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6. 큐티
여호수아 3:1 ~ 8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관찰 :
1) 요단강 도하 준비
- 1절.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정리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데리고 요단강 앞으로 이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하고 담대하라 하셨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전략을 세워 실행한 여호수아는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한 후에,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널 차비를 한 것입니다.
- 2절.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 요단강 앞까지 이른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에서 사흘간 머물렀습니다. 이 말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치고자 하는 것은 적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빠른 속도로 쳐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강 주변에 250여만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요단강 건너의 여리고성 뿐만이 아닌 모든 가나안 족속들에게 알려졌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시간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뜻을 듣고자 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의 법궤를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되고 그에 따라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 3절.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 이러한 아이디어는 여호수아 스스로가 만들어낸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알려주신 것이고, 지도자 여호수아의 명령을 관리들을 통하여 온 백성에게 포고하는 형식으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레위인인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앞장 서게 하고 그 뒤를 백성들이 따르게 하는 것으로 요단강 도하를 시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 행위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여호수아는 단호하게 그 명령을 온 백성에게 포고하고 따를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 4절.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 언약궤를 따라가지만 그 언약궤를 함부로 쉽게 여기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천 규빗은 대략 900m 정도의 거리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궤의 뒤에서 900m 정도 떨어져서 따라감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에 대해서 경외심을 가져야 했습니다. 이 언약궤가 들어가서 요단강의 물이 멈추고 쌓이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발생하도록 한 것입니다. 또한 온 백성은 그 누구라도 언약궤를 보지 못하는 이가 없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언약궤를 보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이 사건을 통해서 확실히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이디어를 이스라엘 랍비들은 엉뚱하게 활용했습니다.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를 산출할 때 이 거리를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심은 그런 것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웃사는 언약궤에 임재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소홀하게 여기다가 하나님의 치심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의 바른 의도를 알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2) 요단강 도하 하루 전
- 5절.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음날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언질을 받은 듯합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큰 일을 다음날 이루실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놀라운 일을 이루실 때 그 백성들은 성결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고자 하실 때,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성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큰 일을 기대한다는 것은 옳은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자신의 몸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회복은 한국 교회 내부의 정결의 회복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부분입니다.
3) 요단강 도하 당일의 명령
- 6절.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 드디어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38년 전에 진작에 건넜어야 할 요단강을 이제야 건너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드디어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 2000 규빗 앞에서 건너라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그 명령을 따라서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진군하게 되었습니다. 언약궤 앞에는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요단강 건너편에서 이러한 일들을 살핀 정탐들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일 것입니다. 가나안 일곱 지파의 정탐꾼들이 요단강을 도하하는 이스라엘의 현황을 살폈을 것이고, 언약궤가 앞장서서 나가는 장면에서 처음에는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웃음기가 다 사라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 7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불어넣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진군하는 이날을 기점으로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큰 지도자로 세워주시고, 모세가 발휘한 지도력을 여호수아도 발휘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하나님의 명령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르게 전달하면서 일사분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신적 권위와 신적 기사를 베푸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면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전쟁을 치루어야 하는 여호수아에게 다시금 용기를 내게 되는 하나님의 격려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홍해바다를 가름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세워주신 지도자로 완전히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가름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로 견고하게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 8절.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 하나님의 명령이 다시금 떨어졌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요단강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이것이 여호수아를 통하여 다시 제사장들에게 명령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명령은 반드시 순종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정복 전쟁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영적 전쟁의 선전포고였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있던 가나안 일곱 족속 뿐 아니라 사탄의 진이 뒤흔들리게 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가르침 :
1)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여호수아가 먼저 본 것은 백성들을 성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여 친히 일해주실 것을 약속받은 여호수아는 흥분하여 백성들을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성결할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목욕재개하라’고 번역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하나님의 큰 일을 기대한다면 맨 먼저 회개함으로 성결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성경에서 언제나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더러운 죄가 처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는 백성들이 사랑하고 소망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경외심으로 대하는 것이 되어야 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언약궤를 2000 규빗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제사장 8명은 언약궤를 지고 홀로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만일 요단강 건너에서 가나안의 일곱 지파가 활을 들고 방비하고 있다가 그들을 향해 쏘았다면 이들은 죽은 목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스라엘 250여만의 무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요단강의 맞은 편에는 가나안 각 지파들의 정탐꾼들이 포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제사장들은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고 나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철저히 신뢰하지 않는다면 행할 수 없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요단강의 물을 멈추시고 쌓아올리시면서 하나님의 권능을 이스라엘과 가나안 일곱지파들에게 보이시고자 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모세와 같이 되었습니다. 또한 여리고성을 포함한 가나안 지파들은 하나님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에 두려워 떨고,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성문을 닫아걸고 꼼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아간의 죄악으로 인해서 아이성에서 패배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가나안 지파들이 용기를 내어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양상으로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내부 모순에 의해 가나안의 정복전쟁이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적용 :
1)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교회는 먼저 교회 자신이 성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원리입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성결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물과 성령 즉, 성령의 깨끗게 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삶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거듭난 자가 원래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가도록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것만이 참된 성결을 유지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언제나 간절함으로 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나는 성령님께서 나를 주재하시도록 간구드립니다.
2)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앞장서며 요단강을 가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전포고이고, 가나안 정복의 시작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이 일하시면 이러한 사건은 언제나 일어나게 됩니다.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지혜이고 은혜입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