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른바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난 왕은 노산군(뒤에 단종), 연산군, 광해군 등 세 명이었다. 이 가운데 ‘반정(反正)’ 즉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왕이 교체된 것은 연산군을 폐한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폐한 인조반정이다. 그런데 반정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왕위에 오른 과정을 보면 중종과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기간 1623~1649)는 아주 달랐다. 중종이 정변을 일으킨 공신들의 추대로 갑자기 왕위에 올랐다면, 인조는 왕이 되고자 몸소 정변을 준비하고 앞장선 인물이다.
광해군에게 눌린 울분의 세월
조선 16대 왕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 뒤에 元宗으로 추존됨)과 좌찬성 구사맹의 딸(뒤에 인헌왕후로 추존) 사이에서 맏아들로 1595년 11월 7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인조가 해주에서 출생한 것은 왜구의 침입으로 왕족들이 해주에 피신 중이었기 때문이다.인조의 조부가 되는 선조는 14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늙어서 얻은 영창대군 외에는 모두 후궁의 소생이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인조의 친부인 정원군은 광해군의 견제를 상당히 받았다.
후궁 인빈 김씨의 소생인 정원군은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자식으로는 인조(능양군) 외에도 능원대군 보, 능창대군 전, 능풍군 명이 있었다. 아들 덕분에 죽어서 왕으로까지 추존된 정원군은 생전에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아들인 능창군이 모반죄로 모함을 받아 17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자, 그 뒤로 몸과 맘이 상하여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죽음은 후일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반정을 통해 왕이 된 인조에게 그에 걸맞은 일화가 없을 수 없다. 광해조에 변방에 귀양 가 있던 김시양이라는 사람이 하루는 정원군이 반정하는 꿈을 꾸었다. 심상찮음을 느낀 김시양은 자신의 일기에다가 이렇게 썼다.
“옥부(玉孚)가 불을 들었으니 범해(虎年)의 일이다 玉孚擧火虎年事” [연려실기술] 권23, ‘인조조 고사본말’ 계해정사
정원군의 휘(諱)가 옥(玉)과 부(孚)를 합한 부(琈)이고 중종(中宗)이 병인년(호랑이 해이다)에 반정(反正)을 하였으므로 이런 은어를 쓴 것이다. 이로부터 2년 후 정원군은 세상을 떠났지만, 계해년(1623년)에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인조)이 그 꿈을 실현시켰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한고조의 화신
장남이었던 능양군 대신 동생인 능창군이 역모로 죽게 된 것에는 아마도 성품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짐작된다. 평소 무예에 능하고 인망도 높았던 능창군과 달리 능양군은 어려서부터 말이 별로 없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다.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지만, 조용한 성품 탓에 크게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광해군은 이런 능양군을 평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조실록]의 ‘인조대왕행장’에 따르면, 능양군의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는데 선조는 이것이 한나라 고조의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선조는 인조의 휘와 자를 직접 지어주며 총애했고, 광해군을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왕이 된 이후에도 인조는 분위기가 매우 무겁고 말이 없어 측근에 모시던 궁녀들도 왕이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아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표현이 적으니 신하들은 왕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추측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게다가 글을 아주 잘 지었으나, 어떤 글도 잘 쓰지 않았고 신하들의 상소문에 대답하는 비답(批答)도 내시에게 베껴서 쓰게 하여 자신의 필적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아들과도 거리를 두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장성하여 출궁한 뒤 입궐해 들어오면 시중들던 젊은 궁녀들을 피신시켜 자식 앞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인조반정의 주모자는 인조 자신과 신경진·구굉과 같은 인조의 외척세력, 이귀·이서·김류·장유·심기원·김자점 등 소외된 서인 문신집단이 중심축이었다. 이들은 평소 광해군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반정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인조반정에 대해 기술된 주요 사료는 [인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이다. 이들 사료들에는 정치적 문란과 폐모(廢母), 친후금의 중립외교 등 광해군의 실정을 동기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고, 각자 자신이 처해있던 상황에서 반정이라는 한 뜻을 모았을 뿐이다.
반정이 시작되다
인조는 반정이라는 거사를 직접 진두지휘 하였다. 인조는 계획이 여러 사람들 입을 통해 누설될 위기에 처해지자 서두를 수 밖에 없었고 조바심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인조는 예정일 보다 일찍 반정을 일으켰고 이런 탓에 치밀하지도 못한 느낌이지만, 군왕이었던 광해군은 무방비 상태였다.인조를 포함한 반정군은 도끼로 돈화문을 부수고 궁궐로 쳐들어 갔고 반정이 성공했다고 느낄 무렵 궁궐에 불을 질렀다. 반정에 참여한 이들은 가족들에게 ‘궁궐에 불길이 보이지 않으면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자결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궁궐에 불길이 솟자 이를 본 광해군은 옆에 있던 내시에게 "타성(他姓)이 역모를 했으면 종묘에 불을 질렀을 것이니 올라가서 살펴보라"고 했다. 내시는 함춘원(含春苑: 창경궁 홍화문 밖 동쪽에 있는 정원)에 불이 난 것을 종묘로 착각하고는 "종묘에 불이 붙었나이다"라고 보고했다.
“내 대에 와서 종묘사직이 끝나는구나.” 광해군은 긴 한탄과 함께 북문 담을 넘어 도망쳤다. 사실 궁궐에 불이 나기 전에 광해군은 반정의 고변을 보고 받았으나, 심각성을 몰랐고 위급함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반정을 정당화시키다
광해군이 도망간 이상, 인조는 왕위에 오른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러나 할머니인 인목대비의 윤허가 없다면 왕위에 오른들 오래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인조의 측근들은 대비가 있는 서궁으로 달려갔다. 처음에 인목대비는 반정을 믿지 않았다. 대비는 내가 “죄인(광해군)을 직접 봐야 너희들의 말을 믿겠다”라고 고집을 피웠다. 수색 끝에 민가에 숨어있던 광해군이 잡히자 인조는 직접 광해군을 데리고 대비전으로 갔다. 대비는 옥새를 가져오라 명령한 후 왕으로 책립할 준비를 갖추게 했다. 윤허만 내려 주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대비가 새삼스레 옥새를 가져 오라고 하자, 인조를 포함한 주모자들은 속이 타 들어갔다. 대비가 인조가 아닌 선조의 다른 왕자나 손자에게 옥새를 내어준다면 정변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었다. 손쉽게 정변에 성공했지만, 마지막 대비의 윤허를 받기까지의 시간은 그들에게는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인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인목대비를 깍듯하게 모셨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켜 수도 서울로 쳐들어 오자 몽진 길에 올랐던 인조는 궁궐을 떠나지 않겠다는 대비 때문에 애를 태웠다. 인목대비가 반란군 수중에 들어가 마음을 바꾸게 되면 왕위에서 쫓겨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다. 광해군을 패륜자로 몰아 반정의 명분을 삼았던 인조정권의 기반은 이처럼 약했고 그 후유증은 모역사건과 고변, 이괄의 난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백성의 사랑을 얻지 못한 왕
광해군의 패륜행위와 실정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인조 반정의 실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인조 개인으로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이 왕위 찬탈로까지 이어진 것이고 그를 도운 서인 세력은 대북 일당독재로 권력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을 믿어 줄 어리석은 백성은 없었다. 당시 여론은 이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다. 반란을 일으킨 이괄이 서울에 입성할 때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서울을 떠나던 날, 그를 따르던 백성은 하나도 없었고 한강변에서 배를 타려 했을 때 백성들은 인조가 탈 배를 숨겨놓기까지 했다.
파죽지세였던 이괄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인조는 여전히 왕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던 그의 처지는 늘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인조와 그를 추대한 공신들은 사림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생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追崇)했다. 겉으로는 효심에 찬 행동이었지만, 실제는 종법(宗法)적 정통성이 만들어 약했던 권력 기반을 다져볼 목적이 더 컸다.
국제정세의 오판과 병자호란의 발발
16세기 말 동아시아 정세는 명청 교체라는 큰 변화에 직면하고 있었다. 명은 신종의 학정과 임진왜란 참전으로 국운이 기울고 있었고, 이 틈을 타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1616년 후금을 건국하였다.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광해군은 이러한 국제적 정세에 휘말리지 않고자 후금과 원만하게 지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대후금 외교정책은 강경노선으로 바뀌었다. 외교뿐만 아니라 인조와 반정세력들은 광해군이 벌인 일이라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무조건 반대했다.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세력들은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정권답게 광해군의 중립외교 대신에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도덕외교를 구사했고, 이는 결국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으로 일어났다. 정묘호란으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정묘화약을 맺은 이후 후금군은 철군했다. 그후 1636년(인조 14년)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는, 종전의 입장을 바꿔 이제는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청조의 요구에 불쾌한 인조는 청과 일전을 불사르겠다는 일념으로 척화파를 지지하였지만, 채 전의를 갖추기도 전에 청군은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군은 6일만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였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게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길을 차단했다. 강화도행을 포기한 인조는 우왕좌왕하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이로써 12월 15일부터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까지 45일간의 남한산성의 항전이 시작되었다.
남한산성의 항전은 청군의 위협 외에도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 진행되었다. 1637년 1월 23일 밤, 청군은 남한산성의 공격과 함께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가 점령되고 위기감이 고조되자 성내는 척화에서 강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1월 30일 인조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산성을 나서 삼전도로 향했다. 말에서 내린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삼배구고두는 여진족이 천자를 뵈올 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예식이 끝난 후 인조는 소파진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당시 사공은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서로 건너려는 신하들이 몸싸움을 일으켜 왕의 옷소매까지 붙잡기도 했다. 청의 장수 용골대가 인조를 호위하며 강을 건너자 1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강 옆 길가에서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며 울부짖었다.
정통성이 약한 반정이 비극을 잉태하다
도덕적 가치를 내세우며 성공한 인조반정이었지만, 인조의 치세를 보면 그의 왕위등극과 함께 백성의 고난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인조 또한 마음 편히 왕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정통성 문제로 고민을 겪었고, 병자호란 뒤에는 청국의 요구로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게 되지 않을까 불안했다. 8여 년의 인질생활을 끝으로 소현세자가 귀국했지만 인조는 냉담하게 대했고,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돌연사한 소현세자에 대해 사인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정황으로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의혹은 아직까지도 불씨처럼 남아 있지만, 그가 설사 죽지 않고 살았다 해도 인조는 그를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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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정성희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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