碑陰
滄洲 全克恬
先祖高麗奉翊大夫版圖判書致仕公碣陰
昔在高麗之季有官奉翊大夫版圖判書姓全諱淑沃川郡人也先世自領同正諱學浚始大 顯曰諱孝格太子中允諱大富刑部侍郎諱弼 檢校司廵衛護軍諱侑民部典書是娶兵部待郞陸洪之女生判書判書歴敭累朝位至正卿享年一百有一十有一而卒嗚呼往時行蹟雖不可歷指而其在國祚將訖致仕而歸及至改玉高卧江鄉者餘三十年出處一節因可知矣先娶開國功臣趙胖之妹有一子而其後無聞後娶判宗簿寺事黃仁桂之女有子若孫世濟其美自後苗裔之支分派析布列遠邇者不可勝紀至有名臣巨卿之奉揚先德者代不絕人豈非積德累仁之報也嗚呼盛哉墓在利山縣北之寂洞久無壙表恐來雲之不識衣冠塟地今與姓族謀樹短石子孫世系元數煩不能取載然庶使百世之下知吾祖判書之墓云
비음 (비석 뒷면)
창주 전극념
선조 고려 봉익대부 판도판서 치사공 갈음(선조이신 고려 봉익대부 판도판서 치사공의 비석 뒷면 기록)
옛날 고려 말엽에 관직이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 版圖判書)에 이르고 성은 전(全), 휘(諱: 이름)는 숙(淑)이며 옥천(沃川) 사람인 분이 계셨다.
선대(先代)는 영동정(領同正)을 지낸 휘 학준(學浚)으로부터 비로소 크게 번창하였다.
그 아들은 휘 효격(孝格)으로 태자중윤(太子中允)이고,
그 아들은 휘 대부(大富)로 형부시랑(刑部侍郎)이며,
그 아들은 휘 필(弼)로 검교사순위호군(檢校司廵衛護軍)이고,
그 아들은 휘 유(侑)로 민부전서(民部典書)이다.
민부전서께서 병부시랑(兵部侍郎) 육홍(陸洪)의 딸에게 장가들어 판서(判書: 전숙)공을 낳으셨다.
판서공께서는 여러 조정을 거치며 벼슬길에 나아가 지위가 정경(正卿: 정2품 관직)에 이르렀고, 111세의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다. 아! 슬프도다. 지나간 시대의 행적을 비록 낱낱이 다 가리켜 말할 수는 없으나, 나라의 국운(고려)이 장차 다하려 할 때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 돌아가셨다. 왕조가 바뀐(조선 건국) 뒤에 이르러서도 강가 시골 마을에 높이 누워(은거하며) 지내신 지가 30여 년이나 되었으니,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난 한결같은 절개를 이로써 가히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개국공신 조반(趙胖)의 누이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그 뒤의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나중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황인계(黃仁桂)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어 아들과 손자를 두었으니,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어 나갔다.
그 후로 후손의 갈래가 나누어지고 파가 갈라져서 멀고 가까운 곳에 벌여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름난 신하와 큰 관료가 나와 선조의 덕을 받들고 날린 이가 대대로 끊이지 않았으니, 어찌 덕을 쌓고 인을 포갠 보답이 아니겠는가? 아, 성대하도다!
묘소는 이산현(利山縣) 북쪽 적동(寂洞)에 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묘 표석이 없어 먼 미래의 후손들이 옷과 갓을 묻은 무덤 자리를 알지 못할까 염려되었다. 이에 이제 일가 친척들과 상의하여 짧은 돌을 세우기로 하였다. 자손의 세계(世系: 계보)와 원래의 수는 번잡하여 다 가져다 실을 수 없으나, 거의 백 대의 후대 마저도 우리 선조 판서공의 무덤임을 알게 하려는 바이다.
[출처] 창주선생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