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美슈퍼컴, 1초에 119경번 연산… 韓 ‘세종’은 세계 22위 그쳐
기술패권 시대 ‘게임체인저’ 슈퍼컴
AI 폭발적 성장으로 활용 증가… 美 전 세계 유일 엑사급 보유
중국-일본-영국 등 적극 투자… 韓 12대 보유, 톱10 진입 없어
슈퍼컴 6호기 사업도 지지부진… “국가 차원서 로드맵 짜 투자해야”
미국 오크리지국립연구소(ORNL)의 슈퍼컴퓨터 ‘프런티어’. 사진 출처 오크리지국립연구소 홈페이지
《1940년 11월 7일 오전 미국 워싱턴주의 터코마 다리가 바람에 출렁이다 갑자기 붕괴됐다.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현수교’로 주목을 받았으나 완공 4개월 만에 무너지면서 20세기 미국 교량 공학 역사상 최악의 참사라는 오명을 얻었다. 원인은 공기역학적 영향, 즉 바람에 의해 구조물이 변형되며 발생한 사고로 알려졌다. 그러나 강풍도 아닌 바람이 어떻게 멀쩡한 다리를 붕괴시켰는지 정확한 과정은 밝혀지지 않았다.》
지난해 국내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다리 붕괴 당시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초고성능컴퓨터(슈퍼컴퓨터)를 활용해서다. 연구팀은 슈퍼컴 5호기 누리온을 통해 사고 당시와 유사한 조건을 만들어 공기역학적 힘(바람)과 다리의 비틀림이 서로를 증폭시키며 사고가 발생한 전 과정을 재현해 냈다. 누리온은 다리를 130억 개 이상의 격자로 쪼갠 막대한 양의 계산을 3개월 만에 처리했다. 슈퍼컴퓨터의 발전으로 과거에는 시도조차 힘들었던 문제 해결이 가능해진 것이다.
● ‘페타’ 넘어 ‘엑사’급 개발 경쟁
미국과 일본, 중국, 유럽 등 전 세계 각국이 고성능 슈퍼컴퓨터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최근 생성형 인공지능(AI) 기술 발전과 더불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게임 체인저’로 중요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슈퍼컴퓨터는 당대의 컴퓨터 중 가장 빠른 계산 성능을 보유한 컴퓨터를 가리킨다. 그렇다 보니 시대에 따라 슈퍼컴퓨터의 성능 기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재 슈퍼컴퓨터의 성능은 페타플롭스(PF)로 주로 측정한다. 플롭스는 1초에 수행할 수 있는 연산의 수를 가리키는 단위다. 페타플롭스는 1초에 1000조 번을 연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약 PC 10만 대 정도를 합친 능력이다.
최근에는 페타플롭스를 넘어 엑사플롭스(EF)급 슈퍼컴퓨터 개발 경쟁이 치열하다. 엑사플롭스는 페타플롭스보다 1000배 빨라 1초에 100경 번의 계산이 가능하다.
슈퍼컴퓨터의 활용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슈퍼컴퓨터의 탁월한 숫자 계산 및 데이터 분석 능력을 바탕으로 암 치료, 자연재해 예측, 청정 연소 가솔린 엔진, 핵 연구 등 그간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다양한 연구 분야의 혁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최근에는 AI의 폭발적 성장으로 스마트도시, 자율주행 등 산업 현장에서도 활용도가 높아지는 추세다.
● 미국이 선두, 중국과 일본도 강국
슈퍼컴퓨터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곳은 미국이다. 매년 두 차례 슈퍼컴퓨터 전문가 집단인 비영리단체 톱(TOP)500이 발표하는 결과에 따르면 올해 11월 기준 미국 오크리지국립연구소(ORNL)의 ‘프런티어’가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2, 3위 또한 미국으로 올해 새롭게 등장한 아르곤 국립연구소의 ‘오로라’와 마이크로소프트 애저의 ‘이글’이 차지했다.
프런티어는 전세계 유일한 엑사플롭스급 슈퍼컴퓨터다. 성능은 1.194EF로 1초에 119.4경 번 연산을 할 수 있다. 프런티어 개발 프로젝트 디렉터인 저스틴 휘트는 “지구상 80억 명의 모든 인구가 계산기를 들고 동시에 계산해도 4년이 걸릴 계산을 프런티어는 1초 만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프런티어는 무서운 성능을 기반으로 몇십 년이 걸릴 기후 예측 시뮬레이션을 몇 주로 단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지구 기후 변화의 미래와 한 세대 이후의 날씨 패턴을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은 최근 발간한 슈퍼컴퓨터 분석 보고서를 통해 “미국은 슈퍼컴퓨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개발이나 운영, 활용 관련 개별 법률을 제정해 정부 차원에서 활성화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면서 “미국 에너지부(DOE) 산하 세 개의 국립연구소에서 서로 다른 엑사플롭스급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기술 패권 경쟁 중인 중국 역시 미국의 견제 속에서도 고성능 슈퍼컴퓨터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TOP500에 등재하지 않은 2대의 엑사급 슈퍼컴퓨터를 이미 구축해 가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도 강자로 꼽힌다. TOP500에서 4위를 달성한 ‘후가쿠’는 이화학연구소와 후지쓰가 공동 개발한 442FP 슈퍼컴퓨터다. 일본은 현재 후가쿠 차기 시스템으로 엑사플롭스급 슈퍼컴퓨터 개발을 진행 중이다.
영국은 리시 수낵 총리가 직접 나서 AI에 초점을 맞춘 슈퍼컴퓨터 개발로 방향을 잡았다. 영국 정부는 브리스틀대에 2억2500만 파운드(약 3600억 원)를 투입해 차세대 슈퍼컴퓨터 ‘이삼바드(Isambard)-AI’를 구축한다고 밝혔다. 19세기 영국 엔지니어 이삼바드 브루넬의 이름을 땄으며 엔비디아의 AI 반도체 5448개를 탑재해 영국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보다 10배 빠른 2.0EP 이상의 성능을 갖추는 것이 목표다. 영국 정부는 내년 여름부터 신약 개발과 에너지 분야에 슈퍼컴을 활용할 예정이다.
● 국내 슈퍼컴퓨터 구축은 지지부진
네이버 데이터센터 ‘각 세종’ 서버실. 네이버 제공
TOP500에 따르면 한국은 이탈리아와 함께 12대의 슈퍼컴퓨터를 보유하며 국가별 보유 순위 기준 7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글로벌 톱10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국내 시스템 중에서는 네이버의 ‘세종’이 TOP500 리스트에 22위로 이름을 올렸다. 국내 슈퍼컴퓨터 중 가장 높은 순위다. 이 외에 삼성전자의 ‘SSC-21’(28위)과 기상청의 슈퍼컴퓨터 ‘그루’(47위)와 ‘마루’(48위)가 뒤를 이었다.
각국이 고성능 슈퍼컴퓨터 확보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개발은 주춤하는 모습이다. 한국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것으로 평가받은 세종도 연산 능력이 32.97PF로 세계 정상급 컴퓨터와 비교하면 부족하다. 삼성전자의 SSC-21과 그루, 마루도 모두 그 전 발표보다 순위가 뒤로 밀렸다. KISTI가 보유한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의 연산 속도도 25.7PF로 올해 상반기 평가 49위보다 하락한 61위를 기록했다. 슈퍼컴퓨터도 국내에는 자체 제작할 수 있는 업체가 없다. 주로 인텔이나 IBM, 휼렛패커드엔터프라이스(HPE)에서 수입하고 있다.
차기 슈퍼컴퓨터 구축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정부는 2929억 원을 투입해 600PF급의 연산이 가능한 슈퍼컴퓨터 6호를 내년부터 운영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KISTI가 슈퍼컴 6호기 구축을 위해 네 차례에 걸쳐 사업공고를 냈지만 이달 7일 결국 최종 유찰됐다. 슈퍼컴퓨터의 핵심 부품인 GPU 반도체가 가격이 폭등하면서 기존 예산으로는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해서 선뜻 나서는 기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엔비디아 AI 반도체 ‘H100’ 기준으로 600PF의 성능을 내려면 최소 7000억 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하다. 과기정통부는 기존 예산으로는 6호기 구축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관련 부처와 추후 대처 방안을 논의 중이다.
김종원 광주과학기술원(GIST) AI대학원장은 “슈퍼컴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전략적 자산’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며 “정부는 머뭇거리지 말고 국가 차원에서 로드맵을 짜는 등 적극적으로 자력화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혜정 산업1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