으로 비꼬았다. 양국 지도자의 갈등은 본격적인 무력충돌로 확대되었다. 1962년 3월 우수리 강(Ussuri River)에서 중소 양군의 국경 충돌이 벌어졌다. 양측의 긴장관계가 점차 악화되면서 1969년에도 우수리 강과 헤이룽장(黑龍江), 신장성 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수백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중국과 소련은 국경에 각각 100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하고 최악의 경우 핵전쟁까지 준비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았다. 제3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아니라 같은 사회주의 진영끼리 시작될 참이었다. 흐루쇼프가 중국에 대한 대대적인 핵공격을 준비하자 미국이 급히 개입했다. 1969년 10월 15일 키신저는 주미 소련대사에게 만약 소련이 핵을 사용할 경우 미국은 소련의 주요 도시에 대한 보복 핵공격을 하겠다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흐루쇼프는 핵공격을 취소했다. 마오쩌둥을 구한 것은 다름아닌 그가 평생 불신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미국이었던 것이다.
또한 1959년 3월 티베트에서는 라싸를 탈출한 달라이 라마가 독립을 선언하였다. 중국은 티베트를 복속시킬 당시 티베트인들의 자치와 전통 문화를 존중하기로 약속했지만 헌신짝처럼 어기고 온갖 탄압을 일삼았다. 일방적인 사회주의 개조와 종교 탄압으로 불만이 점점 고조되고 있던 티베트인들은 극심한 기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현지 군대가 식량과 생필품을 강제로 공출하자 대대적으로 봉기하였다. 류사오치는 폭동으로 규정한 후 병력을 증파하여 유혈 진압에 나섰다. 10만명이 넘는 사람이 처형당했다. 결국 달라이라마는 천여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인도로 망명했다. 중공은 티베트 자치 정부를 해산시키고 자치구로 개조하여 중앙에서 관료들을 내려보내어 직접 통치하였다. 이후에도 티베트의 혼란과 유혈사태는 계속되면서 지금까지 적어도 100만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륙이 혼란에 빠지자 장제스는 대륙 반공의 기회가 드디어 왔다고 생각했다. 대륙이 무정부 상태에 빠진 사이, 타이완은 장제스의 통치 아래 정치, 사회적인 안정을 누리며 "아시아의 작은 용"으로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다. 군수 산업에만 치중한 대륙과는 달리, 균형적인 경제 발전을 추구하면서 주요 생산품은 바나나, 파인애플에서 공산품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 내내 연 평균 경제 성장률은 10%대를 유지하였고 무역량 또한 매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교육, 의료, 복지 등 사회 인프라 또한 탄탄하게 구축되었다. 국민들의 문맹률은 대륙보다 훨씬 낮은 5% 미만이며 1인당 소득과 생활 수준은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홍콩, 싱가포르 다음이다. 파산 상태에 내몰린 대륙과는 대조적이었다. 비록 장제스의 차남 장웨이거의 아내가 뇌물을 받았다가 장제스의 호된 질책을 받고 자살했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지만, 그가 중국 사회에 뿌리깊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대륙에서 공산당에게 패배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부정부패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 1970년의 타이페이 모습. 장제스는 마오쩌둥처럼 자력갱생식이 아니라 서구와의 협력을 통한 경제 발전을 추구하였다. 그의 강력한 개발 독재로 타이완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발전한 나라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의 심각한 빈부 격차와 부의 집중화 등 부조리함도 많았으나 경제 발전은 1980년대 이후 타이완 민주화의 토대가 되었고 중국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타이완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공산정권을 타도하고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 이후 한동안 중단되었던 유격부대 침투를 재개하고 대륙에 대한 정치 공세를 일삼았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계획이 1961년 4월에 수립된 이른바 "국광계획(國光計畫)"이었다.
"국가의 영광을 되찾는다"라는 이름의 이 전쟁 계획은 장제스 직속의 비밀기관인 "국광작업실"에서 수립한 것으로, 대륙이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민의 불만이 극에 달한 것을 이용해 진먼다오에서 샤먼을 향해 포격을 가하여 도발한 다음, 공산군이 반격하면 "공산정권의 도발"이라고 국제 사회에 선전하여 미군과 함께 샤먼에 4개 사단, 1개 해병대를 상륙시켜 전면적인 대륙 반공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참모부는 현실성이 없다며 반대하였다. 타이완의 군사력은 육해공군을 모두 합해도 60만명 남짓한데다 병력도, 군수품도, 상륙함도 부족했다. 반면, 공산군은 상비군만 400만명에 민병까지 합하면 1억명에 달했다. 미국 역시 반대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 점점 깊숙이 빠져들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장제스를 위해 중국과 새로운 전쟁을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1968년 8월 6일 대륙에 침투하여 정보 수집을 할 목적으로 육군 특수부대를 태우고 출발했던 공작선이 하이난다오 인근에서 순찰 중인 공산군 함대에 발각되어 격침당하고 200여명이 몰살당했다. 11월 14일에도 특수공작원들을 태우고 펑후 열도를 출발했던 해군 포함 "영즈호(永字號)"가 공산군 함대의 공격을 받아 격침당했다. 또한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광기 어린 문화대혁명 속에서도 마오쩌둥의 위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장제스로서는 도무지 파고들 틈이 없었다. 마오쩌둥 역시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장제스가 탄탄한 기반을 구축한 타이완을 공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느 쪽도 무력으로 상대를 정복할 수 없었다.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둔 채 힘의 균형이 이루어 진 것이다. 이후에도 양쪽은 "타이완 해방"과 "대륙 반공"을 외치며 군사적 대치와 충돌을 반복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흐지부지되어갔고 1970년대에 오면 서로 "중국의 합법정부"를 주장하는 정통성 경쟁이 시작되었다.
1971년 7월 미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가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했다. 중소 분쟁을 이용해 중공과 동맹을 맺고 소련의 새로운 대항마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또한 중공은 소련과 함께 북베트남에 대한 최대의 원조 국가였다. 만약 중공과 관계를 개선하고 북베트남에 대한 원조를 중단시킬 수 있다면 베트남전쟁도 평화롭게 끝날 수 있다고 여겼다. 1971년 9월 타이완은 UN에서 축출되고 중공이 새로운 중국 정통 정부로 인정받아 5대 상임이사국의 하나가 되었다.
▲ 닉슨의 중국 방문은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 중의 하나로 국제사회에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음을 보여주었다.
1972년 2월 21일 닉슨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한국전쟁으로 양국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이래 22년 만이었다. 그는 마오쩌둥에게 "하나의 중국"의 원칙에 동의하며 타이완에서 모든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의 방중은 전세계는 물론, 타이완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 물론 미국은 닉슨의 방중 때문에 타이완의 지위가 흔들리는 일이 없다고 말했지만 상투적인 외교 수사에 불과했다.
타이완이 UN에서 쫓겨나고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프랑스와 캐나다, 일본 등 서방 국가들 또한 분위기에 편승해 줄줄이 타이완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하였다. 1971년 한해만 12개국이 단교했다. 다음해에는 14개국이, 1974년에도 12개국이 단교를 선언하였다. 타이완인들은 외교부를 "절교부"라고 풍자할 정도였다. 타이완은 점점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었다. 장제스는 냉혹한 국제 정치의 현실을 새삼 절감하면서 실의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1974년 12월 장제스는 감기에 걸렸다가 폐렴으로 악화되었다. 이미 어떤 치료도 소용이 없었다. 1975년 4월 5일 오전 8시 병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11시 55분, 그의 심장은 멈추었다. 향년 89세. 그의 임종은 아내 쑹메이링과 장남 장징궈, 차남 장웨이궈가 지켰다. 1928년 북벌에 성공하여 중국의 지도자가 된 지 47년, 국공내전에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도주한 지 25년째였다. 평생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중국의 한 시대를 만들어낸 영웅도 이렇게 간 것이다. 유체는 국부 기념관(國父紀念館)에 5일 동안 안치되어 국민들의 조문을 받았다. 타이완 정부는 한달 동안 국장을 성대하게 치루었지만 외국 현직 인사들의 조문은 거의 없었다. 그때까지 국교를 유지하고 있던 남한만이 김종필 총리가 방문했을 뿐이었다. 내리막길로 향하는 타이완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78세의 나이로 죽었다. 수백여명의 젊은 여자를 거느리며 온갖 염문을 뿌렸던 마오쩌둥과 달리, 그는 평생 단 한번도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았다. 또한 성실하고 검소했으며 탁월한 정치,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장제스조차 "만약 그가 우리편이었다면 오늘 타이완으로 쫓겨간 쪽은 마오쩌둥일 것이고 베이징을 차지한 쪽은 우리였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진정한 "인민의 총리"로서 중국 민중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이로 인해 마오쩌둥의 질투에 시달리며 몇차례나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저우언라이만큼은 내칠 수 없었다.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국이 붕괴되지 않은 것은 오직 저우언라이 덕분이었다. 또한 그는 많은 혁명 원로들을 홍위병의 박해로부터 보호하였고 덩샤오핑을 복직시켜 마오쩌둥 사후를 대비하였다.
저우언라이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는 마오쩌둥을 대신해 덩샤오핑이 읽었다. 마오쩌둥은 이미 제대로 거동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병세가 심상치 않았다. 침상에서 저우언라이의 죽음을 보고받은 그는 아무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 온갖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평생을 함께 했던 혁명 동지이면서 또한 항상 경계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던 인물이 결국 자신보다 먼저 죽은 것이다. 장제스 사후 유혈 사태 없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권을 계승한 장징궈와는 달리, 문화대혁명의 여파는 여전했고 피를 부르는 권력 투쟁이 반복되었다. 이른바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이라고 불리는 "문혁파"들은 마오쩌둥이 죽은 뒤 권력을 장악하기를 꿈꾸고 있었다. 모든 관공서에서 저우언라이에 대한 추모가 엄중히 금지되었다. 또한 톈안먼 광장에 모여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는 민중들을 반혁명분자라며 가차없이 처단하고 덩샤오핑을 또다시 실각시켰다. 1976년 7월 6일에는 인민해방군의 아버지 주더가 사망했다. 마오쩌둥과 평생을 함께 했던 1세대 원로들이 하나씩 사라져 가는 것이었다.
9월에 오면서 마오쩌둥의 건강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그나마 장제스는 가족들 사이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마오쩌둥은 죽는 순간까지도 고독하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별거 상태였던 그의 아내 장칭은 "중국에는 여황제가 필요하다"고 떠들고 다니면서 남편이 죽을 날만 기다리며 주변을 철저하게 통제하였다. 늘 20세기의 진시황이 되려고 했던 마오쩌둥은 죽음마저 진시황과 같았던 것이다. 9월 9일 새벽 0시 9분, 마오쩌둥은 죽었다. 장제스가 죽은 지 꼭 1년 반 뒤였다. 9월 18일 텐안먼 광장에서 100만명의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성대한 국장이 치뤄졌다. 타이페이 교외에 묻힌 장제스와는 달리, 그의 유체는 레닌처럼 방부처리된 후 영구 보존되어 톈안먼 광장 맞은편의 마오 주석 기념관(毛主席紀念堂)에 안치되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시체를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중공으로서는 "살아 있는 신"이었던 그를 감히 화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평생 파란만장하고 모순된 삶을 살았던 마오쩌둥. 그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평생을 바쳤지만 성급함과 무지함, 독선으로 인해 국민들의 열광은 곧 실망에서 악몽으로 바뀌었다. 그나마 죽기 전 유일하게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4인방을 후계자로 삼지 않은 것이다.
이로서 장제스-마오쩌둥 두 사람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죽기 직전 장제스는 舊CC파의 우두머리이자 자신의 오랜 측근인 천리푸(陳立夫)를 몰래 베이징으로 보내어 마오쩌둥을 타이완으로 초청하려고 했다는 얘기가 있다. 해묵은 원한을 풀고 세번째 국공합작을 실현하여 양안을 다시 합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죽는 순간까지도 유언에 "대륙 수복"과 "계급 투쟁"을 남겼다는 점에서 야사에 가까운 이 이야기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두 거두가 노년에 와서 대승적인 결단을 내리고 화해했다면 어떠했을까. 중국은 문혁 쇼크에서 벗어나 저우언라이를 앞세워 한창 서방과의 관계 회복에 나서고 있었기에 불가능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또한 이미 병석에서 내일 모레 하고 있던 두 사람에게는 지나간 과거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애초에 국공내전이란 이데올로기의 대결이라기보다 실상 장제스와 마오쩌둥 두 사람의 패권 다툼이었다. 이 점이 남북전쟁이나 한국전쟁, 베트남전쟁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점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죽음으로서 국공의 오랜 대립도 자연스레 끝나고 말았다.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은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예젠잉(葉劍英)과 총리 화궈펑과 손을 잡고 쿠테타를 일으켜 4인방을 하루 아침에 몰락시켰다.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자의 말로는 비참했다. 장칭은 사형을 선고받은 후 다시 종신 연금으로 감형되었지만 결국 1991년 5월 14일 자택에서 자살했다. 나머지 2명은 복역 도중 죽었고, 소위 "해서파관(海瑞罷官)" 사건을 일으켜 문화대혁명의 포문을 처음 열었던 야오원위안(姚文元)만이 20년 동안 복역한 후 출소했지만 정치 일선에 복귀하지 못한 채 은거하며 쓸쓸하게 살다가 2005년 12월에 사망했다. 뒤이어 덩샤오핑은 한 때의 동맹자였던 화궈펑도 실각시켰다. 마오쩌둥의 권력투쟁 방식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접 보고 겪었던 그는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식 사회주의 개조를 중단하고 개혁개방을 추진하였다. 대신 마오쩌둥에 대해서는 "7할의 공과 3할의 과"이 있다며 여전히 추앙의 대상으로 남겼다. 이것은 과거 마오쩌둥이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이 아직 이용 가치가 있다고 보고 류사오치처럼 죽이지 않았다. 이 작은 거인은 3번 쫓겨나고 3번 복직하여 결국 포스트 마오쩌둥 시대의 지도자가 되었다.
1979년 1월 1일 미국과 중국은 정식적으로 국교를 수립하였다. 1월 28일에는 덩샤오핑이 미국을 방문하였다. 타이완은 미국과 단교를 선언하였다. 미중공동방위협정 또한 1980년 1월 1일을 기하여 폐기되었고 미군 타이완 방위사령부도 해체되어 모든 미군은 타이완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서 미국과 타이완의 공식적인 동맹 관계는 끝났다.
동시에 미국은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타이완 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을 통과시켰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하나의 중국"으로서 중국의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타이완과의 오랜 동맹 관계에 대한 예우였다. 또한 향후 중공이 타이완을 침공했을 때 무력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즉, 중국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양안에 대한 일종의 양다리 외교인 셈이었다. 또한 공식적인 단교와 상관없이 기존의 협력이나 정치적 권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는 다른 나라들과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나라들이 타이완과 단교를 선언했지만 이는 형식일 뿐, 그렇다고 타이완이라는 정치적 실체 자체가 부정된 것은 아니기에 국제사회에서는 여전히 실질적인 주권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죽자 양안의 관계도 바뀌었다. 더 이상 무력 통일 대신 평화 통일을 지향하게 된 것이다. 20여년간 반복되었던 진먼다오에 대한 포격전도 멈추었다. 장징궈 총통은 아버지와 달리, 대륙 수복이라는 허황된 꿈에 매달리는 대신 이른바 "十大建设(십대건설)"이라 하여 낙후된 인프라 개선과 빈부 격차 해소, 국민들의 복지 증진 등 타이완의 발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덕분에 타이완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서 일본 다음으로 발전된 나라로 발돋움하여 선진국의 문턱에 서게 되었다.
또한 그는 대륙과의 관계 개선에도 나섰다. 장징궈는 젊은 시절 모스크바 손쭝산 대학에 재학하면서 12년이나 소련에 체류한 경험이 있었다. 그 때 함께 재학 중이던 덩샤오핑과도 친분을 쌓았다. 이제 이 두 사람이 양안의 지도자가 되어 새로운 시대에 앞장서게 되었다. 1987년 11월 장징궈는 그동안 철저하게 금지했던 타이완인들의 대륙 방문을 허용한다고 선언하였다. 대륙 역시 타이완에 대한 화해 제스처와 "일국 양제"에 의한 평화적인 통일 방안을 제시하였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함께 타이완의 자본이 대륙에 들어오면서 민간차원의 경제 교류도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앞서, 냉전의 종식은 이미 중국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1989년 6월 4일 이른바 "톈안먼 사태"가 일어났다. 죽의 장막 속에서 고립되어 있던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매년 10% 이상의 고도 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점점 심화되는 빈부 격차에 대한 불만,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소수 엘리트가 독점하는 정치 구조 속에서 정치적 권리의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 또한 높아졌다. 와중에 톈안먼에서 베이징 대학 학생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모여들었고 시민들 또한 여기에 호응하였다. 지도부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졌다. 자오쯔양(趙紫陽) 당 총서기는 민주화가 인민의 열망이라고 인정했지만 군부의 원로들은 반혁명 폭동이라고 주장했다.
덩샤오핑은 경제적으로는 실사구시를 외치면서도 권력에 대한 집착은 마오쩌둥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또한 과거 홍위병에게 심한 박해를 받았던 원로들은 학생들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을 실각시키고 상하이파의 장쩌민(江澤民)을 총서기로 임명한 후 유혈 진압을 명령하였다. 중국 정부는 진압과정에서 200여명이 죽었고 그 태반은 폭도들에 의해 살해된 무고한 군인들이라고 주장했지만 외부에서는 적어도 2천명 이상이 죽었다고 본다.
▲ 톈안먼 사건 당시 톈안먼 광장에 투입된 전차부대. 이들은 "반혁명 분자들을 처단한다"라는 간단한 명령만 받고 현장에 투입되어 무차별적인 살육을 벌였다.
톈안먼 사건으로 인해 중국의 정치적 자유는 크게 후퇴하였다. 당시 베이징 대학 학생이었던 왕단(王丹) 교수를 비롯해 학생 지도자들과 반 체제 인사들은 대부분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한 채 지금까지도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서구 기자들에 의해 톈안먼 사건은 전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폐쇄성과 정치적 낙후성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추구하면서도 중국은 여전히 국가 권력에 의해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는 경찰 국가이다. 그러면서도 독재자는 없는 독재 권력이다. 이것이 한 사람 또는 한 일가가 장기 집권하는 러시아나 북한 등 다른 독재 국가와는 다른, 중국만의 독특한 정치 체제이다. 대신 소위 "태자당(太子黨)"이라고 부르는 혁명 원로들의 자제들이 중국의 핵심 요직을 독점하고 있다. 중국의 현 통치자인 시진핑 역시 태자당으로,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은 펑더화이의 부정치위원을 지냈고 한때 펑더화이와 함께 몰락했다가 문혁 이후 복권되었다.
한편 톈안먼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타이완에서도 총통 직선제와 타이완인의 정치 권리 확대를 주장하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국민당 원로들은 유혈 진압을 요구했지만 리덩후이 총통은 학생들 속에 직접 들어가 이들과 대화하고 요구를 받아들였다. 쑨원 시대 이래 유지되어 왔던 "국민당이 곧 국가이자 정부"라는 국민당 일당 독재는 폐지되고 5권 분립이 실현되었다. 리덩후이 이후 첫 직선제에 따라 2000년 3월 총통 선거가 실시되었고 타이완 출신 민진당 후보 천슈이벤이 제10대 총통이 되었다. 이로서 50년간 타이완을 지배했던 국민당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91년 4월 30일 리덩후이 총통은 무력을 통한 공산정권 타도와 대륙 반공을 포기하고 중공의 대륙 지배를 인정하여 "하나의 중국"에 대한 정통성 경쟁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더 이상의 냉전식 대결 모드가 아닌, 대화와 교류를 통해 양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이었다. 또한 그는 "불통불독(不統不獨)"이라 하여 통일도, 독립도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이는 타이완이 중국에 흡수 통일되기를 원치 않다는 의미였다. 경제 발전이 우선이었던 중국 역시 굳이 양안의 특수한 관계를 깨뜨려 긴장상태를 고조시킬 생각은 없었다. 1992년 11월에는 홍콩에서 이른바 "9.2공식(九二共识)"에 합의하였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는 이견이 없되, 그 "중국"이 "공산주의 중국"이냐, "중화민국"이냐는 각자 해석하기로 한 것이다. 즉, 타이완이 중국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서로의 정치 체제에는 손을 대지 않기로 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는 타이완 내부의 복잡한 상황 때문이기도 하였다. 타이완 사회에서는 점차 중국인이 아닌 "타이완인"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 2002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신이 중국인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7%에 불과한 반면, 타이완인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40%에 달하는 등 중국과의 통일보다 독립된 타이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는 첫째로, 수십년 동안 대다수 타이완인들의 의지를 무시한 채 "대륙 반공"이라는 명분 아래 초법적인 철권 통치를 휘둘렀던 장제스 정권과 외성인들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다. 둘째로, 오랫동안 네덜란드와 일본의 지배를 받아왔던 그들로서는 중국에 대한 아무런 유대감이나 정체성을 형성할 기회가 없었다. 오늘날 타이완 사회에서 국공내전 이후 대륙에서 넘어온 외성인의 비중은 10%에 불과하고 90%가 내성인, 즉 타이완 토착 주민들이다.
특히 "타이완의 아들"을 자처하는 천슈이벤이 집권하자 말자 "하나의 중국, 하나의 타이완(一中一臺)"을 외치며 분리 독립을 추진했다. 그는 "타이완은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이며 결코 제2의 홍콩과 마카오가 되지 않을 것이다. 타이완은 어느 나라의 일부도, 일개 성이나 지방정부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였다. 타이완이 본격적으로 독립을 추진하면서 중국과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2005년 4월 14일 중국은 "반분열국가법"을 통과시켜 타이완이 독립을 선언할 경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식으로 전방위 압박에 나섰다.
그 직후인 26일, 국민당 롄잔(連戰) 주석이 중국을 방문하였다. 총통 선거에서 천슈이벤에게 패배했던 그는 후진타오 주석을 만나 국민당과 공산당의 적대 관계를 종식하고 양안의 무력 충돌 예방, 국공 양당의 정기 교류 등 제3차 국공합작을 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국민당은 타이완 독립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민진당을 공격하는 등 타이완 정국은 분열되었다. 이는 내성인과 외성인으로 나뉘는 타이완 사회의 특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2007년 7월에는 UN에 가입을 신청했지만 반려되었다. 또한 2008년 3월 22일 천슈이벤은 임기 종료를 앞두고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대만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강행했지만 결국 투표율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면서 부결되고 말았다.
게다가 2008년 1월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후보가 제12대 총통에 당선되면서 8년만에 국민당은 정권 탈환에 성공하였다. 그는 타이완이 아니라 홍콩 출신이었다. 천슈이벤 이래 한동안 경직되었던 양안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었다. 4월 중국과 타이완 정부는 어떠한 제약도 없는 상호 통상과 통행, 방문을 허용키로 합의하였다. 또한 자유무역협정에 서명하여 사실상의 경제 통합을 이룩하면서 거대한 단일 경제권인 "차이완(Chiwan : China+Taiwan)"이 탄생하였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과 2001년 WTO 가입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중국의 GDP는 1979년 2,630억 달러에서 1990년 4,040억 달러, 2000년 1조 2000억 달러, 2011년 7조 2000억 달러로 30년만에 27배나 증가하였고 2012년에는 일본을 능가하고 G2가 되었다. 반면, 타이완은 경제 불황으로 성장이 지지부진하면서 공장을 대거 중국으로 옮기는 등 대륙에 자연스레 편입되고 있다.
하지만 화해 무드와 경제적 협력 관계와는 별개로, 정치적, 군사적 긴장 관계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중국은 타이완에게 분리 독립을 반대하고 소위 "일국양제(一國兩制)"라 하여 중국의 주도 아래 독립된 성으로 편입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타이완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중국의 요구란 타이완의 주변에서 미국의 보호막을 벗어내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홍콩의 예처럼, 일단 중국의 정치 체제에 편입되면 타이완의 주권은 사라지고 공산당의 지배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중국이 티베트 독립을 유혈 탄압하고 홍콩의 민주주의를 짓밟으면서 2014년 8월 이른바 "우산 혁명"이 일어나자 타이완의 거부감은 더욱 높아졌다. 타이완 정부는 중국의 폐쇄성을 비판하고 민주화가 통일의 선결 과제라며 맞서고 있다.
물론 중국이 타이완을 무력으로 합병할 가능성은 없다. 타이완은 미국의 보호 아래 있는데다 타이완 스스로도 만만치 않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군사력에서는 중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타이완을 공격하려면 적어도 100만명 이상을 타이완 해협을 넘어 타이완으로 수송해야 한다. 하지만 상륙 및 공중 침투 능력이 매우 빈약한 중국으로서는 역량 밖인데다 타이완의 강력한 방어력에 부딪쳐 엄청난 시간과 희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손실도 막심할 것이며 국제 사회에서 고립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중국 지도부가 굳이 타이완을 점령할 이유도, 명분도 없을 뿐더러 단순한 영토욕을 내세우기에는 이해득실 측면에서 얻는 이익은 적고 손해가 훨씬 크다.
▲ 이른바 ""Chinese Taipei(中華台北)" 깃발.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타이완은 청천백일기를 사용할 수 없어 올림픽 등 국제 경기에서 중국의 묵인 아래 중화타이페이로 참가하고 있다.
따라서 타이완 내부에서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80% 이상이 "중국이 실제로 타이완을 침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물론 이는 타이완이 독립을 선언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달려있다. 소위 "3불(不統, 不獨, 不武, 통일도 독립도 무력도 반대한다)"을 내세우는 마잉주 총통이 중국과의 충돌을 각오하면서 분리 독립을 선언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즉, 양안의 관계는 현상을 유지하면서 앞으로도 실리 중심의 협력 관계를 강화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타이완은 공식적으로 어떤 정전 협정도 맺은 적이 없지만 중국인들에게 더이상 국공내전은 현재 진행형이 아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 두 지도자에 대한 평가 또한 상반된다. 1990년대 이전만 해도 장제스를 "半봉건 독재 군벌", "미제의 주구"라고 불렀던 대륙은 이제는 항일 투쟁을 주도했던 중국의 지도자로서 쑨원, 마오쩌둥과 동격에 놓는다. 마오쩌둥은 여전히 신성불가침의 존재이지만 중국 민중은 더이상 그를 위대한 지도자라기보다 오히려 "전설과 신화 속의 인물"로 치부하고 그의 혁명 신화는 경제 성장 속에 묻힌 채 아무런 감흥도 받지 못한다. 반대로 타이완에서는 "거장(去蔣)"이라 하여, 곳곳에 남아 있는 장씨 일가의 독재 흔적을 지우는 한편, 마오쩌둥을 재평가하고 있다.
이런 양안의 모습은 과거 "대륙 반공"과 "타이완 해방"을 외치며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촉즉발의 긴장관계를 유지하던 1960년대를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21세기에 와서도 보수 기득권 세력들이 "한국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강조하며 과거에 매달린 채 구태의연한 대결 모드를 고수하고 있는 남북한과는 너무나 대조된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영원한 원수가 어디에 있겠는가.
▲ 후난성 즈장의 항전기념관에서 판매중인 기념품. 마오쩌둥과 장제스 두 사람이 활짝 웃으며 어깨동무하고 있는 이 모습은 냉전 이후 변화한 양안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ps. 길어도 10편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것이 20편 가까이 길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중국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어느 나라보다 가깝지만 한국전쟁 이래 국교가 단절되면서 "가깝고도 먼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중국은 우리를 연구하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반면, 우리는 중국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단편적인 지식만으로 막연하게 바라봅니다. 이는 우리가 지형적으로는 반도 국가이지만 조선시대 이후 폐쇄적인 사회를 추구하면서 사실상 고립된 섬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변국에 대한 외교적 역량도, 경험도 부족하고 이해도 없습니다. 다른 나라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늘 불리한 조건을 강요받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중국을 여전히 십수년 전의 저개발 저임금 저기술 국가로 보고 "짱개"라는 혐오적인 명칭으로 부릅니다. 타이완에 대해서도 그들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 없이 "혐한" 분위기만 강조합니다. 그런 식의 편견어린 시선은 결국 우리가 우물안 개구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시중에는 중국 관련 서적들은 하늘의 별만큼 많지만 대부분 몇몇 지도자에 대한 평전이나 경제, 문화에 대한 책이고 근현대사를 다룬 서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비록 부족함 투성이이지만 국공내전 이후 중국과 타이완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다음에는 좀 더 훌륭한 자료를 모아 국공내전을 도입단계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