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병대의 진주(晉州)주둔
(1) 진주(晉州)에 부대파견
麗順反亂事件이래 잔여공비(共匪)들이 智異山에 집결하여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진주'를 위시한 주변일대의 도시와 촌락에 출몰하여 살인, 방화, 및 약탈을 감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이 지역일대의 민심은 극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진주(晉州)는 지리적으로 보아 군사, 정치, 및 경제의 중요도시인 馬山, 鎭海, 및 釜山을 연결하는 도시로 육군에서는 일찍부터 이곳에 부대를 주둔시켜 공비들의 발호(拔扈)를 극력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비의 준동은 일익 심하여져서 '진주'를 점령한다고까지 호언하는 형세였다.
이런 가운데 1949년8월26알에 大邱에서 해병대 사령관 申鉉俊 대령과 육군 참모총장 丁一權 준장과의 사이에 맺은 협정에 의하여 해병대는 '진주'에 주둔하여 공비소탕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해병대는 金聖恩 중령이 지휘하는 1개대대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8월 9일에 '진주'에 진주하여 사범학교 기숙사를 대대본부로 정하였다. 이리하여 安昌寬 중위가 지휘하는 선발대와 각중대는 '진주'에 도착하여 '진주'를 중심으로 晉州郡, 昌寧郡, 및 咸安郡 일대를 경계담당지구로 하여 공비토벌(共匪掃蕩)에 임하였다.
진주 주둔 金聖恩부대의 편성 및 직위표
(2) 晉州주둔의 의의
해병대의 일부병력이 '진주'에 주둔하면서 수행하여야 할 임무는 智異山을 근거지로 하여 부근일대에 출몰하는 공비의 토벌만이 아니었다. 초창기인 이때 해병대 자체의 정신훈련과 아울러 전투훈련을 쌓아 강병이 되기 위하여 정진하였으며 또한 민심을 수습하는 선무공작에도 무척 노력하였다.
(3) 해병대의 활약
1) 정신훈련 손원일(孫元一) 해군참모총장은 해병대가 '진주'에 주둔하여 공비를 소탕함에 있어서 세가지 요지를 들어 훈시하였다. 1. 共匪의 조직이상으로 세포조직을 강화할 것. 2. 군, 경, 민의 혼연일체를 도모하는데 있어 해병대가 선봉이 될 것. 3. "일보가 백보다", "시작이 성공이다."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확고한 정신적 인 토대를 구축하여 공비들의 허울 좋은 선전에 빠지지 않는 굳은 신념을 가 질 것. 이것은 해병대가 공비토벌에 앞서 정신무장을 먼저 하여야 할 것을 강조한 훈시였다. 해병대 사령관 申鉉俊 대령도 "고금을 막론하고 술과 여인으로 인하여 영웅호걸이 그 신분을 그릇치고 불전자멸의 경우에 이른 자가 허다하였다. 해병대 장병들은 이러한 불미스러운 전철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훈시로서 각성을 촉구하였고 또한 "軍人이란 특권이 부여된 사람이 아니라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의무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국민을 사랑하는 것이 군인 본연의 자세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훈시는 해병대의 정신무장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2) 민심수습 해병대는 민심수습의 제일보로 민폐근절(民弊根絶)을 지상목표로 삼았다. 각자는 이를 깊이 명심하여 "한손에 총을 들고 또 한손에는 국민을 위하는 사랑을 가져라"고 하면서 나라와 겨례를 위한 군대가 되도록 훈련하였다. 이리하여 추호라도 민폐를 끼치지 않기에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은 곧 상부에까지 보고되었다.
9월28일 육군의 丁一權 준장과 해병대 고문 '하우스맨' 소령이 '진주'를 시찰하고 느낀바 소감으로서 "해병대는 일반민가에 대하여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을 뿐더러 진실로 국민을 애호하는 까딝에 '진주'의 일반시민들은 해병대에 대하여 높은 신뢰도를 갖고 있다."고 말하였으며 이를 상부에 보고한 것으로 보아도 '진주'에 주둔한 해병대는 완전히 부대장 金聖恩 중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국방부장관 및 주한미군사고문단장'로버-트' 준장 이하 주한미군사단 간부들도 해병대는 국민을 위하는 군대로서 발전하고 있음을 칭찬하였었다. 이와같이 "민폐를 끼치지 않는 해병대"는 이 지방의 주민들로부터 절찬과 협조를 아낌없이 받았었다.
3) 선무공작(宣撫工作) 晉州주둔에 있어서 해병대의 표어는 "백성없는 전투는 있을 수 없다" 라는 것이었으며 이는 단지 구호에만 끝인 것이 아니었다. 이 이념을 실천하기 위하여 부대장 金聖恩 중령은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온갖 방도를 강구하였다.
이에 부대에서는 선무공작반을 조직하고 9월1일부터 약 2개월 간 각지방을 순회하면서 우선 강연대는 공산주의의 흑막을 폭로하므로써 국민에게 그것이 왜 그릇된 것인가를 알게 하고 영화반은 영화를 통하여 국민에게 공산주의의 폭학상을 알렸었다. 또한 한걸음 더 나가 해병들은 농번기마다 노동력이 부족한 농민들을 많이 도와주므로써 해병대에 대한 신뢰감은 더 한층 깊게 되었다.
이와같이 '진주'에서 꾸준히 실천한 민심수습과 선무공작은 6.25 전쟁까지 이르는 동안 해병대의 정신무장의 주축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같은 훈련의 효과는 한국전쟁의 발발 이후 해병대가 참가한 각종 전투에서 역역히 나타났다.
4) 훈련과 경비 해병대는 '진주'에 주둔 당시 외출을 극히 제한하였다. 그것은 민폐도 우려되어 그렇게 하였지만 그보다 백전백승할 수 있는 강병을 육성하기 위한 맹열한 훈련을 실시하기 위하여서는 촌시(寸時)도 아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맹훈련만이 전승을 얻을 수 있다는 신념하에 주야를 가리지 않고 훈련을 계속하였다. 밤 중에 한시나 두시경이면 당연히 진주사범학교의 뒷 고지로부터 공비가 내습한다는 가정하에 비상소집을 실시하는 등의 각종 훈련을 계속하였다.
이와같이 민폐를 근절하면서 훈련에 열중하는 광경을 자주 목격한 주민들은 해병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을 갖게 되었으며 "다른 군대가 공비를 10명 잡으면 해병대는 수10명을 잡을 것이다."라고까지 확언하는 형편이었다.
그로 인하여 주민들은 이같이 신뢰할 수 있는 해병대와 함께 있다는 안도감에서 밤에 대문을 잠그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되어 점차 공비의 내습으로 인한 공포의 생활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러는 중에 가끔 내습하는 공비는 보이는 대로 해병들에 의해 사살되었다. 해병들은 주야를 불문하고 경비에 극력 유의하여 '진주시'의 치안에 만전을 기했으며 적정을 수색하기 위하여 수색조를 편성하여고 농민 혹은 노동자로 변장하여 부락에 1~2명의 해병을 잠복시켜 공비들의 세포조직과 그 동향을 탐지케 하고 공비의 내습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5) 적정과 배치 해병대의 '진주' 주둔으로 인하여 '진주'습격의 야욕을 이루지 못하는 공비는 '진주'습격을 기어히 감행해 보려고 그 병력과 장비를 매일같이 증강하고 있었다. 10월11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인 육군의 김백일(金白一) 대령으로부터 "경찰이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白雲山의 공비 약 300여 명이 '진주'를 습격할 것을 기도하고 있으니 해병대는 경찰과 협력하여 방어를 철저히 하라"는 통첩을 받았다. 해병대는 즉시 '진주'를 중심으로 병력을 재배치하였으며 견적필살(見敵必殺)의 사기는 충천하여 경계 및 방어에 임하였다.
(4) 共匪의 내습과 해병대의 활약
晉州市를 중심으로 1개 분대씩 경계초소를 배치한 해병대는 적정을 수집하는 동시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0월12일 이중업이라는 자가 지휘한 공비 약 80명이 晉陽郡 水谷面 土谷里에 내습하여 지서에 위협사격을 하면서 일부 공비들은 면사무소에 방화하였고 10월16일 폭도 4명이 '진주'와 '하동'을 연하는 통로의 요지인 '평원'지서 부근에 출현하여 민보단원들에게 "우리들은 해병대이니 경찰에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위협하였다. 또한 10월18일에는 해병대 제1분초에서 비무장공비 6명을 체포하였다.
이상의 적정과 입수된 정보를 종합판단한 결과 "공비들은 白雲山방면과 '협천'방면으로부터 내습하여 '진주'교외에서 합류하고 '진주'시내를 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같은 적정판단아래 해병대는 제1중대를 '진주시' 외곽경비에 임하게 하고 하사관교육대를 병사 서북방고지에 배치하고 제5중대를 병사 및 '진주시'의 경비에 임하게 하였다.
해병대의 철통같은 경비 및 방어로 인하여 수차에 걸쳐 패배한 이들 공비들이 막대한 손실을 무릅쓰고 '진주'에 내습하려는 목적은 무기를 탈취함과 동시에 晉州刑務所를 파괴하여 죄수들을 석방, 포섭하므로써 병력을 증강하여 사실상 '진주'를 또다시 여,순(麗,順)화하려는 데에 있었다.
이들 공비는 예상한대로 10월27일 01:40시 '진주'에 내습하여 왔다. 야음으로 인하여 적정파악이 매우 어려웠으나 적의 내습병력의 단위는 40~70명이었고 그 중에는 여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장비는 주로 M1소총, 99식소총, 및 칼빈소총과 약간의 중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복장은 일본 육군복이고 철모와 각반(脚絆)을 착용하였으며 신발은 일제 지가다비(地下足)를 신고 왼쪽팔에 흰 헌겁(白布)을 두루고 있었다.
적은 이미 초저녁에 공격목표에 가까히 접근한 후 02:00시에 공격을 감행하면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한 후 날이 새기시작하자 도주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행군은 산능선과 하천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부락주민들에게 발견되지 않았고 또한 도주를 전제로 한 내습이어서 사전에 집결지를 정해 놓고 행동하였기 때문에 공비들의 행방을 추적하기에 매우 어려웠다.
(5) 共匪들의 전투경과
晉州에 내습한 공비는 내부혼란반과 방화반으로 편성되어 10월27일 01:40시 해병부대 주변에 접근하여 위병소서쪽 기지부근으로 침입하여 왔다. 이때 제1중대의 병사내에는 4명의 해병들이 있었는데 그 중 1명은 보초근무 중이었고 그외의 인원은 취침하고 있었다.
공비들의 총성으로 이들 해병과 하사관교육대원은 일제히 기상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공비들의 내부혼란반은 병상에 누워있던 2등수병 이울우(李一雨)를 사살하고 방화반은 병사내에 휘발유를 뿌리고 방화하였다. 동시에 제2병사의 주력부대도 무장을 완비하고 혼전 중인 제1병사를 향하여 사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제5중대소속 2등수병 김희선(金熙善)과 제1중대의 3등병조 이우섭(李雨燮)이하 9명은 병기고에 침입하려는 적을 사격하여 영외로 격퇴시켰으나 이때 2수 김희선은 전사하였다.
한편 정찬교(鄭燦敎) 병조장 이하 8명도 이 공비에 집중사격을 가하여 그들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04:30시까지 계속하였다. 이렇듯 해병대 병사에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공비는 '진주'시내에 침입하여 '진주'군청, 재판소, 및 형무소 등에 방화하였다. 해병대는 곧 시가전에 돌입하였고 도주하는 공비를 추격하였다.
이때 사살된 공비(중대장급으로 추정되는 자)가 소지하고 있던 수첩에서 적의 기도를 알 수 있었다. 즉 河東방면에서 침입한 적 150명은 해병대를 담당하고 '산천', '협천'에서 내습한 공비 약 110명은 '진주'시내에 침입하여 각요소에 매복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해병대방면으로 내습한 적은 무력하였다기 보다 해병수색대가 그 동안 連日連夜 맹훈련을 거듭하여 쌓은 전투력의 증강이 이와같이 적의 내습을 격퇴할 수 있었다. 해병부대의 정면에 내습한 적의 주력은 여지없이 분쇄되었으며 이들은 '하동'방면으로 후퇴하고 일부병력은 '협천'방면으로 도주하였다.
'협천'방면으로 도주한 소수의 공비는 07:00시경에 實川지서를 습격하였다. 이는 해병대 병력을 '협천'방면으로 유인하고 또한 '하동'방면으로 도주 중인 적의 주력부대의 후퇴를 용이하게 하려는 양동작전(陽動作戰)에 불과하였다. 이와같이 해병부대로 내습한 적은 그때마다 완전히 격퇴당하고 말았다.
再次 있을 공비의 내습에 대비한 해병들의 임전태세는 항상 견고하게 되어 있었으며 공비들의 내습을 사전에 격퇴하기 위하여 해병대는 '진주'와 '하동'을 연하는 도로요소인 '신안리'에 1개 소대의 병력을 배치하고 '진주시'의 외곽요소인 '망운산', '조락', '개양', '상대리', '초전리', '왕봉', '비봉', '지내동', 및 '양곡' 등지에 분초를 설치하고 공비의 내습에 대비하여 철저히 경계하였다.
이같이 용전감투한 해병대의 공로에 대하여 국회의원을 비롯한 요로인사들이 내진하여 해병들을 위문하였다. 11월27일 주한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 준장이 해병대 사령관 申鉉俊 대령과 해병대 군사고문관 '파그레인'중위에게 해병대의 분투를 찬양하는 서한을 보내왔다.
'진주'습격의 뜻을 이루지 못한 공비는 11월14일 약 150명이 '산청'경찰서를 습격하여 왔다. 이때 부대장 金聖恩 중령은 즉시 전투태세를 갖추고 '산청'으로 출동하였으나 적은 이미 도주한 뒤여서 명에 의하여 추격은 중단하고 철수하였다. 12월13일에 약 100명의 共匪가 河東郡 '목계리' 및 '옥종면'부근에서 약탈행동을 자행한다는 정보에 접하고 申鉉俊 사령관이 직접 출동하여 내습한 공비를 격퇴시켰다.
이와같이 해병대가 滿4개월 동안 '진주'에 주둔하면서 민심수습, 선무공작, 훈련, 및 공비소탕 등에 많은 성과를 거두고 '진주'시민의 哀惜裡에 12월26일 '진주'를 출발하여 제주도(濟州島)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이미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陸軍 第14聯隊와 교대하기 위함이었다.
4. 濟州島 주둔
(1) 임무와 부대배치
해병대가 '진주'에서 공비를 소탕 중 제주도로 이동한 것은 1949년12월28일이었다. 이때 제주도는 "4.3사건"의 전화가 완치되지 못한 때였다. 濟州島에 도착하자 庚寅의 새해를 맞이한 사령관 申鉉俊大領은 장병을 대표하여 전도민에게"군인은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을 경애하자"라는 孫元一 해군참모총장의 檄語의 정신에 의거 주야로 교육휸련에 정진하는 한편 "道民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할 강오이니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내주기를 바란다"는 것과 아울러 "疲弊한 제주도 재건을 위하여 치안을 확보하고 경제부흥에 전력을 다 할 섯을 약속하는 바이다"라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申鉉俊사령관은 예하부대의 현황과 해안선일대 및 주요항만시설과 치안상황을 시찰하기 위하여 1월15일부터 7일 간 濟州邑 翰林, 摹悉浦, 西歸浦, 및 城山浦 등지를 순회하였다.
晉州에서 제주도로 주둔하게 된 해병대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1. 해병대 자체의 정신적 및 육체적 훈련 2.. 4.3사건이래 물심양면으로 피폐한 30만 도민에 재기의 힘을 주는 한편 그들을 번영 의 길로 이도하는 것. 3. 漢拏山을 근거로 공비를 토벌하는 것.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해병대원은 상하일치 단결하여 군무에 정려하면서 오직 강한 군인이 되는 동시에 성량한 국민이 되기를 도민에게 맹세하였다.
부대를 '제주읍'과 '모실포'에 배치하고 모실포부대는 직접 제주도일대의 경비에 임하였으며 제1대대는 '북제주군'일대를 담당하고 제2대대는 '남제주군'일대를 담당하였다. 그 밖에 '한림', '서귀포', 및 '성산포'에는 정보대와 헌병대를 배치하였다.
제주도 주둔 당시의 부대편성 및 직위표
(2) 정신훈련과 민심수습
해병대가 제주도에 주둔하는 6개월 동안에 실시한 정신훈련은 그 후에도 계속 해병대의 정신훈련의 근간이 돼 있다. 장교는 사생활에 있어 淸廉潔白하며 해병들에게는 모범이 되어 신뢰심을 갖게 하고 각자는 언제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므으로써 보람있는 최후를 맺을 수 있도록 교육하였다. 또한 특히 제주도는 "4.3사건"이래 共産主義에 대한 관심이 심대하였기 때문에 공비토벌에 앞서 우선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그들의 잔인한 만행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한다는 취지하에 이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모실포'일대는 기후가 불순할뿐만 아니라 보급품의 부족 및 병사의 파손 등으로 해병들의 고초는 형용키 어려웠으며 사기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았으므로 정신훈련은 군대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자하고 있었다.
이때의 苦境은 사령관 申鉉俊 大領의 시찰담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즉 해병대가 주둔한 곳에는 음료수도 적었으며 전기도 없었고 바람은 심한데 방시설은 고사하고 병사에는 창문이 없어 가마니를 둘러치고 있엇다. 이같은 환경 속에서도 해병은 동고동락하는 해병정신으로 일치단결하여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고난을 극복하면서 정신훈련에 정려하는 한편 도민들의 민심수습에도 적극 주력하였다.
1950년1월17일 申 사령관이 해군참모총장에게 보낸 민심동향의 보고서. 1. "4.3사건"이후 공비의 주동자는 대개 섬 밖으로 도주하고 현재 한라산에 잠복 중인 共匪는 주모자들의 모략선전에 넘어간 자들이며 2. 도민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개가 공비들의 혈연관계를 가진 연유로 과거 군에 대한 두려움에서 공포와 원한을 그대로 풀지 못하고 있다.
이와같은 그릇된 혼미하고 완강한 도민의 동향을 바로잡기 위하여 해병대로서는 共匪를 토벌하는 동시에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선결적인 중대과업이었다. 이러함에 비추어 3월28일 申鉉俊 사령관은 전장병에게 다음과 같은 훈시를 하였다.
"...(前略) 린방(隣邦) 중국이 빚어낸 비극의 실례와 산 교훈을 우리는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中略) 우리 大韓民國 國軍의 矜持를 가지고 국민으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아야 한다."
이리하여 사령관이하 각지휘관은 조례 시마다 민중을 애호하는 군인이 되어야 한다고 훈시하였으며 해병대 전장병은 국민들에게 온순한 양이 되고 적에게는 강한 사자가 되라고 훈시하였다. 이와 같은 정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계몽운동, 여성에 대한 태도, 및 도민을 위한 적극적인 원조 등에 주력하였다.
1). 啓蒙運動은 제주도에서 불행한 사건이 接踵하는 것은 도민들이 너무나 세계 및 조국의 움직임을 모르는 무지에서 생기는 것이라 판단하고 우선 이들에게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병대를 위시하여 해군본부 정훈과 및 보도과의 계몽연설이 1월25일부터 25일 동안 제주도의 각지에서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해병들 자신이 모범적으로 시간을 솔선 엄수함으로써 도민들의 시간관념을 배양하였으며 또한 해병은 도민들이 과거에 군인과 위정자에 대하여 품었던 오해와 증오심을 일소시키기에 각자 노력하였다.
2). 여성에 대한 태도는 여간 조심하였다. 원래 제주도는 三多(風多, 石多, 女多)로 알려진 곳이라 특히 여성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여기에 겹쳐 "4.3사건" 당시 대부분의 청, 장년이 공비와 함께 입산함으로써 여성의 수는 더욱 많아졌다. 어느 집이고 젊은 여자가 없는 집은 없었고 거리에는 주의를 기우려 보아야 겨우 볼 수 있을 정도로 남자들의 수는 적었다.
申鉉俊 사령관은 여성에 대한 불미로운 행동을 삼가하도록 장병들에게 각별히 주의하였다. 제주도로 이동할 당시 申 사령관은 훈시하기를 "군인은 여성옹호의 선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로되 軍機를 누설함이 없도록 하며 또한 군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각자 유의하라" 고 경고하였고 여성을 농락하거나 불의의 일을 맺는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으며 이 경고를 어기는 장병은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그의 방침을 시달한 바 있었다. 전장병은 申 사령관의 이 훈시를 명심하고 한시라도 이를 잊지 않고 행동하였다.
3). 도민을 위한 적극적인 원조는 이 역시 정신훈련이나 공비토벌에 못지 않게 노력하였다. 제주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비교적 문명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생활필수품의 대부분은 육지로부터 구입하여야만 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여기저기에 산재한 대소부락들은 대다수가 무의촌이었다. 여기에 착안한 해병대는 무의촌을 순회 진료하면서 환자들에게 따뜻한 治療를 베풀었다.
이는 과거 '진주'에서 실천한 "국민을 위하지 않는 군인은 있을 수 없다"라는 해병정신을 또 다시 실천한 것이라 하겠다. 한편 해병들은 파괴된 도로보수공사 및 하수도공사 등으로 도민들에게 적극 협력하였으며 농번기에는 조농작업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해병대의 모든 적극적인 행동과 그 실천은 도민들을 군에 대한 원한 및 공포 등을 제거하는데 큰 효과를 가져왔고 또한 해병들은 "아저씨" "누님" 등의 가족적인 대명사를 진심으로부터 사용함으로써 軍, 民 간의 친목은 더욱 두터워져 가고 있었다.
이러한 일례로서 "4.3사건"이래 공비에게 학살당한 가족들의 제사일에는 해병들도 그들의 유가족과 함께 진심으로 울고 슬퍼하면서 위로해 주었다. 이같은 모든 행동은 도민들의 과거의 군인에 대한 의혹감을 일소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해병대를 신뢰하는 도민의 수는 일익 증가하였다.
(3) 共匪討伐
1). 공비의 동태 제주도에 주둔한 해병대의 중요한 임무는 자체의 정신훈련과 도민들의 민심수습이라는 두가지 이외에도 또 한가지는 '한라산'을 근거로 한 공바를 토벌하는 것이었다. 즉 섬안의 공비를 토벌하면서 재산공비와 연락하려고 접근하는 선박을 감시, 포촉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공비들의 동태는 해안선에 연하는 통로로부터 6Mile밖에 있는 부락의 대부분은 소각되어 있었으며 '한라산'으로 출입하는 요소는 경찰의 엄중한 경계배치로 인하여 재산공비들은 부락과의 연락을 완전히 단절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독안에 든 쥐"격으로 이때 이들이 오직 연명할 수 있는 길이란 자수하는 길밖에 없었다. 즉 식량을 약탈할 수 없고 또한 엄중한 경계로 인하여 부락에 내습할 수도 없어 공비의 말로란 餓死아니면 동사하는 운명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공비들의 편성은 재산공비의 수는 무장폭도가 약 30명, 비무장폭도가 약 70명으로 도합 100명 내외였고 소지하고 있는 무장은 M1소총, 99식소총, 및 칼빙소총이 주무기였으며 무장폭도 1명에 비무장공비 2명으로 조편성이 되어 있엇고 탄약은 결핍상태에 있었다.
2) 共匪의 포진, 전술, 및 목적 在山공비들은 소위 그들의 제주도인민위원회 및 道당부 예하에 있었다. 당시 제주도인민위원장은 김달삼이었고, 自稱 제주도지구 인민유격대장에는 육군 제9연대의 도망병인 고성구가 所謂 군사령관으로 있었다. 또한 각면에는 면당부, 각리에는 리당부가 있어서 유기적인 조직을 통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漢拏山은 공비들의 최후적 근거지로서 야전병원까지 있었으며 일제시대에 건설된 '하찌마찌'도로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4門(衛兵所)을 목표로 하여 공비들은 활동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 외에 각면에 공비들과의 내통자를 두고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의 공비들의 在山유격활동의 목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민간인을 납치하여 감소되는 그들의 인원을 보충하는 것. 2.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피복, 무기 및 탄약 등을 탈취하는 것. 3. 선동으로 민심을 동요시키는 것. 4. 농경, 목축, 및 채신(採薪)을 위한 도민들의 활동을 위협함으로써 제주도의 경제력 을 저하시키는 것. 5. 수시로 부락을 습격하고 방화하여 후방의 치안을 교란시키는 것.
이와같은 목적을 이루려하는, `한라산`을 총본부로 하여 출몰하는 공비에 대하여 이를 소탕키 위한 최초의 토벌부대는 육군 제9연대, 제2연대, 철도경찰대, 및 서북청년단 등이었다. 그러나 이 토벌은 대개가 읍, 포, 면에 국한되어 있었고 소위 "하지마끼"도로를 중심으로 하는 '한라산'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은 해병대가 이번에 최초로 시작하게 된 것이었으나 이 토벌작전은 그리 용이한 것은 아니었다.
3) 자연의 장애와 적 색출 '한라산'의 재산공비를 소탕하려면 宇先 '한라산'의 대자연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라산'은 험산심곡에 밀림, 풍설, 폭우, 및 고저굴곡 등 천변만화의 산악지대였다. 이같은 대자연을 이용하여 암약하는 공비들을 토벌하는데 있어서 자연의 장애는 지휘관이 작전계획수립에 고려하여야 할 중요한 요소였다.
즉 화절기가 되면 초목이 무성하고 각종 초목의 악취로 인하여 취각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고 또한 바람이 많은 제주도인지라 초목이 바람에 흔들려 일어나는 잡음은 수색대원의 청각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특히 무성한 잡초 사이로 기어다니는 毒蛇는 수색대원의 행동에 적지 않게 지장을 주었다. 이러한 자연적인 조건들은 지휘관에게 동계작전을 실시하게끔 결심하게 하였다.
冬節期에 공비를 색출하는데 있어서 초대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취각(臭覺)이었다. 해병대 수색대원들은 특수한 훈련을 받고 생쌀과 건빵을 주식으로 금연하면서 동계 재산공비의 색출에 주야로 추위와 싸워야 했다. 공비들은 대개 野牛 또는 野馬 등을 잡아먹는 관계로 그들이 잠복하고 있는 근방에서는 괴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러한 냄새는 적을 발견하는데 효과적인 단서가 되었으며 또한 공비들이 지나간 뒤의 발자취와 나무가지가 꺾인 것으로 공비들이 통과한 방향과 시간을 추정하여 공비들의 잠복지점을 탐지하였다. 그리고 人糞의 냄새와 그 乾濕상태로 시간의 경과를 판단하고 행적을 탐지하는 때도 있었다.
이같이 해병대 수색대는 공비색출의 임무수행에 각종 방법과 정력을 다한 결과로 한 때는 40여 명의 공비가 한 곳에 모여 회의 중에 있는 것을 포촉하여 다대한 성과를 올린 때도 있었다.
4) 제1차토벌(1950년2월 - 6월) 해병대의 제1기토벌은 1, 2대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즉 제1대는 高吉勳 소령이 지휘하는 정보대(932부대)였는데 徐廷南 소위를 대장으로 하는 遊擊隊를 편성하고 兵曺長 陳斗台, 一曺 金益泰, 二曺 조기원을 분대장으로 하는 3개분대를 '한라산'서쪽 5백장군(5百將軍)과 1394고지 부근의 셋오름(三岳), 돌오름(石岳)을 중심으로 토벌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이 유격대는 2월5일 中文里, 西好里북방 16km지점에 있는 돌오름, 무스개(自然굴), 및 950고지에서 처음 접적하였다. 2월5일과 6일의 2일 간에 걸쳐 전투는 계속되었으며 해병대의 공격에 당황한 공비들은 자신들의 말로를 각오한 듯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주도면밀한 작전계획하에 공겨부대는 공비 8명을 사살하고 8명을 생포하였다.
해병대의 맹열한 공격에 제각기 도주하는 공비를 추격하면서 3월10일03:00시경 中文里 881고지 중복에 있는 공비의 야전병원을 기습하였다. 우선 병원 외곽을 포위하고 정찰을 마친 다음 공격을 개시하여 병원장 김포길과 道黨部 書記長 강철을 사살하고 다수의 문서를 압수하였다.
이어 '한라산' 서방 한대악 부근에서 1曺 金益泰가 지휘하는 遊擊分隊는 공비 약 40명과 격전을 벌였다. 이때 공비들은 유격대의 병력이 소수임을 알게 되자 유격대를 포위할 태세를 갖추면서 집중사격을 가하여 왔다. 그러나 기습분대장 1조 김익태는 용감히 부대를 지휘하면서 접전하였으며 이깨의 해병들의 사기는 포위된 상태에 있으면서도 왕성하였다.
해병들은 맹열한 사격을 공비들에게 가하였으나 공비들은 굴하는 기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유격분대원들은 휴대한 탄환이 소진되자 분대장이하 전 해병들은 백병전을 각오하고 공비들 속으로 돌입하여 해병다운 최후를 맺을 것을 결심하였다.
이리하여 분대장은 해병들에게 돌격태세를 갖추고 소지무기의 파괴를 명령하였다. 이는 수적으로 열세한 해병들이 백병전끝에 전원이 전사할지라도 하나의 무기라도 공비의 수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마침 이 지점 근방을 수색 중이던 兵曺長 陳斗台분대가 지원차 도착하여 공비를 강습하고 7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잔여 공비를 격퇴하였다.
이와같이 정보대에서 편성한 유격대원들이 맹활약하는 동안 모실포주력부대인 945부대는 金東河 소령의 지휘하에 '한라산' 산봉을 중심으로 주로 그 서쪽일대를 수색하였다. 제1토벌대대는 金秉鎬 대위가 지휘하고 제2토벌대대는 金載珠 대위가 지휘하였다. 이들 토벌대는 '한라산' 서북부 즉 '제주', 涯月, '한림'지구와 남부의 '안덕', '중문', '서기', 및 '남원'지구를 담당하여 본부를 '모실포'에 설치하고 토벌을 계속하였다.
이리하여 토벌대는 '하찌마끼'도로를 경계로 하여 공비들과 서로 전투하게 되었다. 이 도로는 산정까지는 공비들의 무대였고 주로 1394고지 '오백장군' '셋오름'부근에 숨어 지내고 있엇다.
해병 제2대대제6중대는 공비의 색출작전을 계속하던 중 3월15일 1394고지와 '5백장군'지역에서 공비의 '아지트'를 발견하고 기습하여 공비 2명을 사살하였다. 이어 3월22에는 제6중대가 '돌오름' 서남쪽 500m지점에서 공비 약 50명과 조우하여 3시간 여의 교전끝에 공비를 격퇴하였다.
이와같이 여러곳에서 공비들을 격퇴하면서 공비들의 활동무대를 압박해 갔다. 5월20일에는 토벌대의 본부를 '한라산'의 남쪽 米岳으로 이동하고 '쟝글'지대를세밀히 수색하여 공비들의 근거지를 향하여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제1기토벌작전은 6월말까지 계속되었다.
5) 제2차토벌(1951년1월~4월) 해병대가 수행한 제1기漢拏山共匪討伐作戰의 성공으로 인하여 공비들은 그 본래의 근거지인 한라산서남쪽의 궁형(弓形)의 주변을 버리고 한라산 중에서 가장 험준한 동남쪽 궁형의 주변으로 이동하였다. 더욱이 1950년12월부터 피난민이 제주도로 몰려들어 그 수가 격증하면서부터 재산공비들은 종전의 소극적인 활동에서 적극적인 활동으로 전환하여 민심을 소란케 하였다.
이리하여 1951년1월부터 4월까지의 폭도들의 출몰회수를 보면 1월에 10여회, 2월에는 14회, 3월에는 10회에 이르렀다. 이롷게 공비와 재산폭도들이 합세하여 출몰할 것을 미리 예상한 해병대는 일부 병력을 제주도에 파견하였다.
1951년1월14일 출동한 해병 제주부대는 제주도민의 총의에 의하여 "제주도군경민합동전투지휘소"를 설치하였다. 해병대를 중심으로 하고 또한 선발된 경찰전투대를 포함하여 4개소대의 공비토벌대가 혼성편성되었다. 이 토벌대의 총지휘관은 통영작전에서 대다한 공을 세운 權錫基 중위였다.
이리하여 제2차'한라산' 공비토벌작전은 1월17일을 기하여 시작되었다. 당시 '한라산'의 재산공비는 약 80명으로 추산되었다. 이들 공비는 '한라산' 중에서 가장 기후가 온화한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북으로는 '제주읍' 남쪽 구능지대에서 출몰하여 '남제주군' '서귀리'북쪽 '서호리'에 이르는 반월형원내를 수시로 유격하고 있었다.
이와같은 공비들의 출몰에 대비하여 토벌대는 '한라산'남쪽 주변 '서귀포'를 근거지로 하고 특히 '한라산'동쪽 제산악지대를 수색하였다. 토벌대의 제1소대는 1월27ㅇ일 '한라산' 동북방 御秉生岳에서 공비 20명을 포촉하여 40분 간 교전하여 공비 3명을 사살하고 많은 노획푼을 수거하였다.
제2소대는 1월29일 沙羅岳부근에서 공비 약 30명이 식량을 운반하는 것을 발견하고 기습하여 3명을 사살하였다. 2월10일에는 '사라악'과 明通岩 중간에서 공비의 '아지트'를 발견하여 이를 기습하여 공비 15명을 사살하였으나 동지점에서 무장한 폭토 60명에게 포위되었다. 그러나 해병들은 조금도 당황함이 없이 폭도들과 접전하였다. 때마침 지역일대를 수색 중이던 제1소대가 지원차 도착함으로써 폭도들을 협공하게 되자 폭도들은 도주하기 시작하였으나 이 교전에서 폭도 20명을 사살한 끝에 이들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一曺 徐在潤외 10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니 얼마나 치열한 전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3소대 역시 2월22일 '북악'부근에서 공비 40명과 조우하여 교전끝에 5명을 사살하였다. 이와같이 '한라산'공비토벌대는 3월말까지 작전을 계속하면서 50여 명에 가까운 공비를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와를 노획하였다. 이렇게 하여 재산공비의 주력은 여지없이 분쇄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월 10여 회에 걸쳐 출몰하던 공비들은 4월에 이르러 월 4회밖에 출몰하지 못하였다. 이와같이 1950년도와 1951년도의 2차에 걸쳐 수행된 공비토벌로 인하여 제주도의 치안은 점차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4) 6.25동란 발발과 해병대.
정신훈련, 민심수습, 치안확보, 및 공비토벌 등에 걸쳐 창설된지 일천한 해병대가 거둔 성과는 실로 다대하였다. 그러나 보다 큰 조국의 위기를 피와 땀으로 구출해야 할 때는 왔다.
1950년6월25일 이 날은 이 나라의 겨레로서 또한 세계평화애호국민으로서 잊어서는 안될 역사에 기리 남을 날이다. 해병대는 북한괴뢰군의 불법남침의 날인 6월25일을 제주도에서 비분과 흥분 속에 맞이하였다.
이리하여 제주도의 해안선 경비를 더욱 엄중히 하는 한편 6월25일 10:00시를 기하여 제주도는 비상계엄상태에 들어가고 해병대 사령관은 제주도 地區戒嚴司令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당시 해병대의 임무는 제주도지구 각기관의 전투력을 통합하여 협동을 긴밀히 하여 도내의 치안을 확보하고 해안감시 및 해상경비에 철저를 기함과 아울러 제주도에 상륙하는 적을 미연에 방지하고 해상에 출현하는 적을 발견 즉시 포촉, 섬멸하는 것이었다.
해병대가 이와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남침한 적 인민군은 일사천리로 남진을 계속 하여 왔다. 이러한 국내정세에 처하여 해병대는 적의 남침을 저지할 임무를 띄고 중부전선에 참가하기 위하여 우선 제3개중대가 극비밀리에 7월15일 제주항을 출발하여 群山, 長項戰鬪에 참가하여 남하하는 적과 격전하여 적에게 커다란 타갹을 가하여 敵狗驅逐의 선봉으로서 활약하게 되었다.
한편 濟州道의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新兵 3,000명을 훈련하여 1個聯隊로 편성하고 申 司令官의 직접 지휘하에 9월6일 釜山에 도착하여 9월15일의 역사적인 "仁川上陸作戰"에 參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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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해병대의 역사를 잘배우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