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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3.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묵상글 ( 10/12. 23:20, 05:25~ :30,18:50.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반 이전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4시 ~ 05시반,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
* 가능하면 위와 같이 할 계획이나 개인 형편으로 그리 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오늘 묵상글 공유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 10/12 23:20 )
- 김찬선 신부님. 05;2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30 추가.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18:50 추가.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계속 여부도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11월 대림시기(11/29) 이후 12월 중순 아니면 , 그 이전이라도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할 계획이오며
카페는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킬 계획이기에, 2)의 회원분이나 제가 가끔 묵상글을
올릴 수도 있을 경우를 감안, 묵상글 뜨락은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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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3.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10.12 21:17
2026년 10월 13일 화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1,37-41
한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랍니다.
이 손 씻기는 위생이 아니라 ‘종교 예식’이었습니다.
손가락을 물에 잠깐 담갔다 빼는 정도의 형식이었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은 큰 결례로 여겨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겉’ 이야기를
단숨에 ‘속’ 이야기로 되돌리십니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잔을 아무리 반들반들 닦아도,
그 안에 든 것이 더러우면 마시는 이는 병이 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의 핵심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마음을 깨끗이 하는 길로 제시하신 것은
더 엄격한 규정도, 더 긴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자선(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사람이 겉치레에 매달리는 까닭은,
속이 탐욕과 사악으로 차 있어 그것을 가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움켜쥔 것을 이웃에게 내어 주는 순간,
탐욕이 손에서 풀려나고 마음도 함께 열립니다.
사랑하면 형식에 매달릴 힘이 남지 않습니다.
성경도 오래전부터 노래해 왔습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없애 준다”(토빗 12,9).
성 대 바실리오는 이 말씀을 온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굶주린 이들을 위해 거대한 자선 도시(바실리아스)를 세웠고,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그대의 곳간에 쌓인 빵은 굶주린 이의 것이고,
옷장의 외투는 헐벗은 이의 것’이라고.
자선은 내 것을 인심 쓰는 것이 아니라,
본디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정의라는 것입니다.
친절·선행 주간의 눈으로 보면
여기서 놀라운 순환이 열립니다.
친절과 선행은 이웃만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의 속’을 씻어 줍니다.
겉을 아무리 꾸며도 마음은 깨끗해지지 않지만,
한 번의 진실한 자선이 마음의 탐욕을 씻어 냅니다.
그러니 선행은 은총을 사는 값이 아니라,
은총이 흘러드는 통로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겉(형식·평판)’을 닦느라 속을 방치하지 않는가?
내 마음의 잔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나는 움켜쥔 것을 ‘속에 담긴 것으로’ 내어 줄 수 있는가?
나의 선행은 겉치레인가, 속에서 흘러나온 사랑인가?
주님,
겉을 닦느라 속을 잊지 않게 하소서.
제 속에 담긴 것으로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게 하시어,
그 사랑으로 저의 모든 것이 깨끗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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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3.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12. 21:05
본향으로 돌아감!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마침내 우리가 시작했던 그 자리,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집으로 돌아감(귀가)!
본향으로 돌아감!
2026년 10월 12일 월요일
원주민의 날
본향은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올바름과 균형, 그리고 정신·육신·영혼의 조화입니다. 그곳을 하루라도 떠나 있으면 우리는 그 결핍을 예민하게 자각하게 됩니다. 또한 본향은 내가 그곳에 가져가는 것이며, 그 안에서 본향은 내 안에 늘 존재했고 언제나 함께 있었다는 확고하고 고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 리처드 와가미스, 엠버스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 속한다」 팟캐스트에서 리처드 신부는 영적 여정이 때로는 참된 본향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그곳으로 향하는 길임을 말합니다:
본향을 처음 떠나는 것은 곧 자아의 형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필요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분리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나 자신을 중심에 두는 것이지요. 아마도 우리는 적어도 중년에 이를 때까지는 그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때 나는 훌륭한 농구 선수였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지나갔습니다. 혹은 잘생겼을지 모르지만 그것도 이제는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그 '내려놓음'에 "예"라고 말하고도 여전히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참된 일을 해낸 것입니다. 나의 참된 자아는 내가 만들어낸 것 안에 있지 않고,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만든 자아는 하루하루 걸어갈 길과 할 일을 주었지만, 그것은 진정한 나 자신은 아닙니다. 그것이 직업이든 소명(召命)이든, 아무리 좋을지라도 그것은 나의 참된 자아가 아니며, 하느님 안에 있는 나의 본향은 아닙니다.
삶을 여정에 비유한다면, 결국 우리가 시작했던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지금, 저는 그 점을 많이 묵상합니다. 다가올 일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은 "내가 죽는다"가 아니라 "나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참된 본향임을 깊이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 신뢰가 어디서 오는지, 본향이 어떤 모습인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깊이 알고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임을 압니다. 그 모든 경험들은 저를 큰 깊이, 참된 실재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귀향이야말로 모든 것의 본질이라 믿습니다. [1]
은퇴한 성공회 주교이자 신학자인 스티븐 찰스턴(Stephen Charleston)은 우리의 삶의 여정을 위한 축복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우리는 저지른 잘못에도 용서받습니다.
우리는 조건 없이 사랑받습니다.
우리는 청하지 않아도 축복받습니다.
우리가 부주의할 때에도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이해되지 않을 때에도 이해받습니다.
우리는 기억됩니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를 잊을지라도….
우리 둘레에 계신 성령은 자비이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분을 표현하는 방식은 서로 크게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자유로의 초대를 받습니다.
더 깊이 바라볼 기회, 본향으로 향하는 길을 받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것을 깨닫고, 거룩함 안으로 자라납니다.
그리고 언제나 거기 계셨던 분을 발견합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웨일즈어에는 히라에쓰(hiraeth)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흔히 ‘향수(homesickness)’로 번역되지만, 그 의미는 훨씬 더 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때 알았다고 믿는 집과 사랑에 대한 깊은 그리움입니다—이 세상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더 아름답고 더 완전한 집, 그리고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넓고 더 깊은 사랑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그것은 언젠가, 어딘가, 우리가 알았다고 믿는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이 그리움은 영혼을 가득 채워 몸으로도 느껴질 만큼 강렬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갈망이지만, 달콤하면서도 쓰라린, 그리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그리움입니다.
—Sue N.
Reference
[1] Adapted from Mike Petrow, Paul Swanson, and Richard Rohr, “Tips for the Road,” Everything Belongs, season introduction, ep. 5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23), podcast. Available as MP3 audio and PDF transcript.
[2] Reprinted with permission from Spirit Wheel: Meditations from an Indigenous Elder by Steven Charleston. Copyright © 2023 Broadleaf Books. Page 22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내적 성소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가 누구인지와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을 밝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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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3.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13 04:18
- 하느님께로 훌훌 가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틀어 묵상하면 이런 묵상이 가능하겠습니다.
주님께는 율법이나 할례가 중요하지 않고 정결례도 중요하지 않다.
복음에서 손 씻는 예식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놀라는 바리사이를 보시고,
겉이 깨끗한 것이 중요치 않고 속에 탐욕이 없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시고,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갈라티아 사람들에게
율법이나 할례가 중요치 않고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의 행복과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중요한 것들을 알더라도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식별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이것을 아는 것을 우리는 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앞에서 말한 것에서
‘행복과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말은 나의 행복과 구원 차원에서 중요한 것이어야지
그런 게 아니면 아무리 중요해도 차원을 달리해야 하고
그런 걸 중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차원을 달리할 줄 알아야 하고,
차원을 달리할 줄 아는 것이 지혜이고 행복입니다.
사실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름대로 다 중요하지만
어떤 것은 행복과 구원 차원에선 아무 쓸모가 없고 오히려 해로울 수 있는데
그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중요하게 생각하고 마치 신줏단지처럼 모십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듯 돈은 필요한 것이지 소중한 것이 아닌데
필요 이상으로 중시하여 돈의 노예가 되는 수가 있고,
건강도 너무 중시하여 오히려 몸을 해칠 수가 있지요.
행복과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말아야 하고,
행복과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율법과 정결례를 신줏단지처럼 붙들고 있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주님께서도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라고 하십니다.
자선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나의 행복을 위해 중요한 것이고,
더 나아가 구원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눈치채셨는지 모르지만 요즘 그리고 갈수록 단순해지며
행복 특히 구원이라는 말을 제가 많이 하는데
인생의 말년을 어디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다
하느님께로 훌훌 가는 그런 행복과 구원을 다시 꿈꾸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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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3.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91?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13. 04:39
안과 밖....
안과 밖... 이것은 어쩌면 영원한 우리 화두인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적 삶의 요구를 결코 완전히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 6장을 읽거나 오늘의 복음을 묵상할 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혼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고 그분 이후 많은 이들이, 바리사이들의 외적 의식에 대한 집착과 내적 깊이의 결핍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했을 때, 그것은 친교의 자리가 아니라 심문과도 같았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씻는 의식을 지키지 않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관례는 위생과는 무관하였고, 순전히 의례적·상징적 의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 속은 탐욕과 악으로 가득하다."
안과 밖... 인간은 불행히도 이 둘 사이에 깊은 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겉모습은 실제와 다르게 꾸미고, 허구의 세계 속에 숨으며, 다른 사람을 속이고 결국 자신마저 속이는 것—곧 거짓을 사는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진실을 말합니다. 물론 일부 동물들의 위장이나 회피 행동은 일종의 속임수일 수 있지만, 그것은 정당한 자기 방어이며 위기가 지나면 곧 멈춥니다. 대부분의 종에서 수컷이 암컷을 끌기 위해 치장하는 것도 기능적이고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짓 속에 살게 될 수 있습니다.
1930년대 두 연구자가 어린 침팬지를 길러 수화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들은 지능적 언어 사용의 징후를 찾으며 행동을 세밀히 관찰했습니다. 큰 돌파구는 어느 날 침팬지가 거짓말을 했을 때였습니다. 자기가 접시를 깨뜨리고는 같이 있던 개가 그렇게 했다고 한 것입니다. 연구자들은 환희했습니다. 침팬지가 거짓말을 배운 것이었고, 이는 그 침팬지가 지능을 가졌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침팬지가 우리 인간과 같아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짓이 일정한 선을 넘으면, 우리는 고립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느님의 진리를 말하는 큰 공동체에서 단절시킵니다. 나무는 결코 거짓말하지 않고, 산과 강도 거짓말하지 않으며, 동물들도 거의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터무니없고 비극적인 수준까지 끌고 갈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안과 밖을 완전히 같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안에 감추어 놓고 싶은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의식(consciousness)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말하자면 안과 밖을 완전히 같게 할 수 없다고 해서 '내'가 그러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안과 밖에 다르다는 것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우리를 부자연스럽게 하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여기서 해방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한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가끔씩 군대에 있었을 때 불렀던 군가 중 하나가 무의식적으로 떠오르거나 실제로 그 노래를 부를 때가 있습니다. "보람찬 하루해를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쭉 펴면 고향의 안방~~~...."
어떻게 군대의 내무반이 고향의 안방과 같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긍정적으로 마음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기에 그냥 넘길 수 있는 것이겠지만, 이는 사실 거짓말입니다. 이런 거짓이 제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려 있기 때문에 그 군가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이것을 의식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거짓을 의식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진리에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안과 밖이 같으셨고, 그 안에 어떤 기만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바리사이들을 겨냥하신 것은 놀랍지 않습니다. 거짓 속에 사는 것은 우리를 자연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뿐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도 분리시키는 어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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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3.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6244
2026.10.13 08:13
행동하는 믿음의 실재 (오늘 독서와 복음 묵상)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과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루카 11,41)는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돌아보게 합니다. 무엇을 믿고 있는지가 무엇을 내어주며 살아가는지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 안에 머물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라볼 힘을 얻습니다. 내가 받은 자비가 너의 사정을 헤아리는 마음이 되고, 내가 받은 위로가 너의 곁에 머무는 시간이 됩니다. 그렇게 믿음은 사랑으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과 접시의 겉을 깨끗이 하면서도 속에는 탐욕과 사악함을 담고 있는 삶을 일깨우십니다. 자선은 바로 그 속을 돌아보게 합니다. 내어주는 손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상대를 향한 자비인지, 인정받고 싶은 욕구인지,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는 마음인지 살피게 합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행한다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물질과 함께 마음도 내어놓도록 초대받습니다. 실제로 필요한 것을 나누면서, 그 사람의 처지와 존엄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주었다는 사실로 상대에게 빚을 지우지 않고, 감사나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자유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일상에서도 이러한 자선은 이루어집니다.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듣고, 아픈 사람의 필요를 살피고, 실수한 형제를 성급히 단정하지 않는 일입니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순간에 잠시 멈추어 상대의 아픔을 듣는 일도, 마음에 담긴 사랑을 내어주는 작은 시작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내적 가난이 필요합니다. 내가 옳다는 집착, 인정받아야 한다는 조급함, 상대를 바꾸려는 욕심을 내려놓을수록 그 사람의 필요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비로운 행동은 주는 사람의 마음까지 변화시킵니다. 내 것을 나누는 동안, 나 자신도 하느님의 선을 받아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는 이 사랑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오늘 누구를 통해 위로받았는지, 어떤 작은 친절 덕분에 하루를 견뎠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응답하여, 내 곁에 있는 사람의 필요를 채우도록 나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은 내가 받은 하느님의 선을 너에게 건네는 삶입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행하는 자선은 그 선을 물질과 시간과 마음에 담아, 너의 필요에 맞게 내어주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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