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코, OPENTTD 처럼 하다가는 피똥싸는 A-Train 시리즈. 역 주변이 개발 안되면 5000의 매상은 불가능
A- Train 시리즈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A-Train 시리즈는 OPENTTD나 Railroad Tycoon, 로코모션과 같이 비교해 봤을 때, ‘철도게임’이라는 공통의 틀은 같지만, 속을 뜯어보면 매우 판이하게 다른 게임입니다.
후자의 세 게임이 철도화물이나 여객을 공급처와 수요처에 날라다 주는 운송에 치우쳐 있다면, 전자의 A-Train은 철도운송은 부수적인 거고, 임대빌딩, 호텔, 아파트, 공장, 백화점등을 지어 이들 부동산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데 철도를 사용해야 합니다. 즉, 간단히 말하자면 후자의 게임들과는 다르게, 도시개발의 목적으로 철도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
일본철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방식은 오다큐, 한큐, 메이테츠, 긴키 등 일본의 대형 사철회사가 즐겨 써먹는 방식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오다큐의 통근열차를 타고, 오다큐의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고, 오다큐의 호텔에서 하루를 마친다. 라는 이러한 순환체계는 사철회사의 보유자산에 따라 차이가 있을 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같습니다. 그런데, 사철회사의 이런 영업 흐름을 단 한 사람이 만들어 전파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이 없었으면 일본 사철은 팬터그래프 없는 전동차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1. 고바야시 이치조의 롤러코스터 인생?
미쓰이은행 감사팀 재직때 고바야시 이치조
‘철도를 바탕으로 도시를 개발한다’라는 하나의 명제를 만든 사람은 지금의 한큐전기철도 초대 사장을 역임한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1873.1.3~1957.1.25)란 사람이었습니다.
아먀나시현에서 출생한 고바야시는 대학생일 때 신문사에 자신의 소설을 기고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지만, 작가로 성공하기란 쉬운 일은 어렵지요? 그래서 대학 졸업후 미쓰이은행(現: 미쓰이스미모토 은행)에 들어갔지요.
약관 34세에 미쓰이은행 도쿄 본점 감사팀 주임까지 승진할 정도로 은행일에도 수완을 발휘했지만, 예전 상사였고, 키타하마 은행을 설립한 이와시타 기요차카에게 낚여서 미쓰이은행을 때려치우고 키타하마 증권 오사카 지점 지배인으로 명함을 바꿔 오사카에 부임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 미쿡부터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일본도 예외는 아니어서, 키타하마은행의 증권회사 설립은 백지화되었고, 자연스럽게 고바야시는 백수가 됩니다. 백수가 된 고바야시는 손만 쭉쭉 빨던 중, ‘미노오-아리마 전기철도’의 미래가치를 발견하고, 이와시타를 설득, 공황이어서 캐똥값 이었던 회사 지분을 인수하여 경영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신선한 다카라즈카의 공기를 오사카에?
개업 당시의 우메다역
1906년에 설립된 미노오-아리마 전기철도는 우메다역을 중심으로 다카라즈카, 미노오, 아리마 등의 인근 도시를 전철로 연결하여 운송사업을 벌이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일본정부의 사철 억제 법규인 궤도법 크리에, 불황으로 인한 투자자 전멸, 그리고 ‘허허벌판인 다카라즈카의 공기를 오사카로 수송? ㅄ인증?’ 이라는 조소를 지역민들과 경쟁 철도회사 관계자에게서 듣고 있었지요. 게다가 계획은 계획이고 자금난으로 도 못 뜨고 있었습니다.
미노오-아리마 전기철도의 인수자 키타하마은행측 관리인으로 파견된 사람은 당연히 고바야시였습니다. 고바야시는 우메다~다카라즈카~미노오간의 노선을 1910년에 개업함과 동시에, 궤도법 크리를 피하기 위해 회사명을 미노오-아리마 전기궤도로 바꿨습니다. 도쿄도라면 중앙정부의 다굴을 맞았겠지만, 다행히 간사이권에는 영향력을 제대로 미치지 못해,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했습니다.
3. 승객은 전철이 창조한다
앞서 ‘다카라즈카의 공기를 오사카로 수송 하겠네염?’이라는 비난은 고바야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했습니다.
1. 미노오에 동물원 열었어염! 전철로 편리하게 놀러오세요!
2. 우메다에서 편리하게 다카라즈카로 온천욕을! 전철값+온천욕+연극+카레를 단돈 몇십엔에!
3. 오사카의 집값이 비싸다고요? 그럼 우리 회사가 제공하는 교외 주택을 할부로 사세염! 오사카까지 30분! 주택할부는 우리가 최초입니다!
즉, 노선 예정지의 토지를 헐값에 매수하고, 철도역을 주변으로 한 주택, 소매점, 유흥시설을 건설, 회사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도시개발을 일본사철업계 에서 최초로 시작했습니다.
공기수송노선이 될 거라고 낄낄대던 업계 관계자들은 미노오-아리마 전기궤도의 수송인원과 영업수익이 예상치의 2배를 뛰어넘고, 다카라즈카, 미노오로 놀러가는 사람과 우메다역으로 몰려가는 통근객으로 인해 가축수송인 걸 보고 경악했습니다. 사철회사들은 운송수입으로만 먹고사는 기존의 영업방식을 버리고, 고바야시의 부동산+철도 결합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했지요.
자신감을 얻은 고바야시는 회사의 명칭을 한큐 급행철도(阪急)로 변경하고, 고베본선을 건설했습니다. 한큐의 앞날은 뻥 뚫린거나 다름없었지요.
이 시기에 그가 남긴 유명한 발언이 있습니다. ‘乗客は電車が創造する’ (승객은 전철이 창조한다)
4. 철도역과 연계된 최초의 백화점
철도+부동산 연계의 최초이면서 성공적 사례: 한큐백화점
승승장구하는 그는 1920년에 한큐 우메다역에 일본 최초로 철도역과 연계된 백화점-한큐백화점을 건설합니다.
1층에는 도쿄에서 섭외해 온 시라기(白木)분점, 2~3층은 한큐 슈퍼마켓과 한큐직영 푸드코트를 열었습니다.
당시 업계 관계자들은 “뭐 하러 그런 짓을?”이라는 회의적인 반응이었고, 전 세계에서 철도회사가 유통업을 겸업하는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시는 “무식해서 도전할 수 있으니 햄볶아염” “장소가 편리하면 손님들이 올 겁니다” 라는 개념으로 역시 성공했습니다.
이후 지속적으로 호텔업으로의 진출, 야구단 창립, 도호(東寶)영화사 창립 등의 활발한 사업을 벌였는데, 특히 야구단과 다카라즈카 극단의 경우 그의 임종 때, ‘다카라즈카 극단과 한큐 브레이브스는 팔지 마라’라고 할 정도로 애착을 보였습니다.
5.한큐사장에서 정치계로의 진출도
1934년에 한큐 사장직에서 물러난 후, 고바야시는 도쿄전력회사에 스카우트되어 방만 경영에 빠지고 있었던 도쿄전력의 경영을 재건하고, 쇼와 비료를 설립하는 등, 한큐철도뿐만 아니라 일본 경영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과거부터 있었던 키보드워리어적 성격도 여전해서, “국철이 민영화되면 개발 사업도 가능해서, 자금조달도 자유롭게 실시할 수 있고, 창의와 책임이 박힌 적극적인 경영을 할 수 있다.”라고 일본 국철의 민영화를 주장하기도 했는데, 당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시점에서, 자칫하면 코로 우동 먹을 수 있는 발언이었습니다.
정계의 인물에게도 주목 받아, 상공대신과, 국무대신을 역임하였지만, 전쟁 중 정치인이었다는 이유로 추방되어, 도호 영화사 대표직만 맡던 중, 1957년 1월25일, 이케다시(池田市)의 자택에서 급성심장성 천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대중을 노동자로 보지 않고, 소비자로 보고, 소비자가 즐겁게 돈을 쓰게 만든 고바야시 이치조는 고령화를 통한 인구감소로 철도사업이 새로운 국면전환의 필요성을 맞은 지금, 다시 주목 받는 인물이 되고 있습니다.
한큐가 세운 다카라즈카 극단. 창립때부터 지금까지 여성단원으로만 구성. 대표작은 베르사유의 장미.
한큐 기업광고. 하단의 자막은 한큐의 계열사.
전철을 바탕으로 계열사의 활동을 보여주는 컨셉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전 디시인사이드 철도갤러리와 철도동호회에 동시 게재하기로 했는데, 여기에 게재하는 것을 까먹었군요.
늦게나마 올려봅니다.
출처
1. 임채성(2007), 일본 동경권 대형사철의 경장구조와 경영비교분석, 한국철도학회논문집 v.10
2. 에이카와 고우키(2007),고바야시 이치조의 지혜, KK 베스트셀러즈
3. ja.wikipedia.org/wiki/小林一三
4. http://www.hanshin.co.jp/company/about/history02.html
5. http://from-osaka.up.seesaa.net
6. http://fashionjp.net
첫댓글 저만한 비즈니스 마인드가 있지도 않으면서 '승객은 철도, 공항이 창조한다'라고 외치는 자들이 많은 나라에 있는 게 아쉽죠.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사실 한큐그룹이 1970년대부터 긴테쓰한테 밀리기 시작했죠. 1964년에 소고 신지 총재가 신간선 만들고부터 조금씩 맛이 가기 시작하더니 1970년대부터 긴테쓰한테도 밀리고....현재는 아마 일본 최강의 사철기업집단이 긴테쓰로 알고 있습니다. 요새 긴테쓰도 맛이 반쯤 간거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