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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 2-77 (107)
《주가(周苛)와 종공의 순절(殉節)》
항우는 그 대답을 듣고 크게 만족해하며 사신을 즉석에서 돌려보내고, 모든 장수들을 불러 명한다.
"유방이 오늘 밤에 항복을 하러 온다고 하니, 막사 장막(帳幕)뒤에 장수 몇 사람이 숨어 있다가
유방이 내 앞에서 북면(北面)하고 앉아 절을 하거든, 그 즉시 달려 나와 유방을 즉석에서 죽여
버리도록 하오. 그래야만 나의 원한이 풀리겠소."과연 항우다운 무지막지한 명령이었다.
이런 명령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장수 다섯이 각기 번뜩이는 장검을 가지고 장막 뒤에 숨어서
한왕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한편, 장량과 진평은 기신을 위장 투항하게 하는 동시에
한왕이 성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대왕을 먼저 떠나시게 한 뒤, 기신을 출발시키는 것이 어떻겠소 ?"
장량이 그렇게 말하자 진평는 손을 설래설래 내저으며 반대한다.
"지금 초군이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으므로, 대왕께서 성 밖으로 나가셨다가는 큰일나시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기신 장군에게 곤룡포(袞龍袍)를 입혀 동문으로 내보낼 때에,
횃불을 든 미녀들 5백여 명을 배행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그리하여 초군 병사들의 눈을 현혹케 하면 병사들이 모두 동문으로 몰려 올 것이니, 대왕께서는
그 기회를 이용해 평복으로 갈아 입으신 후에 서문으로 빠져 나가시면 무사하실 것이옵니다."
진평은 워낙 계교가 비상한 사람인지라, 그의 절묘한 술책에는 장량조차 감탄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기신이 한왕으로 분장을 하고, 5백여 명의 시녀들을 앞뒤로 나누어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게하고 동문 밖으로 나서니, 아니나다를까 초군 병사들은 한왕이 탄 수레보다는 저마다
아우성을 치며 미녀들 주변으로만 구름처럼 몰려들었다.한왕(漢王) 유방은 그 기회에
막료들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빠져나와 멀리 성고성(成皐城)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항우는 초저녁부터 유방이 나타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종이 달려오더니,
"유방이 이제야 나타났사온데, 앞, 뒤로 미녀 5백 명씩이나 거느리고 오는 중이옵니다."
하고 알리는 것이 아닌가 ?항우는 그 말을 듣고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유방이 본래부터 색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항복하러 오는 주제에
계집을 5백명 씩이나 데리고 오다니, 그자가 정신이 돌아버린 모양이구나."
그러면서 항우 자신도 미녀들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여, 몸소 횃불을 밝혀 들고 영문 밖까지 마중을
나왔다.유방은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미녀들과 함께 유유히 수레를 타고 오는데, 항우가 마중을
나왔는데도 수레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았다.
(저런 무례한 놈이 있나. 감히 내 앞까지 수레를 타고 오다니, 저놈이 제정신이란 말인가 ?)
항우는 매우 괘씸하게 여기며 수레 앞까지 다가갔지만, 수레에 타고 있는 사람은 그래도 말이 없었다.
항우는 적이 의아스러워 수레 위의 사람을 향하여
"한왕 유방은 항복을 하러 온 주제에 어찌하여 아무런 말이 없는가 ?"하고 큰소리로 호통을 질렀다.
수레 위에 사람은 그제서야 반쯤 가려진 휘장을 손으로 올리고 빠끔히 내다보면서,
"나는 한왕이 아니고 한나라의 대장 기신(紀信)이로다 ! "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
항우가 횃불로 수레위를 자세히 비추어 보니, 수레 위에 앉아 있는 인물은 비록 곤룡포를 입기는
하였으나 유방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였다."앗 ! 너는 누구냐 ?"
항우는 감쪽같이 속은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 울화통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들며,"이놈아 유방은 어디 가고 네놈이 왔느냐 ! "
하고 하늘이 무너질 듯한 호통을 내질렀다.그 호통이 얼마나 요란했던지 5백여명의 미녀들이
한꺼번에 "악!" 하는 비명을 질러대며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떠는 통에 한바탕 짧은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수레 위에 앉아 있는 기신은 항우를 오연히 굽어보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한왕을 대신하여 죽으러 온 사람이다. 대왕께서는 그대가 없는 사이에 팽성을 치려고 한신,
영포, 팽월 장군등과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조금 전에 팽성으로 떠나가셨다.
팽성을 공격하게 되면 그대의 가족들은 결코 무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항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면 오늘 낮에 보내 온 항표(降表)는 새빨간 거짓이었단 말이냐 ? "
"물론 그렇다. 지금이라도 용기가 있거든 광무(廣武)로 달려가 자웅을 결해 보라. 그러면 제아무리
역발산 기개세의 영웅이라도 우리를 당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항우는 눈앞에 닥친 죽음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기신의 충성심에 한편으로는 내심 감탄을 하면서,
"도대체 유방에게 이렇듯 충성스러운 너는 누구냐 ?"그러자 계포가 항우에게 말한다.
"이자는 한군(漢軍) 대장 기신(紀信)이라는 자이옵니다. 당장 끌어내려 목을 베어버리라는 명을
내려 주소서."그러나 항우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한다.
"나도 비록 많은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이 사람 같은 충신은 한 사람도 없지 않느냐?
저 자를 그대로 죽여 버리기는 그의 충성심이 너무도 아까우니, 순순히 타일러서 긴요하게 쓰고 싶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잘 설득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한 항우는 수레위를 향하여 타이르는 어조로 말을 하였다.
"그대의 충성심은 가히 본받을 만 하구나. 내 이제 그대에게 이르노니, 수레에서 내려와 곱게 항복을
한다면 내가 그대를 크게 중용하리라."그러자 기신(紀信)은 수레 위에서 항우를 오연히 굽어보며
큰소리로 꾸짖듯이 말한다."항우는 듣거라, 너는 워낙 멧돼지 같이 우악스런 자가 아니더냐.
내 어찌 너와 같은 무식한 자를 섬길 것이냐 ?또한 대장부가 어찌 임금을 섬기는 데 있어, 두 마음이
있을 것이냐. 목이 열 번 달아나는 한이 있더리도 금수 같은 네놈에게 항복할 내가 아니다.
나는 살아서도 한왕의 심복이었던 것처럼, 죽어 귀신이 되더라도 한왕을 위해 너같은 포악한 무리를
섬멸하는 데 힘을 아끼지 않을 것이니 쓰잘머리 없는 소리는 그만 지껄이거라."
항우는 그 말을 듣자 열화같이 분노하며 또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이자를 수레에 탄 채로 화형(火刑)에 처해 버려라 ! "
이윽고 수레와 수레 주변에 기름불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러나 수레에 타고 있는 기신은 불에 타 죽으면서도 비명을 지르기는 커녕,눈썹 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항우는 기신(紀信)을 화형(火刑)에 처하고 나서 계포와 용저를 불러 명했다.
"그대들은 정병 만명을 거느리고, 유방의 뒤를 추격하여 그를 이틀 안에 사로잡아 오라.
그자는 지금 영포, 팽월 등과 함께 팽성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계포와 용저는 즉시 군사를 몰고 떠났다.
그러나 밤낮 이틀간이나 추격을 해 보았으나 유방은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촌(精村)이라는 곳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척후병이 급히 달려와 말하는데,
"한왕은 지금 성고성(成皐城)에 입성하여, 지원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계포는 그 말을 듣고 용저에게 말했다."유방이 이미 성고성에 입성하였다면 우리가 추격을 해도
소용없는 일이 아니겠소 ? 그러니 우리는 차라리 본진으로 돌아가 팽성을 지키는 것이
현명할 것 같소이다."그러자 어느새 뒤따라 온 항우가 그 말을 듣고 새로운 군령을 내린다.
"성고성을 함락시키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영양성은 유방이 버려두고 떠났으니 공격을 하면
어렵지 않게 함락 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항우와 계포, 용저는 영양성으로 돌아와 그날부터 유방의 본거지였던 영양성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무서운 공격이었다. 남문 쪽으로는 계포가 공략하고, 서문 쪽에서는 용저가 쳐들어가고, 북문 쪽은
종이매가 공격을 하고, 동문 쪽에서는 항우 자신이 철포를 연방 쏘아가며 무섭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성을 지키고 있는 주가(周苛)와 종공은 성위에서 돌과 화살을 성밖으로 굴리고 쏘아대며
맹렬하게 저항하였다.이렇게 양군의 치열한 공방전이 닷새 동안이나 계속되었지만 항우는 암만해도
영양성을 손쉽게 점령할 수가 없었다.마침 그때 성안에는 위표(魏豹)가 머물러 있었다.
항우의 공격이 조금도 식지 않고 끈질기게 맹렬한 것을 보고, 위표가 주가와 종공에게 말한다.
"한왕은 이미 성을 버리고 떠나 갔는데, 두 장군은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우시오 ?
그러다가 항왕이 성을 점령하는 날이면 두 장군은 꼼짝없이 죽게 될 것이니, 차라리 지금 항복을
하여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주가(周苛)와 종공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며 소리친다.
"네 놈은 언제나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니, 세상에 개만도 못한 놈이로구나 ! 너 같은 놈을
살려 두었다가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니, 우선 네 놈부터 죽여 버려야 하겠다 ! "
하며 위표의 목을 한칼에 베어, 항우가 공략하고 있는 동문 위에 높이 매달아 놓고,
"누구든지 적과 내통하는 자는 이 꼴이 될 것이니, 모든 군사는 목숨을 걸고 성을 지켜라."
하는 방문을 높이 내붙였다.위표를 내통죄(內通罪)로 처단해 버리고 나니, 성을 지키던
한나라 군사들의 사기는 새삼스럽게 왕성해지는 것이었다.항우는 그 사실을 보고 크게 분노하였다.
그리하여 총력을 기울여 공격을 퍼부었지만, 영양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에 항우는 생각을 달리하여 항백, 종이매 등과 함께 새로운 공격 방안을 논의하였다.
"우리가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적은 끄떡도 하지 않으니, 무슨 새로운 방법이 없겠는가 ?"
항백이 대답한다."성을 함락시키는 데에 공격 이외에 무슨 방법이 또 있으오리까 ? 결사적으로
공격하면 제아무리 금성 철벽인들 어찌 함락되지 않으오리까.
이제부터는 방화 특공대를 조직해 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성벽을 기어올라가 성안 여기저기에
불을 지르게 하면 적들은 반드시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회에 많은 군사들이 일시에
성안으로 넘어 들어가게 하십시다.이렇게 하면 영양성은 반드시 함락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시간을 지체하여 한신의 지원군이라도 달려 오게 되면, 그때는 영양성을 영원히 함락시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항우는 그 말을 옳게 여겨 방화 특공대를 새로 조직하여, 제각각 기름방망이를 들고
성벽을 기어올라가 불덩이를 성안으로 던지게 하였다.아니나 다를까, 방화 특공대가 죽음을
무릅쓰고 성벽을 기어올라가, 곳곳에 불덩이를 던져버리니, 성안의 군사들은 일대 혼란을 일으켰다.
초군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동서남북 사방에서 성벽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쏱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는데,마치 수 많은 개미떼가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한군 대장 주가(周苛)와 종공은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밀리는 바람에 마침내는 종공은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어 버렸고, 주가(周苛)는
서문으로 빠져나와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초군 대장 용저가 그 광경을 보고 주가의 뒤를 맹렬히 쫒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방금 생포한 종공을 땅바닥에 꿇어 앉혀 놓고 꾸짖어 말했다.
"일개 장수에 불과한 네가 무슨 용기로 감히 나를 막아 내려고 했느냐.
그러나 그동안 네가 보여 준 가상한 용기는 크게 칭찬 받을만 하니,
네가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먹고 나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하면 나는 너를 살려주고
영양성 태수(太首)로 임명해 줄 테니 순순히 항복을 하거라."그러자 종공은 항우를 증오의 눈으로
노려보며 오연히 말한다."나는 성을 빼앗기고 포로가 되었으니, 이제 남은 일은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여러소리 말고 나를 빨리 죽여라 ! "항우는 종공의 충절에 내심 크게 탄복하였다.
(아아, 유방의 신하들은 열에 하나같이 이렇듯 충성스러운데, 나의 휘하에는 어째서 저런 충신이
한 사람도없단 말인가.)항우는 종공의 태도에 내심 감탄해 마지않으며, 계포를 은밀히 불러
특별지시를 내린다.
"종공은 충성심이 매우 강한 사람 같으니, 장군이 종공을 설득하여 순순히 항복하게 해보시오."
계포가 특별 지시를 받고 종공을 만나 설득하기 시작한다.
"장군이 전공을 세워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것은 대장부로서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일 것이오.
그러나 성을 빼앗기고 헛되이 죽어 가면 그대의 이름을 누가 알아 주겠소 ?
그러니 지금이라도 항왕께 항복하여,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어떠하겠소 ?"
그러나 종공은 도리질을 하며 조용히 대답한다."바른 길을 가다가 죽으면 마음이 기쁜 법이오.
나는 힘이 부족하여 성을 빼앗기고 말았지만, 충성만은 다하여 싸웠소. 그러니 여러 말 말고
나를 빨리 죽여 주시오.내가 설혹 지금 항우에게 항복을 한다 하더라도, 내일이면 항우를 배반하고
한왕을 다시 찾아가게 될 것이오."계포는 그 말을 듣고 나자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그리하여 항우에게 사실대로 고하니,"그자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한다면 그냥 살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니,당장 목을 베어버리시오." 하고 명한다.종공은 마침내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이 잘려 나갔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숙연케 하였다.
2-78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