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 시평 (16) 정현우 시인
은둔 속의 드랙퀸(Drag queen)적 수행과 죽음 (침례 1)
여성성을 가진 여성 필자가 여성적 남성에 대한 논의를 한다는 게 물과 기름과의 관계처럼 겉돌지만, 한국 시문학사 안에서 암시든 직설이든 종종 성 정체성을 언급하고 있는 시가 있기에 늦은 감이 있지만 범박하게나마 담론화해보고자 한다.
성 정체성 담론으로 봤을 때, 우리나라 가부장제의 문화권은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남성의 성 일탈을 허용하지 않지만 일부 성 일탈자들은 무의식 속에 억압된 여성성을 지우지 않은 채 때때로 가부장제의 규범 속에서 규정된 이성애적 결과들을 향해 혼란을 초래한다. 쥬디스 버틀러는 이런 성을 위시하여 “모든 성의 정체성이란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이고, 사회가 이상화시키고 내재화한 규범이며 반복적으로 수행되어 몸에 재각인되는 행위에 불과하다”라고 한다. 그에 힘입어 요즘 핫하게 뜨고 있는 정현우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창비시선, 2021) 에서 일부 시는 시인의 간접 경험인 젠더의 성 정체성, 즉 왜곡된 행위와 몸의 문화적 의미를 생산하고 수행하는 특징을 내보이고 있다.
그의 시에서 뿌리 내리지 못하는 여성적 남성은 “손톱에 무채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누나의 검은 치마를” 입거나 (「여자가 되는 방」), “오렌지빛 원피스를 입는” (「신이 우리를 죽이러 올 때」)등 드랙퀸적(Drag queen) 행위를 한다. 왜곡된 행위 과정에서 자신을 억제하지 못한 여성적 남성은 제 “사타구니에 불을 지르고 싶고” (「인면어」)“, “나의 보호색이 나의 적”이 되어 자신을 괴롭힌다. (「겨울의 젠가」) 그런데 이런 수행적 행위는 일회성으로 철회되는 게 아닌, 살아가는 동안 재생산된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여성적 남성은 우울증, 죽음 등 성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가부장제의 역사가 여성적 남성을 배제하거나 타자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한 사회적 규범에 짓눌린 여성적 남성은 외부를 향해 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숨어서 여성 복장과 악세사리를 수집하는 등 드랙퀸적 행위를 하곤 한다. 은둔 상태에서 수행하는 행위는 자신의 근원에 대한 거부가 아닌, 죽음 같은 삶을 살기에 허구의 가면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얼굴을 물어뜯는 개의 밤.
죽은 나를 아무도 반기지 않을 밤.
엄마의 가발을 뒤집어쓴 채
슬퍼하지 못해
마음대로 여자가 된다.
허락되지 않는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도,
아름답다라고 말하면
한올씩 익사한 시신에 머리카락을 심어주는 기분,
증오를 사랑이라 느끼는 기분,
반쪽 얼굴을 빗질하듯이
바람은 바람을 먹고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자해를 한다
비명은 슬픈 생각인지 알 수 없다
잠은 둘이 자는데
왜 두가지 성을 가질 수 없을까.
허용되지 않는 나의 태초는
죄에 가까운 점사(占辭),
여자가 될 수 없어
잠시 종교를 가진다.
- 「침례 1」,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진정한 성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남성도 여성도 아닌 죽기 직전의 호문쿨루스가 된다. (「달팽이 사육장 2」)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삶은 “죽은 자의 밤”이어서 살아도 사는 게 아니며 죽어도 어느 한 사람 그에 대해 슬퍼해 주지 않는다. 그만큼 가부장제 문화권은 드랙퀸적 성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이를 도외시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화자의 드랙퀸적 재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성적 영역의 통로를 보여준다. 이러한 화자의 수행적 행위를 두고 가부장제 문화권은 여성성에 대한 집착과 동일시라고 한다. 화자의 드랙퀸적 행위는 “엄마의 가발을 뒤집어쓰거나”, “서랍 속에 꽃”이거나(「서랍의 배치」) 아름답다는 말로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 “익사한 시신에 머리카락을 심어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시행에서 ‘엄마의 가발’과 ‘서랍 속의 꽃’ 그리고 “여성이 되어 변기에 앉아” (「항문이 없는 것들을 위하여」) 있는 행위는 여자의 제유를 드러내는 수사적 장치인데, 이는 남성인 화자가 타 영역의 통로로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화자는 여성성을 향한 모방 내지 남성성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성에 대한 모방 행위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만족감이 아닌 “가지를 쳐내도 징그럽게 자라나” (「옷의 나라」) 옷이 제 팔에 맞지 않는 것처럼 화자의 성 역시 완전한 성이 아닌 ‘반쪽 성’이라는 것을 재확인 시켜 준다. 화자에게 ‘허용되지 않는 태초의 성’이 무의식에 자리 잡게 된 동기는 ‘서랍’(자궁)으로 상징된 원래 엄마와의 사랑이 상실된 데 있다. (「서랍의 배치」) 이때 화자의 에고는 “죽은 사람의 옷(엄마)에 들어가” 하나로 합체되는 동일시를 보여준다. (「옷의 나라」) 그 과정에서 화자의 에고는 초자아로 변해 자신을 박해하고 우울증세를 보이게 되는데, 이 시에서 박해는 자기 파괴적 자해로 나타난다. 이를 확인 시켜 주는 것이 “잠은 둘이서 자는데/두 가지 성을 가질 수 없는 걸까”라는 화자의 진술인데, 이를 통해 보면 화자가 동성애적 성 정체성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화자가 몸을 구성하는 사회적 양식에 실패했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결국 화자는 성 정체성의 가면을 벗지 못하고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 하지만 그 종교 역시 진정한 성 정체성을 승화시키지는 못한다. “인간이란 무엇이냐는 신도의 질문에 신부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후쿠시마」), “할머니는 부적을 썼”던 것이다.(「수묵」) 부정적 심리를 가진 시인의 목소리는 아프고 고통스럽다. 이를 푸코식으로 말하면, 화자의 몸이 의미화의 결여를 보여주는데, 그 점에서 화자는 ”영혼마저 몸의 감옥이“되어버린 것이다.
정현우의 시는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에서 불구성과 부정심리를 나타낸다. 또한 그의 시는 진정한 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가상적 죽음으로 자신을 지운다. (「종언」, 「소멸하는 밤」, 「난 죽음 사람」) 그러니까 그의 시에서 여성적 남성이 진정한 성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는 지점, 그곳은, 시인의 친구(네)가 여성적 남성의 고통을 안고 죽음으로써 “이승에서 저승으로 돌아오는” 소멸한 밤의 공간이고, 징그럽고 아름다운 얼굴을 한 채 저 세상으로 가버린 영안실이기도 하다. (「시인의 말」 중에서) 시인은 친구의 지워진 손과 얼굴을 주워 담으며 시적 상상력과 눈의 표상화를(「스노우 볼」) 통해 은둔의 세월을 살다간 친구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젠더의 처절한 고통에 힘을 보태고 싶었을 것이다.
남성적 여성의 죽음은 가장 힘든 리비도의 과정을 순식간에 철회해버린다. 인간이 성적으로 분화되든 안 되든 젠더화된 특성들은 인간 본성을 가르는 도덕성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진리를 식별하는 눈을 가졌는지, 동물과 분변된 힘을 가졌는지가 중요하다. 결국 정현우의 시는 여성적 남성의 죽음을 통해 강철 같은 사회적 규범에 대한 이중 거부를 드러낸 셈이다. 그 점에서 그의 시는 가부장제 문화권의 규정된 성 규범을 허무는 데 일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정현우 시인 약력]
□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
□ ‘낯선’동인
□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창비시선, 2021)
□ 동주문학상 수상(2019)
[권영옥 약력: 시인, 문학평론가]
□ 경북 안동 출생,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 졸업(문학박사)
□ 저서 『한국현대시와 타자윤리 탐구』, 『구상 시의 타자윤리 연구』.
□ 시집 『청빛 환상』, 『계란에 그린 삽화』 , 『모르는 영역』
□ 전) 상지대, 아주대 외래교수, 현재) 《두레문학》편집인, 문예비평지 『창』편집위원
□ <두레문학상>수상.
□ 이메일 : dlagkwnd@hanmail.net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