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왔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소 3총사
사자도 찔러죽이는 아프리카 물소
미국 원주민의 상징 아메리카 들소
눈물겨운 새끼사랑의 사향소
2021년 소의 해가 밝았습니다. 부지런함, 우직, 성실, 온순, 희생... 열두 띠를 상징하는 동물 중에서 소처럼 긍정적인 모습으로만 그려지는 동물도 없을 것입니다. 농사일에 부리고, 젖도 짜내고, 사람들의 식생활을 위해 상당수는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도축장에서 생을 마감하는 소에게 사람으로서 갖는 근원적 미안함과 고마움의 감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드는데요.
우리에게 친숙한 소는 오랜 세월 인간에게 길들여진 가축입니다. 하지만 길들여지기 이전의 모습으로 여전히 지구촌 야생의 초원과 벌판을 누비는 소들이 있습니다. 소띠해를 맞아 날 것 그대로의 야성미가 철철 넘치는 야생의 소 3총사를 소개하는 시간으로 준비했습니다.
◇소의 얼굴을 한 괴수...사파리 5대 천왕 아프리카 물소
왕방울만한 눈, 뜨거운 김을 뿜어내는 콧구멍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황소·젖소와 얼굴 형태가 빼닮았습니다. 하지만 검은 피부에 머리 위에는 끝이 말려올라간 더블유(W)꼴의 뿔을 얹은 이 짐승, 아프리카 물소입니다. 버팔로(Buffalo)라는 이름으로도 친숙한 이 소는 먹고 먹히는 삶의 혈투가 벌어지는 아프리카 사바나 드라마의 주연이기도 합니다. 사자·표범·코끼리·코뿔소와 더불어 흔히 ‘Big 5’라고 불리는 사파리 5대천왕입니다
사바나에서 무리지어 쉬고 있는 아프리카 물소. 날카롭게 구부러진 뿔은 사자의 피부를 꿰뚫는 치명상을 입히기도 한다. /Malingering 플리커
남아프리카 현지 통화인 100란드(약 7410원)에도 등장합니다. 아프리카 물소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킹’의 오프닝 부분에 잠깐이지만 강렬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주술사 라피키(맨드릴 개코원숭이)가 갓 태어난 아기사자 심바를 축복하러 사자 무리에게 다가갈 때 뿔이 달린 머리를 아래로 반듯이 숙이며 원로에 대한 예를 깍듯이 갖추는 장면이죠. 하지만 만화는 만화일 뿐. 현실의 아프리카 물소는 우람한 덩치와 파워에, 위협을 받으면 뿔과 발굽을 살인병기처럼 휘두르는 파이터입니다. 식성만 초식이지 사실상 맹수나 다름없는 아프리카 물소는 사자의 주된 사냥감이기도 합니다. 누우나 임팔라, 얼룩말보다 월등하게 덩치가 크다보니 한 번 사냥에 성공하면 오랫동안 배불리 먹을 수 있거든요.
아프리카의 한 평원에서 암사자가 아프리카 물소의 등에 올라타 숨통을 끊으려 하고 있다. /Demetrius John Kessy 플리커
하지만, 사자들의 어설픈 공격은 재앙을 재촉합니다. 물소의 숨통을 끊으려다 되려 갈고리처럼 날카롭게 휜 뿔에 피부를 꿰뚫리는 치명상을 입거나, 뒷발굽에 치이고 밟혀죽는 일이 드물지않게 일어납니다. 이러다보니 사자들의 물소 사냥은 백수의 왕답지 않습니다. 한 마리에 십여마리씩 달려드는 인해전술 작전을 펴거나, 갓 출산해 몸을 추스리지 못한 어미와, 채 일어나지도 못한 새끼를 덮치는 가정파괴 작전을 벌이지요. 글로벌 여행잡지인 콘데나스트 트래블 매거진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 10종류에 독사 블랙맘바·바다악어·독개구리 등과 함께 아프리카 물소를 포함시키면서 “900㎏이 넘는 이 괴수는 아프리카에서 어떤 짐승보다도 사냥꾼을 많이 죽인다”며 “희생물 주변을 빙빙 돌며 괴롭히다가 시속 56㎞로 돌진한다”고 했습니다.
관련 동영상: ‘감히' 아프리카 물소의 영역에 들어와 얼쩡거리던 어린 사자 한 마리가 물소 뿔에 받혀 공중에 내동댕이쳐지는 장면.(내셔널 지오그래픽)
◇절멸 위기서 국가공식 상징으로 牛생역전...아메리카 들소
아프리카에 버팔로가 있다면, 대서양 건너 북미 대륙에는 바이슨(Bison), 아메리카 들소가 있습니다. 물소와 들소의 구분은 아주 어렵지는 않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 확실히 다르거든요. 일단 W자로 굽었다가 위로 올라가는 아프리카 물소 뿔과 달리 아메리카 들소는 반원을 그리며 위로 뻗은 형태입니다. 초승달과 그믐달이 마주보는 모양새랄까요. 적도 아래 주로 서식하는 물소와 달리 겨울철 칼바람과 눈보라에도 버텨야 하는 들소의 털은 한결 두껍습니다. 머리쪽 털은 사람처럼 흑발에 가까운 색인 반면, 몸통과 허리부분 빛깔은 상대적으로 옅은 고동색입니다. 들소가 대중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된 계기 중 하나는 30년전 개봉한 영화 ‘늑대와 춤을’입니다.
아메리카 들소의 위풍당당한 모습. 머리부분과 몸통부분의 털 모양과 빛깔에 확연한 차이가 있다. /Dan Djurisin 플리커
주인공 미군 장교 존 던바(케빈 코스트너)는 원주민 수우(Sioux)족과 함께 들소 사냥을 하고, 자칫 성난 들소에 받힐뻔한 원주민 소녀의 목숨을 구해줍니다. 이 영화에서처럼 아메리카 들소는 인간을 위한 고기와 옷의 중요 공급원인 동시에 원주민의 꿋꿋한 기백과 인내의 상징입니다. 대평원을 호령하다가 백인 이주민들에게 쫓겨 절멸 위기에 내몰린 원주민처럼, 들소 역시 19세기에는 남획으로 인해 미국 전역에 수 백 마리 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멸종이 임박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보호 운동이 벌어지면서, 지금은 주요 국립공원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동물이 됐고, 목장에서 들소를 방목하며 고기를 공급하는 축산업자들도 생겨났습니다.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아메리카 들소 무리들이 풀을 뜯고 있다. /미국국립공원공단(NPS) Jim Peaco
아메리카 들소는 의회 입법을 통해 미국의 국가 상징으로 공인됐습니다. 2018년 4월 하원이 아메리카 들소를 미국민의 단합과 회복, 건강한 자연과 지역사회의 상징으로 삼는다는 내용의 ‘국가 들소 유산 법(National Bison Legacy Act)’을 통과시켰습니다. 미국 정부의 공식 국가상징동물은 흰머리수리(Bald Eagle)이었는데, 여기에 들소가 추가된 것이죠. 아프리카 물소만큼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건드렸다간 뼈도 못추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옐로스톤 등 미국 대형 국립공원에서는 들소에게 절대로 가까이 가서 자극시키 말라는 경고문고가 곳곳에 붙어있습니다.
관련 동영상: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살고 있는 들소 가족을 근접 촬영한 ASMR(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소리와 장면)(내셔널 지오그래픽)
◇들소의 털과 물소의 뿔을 가진 북극의 고독한 전사, 사향소
만일 야생에서는 절대로 만날 일이 없는 아프리카 물소와 아메리카 들소가 눈이 맞아 사랑을 나누고 2세를 탄생시킨다면 이 소와 빼닮았을지 모릅니다. 물소처럼 끝이 바깥을 향해 굽은 뿔에 들소의 덥수룩한 털가죽을 가진 사향소 말입니다. 알래스카·그린란드·시베리아 등에 분포하는 사향소는 지구상의 모든 소 중에서 가장 거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북극의 한파를 견뎌내기 위해 다리 아래까지 수북한 털로 덮여있습니다. 털에 주렁주렁 고드름을 매단채 눈보라를 헤치며 눈에 덮인 이끼와 풀뿌리를 캐먹습니다. 사향소라는 이름은 번식철에 수컷들이 눈 주위에서 뿜는 사향과도 비슷한 강렬한 냄새에서 유래됐습니다. 얼마나 냄새가 강렬한지 100m 밖까지 퍼져나가 암컷의 사랑본능을 자극한다고 합니다.
물소와 비슷한 뿔과 들소처럼 덥수룩한 털가죽을 한 사향소. /Rocklin Lyons 플리커
그렇게 번식철 짝짓기를 통해 태어난 사향소의 송아지는 색깔만 좀 칙칙할 뿐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여느 송아지와 다를 바 없이 깜찍합니다. 사향소는 조직적이면서도 헌신적인 새끼 보호로도 유명합니다.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새끼들은 언제나 육식동물들의 사냥 1순위죠. 하지만 무리를 지어 사는 사향소들은 천적인 늑대들과 맞닥뜨리면 강력한 새끼 보호 태세로 돌입합니다. 어른 사향소들이 동서남북 빈틈이 없게 360도 방향으로 촘촘하게 스크럼을 짜듯 어깨를 밀착시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한 가운데에는 연약한 새끼들을 몰아넣습니다. 내가 끌려나가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아이들만큼은 절대로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입니다.
천적에 맞서 특유의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는 사향소 무리들. /미국국립공원공단(NPS) Joel Berger
이런 강렬한 새끼 보호 본능에 힘입어 극한의 기후조건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사향소지만, 최근에는 늑대보다 더 무서운 천적을 만났습니다. 바로 기후변화입니다. 사향소는 같은 북극권 서식 동물인 북극곰이나 바다코끼리 등에 비해 생태가 상대적으로 덜 연구된 동물입니다. 그런데, 2018년 과학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사에 따르면, 기온 상승으로 눈이 녹고 비가 쏟아져내리는 등의 기후변화로 먹이 공급이 끊기면서 많은 사향소들이 굶어죽거나 영양결핍으로 몸집이 왜소하고 연약한 새끼를 낳는 현상이 목격됐습니다. 이대로 북극얼음이 녹아들어간다면, 검고 수북한 털을 휘날리며 설원을 헤치는 위풍당당한 사향소의 모습을 앞으로 보기 영영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이 기이하면서도 매력적인 동물의 앞날은 환경을 생각하는 어쩌면 우리들의 소소한 생활습관에 달려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관련 동영상: 시베리아 북부 툰드라 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향소 무리와 깜찍한 송아지(내셔널 지오그래픽)
출처 조선일보 정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