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이제 100년이 됐습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병탄된지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병탄 이후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1919년 3.1독립운동이 있었던지는 91년이 지난 2010년의 3월 1일 입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한일병합'이라 명기됐지만, 우리는 분명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병탄된 것이고, 국권이 강제로 침탈 된 것 입니다.
국권이 침탈된 1910년으로부터 광복을 맞이한 1945년까지 35년 간 우리는 일제에 의해 무자비하게 침탈 당했습니다. 특히 우리의 고귀한 '문화 유산'은 인적, 물적 자원과 더불어 일본인 들에 의해 수없이 수탈 됐습니다.
문화재청이 20년 동안 연구해 보고한 <국외 한국문화재 목록집>에 따르면 공식 확인된 문화재만 6만 1409점에 이릅니다.
세계에 퍼져있는 우리 문화재 60%. 6만 1409점이 현재 일본에 잠들어 있다.
특히,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오구라 컬렉션'은 대표적인 일본 개인소장가에 의해 수탈된 문화재 일 뿐더러 국보급 보물만해도 30~40점에 이릅니다.
국회에서는 지난 25일 본회의를 통해 『일본 소장 조선왕조 의궤 반환 촉구 결의안』을 공식 입장으로 채택 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 강화도에 사고를 설치하고 실록과 의궤 등 주요 문서를 보관했었는데, 일제는 1922년 조선총독부 기증 형식으로 일본 궁내청 서릉부로 의궤를 반출 해갔습니다. 우리 문화이자 정신의 침탈 행위 였습니다.
최근 도쿄대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을 우리에게 반환한 바 있습니다. 일본은 이제라도 의미있는 반성을 표명하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해 궁내청에 소장돼 있는 조선왕조 의궤를 즉각 반환해야 합니다.
이 뿐 아니라, 적어도 일본이 '국립도서관, 국립박물관, 의회박물관' 등에 소장하고 있는 우리 문화제에 대해서도 반환을 강력히 촉구해 나가야 합니다.
1973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 3187'과 유네스코의 '문화재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등에 비춰보면 우리는 원산국으로서 반환을 요구할 충분한 권리와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원'한 상황입니다. 우선 이번에 사진으로 볼 '오구라 컬렉션'의 경우도 문화재청에 PDF파일을 요청했으나, "책을 만들 당시부터 일본측과 협의한 내용에 따라 PDF파일은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발간한 연구 책자 밖에는 공유할 수 없다는 겁니다. 책 내용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문화재를 연구한 것임에도 일본측의 감수를 받아 내용이 유하며, 일본어가 병기돼 있습니다.
앞으로 하나 하나 해 나가야할 문제들 입니다. [국권침탈 100년]을 맞아 전병헌 블로그에서는 전세계에 퍼져 있는 우리 문화재를 미약하지만, 사진으로 만나 볼 계획입니다. 더불어 환수 추진을 위한 다양한 운동에 동참하기위해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양도 양이지만, 질적으로 어마어마한 오구라 컬렉션 도록 ⓒ전병헌 블로그
오구라 컬렉션은 무엇인가?
오구라 컬렉션은 일본의 재단법인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의 설립자인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한 천 여점에 이르는 고고자료, 미술공예품을 총칭하는 말이이다.
오구라 타케노스케는 나리타현의 유복한 농가에서 태어나, 1896년 동경제국대학을 졸업, 일본우편선에 근무를 했다가 조선으로 와서 경부철도와 대구전기회사를 설립했다. 대구전기는 이후에 대흥전기, 남선합동전기를 거쳐 조선에서 제일 큰 전기회사가 됐다.
오구라는 조선의 문화 유물에 대해 본격 수집에 나선 것은 1921년 경이다. 이후 30여년에 걸쳐 문화 유물 수집을 계속 했다.
오구라는 패망해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우리 문화 유물을 수집하는데 힘을 썼다고 한다. 이렇게 오구라가 모은 이른바 컬렉션은 1100건에 이르렀고, 이중 고고자료는 580건으로 대부분인 557건이 조선 유물이다.
시대로 구분하면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을 거쳐 통일 신라시대까지 고고자료가 많고, 다시 삼국, 통일 신라시대의 조각을 비롯해 고려, 조선의 미술공예품이 뒤를 잇고 있다.
조선의 유물만 집중적으로 수집한 것이 오구라 컬렉션이다.
이중 일본의 중요문화제로 지정된 것이 8점, 중요미술품으로 인정괸 것이 31점이 포함돼 있다.
이책에 설명돼 있는 '오구라 컬렉션'은 우리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간 책자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감수를 받은 내용이이기 때문에 상당히 호의적으로 돼 있다. 실상은 오구라의 수탈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부족하지만, 도록 속의 '오구라 컬렉션'을 사진으로 나마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견갑형동기: 한국식동검문화 성립기의 것으로 보임, 나팔형동기와 함께 요령지방의 정가와자 유적에서 유사한 청동기가 출토된바 있기 때문에 요령식 동검문화의 요소로 생각된다. 사슴등의 형상문이 시베리아의 샤머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사냥 의식과 관련된 의기로 추정된다.
향로: 뚜껑, 본체, 받침으로 구성된 청ㄷ동제 향로, 중국 한대에 유행한 박산향로와는 뚜껑이 박산이 아니라는 점이 다르다. 국립박물관 소장춤 중에 박산 모양을 투각으로 간략하게 표현한 유사한 형태의 향로가 있으나 이 뚜껑의 문양은 산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녹유박산향로: 박산로는 바다를 상징하는 승반 위에 산 모영의 뚜껑을 덮은 동체부가 얹혀 있는 향로로 한대에 유향했다.
금제관: 삼국 6세기경, 호암미술관 소장 전 고령금관과 함께 대가야 왕족과 같은 최고위급의 무덤에서 유출된 것으로 판단.
굵은고리귀걸이: 삼국 6세기경, 중심고리는 두터운 고리형으로 표면에 금사로 된 귀갑문을 두르고 그 안에 누금으로 꽃모양 장식을 하였다.
갑옷: 삼국 5세기경, 삼각판을 차례로 겹쳐가며 원두정으로 고정한 후 가운데 테두리에 일정 너비의 철판을 덧대어 마무리하여 상하 7단을 이루었다. 김해를 비롯하여 합천, 함안, 함양 등 가야의 전 지역에서 5세기 후반 유향한 갑옷으로 백제지역인 청주 신봉동에서 출도 됐다.
솥: 세발달린 솥의 한 쪽에 닭머리 손잡이가 달리고 뚜껑이 있다.
기마인물형토우
금동일광삼존불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충남 공주에 있는 한 사지의 석탑 내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금동약사불입상, 금동보살입상, 금동보살입상, 금동보살입상
금동불입상: 강원도 어느 사지의 석탑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전한다.
금동사비관음보살입상: 백두산 산록 폐사지에 위치한 탑지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청자상감국접문병: 전성기를 막 지난 13세기의 조형적 특징을 보여주는 이 병은 이전에 비해 어깨가 미끈하고 긴장감이 완화되었으나 세장하면서 시원스러운 맛이 있다.
청화퇴화청화화문탁잔: 금속기를 모델로 한 잔탁으로 외면에는 8엽화문을 백퇴철화기법으로 장식했다.
청자퇴화철화초화문병: 고려시대 지방양식의 청자로 추정된다.
분청화사기철화연화어문병: 활달한 붓 놀림의 그림장식이 특별한 작품으로 충청도 계룡산 주변에서 제작된 것이다.
백자청화매화조접초충문각병
귀거래도: 시서화 삼절로 지칭되는 강희안은 15세기 조선 초기에 가장 두드러진 문인화가이며 조선 중기 화단을 크게 풍미한 절파계 화풍의 선구로 보인다.
정말 무수히도 많은 우리 유물들이 '오구라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국립도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전병헌 블로그
도록 속의 '오구라 컬렉션'을 다 찍어 설명하는 데만 해도 수일은 걸릴 만큼 방대한 우리 유물이 '오구라' 한 명에 의해 수탈된 것을 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유물들이 이런 형태로 일본으로 유출됐을까? 하는 생각에 슬픈 마음이 이를데 없습니다.
특히 반가사유상 같은 경우나 신석기, 청동기 유물 등은 우리 역사 사료로서 그 가치가 비할데 없다는 생각도 들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2010년 국권침탈 100년을 맞아 우리가 하나 하나 해결하고 노력해야 할 일들이,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전 100년에서 못했다면 이후 100년에서라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고, 문화이며 정신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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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병헌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베르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