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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4.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묵상글 (10/13 20:40, 22:00, 05:15, 05:30.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반 이전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4시 ~ 05시반, 07시 이후 >
< 김찬선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
* 가능하면 위와 같이 할 계획이나 개인 형편으로 그리 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오늘 묵상글 공유 : - 고인현 신부님. ( 10/13 22:00. 추가 ) 호명환 신부님. ( 10/13 20:40. )
- 김찬선 신부님: 05:1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30 추가.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아직.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계속 여부도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11월 대림시기(11/29) 이후 12월 중순 아니면 , 그 이전이라도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할 계획이오며
카페는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킬 계획이기에, 2)의 회원분이나 제가 가끔 묵상글을
올릴 수도 있을 경우를 감안, 묵상글 뜨락은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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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3.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6270
2026.10.13 21:09
2026년 10월 14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1,42-46
어제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하신 예수님께서,
오늘은 ‘불행하여라’ 하고 거듭 탄식하십니다.
이는 저주가 아니라, 깊은 슬픔이 담긴 충고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잘못된 길을 갈 때 터져 나오는 안타까움입니다.
첫째 탄식입니다.
“박하와 운향과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본디 십일조는 곡식과 가축에 대한 것이었는데,
바리사이들은 마당의 작은 향초 한 줌까지 세어 바쳤습니다.
놀라운 열심입니다. 그런데 그 열심의 방향이 어긋났습니다.
작은 규정은 자로 재듯 지키면서,
정작 율법의 심장인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비워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도 소홀히 하지 말라” 하십니다.
형식을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탄식입니다.
“회당에서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신앙이 어느새 ‘나를 높이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셋째,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
겉은 평평한 땅 같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지만,
그 아래는 죽음이 있습니다.
남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곁에 있는 이들을 상하게 합니다.
그러자 율법 교사가 발끈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 오늘의 핵심이 있습니다.
종교가 사람에게 ‘짐’이 될 수 있습니다.
규정을 늘려 남을 무겁게 하면서,
정작 자신은 손끝 하나 거들지 않는 것 ―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반대입니다.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가 사목자들에게 일깨웠듯,
말씀을 가르치는 이는 먼저 그 짐을 함께 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짐을 지워 놓고 물러서신 것이 아니라,
친히 우리 짐을 지시고 “내 멍에는 편하다” 하셨습니다.
친절·선행 주간의 눈으로 보면
친절이란 결국 ‘남의 짐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말로 훈수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함께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1독서(갈라 5장)가 그 힘의 근원을 알려 줍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친절(호의)과 선행(선의)은 우리가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살 때 저절로 맺히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일치의 눈으로 보면
윗자리를 다투는 곳에는 하나 됨이 없습니다.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고 자리를 내어 줄 때,
교회는 비로소 한 몸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작은 규정에 철저하면서 ‘큰 사랑’을 빠뜨리지 않는가?
나의 신앙은 어느새 ‘나를 높이는 수단’이 되지 않았는가?
나는 남에게 짐을 지우고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웃의 짐에 손을 대는 사람인가?
주님,
규정에는 철저하면서 사랑을 빠뜨리지 않게 하소서.
윗자리를 탐하지 않게 하시고,
이웃의 짐에 기꺼이 손을 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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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4.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92?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13. 15:50
하느님 안에서 집처럼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제 삶 속에서 늘 함께해 온 것은 영적 향수였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집으로 돌아감(귀가)!
하느님 안에서 집처럼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
2026년 10월 13일 화요일
연구자이자 이야기꾼인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은 자신의 삶 속에서 늘 자리해 온 영적 향수(spiritual homesickness)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향수(homesick)"라는 단어는 흔히 어린아이의 잠깐의 슬픔이나 집과 가족을 향한 일시적인 그리움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날 문화 속에서는 이 감정을 대개 가볍게 치부하며, 단순히 하룻밤 캠프에서 느끼는 흐릿한 감정 정도로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 향수는 인간 경험의 핵심이자, 우리가 본능적으로 지닌 "자리와 소속감"을 향한 깊은 갈망을 드러내는 강렬한 정서적 체험입니다.
브라운은 자신의 영혼이 끊임없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갈망을 이야기합니다:
영적 향수는 제 삶 속에서 늘 함께해 온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매일의 경험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갈망이었고, 제 존재 밖이 아니라 제 내면에서 성스러움(sacredness)을 찾으려는 절박한 그리움이었습니다. 곧 '내' 영혼, '내' 집,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제 안에만 존재하는 고향을 향한 향수였습니다.
삼십 대와 사십 대 동안 저는 가끔 그런 그리움에 이끌려 모든 일을 멈추고, 가능한 한 빨리 제 안의 집을 찾아 달려가곤 했습니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주 단순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하늘과 땅의 경계가 얇아져서 하느님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순간(얇은 경계, thin place)에 그분을 만나는 체험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차 안에서 로레타 린이 부르는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How Great Thou Art)"를 들을 때가 그랬고, 트래비스 호수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오후의 수영을 즐길 때가 그랬으며, 혹은 어느 날 밤 드리는 의식 성찰(Examen)을 할 때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문이 끝나면 나는 다시 그곳을 떠나서 인생 전반기의 세계로 돌아가 분주한 삶을 살아곤 했습니다. 나는 이 인생 전반기의 영성을 그리스어 nostos(귀향)와 alga(고통)의 밀물과 썰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2년 동안 나는 거의 매일 영적 향수를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영적 향수는 이제 일상의 무디고 깊은 슬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울이나 피로가 아니라, 어떤 것이 끝나고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는 불편한 깨달음입니다. 나는 떠나면서 동시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두려움도 있지만, 그 안에는 기쁨 어린 기대도 함께 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제 내면의 집으로 돌아올 때, 저는 더 이상 이곳을 잠깐 들렀다가 다시 여느 세상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곧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와 "내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까"와 같은 세상적 기준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저는 그 집에서 거의 끌려나올 수 없을 만큼 머물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 겉돌지 않고, 진지한 이야기와 마음을 나누는 관계에 더 끌립니다. 저는 이 성스러운 공간을 단순히 "진짜 삶"을 지탱하기 위한 방문지가 아니라, 제 삶의 참된 집으로 삼고 싶습니다. 나는 이제 내 고통(alga)이 하느님과 내 참된 자아로부터의 분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전반기를 떠나는 일은 두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 전반기의 분주한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시기를 떠나고 난 후, 저는 결코 그 시절을 다시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가 인생 전반기를 그리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제 영혼의 참된 집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50년 전 임종을 앞둔 어머니 곁에 있었던 때를 기억합니다. 저는 몸을 숙여 "엄마, 이제 집으로 가시는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떨리는 손은 제 얼굴 양쪽을 쓰다듬더니 이내 위로 올라와 제 머리 위에 얹혀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순간 내내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려 애쓰셨습니다. 어머니가 제게 주신 이 선물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 삶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결국 집으로 돌아갑니다.
—Margaret O.
Reference
Brené Brown, “Nostos and Alga: Returning Home in the Second Half of Life,” foreword to Falling Upward: A Spirituality for the Two Halves of Life, by Richard Rohr, rev. ed. (Jossey-Bass, 2024), vii, ix–x.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내적 성소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가 누구인지와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을 밝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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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4.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14 04:26
- 행복한 줄 모르는 불행과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성령의 사람과 육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일까요?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일까요?
왜 이런 질문을 했느냐 하면 오늘 주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불행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얘기를 들은 그들은 자기들이 왜 불행하냐고 반문하고,
자기들은 행복하다고 강변할 것입니다.
그럴 것입니다.
자기들은 행복한데 왜 주님께선 불행하다고 하시는지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그런 것은 아닌지 저는 이것을 보며 자문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것과 행복하다고 자기가 느끼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과거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자기가 행복한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니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행복한 것을 아는 사람이고,
행복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만족할 줄 알고 행복한 줄 아는 것이다.
이 말은 여전히 맞는 말입니다.
사실 분명 행복한데도 행복한 줄도 만족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참 많지요.
그리고 그것을 보며 우리는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그에 대해 가여워합니까?
그러므로 자기가 행복한 줄 아는 것은 분명히 행복할 자격이 있는 것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다른 차원에서 행복과 불행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짓 행복에 만족하는 불행과,
지금 행복에 도취하는 불행과,
그래서 미래의 불행을 보지 못하는 불행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저는 행복합니다.
이는 저의 ‘무조건 행복론’ 때문이기도 한데 저의 행복론은 이렇습니다.
‘나는 지금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
행복에 조건이 없어야 한다는 행복론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행복한 직접적 이유는 뮤지컬 때문입니다.
들어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뮤지컬에 대한 반응이 아주 뜨겁습니다.
그래서 왜 공연 횟수가 이렇게 적냐고 원망을 들을 정도이고,
프란치스칸만 아니라 일반 교구와 본당에서도 요청이 많아서
내년에는 공연 횟수를 아주 많이 늘려야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흐뭇하고 행복한 것이 사실이고,
행복하지 않다거나 행복해선 안 된다고 할 수 없으며
당연히 저는 두루두루 감사해야 하고 행복해야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하느님과 여러분과 출연진들 때문이 아니라
저의 성취감 때문이라면 저는 머지않아 불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에게도 하느님께서는 ‘레오나르도야, 너는 불행하다.’고 하실 겁니다.
칭찬 때문에 행복한 것은 비난 때문에 불행해질 것이고,
성취 때문에 행복한 것은 실패 때문에 불행해질 것이며,
인간 때문에 행복한 것은 인간 때문에 불행해질 것이고,
지금 행복한 것은 오래가지 않아서 불행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저의 전 인생을 보시며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거나 하실 것이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 때문에 행복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 성령의 열매인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도 비춰보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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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4.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14. 05:23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요즘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테니스를 치지 못하지만 그 전에는 테니스를 참 좋아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애써 배운 운동이 있다면 이 테니스일 겁니다. 다른 운동은 대개 어깨 너머로 배웠다면 이 운동은 테니스를 잘 치는 사람에게서 배우기 시작했고, 한 때는 레슨을 받았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테니스를 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서비스를 넣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저에게 서비스 넣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분이 백그립(백핸드로 칠 때 잡는 라켓을 잡는 법)을 잡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백그립으로 라켓을 잡으면 서비스를 넣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하라는 대로 계속 연습했습니다. 오랫동안 연습을 하다보니 어느 정도 서비스 넣는 실력이 늘어나긴 했지만 나중에까지 여전히 가장 어려운 것은 서비스를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문 강사에게서 레슨을 받기 시작했는데, 제가 서비스 넣는 것을 어려워하자 그립에 대해 말해 주면서 백그립을 잡는 것이 원칙이 아니고 백그립에 가까운 그립으로 잡는 것이 좋은 것이니 그냥 중간 그립(포핸드 그립과 백핸드 그립의 중간) 정도로 잡아도 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 강사가 저에게 말해 주었던 것은 "원칙이 정말로 중요하지만 그 원칙을 응용하여 '나'에게 맞는, 즉 '내'가 즐길 수 있는 방식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다 보니 테니스 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졌고, 더 재미있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가장 중요한 계명,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소홀히 한 채 자잘한 규정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지기 어려운 짐을 지우는" 율법주의적 태도로 신앙을 무겁고 불편하며 매력 없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짐을 덜어 주시며 당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분께 배우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그 사랑을 원수에게까지,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까지도 확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역사적 바리사이들을 쉽게 비난합니다. 그들의 악덕과 같은 것에서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방식을 끝까지 최선으로 것으로 고수하는 한 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질렀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장 최선의 것은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분이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삶을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여정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냥 어렵고 힘든 의무를 지키는 것이 믿음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삶이 어떻게 우리를 어떻게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해야 할 바와 하지 말아야 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집중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내' 삶을 아름답게 꾸며갈 수 있을까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할 훈련이나 수양 혹은 수행은 이런 것들은 하지 말고 저런 것들은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우리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술을 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지만, 여기에는 군대식의 훈련이나 노력과는 다른 어떤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영감을 얻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영감의 원천은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감이 참된 것이라면 그것은 '내' 재능이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 우리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심하게 꾸짖으셨지만, 그들을 집단 전체로서 완전히 배척하거나 단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과 친구가 되시고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바리사이 출신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필리피 3,5). 중요한 것은 불타는 열정이 어디를 향하느냐입니다. 바오로의 열정은 율법에서 그리스도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길은 하느님께서 애초에 바오로 사도에게 주셨던 같은 불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져야 할 그 불길은 우리 삶을 참으로 누리며 아름답게 만들어가기 위한 불길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열정이 에고의 경향을 따르고 있다면 그것을 사랑의 주님께로 방향을 잡도록 깨어 의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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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4.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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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의 우정 1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는 삶 (260924. 01:38)
http://www.ofmkorea.org/ofmkfb/585549
그리스도와의 우정 2 말씀에 굴복하는 자유 (260929. 05:37)
http://www.ofmkorea.org/ofmkfb/585739
그리스도와의 우정 3 그리스도가 다시 태어나는 자리 (261008. 05:18)
http://www.ofmkorea.org/ofmkfb/586084
그리스도와의 우정 4 기도와 삶의 경계가 사라지다. (261011. 02:12)
http://www.ofmkorea.org/ofmkfb/586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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