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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 2-78 (108)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항우》
한편, 용저는 주가를 맹렬히 추격하였다. 주가는 얼마간 쫒기다가 문득 커다란 나무를 등지고
말을 멈추며 반격태세를 갖추었다.용저는 무작정 덤벼들기가 두려워 잠시 머뭇거리며
큰소리로 타이르듯 외치며 서서히 다가갔다."그대는 내 말을 들어 보라.
한왕은 이미 우리와 대적하다가 도망을 쳐버렸다.
게다가 그대는 성을 빼앗기는 바람에 그대의 가족들은 모두 우리 손에 포로가 되어 버렸다.
이제 그대는 무엇을 바라고 우리에게 끝까지 저항하는가 ?"
주가가 위연히 대답한다."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는 것을 충절(忠節)이라고 이른다.
내가 성을 빼앗긴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인데, 내 어찌 역적의 무리에게 항복까지 할 수 있을 것이냐 ?
이제 나의 마지막 힘을 쏟아 부끄럽지 않은 충심(忠心)을 보여 주리라! "그리고 번개같이
몸을 날려 용저에게 덤벼드는 것이었다.그리하여 두 장수는 정면으로 싸우기 시작하였다.
맹렬하게 싸우기를 20여합, 용저의 부하들이 그 광경을 보고 사방에서 벌떼처럼 모여드는 바람에
주가는 마침내 사로잡혀 항우 앞에 끌려 나가는 처지가 되었다.항우는 주가에게 타이르듯 말한다.
"그대와 함께 영양성을 지키던 종공은 순순히 항복하여 나는 그의 뜻을 매우 가상히 여겨, 그를
<만호후(萬戶侯)>에 봉해 주었다. 그대도 항복만 하면 이 자리에서 만호후에 봉해 줄 것이니
순순히 항복하도록 하라."주가가 대답한다."종공과 기신은 나와 함께 모두 한왕의 충신들이다.
그러한 종공이 어찌 부귀와 영화에 현혹되어 만고의 역적인 너에게 항복을 했을 것이냐.
네 놈이 아무리 거짓말을 씨부려 대기로 내가 속을 것 같더냐 ?"
그러자 항우는 크게 화를 내며, 주가를 즉석에서 기름가마에 넣어 삶아 죽여 버렸다.
그리고 난 뒤, 영양성안으로 들어가 한왕을 추종하던 성안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려고 하니,
항백이 크게 놀라며 항우에게 간한다."지금 우리의 적은 유방일 뿐이지 백성들은 아니옵니다.
백성들이야 성주(城主)의 입장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지, 결코 그들의 뜻대로 살아 온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을 죽여 없애게 되면 천하의 인심도 잃게 되는 것이오니, 그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정책을 펴는 것이 보다 긴요한 일이 옵니다. 폐하께서는 여기서 잠시 쉬셨다가 유방이 도망간
성고성(成睾城)을 공략하도록 하시옵소서.한나라의 지원군이 몰려 올 길을 차단해 놓고
성고성을 공략하게 되면 유방을 사로 잡기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전열(戰列)을 가다듬으며 성고성을 공략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때 한왕은 성고성에서 장량, 진평 등과 함께 다음 단계의 대책을 숙의중에 있었다.
"한신과 장이는 아직 조나라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영포와 팽월에게는 사람을 보냈지만 아직
아무 소식이 없으니, 이를 어찌 했으면 좋겠소.영양성을 지키던 주가와 종공은 성이 함락되며
순절(殉節)했다고 하니, 항우는 반드시 여세를 몰아 이곳으로 쳐올 것인데, 거기에 대해 어떤 대책을
세우면 좋겠는지 장량 선생께서 좋은 지혜를 가르쳐 주소서."장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영포와 팽월에게 사람을 보낸지 열흘이 넘었으므로 그들은 머지않아 오게 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대장 한 사람을 시켜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을 치게 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그러면 항우는 우리에게로 오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자신의 도읍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부랴부랴 팽성으로 방향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곧 왕릉을 불러 명한다.
"장군에게 정병 5천을 줄 테니, 즉시 팽성으로 달려가 공격을 하도록 하라.
그러면 항우가 우리로 오려다가 황급히 팽성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항우와 싸우지 말고
군사를 거두어 서둘러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라."한왕은 왕릉을 팽성으로 보내 놓고 나서도
항우가 언제 공격해 올지 몰라, 전에 한신이 만들어 놓은 전차(戰車)들을 사방에 배치해 놓았다.
한편, 항우는 대장 오주(吳舟)에게 영양성을 지키게 하고 자기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성고성 공략의
길에 나섰다.항우는 성고성 20리 밖에 진을 치고 적정을 탐색해 보니, 적이 성고성 주변의
개활지(開闊地)에 전차를 어마어마하게 배치해 놓았다는 것이 아닌가 ?
이전에 한신과의 접전에서 전차의 위력에 속수 무책이었던 기억이 떠오른 항우는 조심스럽게
일대 공세(一大攻勢)를 준비하고 있었다.그러던 바로 그때, 비마가 달려와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적장 왕릉이 어느틈에 나타나 팽성을 맹렬히 공격하는 중입니다."
팽성은 항우의 본거지인 만큼 항우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대책을 못 세우고 난감해 하고 있었는데, 또 다른 비마가 달려오더니,
"적장 팽월이 외황(外黃)을 비롯하여 우리의 영토 17개 고을을 장악하고 나서, 우리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습니다."하고 알리는가 하면 또 하나의 비마가 달려와,
"적장 영포가 한왕을 돕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지금 남계(南溪)를 건너고 있는 중입니다." 하고
알리는 것이었다.항우는 연달아 답지하는 이런 소식을 듣자, 크게 당황하며 항백과 종이매에게 물었다.
"적이 삼면으로부터 공세를 펴오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항백이 대답한다.
"팽성은 성벽이 두텁고 높은 데 다가 많은 수비 병력이 있으므로 왕릉이 제아무리 공격을 하더라도
함락될 염려는 없사옵니다.그러니 당장 우리가 팽성으로 달려가기 보다는 비밀리에 이곳을 철수하여,
일군은 외황으로 달려가 팽월을 때려부수고, 일군은 남계로 달려가 영포를 쳐부수기로 하십시다.
그 방법만이 지금의 위기를 수습하는 길이옵니다."
항우는 항백의 제안을 옳게 여겨 즉석에서 대장 조구(曺咎)를 불러 명령하였다.
"그대에게 군사 1만을 줄 테니, 성고성 서쪽에 은밀히 숨어 있으라.
내가 이곳에 없는 것을 알면 유방은 내가 다시 올 것이 두려워 반드시 도망을 갈 것이니,
유방이 성을 비우거든 그대는 성으로 진입하여 점령하고 내가 다시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라.
내가 다시 올때 까지는 유방과 싸워서는 안 된다."
항우는 명령을 내리고 난 뒤, 다음 작전을 위해 일단 그곳을 떠났다.
한편, 한왕은 항우가 한번도 공격을 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너무도 의아스러워 장량과 진평을 불러 물었다.
"항우가 싸워 보지도 아니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갔다니 어찌 된 일이오 ?"장량이 대답한다.
"항우는 남계에서 영포를 공략하고, 외황에서는 팽월을 공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이곳을
떠난 데 불과할 것입니다."한왕(漢王)은 장량의 말을 얼른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항우가 일시적으로 이곳을 떠났을 뿐이라니, 그러면 항우가 우리 성고성을 치기위해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이오?"장량이 다시 대답한다."그렇습니다. 대왕이 계셔서는
천하 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항우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다시 돌아 올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매우 불안하였다."그렇다면 그가 다시 돌아 왔을 때 우리는 그를 당해 내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장량이 다시 대답한다.
"매우 송구스러운 말씀이오나, 대왕께서는 오늘 밤 비밀리에 이곳을 떠나 한신 장군이 점령하고
있는 조나라로 가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그리하여 한신 장군의 도움을 받아 영양성과
성고성을 다시 탈환하는 재기(再起)를 꾀하시는 것이 상책일 것 같사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즉시 성고성을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그러자 장량이 다시 말한다.
"적이 성밖에 잠복해 있을지도 모르오니, 함부로 떠나셨다가는 큰일나시옵니다. 떠나시기 전에
경비 태세를 견고하게 확인한 연후에 떠나셔야 하옵니다."듣고 보니 과연 옳은 말이었다.
"유비 무환(有備無患)이라고 하더니, 선생이 일깨워 주시지 않았다면 내가 큰일을 만날 수도
있었겠소이다."한왕은 장량의 치밀한 계획에 고마워하며, 주발과 시무 두 대장을 불러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우리는 오늘 밤을 기해 한신 장군이 있는 조나라로 이동해 갈 것이니,
두 장군은 이제부터 각기 군사 5천 씩을 거느리고 성밖으로 나가, 적군이 준동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삼엄하게 하시오.우리는 두 장군을 믿고 전군이 이동할 것이오."
주발과 시무는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성밖으로 나와 경계를 삼엄하게 하였다.
항우의 명령을 받고 잠복해 있던 초장 조구는 멀리서 한나라 군사들이 대대적으로 이동해 가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였다.그러나 그들의 병력으로는 기습 공격을 하기에는 부족하기도 하려니와
항우로부터 <싸우지 말라>는 명령도 있었기에, 보고도 못 본 척 숲속에 깊숙이 숨어 있기만 하였다.
한군의 마지막 행렬이 성을 나와 그 끝이 보이지 않게 되자, 조구는 군사들을 몰고,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아니하고 성고성을 손쉽게 점령하였다.이렇게 한왕을 비롯한 한나라 군사들은
한 명의 인명의 손실도 없이 성고성에서 무사히 철수하게 된 데는 장량의 탁월한 작전 계획
덕분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성고성을 떠난 한왕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신이 점령하고 있는 조나라로 길을 재촉하였다.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행군을 계속하기는 이만저만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도망가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난이었다.어느덧 고통스러운 머나먼 행군의 끝이 보였다.
그것은 한신이 주둔하고 있는 성이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한왕은 성을 눈앞에 둔 50리 밖에
군사들을 주둔시킨 연후에, 수십기의 호위병만을 거느리고 한신이 있는 성안으로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한신과 장이는 어젯밤 술에 대취하여 아직 일어나지도 않고 있었다.
한왕은 진중을 돌아보다가 한신의 처소 안으로 들어와 보니, 그의 책상위에는 <원수의 인장>이
들어 있는 비단 주머니가 그냥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
(내가 하사한 원수의 인장을 이처럼 소홀히 간수하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
한왕은 한신을 매우 괘씸하게 여기며 <원수의 인장>을 자기 호주머니에 집어 넣고 나오자,
때마침 잠에서 깨어난 한신이 황급히 달려나왔다.한신은 마루위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아뢴다.
"대왕께서 행차하시는 줄을 모르옵고, 영접을 나가지 못한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한왕은 탄식을 하며 한신을 꾸짖는다."내 지금 진중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오.
장군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원수의 중요한 물건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저져 있으니
군기가 이렇게나 문란해졌을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만약 적이 나의 사신을 사칭(詐稱)하고
진중으로 들어 왔다면, 생각만 하여도 아찔한 일이 벌어질 뻔 하였소. 이런 정신 상태라면
어찌 통일 천하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겠소 ?"한왕의 노여움은 대단하였다. "..... "
한신은 대답을 못하고 머리만 수그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장이가 부랴부랴 달려와 마룻바닥에
말없이 머리를 조아린다.한왕은 장이를 호되게 꾸짖기 시작하였다.
"그대는 일군의 부장으로서 군사를 감독하고 독려할 책임이 있거늘, 내 지금 진중을 둘러보니
군기가 문란하기 이를데 없소. 이는 마땅히 군법 회의에 돌려 참형에 처해야 할 일이오.
그러나 그대들 두 사람은 지금까지의 공로가 컷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긴히 써야 할
인재들이기에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할 터인즉, 그리 알고 명심해 주기 바라오."
한왕은 단단히 못을 박아 놓고 본영(本營)으로 돌아오니, 한신과 장이는 두 손을 읍하고 따라오며
연방 용서를 구한다.그러나 한왕은 끝까지 묵묵 부답이었다.
이윽고 본영에 돌아온 한왕은 장수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폭탄 선언을 내린다.
"내 조금 전에 진중을 순찰하다가 <원수의 인장>을 주워 왔건만, 한신 장군은 아직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그런 사람에게 어찌 원수의 중책을 맡길 수 있으리오. 유능한 인재를 택해
원수를 새로 임명하기로 하겠소."한왕의 폭탄 선언을 듣고, 장량과 진평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장량은 즉석에서 한왕에게 간한다.
"한신과 장이의 직책을 박탈하시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인 줄로 아뢰옵니다.
그들이 책무에 태만했던 것은 사실이오나, 일시적인 과오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오니,
대왕께서는 너그러이 용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자신이 맡은 막중한 책무를 유기하고 술이나 마시는
사람에게 어찌 국가의 중책을 맡길 수 있으리오. 나는 선생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소이다."
한왕의 노여움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이에 장량은 다시 입을 열어 간한다.
"그 옛날 위(衛)나라에 순변(筍變)이라는 대장이 있었습니다. 위왕은 그가 어느 농가에서
계란 두 알을 빼앗아 먹었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노하시어 순변을 파직시키려고 했었습니다.
그러자 당시에 대학자였던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위왕에게 간하기를,
<사람을 쓰는 것은 마치 뛰어난 목수가 목재(木材)를 다루는 것과 같아서,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점은
버려야 한다고 일러옵니다. 소중하게 써야 할 장수를 계란 두 개쯤 빼앗아 먹었다고 파면을 시킨다면,
이웃의 적국에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를 얼마나 업신여길 것이옵니까.> 하고 말했더니,
위왕께서는 그제서야 자사의 깊은 뜻을 알아들으시고 순변의 파면을 취소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신과 장이의 경우도 순변의 경우와 무엇이 다르오리까. 바라옵건데, 대왕께서는
그들의 파직을 너그럽게 취소해 주시옵소서."
한왕은 장량의 간언을 듣고 나서 두 사람을 용서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또 다른 숙원만은 그냥 넘겨 버릴 수가 없어서, 한왕은 한신과 장이에게 따져 물었다.
"지난 날 내가 영양성과 성고성에서 항우의 대군에게 포위되어 있을 때, 그대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는가 ? "한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그 당시 제나라와 연나라는 변계(變計)가 극심하여, 도저히 군사들을 뽑아 낼 수가 없었던 것이옵니다.
그동안의 정벌을 허사로 만들 수는 없는데 다가, 대왕께서 멀고 먼 영양성에 포위되어 계시다는
말씀을 풍문으로만 들었지, 사실 여부를 정확히는 몰랐기 때문에 부득이 출병하지 못했던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제서야 그 문제에 대한 의혹이 풀렸다.그러나 아직도 또 다른 의혹은 그냥 넘길 수가 없어서
이번에는 ,"조나라를 정복한 지 이미 오래건만, 아직도 무슨 이유로 제나라를 그냥 내버려 두고 있소 ?"
하고 또 다른 문제를 따져 물었다.한왕이 한신에게 가지가지 의혹을 품게 된 것은,
한신의 힘이 날로 강대해 지는 데 대한 불안감에서 온 것이었다.
한신은 한왕의 질문을 받고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우리 군사들은 오랫동안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싸우느라고 그 당시에는 몹시 피로해 있었사옵니다.
제나라는 육국 중에서도 가장 강한 나라입니다. 피로한 군사로써 강한 나라를 치면 패배할 것이
분명하기에, 당분간 휴식을 취하면서 예기(銳氣)를 북돋우어 가지고 제나라를 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되었기에 이제부터라도 제나라를 정복하려는 중에 대왕께서 오셨습니다.
오늘부터라도 제나라를 평정시켜 육국을 모두 대왕의 봉토로 만들 것이오니 대왕께서는
지켜보아 주시옵소서."한왕은 그제서야 의혹이 해소되는 듯,
"그렇다면 원수를 그대로 유임시켜 줄 테니, 육국을 반드시 평정하도록 하시오."
하고 관대한 처분을 내려 주었다.한신이 사은 숙배하고 물러가자, 대부 여이기가 한왕에게 품한다.
"지금 우리에게 항복을 해 오거나 귀순해 온 각 고을의 왕자들을 그 고을의 후백(侯伯)으로
봉해 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면 모두들 대왕의 성덕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복종을 하게됨은 물론이려니와 장차 우리의 세력 확장에도 큰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육국 후백들의 인장(印章)까지 새겨 놓고, 불원간 여이기 노인에게
육국을 순방시켜 각국 왕자들을 그 나라의 후백을 봉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장량이 그 소식을 듣고 대경 실색하며 한왕에게 품한다."누가 그런 천부당만부당한 정책을
건의했는지는 모르오나, 그런 어리석은 정책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그 옛날 탕왕과 무왕시절에는 각국 왕자들의 생살권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지, 지금처럼 어느 한나라도 안정되게 장악하지 못 한 우리의 형편으로는 불가한 처사이옵니다.
게다가 우리는 아직도 항우와 정면으로 대결을 하고 있는 처지인 지라, 우리가 지금 각국의 왕자들을
후백으로 봉해 버리면, 그들은 우리와 초나라, 양쪽의 눈치를 보느라고 달가워 하지도 않을 것이옵니다."
한왕은 장량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여이기 대부가 그런 건의를 하기에 나는 육국 후백들의
인장까지 새겨 놓았는데, 선생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도 아니었소이다 그려. 그러니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소이다."그리고는 이미 새겨 놓았던 인장을 모두 깨뜨려 버렸다.
여이기 노인은 그 소식을 듣고 한동안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장량은 그 사실을 알고
어느 날 여이기 노인의 처소로 찾아가 머리를 정중히 수그리며 이렇게 사과하였다.
"소생은 그 정책을 대부께옵서 건의하신 줄을 모르고, 다만 국가를 위해 냉혹하게 비판했던 것이오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옵소서.무릇 천하를 논할 때에는 시세의 강약을 보아 판단해야 옳을 것이라고
생각하옵니다.지금 우리는 초나라의 영토를 절반 가량 점령하고 있음은 사실이오나, 항우의 세력은
아직도 막강하옵니다. 이러한 판국에 어찌 육국의 후백을 봉할 수 있으오리까 ?
대부께서는 한왕을 옛날의 탕왕처럼 생각하고 계시는 모양이오나, 우리의 힘은 아직 그만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보옵니다."여이기 노인은 장량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는 듯,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내가 너무 성급한 판단을 했소이다. 나는 오직 대왕을 위해 그런 건의를
했을 뿐 다른 뜻은 없었으니, 선생은 양해해 주소서.""소생은 선생의 충심을 모르는 바 아니옵니다."
여이기 노인은 그제서야 얼굴에 웃음을 띠며,"대왕께서는 이번에 항우에게 빼앗긴 영양성을
다시 탈환하려고 하시는데, 그일에 대해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하고 묻는다.
"그 계획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옵니다. 대부께서는 지금, 저와 함께 입궐하셔서, 그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도록 대왕께 건의 하시면 좋겠사옵니다."
장량(張良)은 여이기와 함께 입궐하여 한왕에게 품한다.
"자고로 임금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들이 먹고 사는 것에 정책의 근본을 두어야 하는 것이옵니다.
그런데 항우는 영양성을 점령하고도 창고에 가득한 곡식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러하니 대왕께서 영양성을 탈환하시거든 창고 안의 곡식을 모두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도록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민심을 완전히 돌려 놓으면 영양성은 영원히 우리의 소유가 되어 버릴 것이옵니다."
한왕은 여이기 노인에게 묻는다."장량 선생의 건의를 대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
"신은 장량 선생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옵니다. 하루라도 속히 영양성을 탈환하도록 하시옵소서."
세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자 한왕은 한신을 조나라에 머물러 있게 하고, 자기 자신이 3군을 거느리고
영양성 공략의 길에 올랐다.한편, 팽성으로 떠나간 왕릉은 팽성을 사방으로 에워싸고
성안으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애초부터 성을 점령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아니하고, 성안의 민심을
소란하게 만들어 항우를 유인해 오려고 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공격이었다.
왕릉이 10여 일을 두고 연일 공격을 퍼부으니 성안의 민심은 과연 소란해지기 시작하였다.
항우는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불안하였다.처음 계획대로라면 군사를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외황으로
달려가 팽월을 치고, 다른 한 패는 남계로 달려가 영포를 치려 했었지만, 자신의 본거지인 팽성이
위헙을 받고 있다고 하니, 계획을 변경하여 팽성으로 급히 달려 올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항우를 팽성으로 유인해 오려는 장량의 계획이 보기 좋게 성공한 셈이었다.
2-79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