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월이면 광주 망월등을 찾는다는, 경기도 부천에 사는 최영신(42) 씨 광주민준한쟁당시 7공수 33대대 소속 계엄군이었던 그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참상을 잊지 못한다. '80년 5월 17일, 전북 금마의 7i공수 33대대에서 근무하던 최 씨는 제대를 10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출돋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부대에서는 그전까지 폭동진압 훈련 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출동할 때는 M16자동소총과 길이 70센티미터 정도의 진압봉으로 완전무장한 상태였습니다. "부대를 출발한 그와 그의 동료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캄칸한 어둠을 뚫고 달리는 군용트럭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전남대학교 운동장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24인용 군용텐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 다음 낱부터 작전에 들어갔다. 당시 공수부대원의 경상도 출신 차출설과 환각제 복용설과 관련해 최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부대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단. 함께 출동했던 동료 중에 전남 화순이 고향인 제 동기도 있었으니까요. 환각제는 먹지 않았지만 평소 많은 부대원들이 술을 좋아해 수통에 넣어 가지고 다니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술을 먹고 작전에 투입된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5월 18일, 그는 대대본부에 남아 그곳으로 끌려오는 사람들에게 기합을 주는 일을 맡아했다. 전남대 운동장으로 잡혀 온 시위학생들과 시민들이 예외없이 머리가 터져 유혈이 낭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하나같이 머리가 터져 있을까 하고 의아해했었다고 최씨는 회상했다. 그는 단순 가담자로 보이는 몇몇 학생들을 몰래 탈출시키기도 했다.
나머지는 모두 군용트럭으로 어디론가 실려갔다.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그의 부대는 인근 조선대 교정으로 이동했고, 거기에서 3공수, 11공수와 합류했다. 최 씨는 도청 앞 집단발포 일이었던 5월 21일, 현장 작전중인 11공수 63대대장 조창구 중령이 조선대 학군단내에 설치 된 여단본부와의 무전교신에서 당시 11공수 여단장 최 웅 준장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실탄을 더 보내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여단장실 옆방 다른 무전기를 통해 들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중령이 별 두 개 여단장 무전기에다 실탄을 더 지급해달라고 욕설을 퍼부었겠습니까. "시만군들에게 밀려 퇴각하던 조선대 주둔 부대는 그가 속해 있던 7공수와 11공수가 뒤섞여 있었다.장비와 부식 그리고 일부 군인들을 실은 군용트럭은 무차별 사격을 가하며 교정을 빠져나갔고, 나머지는 화순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지원동 주남마을 근처에서 7공수와 11공수가 양쪽으로 주둔했다.
그곳에서 그는 양민학살을 목격했다. "산 중턱에 자린를 잡고 있는데 산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내려가 보았어요. 교복을 입은 한여학생이 한 손에 총탄에 의한 관통상을 입은 채 리어카에 부상당한 두 사람을 태워 끌고 왔더라구요. "11공수의 한 대대장이 그들을 수색하던 종 칼빈 총탄 두 개가 나왔다.그는 그들이 시민군이라고 여겼던지 한 명의 하사와 두 명의 사병에게 '밑에 내려가 처치해" 하고명령했다. 사병 중 한 사람은 그의 부하였다. "주둔지에 올라오면서 네 발의 총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부하사병이 을라왔어요. 사살했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그의 장황한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그 젊은이들이 모두 사살되었음을 직감했습니다. " 최 씨가 그곳에서 만났던 세 젊은이는, 공수부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15명의 사상자를 낸 '주남마을 양민학살사건' 때 부상당한 이들이었다.제대가 하루밖에 남지 않은 5월27일, 그의 부대는 도청 탈환작전을 위해 헬기로 광주 비행장 격납고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출등 준비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때 저는 작전에서 제외되었었어요. 그러나 진압 작전에 나선 동료부대원 상당수가 수류탄 2발과 실탄 3백60여 발로 무장한 채 출동했습니다. "최영신씨는 비록 직접 시민들을 사살한 적은 없지만 광주에 투입되었던 군인이었단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괴로웠다. 그리고 그는 '90년 1월 '주남마을 양민학살사건' 을 세상에 알렸다. 그후 그와 그의 가족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몇 개월 동안 도망다녀야 했다. '학살사건을 증언한 후 하루에도 수십 통씩 '죽여버리겠다'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왔고,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 그 행패를 견디다 못해 그는 주소지 변경을 하지 않은 채 이사를 했다.
그런데 현역 공수부 대원들이 이전 거주지에 찾아가 문을 때려부수는 등 행패를 부렸다. 경제적 어려움도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했던 그는 퇴직금으로 장사를 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돈마저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어려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 양심선언을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이 증언한 내용은 진정한 의미에서 양심선언이 될 수 없다고 여기는 최영신 씨 그는 진정한 양심선언은 무고한 양민들을학살하거나 구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증언 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그들이 가슴 깊이 간직해놓고 살아야만 하는 그 아픔들을 세상에 드러낼 때, 학살을 명령했던 자들이 비로소 역사적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시 5.18 시작에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 내용입니다 정호용 증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 계엄사령부는 충정계획에 따라 계엄이 선포되기 전인 5월 15일에 정웅등 31사단에 공수부대 숙영지를 마련하라고 명령을 내렸지요 정웅이 병력 요청한게 아니라 계엄사가 미리 계획에 따라 광주로 공수부대 보낸 것입니다
첫댓글 최영신 중사는 어거지 쓰기 좋아하는 소수의 그쪽 사람 같은데 그 말을 어떻게 믿나요?
7공수이면 명확하게 김대중의 사람, 광주사람 정웅 소장의 지휘 하에 있던 부대였습니다. 광주사태 당시 명확하게 광주향토사단 예하 부대였습니다. 그 사실 아시지요?
이런 얼간이같은 사람 처음 보네.7공수,11공수 공수부대인지를 전부 알거늘 앵무새처럼 정웅소장 지휘했다고 떠벌이네.이러면 전두환 죄가 희석되는줄 아는가보네
7공수가 광주사태 당시 누구의 지휘 아래 동원되었는가요? 그 명령 계통을 묻는 것입니다.
공수부대 출동을 누가 명한거냐? 이휘성 계엄사령관의 출동시킨줄 아는가?정웅 31사단장이 독단으로 했냐? 전두환 중정서리 자슥이 정호용 특전사령관 자슥이 출동 명령을 내렸잖아
전북 금마의 7공수는 광주시장 요청으로 광주계엄관 정웅 소장이 결정하여 동원시킨 것입니다. 7공수 동원의 최고 사령탑은 정웅 소장이었습니다.
5.17전국비상계엄확대와 함께 공수부대가 각대학을 점령했죠,휴교령을 내리고 말이요
그럼 7공수특전여단은의 바로 상관인 정호용특전사령관의 명령도 없이 정웅사단장이 출동시켰는가? 말같지 않은 소리하네
특전사령관의 역할은 병력 훈련이기 용병에 관여하지 못합니다. 훈련소 소장에게 작전권이 있는 것 보셨나요? 7공수 동원은 광주계엄관 직권으로 한 것입니다. 용병은 지역 사령관 권한이고, 훈련소로서의 특전사는 지역사령관 작전에 관여하지 못합니다.
그만 사기치쇼.5월 15일 전두환/정호용등이 계획하에 공수부대를 각 대학교로 출동시키고 31사단장에게 공수부대 숙영지 마련하라고 정호용특전사령관 증언이 있다잖소
당시 5.18 시작에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 내용입니다 정호용 증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 계엄사령부는 충정계획에 따라 계엄이 선포되기 전인 5월 15일에 정웅등 31사단에 공수부대 숙영지를 마련하라고 명령을 내렸지요 정웅이 병력 요청한게 아니라 계엄사가 미리 계획에 따라 광주로 공수부대 보낸 것입니다
정호용증언이 있는데 딴소리하는 역사학도 보면 저사람은 진실된 목회자인지 의심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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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합니다.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철저하게 폭도들이라고 세뇌교육을 했슬겁니다.그당시 그런일이 있었음을 시인하는것 자체가 용서하는거지만, 전혀 발뺌하는 지휘관과 전두환/정호용일당들은 절대 용서해줄수가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