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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탐꾼의 탈출과 보고
수 2:15-24
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17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0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21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22 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뒤쫓는 자들이 돌아가기까지 사흘을 거기 머물매 뒤쫓는 자들이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찾지 못하니라
23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
24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
수 2:15-24 / 라합이 살고 있는 집은 성벽에 바짝 붙여서 성벽 위에 지은 집이었다. 그래서 라합은 창문을 통해 두 사람을 밧줄로 달아내렸다. 16) `산으로 도망치세요 그렇지 않으면 왕의 신하들이 당신들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에요. 그곳에서 한 사흘쯤 숨어 있어야 할 겁니다. 그렇게 숨어 있다가 그들이 찾기를 포기하고 되돌아가면 그때 갈 곳으로 길을 떠나세요' 라합은 염려스러워 그 두 사람에게 자세히 사정을 일러주었다. 17) 길을 떠나면서 두 사람이 라합에게 다짐하였다. `우리가 당신에게 한 약속을 꼭 지키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18) 그런데 이것만은 꼭 알아두셔야 할 것 같소. 우리가 이 땅으로 쳐들어올 때 당신이 살고 있는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매시오. 그래야 그 집이 당신 집인 줄 알 것 아니오. 우리가 이 성읍으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들리거든 당신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라비들, 남동생들, 자매들을 모두 다 당신 집으로 데려오시오. 19) 만일 당신 집에 식구들이 모여 있지 않고 한사람이라도 집 밖에 있다가 변을 당하면 우리는 책임을 지지 못하겠소. 그가 죽임을 당한다.해도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마시오. 그것은 우리가 일러준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그 사람의 책임일 뿐이오. 그런데 당신 집에 식구들이 모여 있다가 한 사람이라도 변을 당한다면 그때에는 우리가 책임지겠소. 20)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소. 우리끼리 한 약속을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누설한다면 우리 또한 당신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겠소' 21) 라합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한 뒤에 그들을 배웅하고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 놓았다. 22) 정탐꾼들은 산으로 도망 쳐 숨었다. 왕을 보필하고 있던 군인들은 사흘 동안 정탐꾼들이 도망 갈 성 싶은 곳은 모조리 뒤져 보았다. 그러나 정탐꾼들을 발견하지 못하자 여리고로 되돌아갔다. 23) 두 정탐꾼은 산에서 내려와 요단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가서 자기들이 겪었던 일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24) 여호와께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확신합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무서워하더군요'
본문은 정탐꾼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 내려 성 밖으로 도피시키는 장면과 라합이 구원의 표로 자기의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 내린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정탐꾼들의 무사 귀환을 위한 라합의 조언(15-16)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있었기 때문에 창문 너머는 여리고 성 밖이었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정탐꾼들을 자기 집의 창에서 줄을 내려 성 밖으로 도피시켰습니다. 또한 그녀는 그들이 추격하는 자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산으로 도망하여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그들이 돌아간 후에 돌아가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이 여리고 성을 빠져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추격대의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요단 강을 건너기까지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도록 조언해 주었습니다.
라합과 두 정탐꾼 사이의 언약의 재확인(17-21) 정탐꾼들은 자기들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라합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는 자기들을 달아 내렸던 창에 붉은 줄을 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붉은 줄을 내린 그 집에 라합의 모든 가족이 모여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붉은 줄은 먼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출애굽 때에 문설주에 바른 유월절 양의 피와 같은 맥락입니다. 여리고성을 심판할 때 창문에 붉은 줄이 매여 있는 집을 구원하겠다고 한 것은 정탐꾼들과 라합 사이에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라합은 언약한 대로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정탐꾼들의 귀환과 정탐 결과를 보고함(22-24) 정탐꾼들은 자기들을 뒤쫓던 여리고 병사들이 다 돌아갈 때까지 사흘 동안 산에서 머물다가 무사히 귀환하여 여호수아에게 모든 일을 상세히 보고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셨으므로 그 땅 주민이 간담이 녹을 정도로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며 긍정적이고 확신에 찬 보고를 하였습니다. 정탐꾼들은 여리고 성을 정탐하고 난 후에 더 큰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적용: 정탐꾼들이 자기들의 목숨을 걸고 사명을 다하므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당신도 축복의 통로로 쓰여진 적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 봅시다.
억누룰수록 우울은 커진다. 표현하지 못한 것은 완전히 눌려버리고 만다. 내면의 것을 끄집어내고 표현할수록 더욱 생기 있는 존재가 된다. 삶의 고통을 표현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혼과 우리가 걸어가는 길 사이의 장애물은 줄어든다. 마크포네 <고요함이 들려주는 것들> 중. 라합과 그 가족이 '붉은 줄'을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내어 구원 받았듯이, 우리도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과 행동으로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과 친구, 이웃을 살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살리는 믿음
수 2:15~24 / 고신일 목사
할렐루야!
오늘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복된 날입니다. 감사의 날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월을 영어로 'March'라고 합니다.
<이 달의 이름은 군신이며 농업의 신인 마르스(Mars)에서 따 온 라틴어인 Martius에서 기원하였습니다.(대개 전쟁은 봄(3월)에 시작했기 때문)
고대 로마력으로 3월은 첫 번 째 달로 한 해의 시작이었습니다.
3월은 추운 겨울이 지나고 모든 생물이 활기차게 활동하는 달이며, 곡식의 종자를 심는 달이기 때문에 3월이 한 해의 정월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경에 달력을 고쳐 1월인 January와 2월인 February를 넣음으로써 March는 3월이 되었습니다.>
March 는 '행진하다/진격하다/당당하게 걷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 옆의 분들과 "봄입니다. 믿음으로 행진합시다.",
"믿음으로 당당하게 사십시다"라고 인사합니다.
여러분의 범사의 삶이 멋진 행군과 같이 힘있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두 성경을 높이 들고 읽습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신18:8~9).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고백한 대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스라엘과 가나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은
요즘은 차로 하룻길이면 되는 길입니다. 옛날 걸음으로도 11일이면 족한 길입니다.
그 많은 무리들이 놀며 쉬며 가도 두세 달이면 족한 길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불평하고/불신하는 바람에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광야(사막)에서 보냈습니다.
그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집트를 탈출했던 때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심지어 출애굽을 지휘했던 모세까지도 죽었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람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살아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사람들 들어가 살라고 비어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요단강이 막혀 있고, 강 건너 여리고에는 견고한 성이 쌓여 있고, 강한 군대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신중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뽑아 여리고를 정탐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물이 넘쳐 위험한 때(수3:15)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에 있는
기생 '라합'의 집에 숨어들었습니다.
라합의 집
오늘 본문(15절)에 보면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수2:15)
여리고 성은 성벽이 이중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999년 'Creation Ex Nihilo Journal'에 실린 성서고고학의 대가
브라이언트 우드 박사의 논문은 여리고성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드 박사의 논문에 따르면 요단 계곡에 위치한 여리고성은
고고학적으로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도시로 밝혀졌습니다.
여리고성은 외벽과 내벽 등 두 겹으로 돼 있으며
외벽은 5m 정도 높이의 기초 성벽 위에 두께 2m, 높이 7m의 진흙벽돌 벽으로 세워졌습니다.
내벽은 지상으로부터 높이가 14m 정도 되는 둑 위에 다시 높이 솟아오른
내성벽의 구조로 설계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구조를 지닌 이중 성벽이었습니다(사진 참조).
길이가 450㎞나 되는 요단(요르단) 계곡은 헬몬산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아카바만 그리고 케냐와 탄자니아를 거쳐 모잠비크까지 이어집니다.
계곡의 가장 낮은 곳은 해수면보다 396배나 낮은 사해 부근입니다.
여리고는 이런 요단 계곡 주변의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위치해 있었으며
그 안에 펼쳐진 이른바 '녹색 카펫'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우드 박사의 논문은 100여년 동안에 걸친
유적 발굴에 관한 보고서를 분석한 내용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외벽꼭대기와 내벽꼭대기 사이에
나무를 올려 연결시켜 놓고 그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집들은 숨기도 좋고 성안과 밖으로 도망가기도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정탐꾼들이 그곳으로 숨어 들었던 것입니다. 라합의 집도 그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스파이(정탐꾼)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정보가 새어나간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이 여리고에 잠입했다는 소식이
여리고 왕에게까지 보고되었습니다.(수2:2)
정탐꾼들은 제대로 활동을 해 보기도 전에 붙잡히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군사들에게 "그들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고
성문이 닫혀 질 때쯤 어디로 가는지 급히 갔다"고 얘기했습니다.
사람들은 라합에 대해
'라합은 위기에 처한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적군 스파이를 숨겨준 여인이 아닌가?'
'라합은 자기 민족이 승산이 없음을 알아 배신자의 길을 간 것이 아니냐?'
'거짓말을 하여 정탐꾼을 살려 준 라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고 말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라합은 이방여인이었지만 40여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길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합이 "상천하지(上天下地)에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라합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살려 준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좋지 못한 길로 빠져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며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찾아가 집으로 데려 오려고 하겠지요. 그래서 아이에게 "집에 가자"고 했을 때
아이가 '저는 못 갑니다. 친구들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비겁하게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한다면…
'아이구 내 새끼 다 컸네, 의리 있네, 멋지다! 잘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아마 그런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라합이 "상천하지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정도의 믿음을 가졌으니…
자신의 믿음에 따른 행동을 한 것입니다.(히11:31)
산파 십부라와 부아가 바로 왕의 명령을 어기면서
이스라엘 여인에게서 태어나는 아기들을 죽이지 않고 생명을 살린 것처럼…
사람보다, 세상 권세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부라와 부아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출1:20~21)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사람보다,
세상보다, 세상 권세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순교자들이 왜 죽었습니까? 세상 권세자들과 세상 힘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복음 전하다가
세상 권세자들에게, 세상에 힘있는 자들에게 죽어간 것입니다.
구원의 표 - 붉은 줄
라합은 숨겨준 두 정탐꾼에게
"내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 자매들과 모든 가족을 구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고,
그렇게 하겠다는 증거를 달라"고 했습니다.(수2:12~13)
라합의 요구를 들은 정탐꾼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수2:18)
지금, 여리고는 비상사태입니다. 몰래 들어왔다는 정탐꾼들을 잡지 못했습니다.
언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그런데 라합의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행동입니다.
위험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런 거, 저런 거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달았습니다.(수2:21)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수2:21)
정탐꾼들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 이스라엘 진영에 돌아가고,
다시 강을 건너 쳐들어오려면 아직도 여러 날을 기다려도 되겠지만
라합은 정탐꾼이 나가고 바로 붉은 줄을 내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중에"라고 생각했다가 혹시라도 잊게 된다면
아무리 탄식하고 후회해도 소용없기 때문에 잊지 말고 즉시 해야 합니다.
정탐꾼들이 돌아간 후, 라합의 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붉은 줄이 잘 매어 있는가를 확인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줄이 있어야 그 가족들이 살 수 있고,
그 줄이 있어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집이 라합의 집인 줄 알고
그들을 해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집 대문에 기둥교회에 등록한 가정이라는 표시로 교패 붙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교패… 안 붙여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 문에
유월절(passover) 양의 피를 발라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던 것을 의미하고
"이 집은 예수 믿는 사람이 사는 집입니다"하는 표시로 교패를 붙이는 것인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티낸다고 할까봐…, 이것 저것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편하게 살려고(교패 붙이면 거절하기 곤란해서)… 등등
갖가지 이유를 들어 교패를 붙이지 않으려 합니다.
잘 들으세요. 교패 달지 않는다고 지옥 가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구원받은 천국백성임을 드러내는 용기와
그 드러냄 때문에 불편함을 감당하는 희생도 귀한 것입니다.
물론 표시 나게 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라합의 집 창문에 매단 붉은 줄은 구원의 줄이기도 했지만,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고통의 줄이기도 했고,
그것 때문에 이런 저런 이웃 사람들의 질문도 받았을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에게는 어떤 붉은 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소망하며/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드러낸 붉은 줄은 무엇인지요?
예수 믿는 것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붉은 줄처럼 신경 쓰이는 일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약속을 받은 백성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지만 골치 아픈 일입니다.
예수 믿고, 예수 믿는 표를 내려면… 섬기고 봉사하려면…
구원받은 백성임을 드러내며 살려면…
라합이 잘 보이는 창가에 붉은 줄을 달았던 것처럼 눈에 띠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예배시간 직전에 와서 예배 끝나자마자 부지런히 가시는 분들이야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겠습니까.
그러나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분들은 표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드러냄 때문에 피곤합니다. 안 들어도 되는 소리를 듣습니다.
심지어 잡아 흔드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그래도 잘 참고, 잘 견디시기 바랍니다.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디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 "사랑은 오래 참고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 때문에 참아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 때문에 견뎌야 되는 일이 있습니다.
적당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견뎌야 합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참아야 할 일이 있고 견뎌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힘들고 어려워도 고통스러워도 참고 견뎌야 합니다.
가족을 모으는 라합
여호수아 6장에 보면
라합은 정탐꾼들이 다녀간 뒤 모든 가족들을 모아 함께 생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가족들이 한 집에 모여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모여 살자고 했다' 해서 모두 쉽게 응했겠습니까?
가족, 친척, 친구… 설득하고 이해시키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생명을 건 설득의 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라합의 노력 때문에 라합의 가족들이 구원받았습니다.
이처럼 가족 모두가 구원받은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을 다하여 감동시키고, 예수 향기 풍겨 취하게 하고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가족 중에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분이 있다면
더 전해야 하고, 더 설득해야 하고, 참아야 하고, 더 섬겨야 하고,
더 베풀고, 더 숙여야 하고, 더 기도하고, 더 성실하여…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삶을 통해 본을 보이고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의 모습, 헌신의 모습,
인내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까?
작년 여름성경학교 기간에 직장생활을 하는 한 청년이 직장에 휴가원을 내고
성경학교에 봉사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 청년은 회사 일이 바쁜데도 휴가를 내서 봉사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직장에서 상사들이 그 청년에 대해 '이 사람은 우리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이고,
지금까지 결석, 지각, 조퇴 한 번 하지 않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휴가를 쓰겠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장 생활을 하십니까? 여러분의 직장에서 그런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방 여인 라합은 비록 기생이었지만 가족들을 살렸습니다.
라합 때문에 그 가정이, 그 가족이,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었듯이…
여러분이 있음으로 해서 여러분의 가정과 친척/친구/이웃이… 예수 믿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영향력이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리는 믿음, 영향력 있는 믿음,
탁월한 믿음이 되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여러분 살다 만나는 사람들을 두려워 마십시오.
살다 건너야 하는 강 때문에 떨지 마십시오.
높은 성벽이 있고 공격하는 적이 있어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때를 따라 필요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정탐꾼들이 라합을 만나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만날 만한 사람을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단, 여러분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만날 만한 의사를 만나야 합니다.
제가 군대에 가는 청년들의 손을 잡고
"하나님 만날 만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시옵소서.
좋은 지휘관, 좋은 선임, 좋은 후임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아야 좋은 만남을 주시는 것입니다.
단,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마음에 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기억하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이방 여인 기생 라합도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살다 만나는 사람 모두,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하면 안됩니다.
천해 보여도 깔보지 마십시오. 못되었어도 정죄하면 안됩니다.
혹 더러운/추한/돌 던질 말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기생이라도… 무시하지 마십시오.
공부 잘 한다고 너무 재지 마세요. 공부 좀 못한다고 기죽지 마세요.
공부 못하던 아이가 큰 사업체의 사장이 되어 공부 잘 하던 아이를 사원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공부 못한다고 매일 혼나던 아이가 직장의 상사로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 언제 어떻게 만날지 모르는 그 사람이
나를 살려 줄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살려 준 것처럼….
비가 많이 내리는 날, 미국 피츠버그의 한 가구점 앞에서
초라한 모습의 할머니 한 분이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가게 주인이 나와 할머니를 안으로 모셨습니다.
할머니는 "가구를 사려는 것이 아니라 차를 기다리는 중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따듯한 차를 대접하며
"물건은 안 사셔도 괜찮으니 편히 앉아서 구경하시며 차를 기다리세요"라며
차번호를 적어 몇 번이나 밖에 나가 차가 오는지 확인했습니다.
그는 차가 올 때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할머니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며칠 후 가구점 주인은 미국의 대재벌 카네기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비 오는 날 제 어머님께 베푼 당신의 친절에 감사 드립니다.
우리 회사와 고향 스코틀랜드의 집을 짓는데 필요한 가구를 모두 당신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낡은 코트 자락 밑에 천사의 날개가 감추어져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추해 보이는 사람 옷자락 속에 천사의 날개가 숨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낯선 사람에게 최선의 대우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가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려 해도…
때로는 그 길이 험하거나 생각지도 못한 위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강을 건너야하고, 성을 기어올라야 하고, 잡아 없애려는 적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하나님 마음에 드는 백성은 결국 이깁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여리고성에 숨어들었어도 결국 이스라엘 사람으로 드러난 것처럼…
아무리 위장을 하고 살아도, 몰래 살아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세상이 알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척하며 성경책을 보이지 않게 해도 사람들은 다 압니다.
이왕에 예수 믿는 것, 어디서 어떻게 살든지…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며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새 날, 복으로 주신 은혜의 날입니다.
과거의 잣대로 오늘을 평가하고 미래를 예측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개천 같은 곳에서도 우뚝 선 믿음의 사람을 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환경과 조건을 탓하지 말고 기죽지 마세요.
비록 기생이라는 떳떳하지 못한, 부끄러운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순수했던 라합은
이스라엘의 성군이라고 불리는 다윗의 고조 할머니가 되었습니다.(마1:5~6)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인 것, 어느 곳에 가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잊지 말고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에는 독일 나치에 의해 희생된 600만 유대인을 추모하는 기념관
'야드바쉠(Yad Vashem)'이 있습니다. 야드바쉠이란 '기억'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민족이 참혹한 학살을 당한 것을 기억하고
'절대 잊지 말자'는 뜻으로 <야드바쉠>이라고 했답니다.
우리나라에는 독립기념관이 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의 참혹한 상황들을 재연하고
소름 끼치는 일제 시대의 형무소와 고문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의 일을 기억하는 것보다
이후의 독립을 기념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그 이름부터 기념관입니다.
기억하지 못하고 기념하는 것은 같은 고통을 반복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지 못하고 기념하는 것은 감사를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지능지수(IQ)는 얼마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IQ는 다 좋다고 합니다.
자기 자식들도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서 공부 못한다고 합니다.
물고기의 지능은 0.4밖에 되지 않고 기억은 3초밖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과 수초 전에 물고 혼났던 미끼를 또 다시 물어 낚시에 걸린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고기가 망둥이지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의 결국 죽음인 것입니다.
어려움을 예상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 앞에는 '정복하기 어려운 조건들'로 가득 찬 산과 성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처럼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우리 때문에 그들이 간담이 녹을 것입니다.(수2:24)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면…
생명을 살리는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
정탐꾼들이 라합을 만났던 것처럼…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다만 내가 만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는지 먼저 살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하나님께서 내게 그런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 라합의 가족이 구원받은 것처럼… 하나님은 빼내주십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가족이… 그런 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있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옛날 옛적에 한 말씀으로 듣고 흘려 버리는 자가 아니라
기억하고 가슴에 담고 믿음으로 사는 믿음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탁월한 믿음, 영향력을 끼치는 믿음, 살리는 믿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기생 라합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수 2:15-21
여장부 라합의 순간적인 기지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의 방어태세를 살펴보러 보낸 두 정탐꾼들은 기생 라합에게서 결정적인 정보를 얻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홍해에서 바닷물을 말리는 기적을 일으켰고 광야를 안전하게 통과케 해 아모리의 두 왕까지 전멸시킨 일에 관해 가나안 족속들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여리고 주민들은 벌써부터 간담이 완전히 녹아내려져 이스라엘과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포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 정보만으로 이스라엘의 신세대들로선 첫 전투에 큰 자신감을 갖고 임할 수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의 엄청난 승리에 라합이 일등공신인 셈입니다. 그렇다고 여리고에게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단순한 격려 하나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여리고 전투에 기여한 측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날 신자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믿음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주막의 안주인으로 오래 동안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상대했고 인생의 모진 풍파를 다 겪은 여장부였던 것 같습니다. 여리고 주민 한 명이 수상한 행색의 두 나그네가 이스라엘이 보낸 정탐꾼인 줄 눈치 채고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6절)고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체포조가 들이닥쳐도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거짓말로 둘러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단 어느 나라에서 보냈는지는 몰라도 외지인 두 사람이 왔었다는 사실은 인정했습니다.(4절) 그러나 성문이 닫기 전에 떠났으니 급히 따라가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충고까지 해주었습니다.(5절) 참으로 놀라운 지혜입니다.
어지간한 남자들도 갖지 못한 담대함은 물론 노련함이 돋보입니다. 군인들더러 자기 말을 온전히 믿게끔 대화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수상한 사람 두 사림이 온 것은 사실이라고 순순히 시인하고선 성문이 닫히기 전에 서둘러서 떠났다고 말했습니다. 정탐꾼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므로 군인들로선 그녀를 의심하지 않고 말하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어서 빨리 따라가면 체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줌으로써 군인들이 다른 가능성은 생각할 필요 없이 곧바로 추격에 나서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정탐꾼들은 집안에 머물러 있으니 아무리 빨리 따라 가봐야 허사입니다. 여리고 성과 이스라엘이 진치고 있는 곳을 나누는 경계는 요단강인데 그곳 나루터까지 갔다 오는 시간이 꽤 걸린다는 것까지 감안한 것입니다. 그 동안에 두 사람을 다른 길로 피신시킬 여유를 번 것입니다. 추격대가 나루터까지 가서도 발견하지 못하면 이미 강을 건너 이스라엘 지경으로 완전히 넘어간 것으로 간주하고 추격을 포기할 것입니다.
그럼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므로 그녀에게 책임 추궁할 수도 없습니다. 정탐꾼들이 들키지 않고 여리고를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체포조가 떠나자마자 곧바로 정탐꾼들을 성 위에 있는 자기 집에서 줄로 매달아 내리고 딴 길로 도망가게 했습니다. 기생집 안에는 여전히 다른 손님들이 남아있어서 정문으로 도망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체포조가 완전히 수색을 포기하도록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사흘은 숨어 있다가 가라고 세심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16절)
그 전에 정탐꾼들과 라합은 서로를 선대하여 목숨을 지켜주기로 약조를 맺습니다. 우선 라합은 정탐꾼들과 나눈 대화와 도망간 경로를 절대로 누설하지 않기로 합니다. 그 보상으로 그녀는 정탐꾼들에게 나중에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침공할 때에 자신과 가족들은 죽이지 않고 구해준다는 맹서를 하라고 요구했습니다.(12-13절) 정탐꾼들로선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해준데다 자기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라 못 들어줄 리 없습니다.
라합의 신앙고백
그녀는 엄연히 여리고 백성이며 정탐꾼들은 자기들을 정복하러 온 적국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동족을 배반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여리고는 완전히 진멸되었으므로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의 국가주권을 일본에 팔아넘긴 이완용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른 꼴입니다.
만약 그 거짓말이 먹히지 않고 여리고 군인들이 집안 구석을 샅샅이 뒤졌다면 또 혹시라도 정탐꾼들이 다른 길로 돌아가는 동안 발각이라도 난다면 그녀도 바로 죽음에 처해집니다. 그렇다면 자기 목숨을 걸만한 확고한 이유가 있어야만 조국을 멸망하게 만들 그 살 떨리는 엄청난 모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정탐꾼들이 잡히면 당장 사형에 처하게 될 처지가 불쌍해서 구해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녀가 자기 목숨까지 걸게 된 첫째 이유는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여리고가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앞에 간담이 완전히 녹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족속과 맞섰다간 틀림없이 아모리 왕 시혼과 옥처럼 전멸 당할 것이고 그럼 자기도 죽게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극도의 두려움은 다른 여리고 사람들 모두가 갖고 있었고 또 항복하면 살 수 있다는 계산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이스라엘에 항복한 자가 없었습니다. 여리고 군대가 아주 살벌하게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 있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여리고 주민의 공포심이 대단했음을 거꾸로 반증하는 셈입니다.
주목할 사항은 그녀가 정탐꾼을 숨기자마자 이스라엘에게 항복할 의사를 밝혔다는 것입니다.(8절) 그렇다면 평소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녀가 정탐꾼들에게 처음 건넨 말을 다시 살펴봅시다. 먼저 “여호와가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9절)고 시작해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11절)고 마쳤습니다. 이는 분명히 여호와에 대한 그녀의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특별히 여호와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계이며 땅은 눈에 보이는 현실 세상입니다. 여호와는 그 양쪽을 다 주관 통치하시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 안에 여러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다른 모든 나라들의 신들은 여호와에 권능에 비추면 완전히 유명무실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과 하늘 전체를 통치하지 않고 그 나라와 종족만 주관하는 지역 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호와는 히브리 민족만 아니라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신이라 가나안의 지역 신들을 총동원해서 맞선들 승리는 당연히 이스라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애굽의 모든 신들은 물론 아모리 두 왕들과 이방 최고 주술사 발람 등 모든 이방신들이 여호와 앞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전혀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그녀의 세상만사를 판단하는 지혜는 물론 영적인 분별력도 아주 뛰어났습니다. 정확히 말해 그녀 혼자만이 가나안에서 올바른 영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여호와를 아주 능력이 큰 신이라고 두려워는 해도 정확하게 그 특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종교학이나 신학공부를 한 적도 없고 제사장 집안 출신도 아닙니다. 한갓 아녀자로 기생입니다. 고대의 기생이란 사실은 창녀 역할도 겸했습니다. 그녀는 지금껏 정말로 한 많고 비참한 생을 살아왔습니다. 남자들의 하루 저녁 성적인 노리개 감이 되는 것 말고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가치와 보람을 누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눈만 뜨면 지긋지긋한 똑같은 일상이 기다리고 있고 저녁에는 아무 생각 없이 파김치가 된 육신을 침상에 던지는 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요컨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과 똑같은, 아니 차라리 죽어서 이 땅에서 없어지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 같은 하루하루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목숨을 끊으려니 죽은 후 하늘에서도 아무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그동안 지은 죄가 많아 신의 저주를 받을 것이 확실해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겨우 연명하고 있던 차에 정말로 희한한 소식이 하나 들려왔습니다. 애굽에서 사백 년간이나 노예로 섬기던 히브리 민족이 애굽을 시쳇말로 열 번이나 완전히 묵사발로 만들고 탈출한 후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바다를 마른 땅으로 건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먹고 마실 것 하나 없는 광야를 그 많은 백성이 사십 년간을 방황했어도 강건하게 생존해 나와서 아모리 두 왕까지 전멸시켰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히브리인들의 신은 지금껏 모든 나라의 모든 신들과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신인지 알고 싶고 그 신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는 히브리 민족이 너무 부러워졌을 것입니다. 자기도 그런 신을 섬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막연한 소망도 생겼을 것입니다. 자기는 죽어 마땅한 천하의 추악한 죄인이었고 그런 심판을 받아도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길 그런 기구한 인생이었습니다. 가장 신다운 신인 여호와에게 뭔가 구원의 길이 있거나, 최소한 자기 인생에 대한 위로라도 얻을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실 날 같은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느 날 그 히브리 민족의 정탐꾼이 아무 예고 없이 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도무지 소망이라곤 없이 비천한 기생으로 살다가 죽는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고 있던 그녀의 인생에 아주 희미하게나마 한줄기 빛이 비취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어차피 아무 소망 없이 죽으나, 아니 살아도 죽은 것만큼도 못할 바에야, 이번에 한 번 죽기 살기로 자기 인생을 뒤집어보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바로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생일대의 모험을 결행한 것입니다.
그녀의 그런 목숨을 거는 결단이 자신과 두 정탐꾼의 목숨만 살린 것이 아닙니다. 여리고성 전투의 승패 자체를 그녀가 갈랐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만약 그녀의 모험과 기지가 없었다면 두 정탐꾼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들켰으면 여리고 사람들이 그냥 처형만 시킬 리 없습니다. 거꾸로 이스라엘에 대한 정보를 캐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며 잔인한 고문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장 먼저 무엇을 알고 싶어 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군대 숫자가 많고, 애굽과 아말렉과 미디안과 아모리 족속을 패배시킨 사실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유추해보면 최고로 궁금했을 한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나이든 그 선지자 모세가 아직 살아있는지 여부일 것입니다.
모세는 아모리 두 왕을 전멸시킬 때까지 지휘하다가 가나안 땅이 멀리 보이는 곳에서 죽어서 이름 모를 곳에 묻혔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예에서 보듯이 고대의 총사령관은 자신의 죽음을 적군에게 비밀로 합니다. 아직 모세의 죽음까지는 가나안 족속들이 몰랐을 것입니다. 만약 그 노인이 살아있다면 싸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지레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발람의 사건을 그렇게 길게 기록한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발락이 당시에 가장 영험했던 주술사 발람에게 백지수표를 제시하면서까지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각 민족 신들의 대결인 고대 전쟁의 승패는 결국 그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다 같은 사탄의 종들임에도 자기에게 치성과 제물을 많이 바치는 쪽에게 사탄이 능력을 발휘해서 승리를 안겨다 주는 것입니다.
두 정탐꾼이 잡혀서 여리고 군대의 고문에 못 이겨서 모세가 벌써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여리고 성 전투의 양상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절대로 그들이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가만히 있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응전하러 나왔을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움으로 승리는 하겠지만 사상자가 만만치 않게 나왔을 것입니다.
결국 기생 라합의 담대한 결단이 이스라엘에게 한 명의 희생자도 없는 완벽한 승리를 가져다준 것입니다. 계속 강조해왔듯이 여리고 성은 백성들의 행진하면서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어야 목숨을 구원 받는다.
요컨대 기생 라합이 자기 목숨까지 바쳤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목숨도 구원 받은 것입니다. 한 명이 죽어서 이백만 명이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만 이 땅의 죄인들을 다스린다는 원리가 이때에도 이미 실현된 것입니다. 그 사실을 본문도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로 21절의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성벽 위에 비슷한 모양의 집들이 여러 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탐꾼들이 그녀와 약조한 대로 이스라엘이 나중에 전투를 치를 때에 쉽게 구별해서 살려주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녀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니까 그 붉은 줄은 누구나 명확히 볼 수 있었고 또 라합의 집인 줄 모르는 주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줄을 단 시점이 언제입니까? 본문 21절이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줄을 달았다고 말하니까 정탐꾼이 도망간 직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18절에선 두 정탐꾼이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매달라고 말했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이 성 주위를 도는 행진을 하기 전에는 매달았고 완전히 함락될 때까지 최고로 짧게 잡아도 일주일 이상을 달아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그 집에 들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라합도 인정했는데 그들이 떠난 후에 빨간 줄이 달렸습니다. 그럼 누구라도 그 사건과 연결해서 뭔가 있다고 쉽게 의심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붉은 줄을 계속해서 달아놓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지 않습니까?
마침 지난주에 미국 TV에서 영화를 한편 보았는데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왔습니다. 회사의 중역인 여성이 밤중에 혼자서 출장을 가려고 시골길로 차를 몰고 공항으로 가는데 엄청난 폭설이 내렸습니다. 차가 미끄러져 길가 낮은 곳의 눈이 많이 쌓인 곳으로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차는 꼼짝달싹하지 않았고 여자 혼자 힘으로 끌어올릴 수도 없었습니다. 한적한 시골이라 셀폰도 터지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는 차들도 거의 없는데다 길에선 그곳에 차가 빠졌는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자칫 차안에서 얼어 죽을 판이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빨간색 속옷을 꺼내서 트렁크에 달린 라디오 안테나에 걸었고 지나가던 경찰이 그 빨간 옷을 보고서 구해주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추측컨대 정탐꾼들과 라합도 그런 기지를 발휘했을 것 같습니다. 기생은 주로 채색 옷을 입었기에 길다란 빨간 옷이나 수건 같은 것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며 마치 빨래 널 듯이 달아놓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혹시라도 이상하게 여기고 의심 받게 되면 죽음까지 각오해야 합니다.
불은 줄은 어린 양의 피였다.
두 정탐꾼이 라합에게 맹세할 때에 지시한 내용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18,19절) 어디선가 많이 익숙한 말씀 같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던 날 밤에 여호와가 죽음의 사자를 보내면서 구세대들에게 내린 지시와 똑같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12;21-23)
이스라엘은 먼저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로 문의 인방과 설주에 가로 세로로 발라야 했습니다. 그리고 식구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집안에 모여서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도록 아무도 밖에 나가선 안 되었습니다. 그 사자는 붉은 피를 보고 그 집에 심판을 보류하고 건너 띄었고 붉은 피가 발라져있지 않는 애굽 집의 장자만 모두 죽였습니다. 이스라엘도 만약 밖에 나갔다면 심판받아 죽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나 오직 어린 양의 피공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지금도 라합더러 온 식구를 집안에 모이게 하고 붉은 줄로 구별해서 표시하되 만약 집 문을 벗어나 거리로 나가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합니다. 라합은 자기 목숨을 건 모험으로 구원 받을 만하다고 쳐도 그 가족은 전적으로 아무 공로 없이 붉은 줄 때문에 구원 받은 것입니다. 라합의 자기 목숨을 건 이런 구원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 그녀와 정탐꾼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었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서로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내걸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정탐꾼들에겐 출애굽 때의 죽음의 사자를 통한 구원이 너무나 오묘해서 뇌리에 온전히 박혔고 그래서 무심결에 그런 지시를 내렸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 모두에게 성령이 충만히 역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여리고 성벽 위에 세운 것입니다. 출애굽 유월절에 이스라엘과 함께 하여 구원을 주관하신 예수님이 지금 여리고의 라합의 집에도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라합 개인적으로는 자기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하며 정탐꾼을 도와서 피신시킨 공로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로운 행위와 공적을 보고 구원해준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라합이 상천하지에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온전히 시인했습니다. 어차피 저주 받아 비천하게 죽을 바에야 그 참 하나님에게 목숨까지 의탁해보겠다고 기꺼이 또 담대히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녀로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진심으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녀가 지금껏 섬겨왔던 모든 이방신들은 바치는 치성에 따라서 현실적인 복을 주겠다고 약속은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적으로 은혜로운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제사 드릴 때만 종교적인 자기만족만 그것도 일시적으로 있었을 뿐입니다. 나아가 아무리 열성적으로 섬겼어도 기쁨과 평안이 임하기는커녕 오히려 허무하고 갈급해지기만 했습니다. 라합 개인과는 어떤 인격적 관계도 형성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냥 조각상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은 그와 달리 엄청난 기적을 실제로 많이 일으키면서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을 어떤 위험에서도 구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과 오래 전에 맺은 언약을 이루려고 지금 여리고 눈앞에까지 인도해왔습니다. 여호와야말로 하늘과 땅 즉, 영계와 물질계 둘을 다 다스리는 유일한 참 하나님임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녀로선 만약 여호와마저 자기를 외면한다면 자기는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담담히 받아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목숨까지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신학적으로 정리만 안 되었을 뿐 분명히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두 정탐꾼이 라합에게 맹세하는 말의 후반부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19절b) 만약 여리고 사람이 너희를 죽이면 그 책임은 우리가 지겠다고 합니다. 그의 피가 우리의 머리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정탐꾼들 또한 자기들의 목숨으로 너희 가족의 목숨과 대체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약속을 끝까지 지키자는 서로 간의 피의 맹세로 그치지 않습니다. 당신의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온 당신의 자녀는 죽음으로 끝까지 보호 인도한다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드러낸 것입니다. 라합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믿음을 고백하며 헌신할 수 있었던 것처럼 정탐꾼들도 그 자리에 임하신 성령님이 간섭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진리에 따라서 맹세하게 만든 것입니다.
붉은 줄을 내걸라.
인간적 현실적으로 따지면 한 순간만 삐끗해도 라합과 두 정탐꾼은 당장 죽음에 처해집니다. 그런 절대 절명의 순간에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완성시킬 때까지 끝까지 보호하시며 들어 사용하셔서 반드시 당신의 영광을 보게끔 인도해주십니다.
라합이 두 정탐꾼을 재빨리 피신시키는 것을 그 집의 다른 손님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눈치 빠른 한 사람만 신고하러 갔습니다. 집에서 줄로 달아 내릴 때도, 한밤중이었겠지만, 또 사흘간이나 숨어서 도피할 때도 아무에게 들키지 않았습니다. 내걸린 붉은 줄에 관해서도 끝까지 눈치 채기는커녕 의심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세밀한 간섭이라는 것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 해서 십자가에 달려 붉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아무 공로 없어도 그 붉은 피의 은혜를 순전하게 받아들이는 자를 구원하고 끝까지 보호해주십니다. 반대로 그 피를 보고도 자기 공로만 앞세우는 자는 죽음을 면할 길이 없으며 주님을 배척했던 자기 허물로 죽을 뿐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 죽음 직전까지 갈만큼 절망적인 인생이 있습니까? 사방이 다 막혀 빛이라곤 새어 들어올 바늘구멍조차 없는 것 같습니까? 그래서 파멸만이 앞에 보이고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까?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자를 찾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궁극적이고 영원한 구원을 받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면 예수님이 반드시 먼저 찾아와 주십니다.
정말 죽지 못해 겨우 연명만 하고 있던 라합의 일상 가운데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두 정탐꾼이 나타난 것은 예수님이 보낸 구원의 천사였습니다. 그녀의 믿음을 검증 확인한 후에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마저 나를 외면하시면 나는 죽음뿐이라는 진정한 고백과 함께 하나님 쪽으로 한 발자국만 옮기는 모험을 결행하면 상황은 완전히 역전됩니다. 죽음과 사탄과 죄악과 흑암의 세상에서 생명과 하나님과 의와 빛의 나라로 순간적으로 옮겨집니다.
그런 하나님을 찾고 싶은 소망과 또 하나님을 향해 결단할 수 있는 힘도 성령님이 심어주십니다. 기생 라합처럼 평소에 타락한 세상에선 아무 소망을 갖지 못하는 대신에 분노와 안타까움을 품고 정말로 의로운 인생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갖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녀가 매일 밤 출구가 없는 절망 가운데 눈물로 지새며 처절하게 영적 씨름을 했기에 목숨을 건 이런 헌신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 필연적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아셔야 합니다. 성벽 위에 있던 그녀의 집은 여리고 성이 완전히 무너질 때에 함께 땅에 흔적도 없이 파묻혔습니다. 어떤 의미와 기쁨도 없던 여리고의 기생 라합도 함께 묻히고 붉은 줄로 구원 받아 여호와의 충성된 여종 라합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권능은 조금 더 나은 인생으로 바꿔주는 정도가 아니라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으로 태어나게 해줍니다.
신자는 이미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남은 일은 세상 앞에 예수님의 십자가 붉은 줄을 내거는 것입니다. 모든 이로 자신이 예수 믿는 신자인 줄 알게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들과 달리 하나님의 참 생명으로만 자기 인생을 아름답고도 거룩하게 이끌어가고 있음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문제는 붉은 줄을 거는 순간 자동적으로 세상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즉, 피를 흘려야만 하는 반발 멸시 음해 핍박이 따라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은 반드시 환난을 당하게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승리했기에 담대하라고 명했습니다. 당신의 독생자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이 반드시 모든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내거는 예수님의 붉은 줄로 인해서 세상과 사탄에 미혹된 영혼들이 여리고 성처럼 무너지는 기적이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