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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 강을 건널 준비
수 3:1-5
1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2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수 3:1-5 / [강을 건너다] 여호수아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백성들도 일찍 일어나 지금까지 요단강을 건너려고 진을 치고 있던 싯딤을 떠났다. 요단강을 건너려고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요단 강가에 도착해서는 언제 강을 건널 것인가를 결정할 때까지 진을 치고 기다렸다. 2-3) 사흘 후 이스라엘 우두머리들이 진영을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외쳤다 `제사장들인 레위 사람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계약궤를 메고 나서는 것을 보거든 너희는 그 계약궤의 뒤를 따라라. 4) 너희는 그 계약궤 보다 앞서가서는 안 된다. 계약궤를 보고 다만 그 가는 길을 따라라. 계약궤와 너희 사이는 약 1킬로미터쯤 떨어져야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계약궤에 가까이 가지 말아라.' 5) 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라. 몸가짐도 깨끗이 하여라. 너희 자신을 평소 때와는 다르게 거룩히 하란 말이다. 내일 여호와께서 너희가 보고 있는 가운데 기적을 베푸실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단 강가에서 사흘을 유숙하며 강을 건널 준비를 합니다. 그 준비는 순전히 영적인 것입니다.
요단 강가에서 유숙함(1) 당시 우기여서 요단 강이 범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요단 강가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언약에 대한 굳은 믿음의 실행이었습니다(수 1:11). 요단 강가에서 사흘을 유숙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빠른 물살로 범람하는 요단 강물을 보며 의심과 걱정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속으로 ‘이 거센 강물을 가축을 포함하여 이 많은 인구가 어떻게 넘을까’하고 근심하였을 것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공허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눈에 보이는 위험한 현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사이에서 크게 갈등하였을 것입니다.
관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다(2-4) 사흘 후에 관리들이 백성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그 명령은 첫째,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멜 때 그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언약궤가 앞선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직접 이 길을 인도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위험한 길이라도 하나님께서 가시면 안전한 길이 됩니다. 둘째, 이스라엘 자손들과 언약궤 사이를 이천 규빗(800m 이상)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라는 말씀은 믿음의 길이 이미 알고 가는 길이 아니라 순종하면 알게 되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5)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영적인 준비를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너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공병대나 뗏목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성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결’은 속된 것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성결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하는 우리들의 영적 준비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승리할 유일한 조건은 바로 성결입니다.
적용: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말해 봅시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행함에 이르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나의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믿음이 내 안에 자리 잡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행하는 믿음이란 나의 생각이 내키지 않을 때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때 하나님은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설 교 >
요단강을 건너려면
수 3:1-6, 13-17 / 이영무 목사
태권도 여자 57킬로 급에서 장지원 선수가 첫 금메달을 땄습니다. 물론 후반에 체력이 달려서 정신력으로 버티는 모습이 안쓰럽게도 보였지만 그녀의 메달은 값진 메달이라고 생각됩니다. 장지원 선수는 4년 전 시드니올림픽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에서 탈락했습니다. 국제경기 경험이 많은 한체대의 동갑내기 정재은이 대표가 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코칭스태프가 경기 도중 기권 타월을 던졌던 것입니다. 1-1의 팽팽한 접전가운데 본인의 의사와는 전연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기에 장지원 선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출전권을 양보받은 정재은 선수는 시드니올림픽에서 결국 금메달을 땄지만 장지원 선수는 깊은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장지원은 그 휴유증으로 2002부산아시안게임과 2003독일세계선수권 대표 선발에서 잇따라 탈락했습니다. 하지만 시드니 때의 설움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오기로 일어선 장지원은 지난해 11월 올림픽 출전권이 걸려 있는 쿼터대회에서 우승하며 자신감을 회복했고, 두 차례의 국내 대표 선발전도 모두 석권하며 꿈에 그리던 아테네행 티켓을 잡았습니다. 1미터74의 큰 키에 비해 체력이 약하다는 평을 들어온 장지원은 이번 대회를 위해서 ‘남들보다 특별하게’ 라는 좌우명 아래 하루 800차례씩 발차기를 하며 약점인 오른발 공격과 체력 보강에 힘쓴 결과 금메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종종 건너야할 강이 있습니다. 그것은 슬럼프 일수도 있고, 전진을 가로막고 있는 큰 장애물일수도 있습니다. 그 장애를 딛고 일어나 극복하는 사람만이 그 분야의 정상에 우뚝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민족에게도 동일합니다. 한 민족의 발전과 흥왕의 배후에는 넘어야할 강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그의 “도전과 응전” 이라는 책에서 한 문명이 강하게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그 문명이 발흥한 뒤안길에 엄청난 도전과 시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도전과 시련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그 도전에 대하여 불퇴전의 용기를 가지고 응전하는 일단의 강한 창조적 소수 집단이 있었느냐가 그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때마다 장애물과 같은 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창12:1)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유프라데 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은 “강을 건넌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수아는 임종을 앞두고 자기 조상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수24:2-3)
아브라함은 유프라데 강을 건넘으로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는 복을 입었습니다. 동시에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도 모세의 인도 하에 홍해를 건넘으로 노예백성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꿈꾸어오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또 하나의 강을 건너야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요단강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이제 지루한 40년의 광야생활의 끝맺음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축복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단강 도강은 분명 축복이었지만 동시에 위기요 장애물이었습니다. 이 장애물을 넘지 못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유랑민으로 전락할 것이요 가나안의 축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성지순례를 가서 보는 요단강은 작은 개울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지금부터 3500년 전의 요단강은 폭이 넓고 수심이 깊은 강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시기는 연중 수위가 가장 높은 시기였습니다. 요단강은 모맥(밀과 보리)거두는 시기에 항상 물이 넘쳤습니다. 이 시기가 보통 4월이었는데, 북방 헬몬산의 많은 눈들이 서서히 녹아내리면서 갈릴리 호수로 흘러들어오고 이 호수가 범람하면서 요단강으로 흘러넘치기 때문에 아주 수위가 높은 시기였습니다.
위대한 사역을 일으키고자 할 때는 반드시 넘어야할 장애와 난관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반드시 건너지 않으면 안 되는 지뢰와 같은 위험한 상황들이 도처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민족이나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위기나 난관을 만날 때 그것을 단지 하나님의 징계로만 여기거나 피하면 피할수록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어떻게 해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 어떤 전략을 지시하셨고 백성은 어떻게 순종하였는지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어 봅시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이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분들이나 인생의 질고 속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분들, 건축을 시작하려는 우리 교회 공동체에 적용되었으면 합니다.
첫 번째로,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새로운 각오와 헌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본문말씀 1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여호수아는 참으로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새로운 도전 앞에서 일찍 일어나 행동하였습니다. 역사 속에서 쓰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게으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다. 신앙의 성숙이나 능력있는 삶을 원하는 크리스챤이라면 일찍 일어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가 사업가라면 시간을 더 내어서 사업장을 돌보고 연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처한 직장에서 인정받는 훌륭한 직장인이 되기 원한다면 더 연구하고 개발하는 직장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부지런한 사람이되 또한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요단에 이르러 3일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하늘을 향하여 귀를 열어놓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자신을 헌신할 줄 아는 지도자였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영국 국민들은 깊은 절망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때 수상인 윈스턴 처칠 경은 영국의회를 통해서 온 백성에게 드리는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대영제국 여러분, 우리는 이제 옛 시대를 뒤로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이고, 우리는 이 길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안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수호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국을 수호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피, 우리의 땀, 우리의 눈물, 우리의 최선을 민족 앞에 드려야 할 시간이 된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영국 백성을 전쟁 앞에서 하나되게 하였고 그들은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성전건축의 새로운 역사 앞에 서있는 영신교회 교우들도 새로운 각오와 헌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먼저 예배에 열심히 참석합시다. 가끔 집안일로 주일 예배에 빠지던 분이라면 이제 빠지지 않기를 다짐하십시오. 주일 낮 예배만 참석하던 분이라면 주일 오후예배에도 참석할 것을 다짐하십시오. 수요예배까지만 참석했던 분이라면 새벽기도나 금요일 심야기도회까지도 참석하기로 결심하십시오. 구역예배에도, 남여신도회 모임에도 더 열심을 내도록 하십시오. 새로운 각오와 헌신만이 새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할 것입니다.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이었던 유명한 패튼 장군은 그의 부하들에게 늘 이렇게 연설하곤 했습니다. “여러분의 후손이 여러분에게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자신있게 대답하라. 나는 영광스런 패튼 전차부대의 일원이었다고”
교회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기도할 때 당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겠습니까? 그냥 방관자로 구경꾼으로 계실 것입니까? 아니면 그 역사의 와중에서 함께 동참하며 명예스러운 영신교회 성도로 남을 것입니까?
두 번째로, 요단강을 건너려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본문말씀 3절입니다.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언약궤는 법궤 또는 하나님의 궤, 증거궤로 불리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십계명 돌판, 만나 항아리가 보관되어 있었고 이는 곳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행진할 때마다, 혹은 전쟁 때에는 늘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갔으며 이는 곳 백성 중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징표였습니다.
특별히 본문 4절에 백성과 언약궤는 2000규빗의 거리를 두도록 하였습니다. 한 규빗은 손가락 끝에서 팔목까지의 길이입니다. 보통 45센티를 의미합니다. 2000규빗은 약900미터의 거리입니다. 200만의 인구가 언약궤를 따라가려면 이만한 거리를 둘 때만 온 백성이 언약궤를 바라보고 행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은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너희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도 언약궤를 바라보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너희 길을 알려주실 것이고 너희의 길을 인도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십니까? 하나님만을 바라보십시오. 그분께 여러분의 인생의 초점을 맞추십시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삶의 지표로 삼고, 그분께 모든 것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만 주목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마틴 루터가 어느 날 아침 빵을 먹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개가 루터의 손에 빵이 있는 것을 보고 그 빵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빵을 든 루터의 손이 입으로 가면 시선이 입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 손이 움직이는 데로 개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때 루터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도 저 개처럼 모든 시선이 주께로만 향하게 하옵소서”.
지금 우리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요단강을 건너려면 스스로 성결케 해야 합니다.
본문말씀 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우리가 만약 요단강 앞에 서있다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강을 건너는 방법에 대해 듣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엉뚱한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고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다양한 문제들을 가지고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사업이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나님, 직장이 흔들려요, 방법을 알려 주세요” “하나님 저희 가정에 아픔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 그때 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먼저 자신을 성결케 하라!”
여러분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겠습니까? 진정한 능력은 성결임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작은 그릇도 쓰시고, 못생긴 그릇도 쓰십니다. 그러나 더러운 그릇은 그냥 쓰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반드시 깨끗하게 하셔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준비하십시오. 인생의 난관 앞에서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날던 독수리가 갑자기 추락하였습니다. 지나가던 선교사가 궁금하여 다가가 자세히 관찰하였습니다. 독수리는 총이나 활에 맞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두발을 벌려본즉 족제비 한 마리가 그 배에 붙어서 심장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수리는 먹이를 찾다가 족제비를 낚아채어 가슴에 안고 공중에 올랐으나 그 족제비가 오히려 독수리의 심장을 찢은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성공의 문턱에서 주저앉기도 하고, 정상에서 하루아침에 곤두박질하기도 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바로 심장을 갉아먹는 죄악된 습관과 생각을 멀리 던져버리지 못하고 껴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끊을 것은 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됩시다.
이제 공동체적으로도 분열과 갈등, 미움과 반목, 질시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하나 되어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으로 서로를 세워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위대한 도전 앞에서 먼저 자신을 성결케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네 번째로, 요단강을 건너려면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본문말씀 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본문말씀 13절입니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요단강을 건널 수 있는 전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먼저 강에 들어가면 흐르던 물이 멈출 것이고. 그때 백성들은 건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물을 갈라놓은 뒤에 건너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물이 넘실대면서 흐르고 있지만 거기에 믿음으로 발을 담그라는 것입니다.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담그면 그때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장벽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우리의 기도는 어떤 스타일입니까? “하나님, 이 문제만 해결해주시면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십일조도 잘하고 예배에도 열심히 참석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먼저 충성하고 봉사하라. 그러면 내가 길을 열어줄 것이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의 죽음의 기사가 소개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렸지만 예수님은 바로 돌아오실 수 없었고 나사로의 장례가 마친 후에나 돌아오시게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슬퍼하였습니다. 이를 민망히 여기신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함께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돌문을 옮기라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벌써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복음 11:40)고 하셨습니다.
영광과 기적은 믿는 자 만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으라! 그러면 영광을 볼 것이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 가운데 있다면, 새로운 결단의 시점 가운데 있다면, 이제 믿음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망설이거나 쭈볏 거리지 말고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 디딤으로 요단이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요단을 건너려면 앞장서서 헌신하는 지도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말씀 17절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특별히 기적의 선두에 서있는 제사장들의 헌신이 눈에 띱니다. 제사장들은 중간 지도자들로써 온 백성이 다 강을 건널 때까지 언약궤를 메고 요단가운데 서 있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갈라진 요단을 마른 땅같이 밟고 건너는 백성들의 기쁨과 놀라움을 목격하는 보람도 있겠지만 역시 무거운 언약궤를 메고 수 시간을 정지된 채로 서있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간지도자들인 이 제사장들이 두려움을 모르고 믿음으로 나갔고 헌신함이 있었기에 백성을 안전하게 도강시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제 성전건축의 대 역사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평신도 지도자들과 제직들이 앞장서서 전진하고 무거운 짐을 먼저 지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로 인하여 교회 공동체가 위기를 넘어 기쁨을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더 큰 축복으로 가는 두 가지 조건
수 3:1-6 / 피영민 목사
서론
여호수아 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강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서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 취급하고, 자신의 국고성을 짓는데 일꾼으로 사용하였으며, 사내 아이 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빠뜨려 죽게 하여 민족을 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마지막에는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듣고 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강퍅한 애굽 왕 바로도 장남이 다 죽음으로 결국 하나님께 손을 들고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주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감과 해방감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복을 주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리라는 기대감으로 기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하고,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시는 축복도 경험하고, 반석에서 생수를 얻는 축복도 경험하면서 결국 2년의 세월을 걸쳐 가데스바네아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일어난 일은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어 그 땅과 사람과 식물들에 관해 정탐하고 오라 하였는데, 그 중에 2명만이 믿음의 보고를 하고 나머지 10명은 불신앙의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믿음의 보고를 따라가지 않고 불신앙의 보고를 따랐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게 하시며 죽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믿음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다 애굽에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받았으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을 경험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집도, 땅도, 안전도 없고, 먹을 음식도 풍부하지 않고, 위험도 많고, 전쟁이 있는 땅에서 40년을 방황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벌 시간도 끝이 나는 순간입니다. 이제는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시간이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 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200만 명인데, 200만 명 중 가나안 땅을 밟아 본 사람은 4명입니다. 두 명은 여호수아와 갈렙이고, 또 다른 두 명은 여호수아 2장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다가 기생 라합의 집에 숨어서 살아 나온 두 명이 있습니다. 200만 명에서 4명 빼고는 가나안 땅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전에 가본 일이 없는 길을 가야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온 곳은 요단 강 앞입니다. 그리고 요단 강을 건너가면 가나안 땅에서 가장 난공불락이라고 소문 난 여리고 성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속으로 좀 더 쉬운 길은 없었을까하며 왜 강이 막혀있는 어려운 길로 인도해 줬는지 속으로 생각했었을 지도모릅니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해주신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길에서 기적을 베푸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단 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안으로 무너지는 기적으로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요단 강을 건너가고 여리고 성만 무너지면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은 다 정복이 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의 땅이 되는 길입니다.
그 길은 번영의 길, 평안의 길이며, 하나님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주셨더라도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야 하지 않던 길을 가야 했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가야 할까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2012년도 맞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11년까지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되어 지금까지 인도해주셨는데, 2012년도는 미지의 시간이고, 두려움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가본 적이 없는 2012년의 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2012년도에는 전에 해보지 않았던 결단을 내려야 할 수도 있고, 전에 만나지 못했던 문제를 만날 수도 있고, 전에 누려보지 못했던 축복을 누릴 수 있고,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그 장교들을 통해서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육한 것입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는데 여호수아가 이것을 강조하였습니다.
Ⅰ.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으로 나아가면 축복을 만나게 된다.
절대 순종을 하면 축복을 만나게 됩니다. 순종은 축복이고 가나안 땅이지만 불순종은 고통이고, 방황이고, 광야입니다. 그것은 불신자들에게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원리대로 살다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원리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순종은 축복이요, 불순종은 고통이며, 순종은 가나안 땅이요, 불순종은 광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에 가본 경험이 없는 길을 가야 합니다.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수 3:3-4). 여호수아는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언약궤만 보고 따라가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언약궤에서 눈을 떼지 말고 언약궤가 가는 곳으로 계속 따라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면 승리, 축복, 번영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금으로 도금합니다. 크기는 가로 1.1미터, 세로 0.7미터, 높이 0.7미터가 되고, 그 위에 금으로 된 판이 놓여 있습니다. 이 금판을 시은소 또는 속죄소라고도 합니다. 이 금판 위에 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를 대속죄일에 뿌리면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언약궤 위에는 금으로 도금된 그룹천사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언약궤는 성막에 가장 중요한 지성소에 놓이게 되는데,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비, 아론의 싹 난 지팡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만나 세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이 언약궤는 아무나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움직이게 되었는데, 레위 사람 아론의 아들들 가운데 고핫 자손이 움직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궤를 보자기에 싸거나 수레에 실어서 움직여서도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언약궤는 금으로 만든 채를 꿰어 멜 수 있도록 모퉁이 네 군데에 동그란 고리가 달려 있습니다.
언약궤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 가본 길을 갈 방법은 언약궤만 바라보고, 따라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기서 참 중요한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고가 2000천 규빗 쯤 되게 하고 가까이 따라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1규빗은 사람의 팔꿈치로부터 손끝까지 1규빗으로 45cm가 됩니다. 그러므로 2000천 규빗은 900m가 됩니다.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메고 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900m 사이를 두고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언약궤와 백성들과 900m의 사이를 두는 이유는 첫째,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언약궤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둘째 이유는,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3장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아닙니다. 기둥은 다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언약궤를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직진하면 백성들도 직진하고, 언약궤가 우회전하면 백성들도 우회전하고, 언약궤가 좌회전하면 백성들도 좌회전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존경심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우습게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존경심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존경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2000규빗의 거리를 두고 따르라고 하는 것은 200만 명이 전부 법궤를 바라보고 따라가며, 하나님께 대한 존경심을 보이며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약궤를 따라가면 하나님께서는 요단 강도 갈라지게 하시고, 여리고 성도 무너지게 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도 거저 주시는 축복의 길, 승리의 길,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올해는 다른 곳에 눈을 두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두고 따라가시길 바랍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5-6). “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 37:5-6).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순종하고 따라가면 인생에 실패가 없고, 축복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은 미래의 일을 한 번에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한 걸음씩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며 하나님을 따라가겠다고 고백하고, 매일 주님을 바라보며, 아침에 일어나 오늘 나의 삶을 인도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성도들 되길 바랍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시 25:4-5). 다윗의 기도는 당신의 길을 내게 보이시고, 당신의 진리를 내게 가르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2012년 1월 1일 첫날에 다윗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매일 내 길을 지도해주시고, 주의 진리를 내게 가르쳐달라고 기도하며, 절대 순종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절대 순종의 길을 가게 되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과는 상관없고, 주일에는 교회에 나와 예배는 드리지만, 일상생활은 예수님과 아무 관계 없이 삽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겪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Ⅱ. “개인적인 성결”을 이루면 축복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성결을 이루면 축복을 받게 됩니다. 더러우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윤리적으로 더럽고, 추잡하고, 지저분하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성결해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성결해야 합니다. 영적, 도덕적으로 성결해야 합니다. 영적, 도덕적으로 지저분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수 없고, 이런 사람의 삶에는 실패가 오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수 3:5). 스스로 성결케 하라는 것은 영적으로 깨끗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따라 광야를 갈 때에도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깨끗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 (레 20:6-8). 신접한 자 박수, 무당을 쫓아다니는 것은 영적으로 음란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고 가나안 땅을 얻으려면 개인적으로 성결해야 합니다.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일만 먹을 뿐 아니라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 개월간을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고 함이라 하라” (민 11:18-20).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평해서 하나님께서 메추라기 떼를 보내어 고기를 일 개월간을 먹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고기 먹을 때도 더럽게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결케 하고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 육적으로 음란을 버리고 성결하면 광야도 안전하게 지나고, 광야에서도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는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성결이 축복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요단 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려면 성결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성결을 이루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0). 둘째, 하나님 앞에 겸허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겸손한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셋째, 하나님 앞에 “거룩함을 추구하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적극적으로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셨는데, 벗어버리고 입지 않고 다닌다면 벌거벗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렸으면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적극적인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려면 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면 죄가 멀어지지만, 말씀을 멀리하면 죄가 가까워집니다. 말씀과 죄는 언제나 반비례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과 가까우면 악령이 멀어지고, 성경과 멀어지면 악령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해지려면 적극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주일 날 예배만 드리고 그냥 가는 사람 그리고 새벽 기도도 하지 않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2012년도에는 바뀌어야 합니다. 기도 생활과 경건 생활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을 받고, 말씀을 통해 에너지를 받아 죄와 마귀와 세상 유혹을 이기고 거룩함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과 기도를 떠나서 거룩하게 산 인물이 역사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올해는 하나님 앞에 허물이 있는 것은 솔직하게 자복하고 버리며, 적극적으로 성결을 추구해서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결 론
21세기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더욱 불순종하고, 불 경건한 시대입니다.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을 멋으로 알고 죄짓는 것에 담대합니다. 죄짓는 것을 특권이고, 자유인 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악해도 하나님께서는 절대 순종과 개인적 성결을 이루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가나안 땅의 축복을 주십니다. 여호수아 3장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죄에서 놓임 받아 구원을 받았더라도 광야에서 방황하다 거기서 죽으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순종과 개인적 성결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있으면 여호수아가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기적을 볼 것입니다.
2012년도에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기를 바랍니다. 가정과 사업과 자녀들의 기적을 보고, 나라와 교회가 기적을 보는 한 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가정의 축복, 사업의 번영, 교회의 부흥, 성전 건축, 북한의 해방, 우리나라의 평안이든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하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떤 누구도 가운데 서서 방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복 받으려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두 가지는 바로 절대 순종과 개인적 성결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것입니다. 올해는 하나님의 기사와 기적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망했던 사업이 일어나고, 육신의 암 덩어리가 다 떨어지고, 귀신과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완전히 해방되어 성령의 충만을 입고 기적을 보게 되길 바랍니다. 오늘 2012년 1월 1일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실 놀라운 기적을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요단 도하 사건
여호수아 3:7-14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3백 년 가까이 소수민족으로 살던 애굽을 40년 전에 떠나 광야에서 정처 없이 떠돌이로 지내다가 꿈에 그리던 정착지인 가나안 코앞까지 왔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동 속도가 아무리 느리다고 하더라도 두세 달이면 충분했는데, 한 세대도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애굽을 떠날 때 스무 살이 넘은 사람은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긴 세월을 기다리던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설렐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면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들이 사해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으로 우회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우회할 수밖에 없는 어떤 속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가나안에 사는 원주민 부족들이 동편은 요단강이 막아준다고 생각하여 주로 남쪽을 경계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해 우편으로 우회하는 게 전략적으로 옳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자리를 잡으려면 가장 강력한 부족을 먼저 정복해서 본때를 보여야 했을 겁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족이 가장 강력했습니다. 그들과 직접 전투를 벌이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이 부족합니다. 가나안에 첫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남쪽에서 곧장 직진해서 올라가면 예루살렘을 만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3km에 있는 여리고를 먼저 치는 게 최선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해를 우회해서 올라가야 합니다. 여리고는 요단강 서편 8km 떨어져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모세가 지도자로 살아있을 때 진행된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계획했던 대로 올라가다가 모압 지역에서 죽었습니다. 뒤를 이어서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요단강이 한강이나 낙동강처럼 큰 강은 아닙니다. 갈릴리에서 사해까지 지형에 따라서 넓어졌다가 좁아지기도 하면서 이어지는 강이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어른들만이 아니라 남녀노소가 다 모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려면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습니다. 산모나 아픈 사람들은 물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강을 건널 때 적의 공격을 받으면 낭패입니다. 강을 건넌다고 하더라도 피해가 너무 크지 말아야 합니다. 새롭게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로서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여호수아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단강을 어려움 없이 건널 방법에 관한 자세한 지침을 들은 겁니다. 그 지침이 오늘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긴 합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장섭니다. 그들이 요단강물을 밟으면 위에서 흘러내리던 요단강 물줄기가 끊어질 것입니다. 아래에 있던 강물은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요단강이 바닥을 드러냅니다. 믿기 힘든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이 된 강바닥을 걸어서 건넜습니다. 아무런 사고도 없었고 피해도 보지 않았습니다. 대대손손 전승될 만큼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요단강 도하 사건은 40년 전에 일어났던 홍해 사건과 맥을 같이 합니다. 홍해 이야기는 출 14장에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는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홍해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의 뒤에는 애굽 왕 바로가 보낸 기마병이 뒤쫓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든 손을 들어서 홍해를 갈라지게 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모세는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밤새도록 돌풍이 불어 홍해가 갈라져서 마른 땅이 드러났고, 이스라엘 백성은 무사히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거냐, 뭔가 믿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요단강 이야기를 조금 더 설명하면 그런 오해가 풀릴 겁니다. 성서주석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267년 12월7일 밤부터 8일 새벽에 요단강 협곡의 둑이 무너져 16시간이나 강물이 막혔다고 합니다. 1960년에도 이런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물이 범람해서 벌어진 현상입니다. 지진으로 인해서 강둑이 무너지는 일도 있습니다. 1927년 7월11일에는 지진으로 21시간 이상 요단강물이 멈췄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
자연현상을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서 발생한 초자연적 기적이라고 말하는 성경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고대인들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크게 보면 오늘 우리의 과학도 신화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과학이 내일의 신화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궁극적인 비밀을 오늘의 자연과학이 다 밝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언젠가 지금 우리가 실재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들이 비(非)실재로 드러날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최선은 성경이 말하는 핵심 메시지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궁극적인 실재를, 즉 진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언약궤를 짊어진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딛자 요단강이 멈췄다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말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이 사건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7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모세에게 홍해 사건이 일어났다면 여호수아에게는 요단강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기적 이야기는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표적을 구한 이유도(고전 1:22) 그들이 표적 자체에 호기심이 많아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주변 종족에게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그 이야기를 읽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거나 요단강이 멈추는 사건처럼 기적으로 보이는 일들은 우리의 삶에서 결정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보도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표적과 기적이 그치지 않았으나 그것으로 그들의 신앙이 깊어지지 않았습니다. 홍해를 건넌 직후에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으나 조금 지나면서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서 처음 대결한 여리고 주민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으나,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그들은 가나안 토속 종교인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아무리 많이 경험해도 그것만으로 바른 신앙 안에 들어서지 못한다는 게 분명합니다. 성경 이야기까지 들어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늘 그것을 경험합니다.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돈을 벌거나 이름을 떨친다고 해도 그것으로 참된 행복을 얻는 사람은 없습니다. 표적과 기적은 그 일을 경험한 한순간의 황홀한 느낌으로 끝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100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는 일과 비슷합니다. 한순간은 하늘을 나는 듯이 기쁘겠지만 얼마 지나면 시시한 일상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을 읽는 우리는 어디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아니 “하나님이 함께하심”이라는 사실에 관심이라도 있을까요? 여전히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건 아닐까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나이가 들수록 더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고, 더 둔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요구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 말고는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인식하거나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생각은 하나님을 믿으니까 자기 인생이 더 좋게 풀리거나 기쁨과 평화가 크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이런 신앙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보다는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더 많아 보입니다. 믿음 생활을 잘하는 기독교인의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정의롭지 않습니다. 억울한 고난도 많고 죽음도 많습니다. 굳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기독교가 말하는 수준의 기쁨과 평화는 누구나 누릴 수 있습니다. 타종교에도 자비와 사랑과 평화가 있습니다. 자연을 친구 삼아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디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저도 이에 관해서 명백한 실체를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없어서 성경이 말하는 대답을 손가락질하듯이 전할 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뒤에 9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라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10절에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함께하시지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세상을 떠난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말은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을 살아있다거나 죽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말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살아있다는 사실을 존재의 심연에서 느낄 때 나오는 고백이 바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입니다. 삶의 신비를 느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한 뒤에 물러나 계시지 않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을 통치하십니다. 그분 덕분으로 우리는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혹은 하나님이 없어야 멋진 인생을 산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나름으로 재미있고 의미 있게 삽니다. 그들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생명의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아이를 낳습니다. 그런 생물학적인 차원의 생명은 사람만이 아니라 강아지도 누립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강아지와는 다른 차원의 생명을 살기에 생물학적인 생명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강아지는 시간의 깊이를 모르지만, 사람은 시간의 깊이를 절실하게 느낍니다. 강아지는 삶을 평면적으로만 느끼지만, 사람은 생명을 입체적으로 경험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입체적인 생명 경험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신앙에 내세가 있습니다. 내세 신앙은 유치한 게 아닙니다. 삶에 대한 훨씬 심층적인 가르침입니다. 사람은 순간의 삶만으로는 생명을 충만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지금 지구에서 느낀 한평생의 삶도 기본적으로 한순간이기에 여기에만 묶여 있는 한 그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생명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절정은 부활입니다. 죽음 너머까지 하나님의 생명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그는 실제로 살아있다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 경험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나타납니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고백은 곧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이 점점 더 풍성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동네 낮은 산만 다니던 사람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가는 경험과 비슷합니다. 이런 경험에 근거하여 오늘 성경 본문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삶을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고 받아들이십니까?
임마누엘
‘임마누엘’이라는 성경 용어를 여러분은 들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용어를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며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마태복음 기자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로 붙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이 파혼하려고 하자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는 부정한 방식이 아니라 성령으로 임신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마리아가 낳을 아이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사실의 근거를 바로 앞에서 읽은 사 7:14절에서 찾았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은 생명의 수여자이기에 예수도 역시 우리에게 생명의 수요자이십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즉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 우리 기독교의 모든 신앙이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실제로 알고 믿으며, 경험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믿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답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물리학을 깊이 알려면 물리학을 다루는 책을 자주 읽고, 그런 강연을 자주 들어야 하듯이, 예수의 말씀을 자주 듣고 그에 관한 신학책도 자주 읽어야 합니다. 예수가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혼의 떨림을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임마누엘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이 가리키는 삶의 비밀에 대해서 거룩한 궁금증을 느껴보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서 실존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채, 그리고 부활의 영광에서 비치는 생명의 빛을 경험해보지 못한 채 “살아있다.”라는 고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의 중심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을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살아내려면, 즉 생명을 얻으려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막히는 기적을 중요하게 생각한 고대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임마누엘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그 믿음이 더 깊어져서, 실제로 “아, 나는 살아있구나, 생명을 얻었구나.”라는 고백의 중심에 이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신을 벗으라
출 3:1-5
신의 역사는 처음에 신을 신지 않았지만 풀로 만든 신 고무신 유제신 목재신 놋쇠신 구두가 있었습니다. 짚신을 거꾸로 신고 반가운 손님을 맞음 처녀의 짚신을 신는 총각을 통해 처녀귀신의 한을 풀다.
① 피혁제(皮革製):석·흑피화(黑皮靴)·협금화(俠金靴)·수화자(水靴子)·목화(木靴)·기자화(起子靴)·사피화(斜皮靴)·동화(童靴)·백화(白靴)·단화(短靴) 등이 ‘화’에 속하고, 흑피혜·분투혜(分套鞋)·투혜(套鞋)·사피혜·피초혜(皮草鞋)·당혜(唐鞋)·운혜(雲鞋)·발막신·징신 등이 ‘혜’에 속한다.
② 초마제(草麻製):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으로, 짚신[草履]에는 왕골짚신·부들짚신·고은짚신·엄짚신 등이 있었고, 미투리[麻履]에는 삼신·절치·탑골치·무리바닥·지총미투리 등이 있었다.
③ 포백제(布帛製):사(紗)·나(羅)·능(綾)·단(緞)을 재료로 하여 만든 당혜·운혜·태사혜 등이 있었다(이것의 원바탕은 가죽인데 겉을 포백으로 대었기 때문에 포백제로 취급한다).
④ 유제(鍮製):놋쇠로 만든 신으로 ‘유혜’ 또는 ‘놋신’이라고 하며, 특수층에서 비올 때 신었다.
⑤ 지제(紙製):종이로 만든 신이다. 지혜(紙鞋)는 일반적으로 천한 사람들이 신었다. 지총미투리는 이 중 고급품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지혜를 신는 것을 법으로 금하여 점차 소멸되어 갔으나, 순조 때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⑥ 목제(木製):목극(木屐))이라고 하며 ‘격지’ 또는 ‘나막신’이라고도 불린다
피아노도 발을 신발을 신긴다. 여자가 신발을 벗고 맨발을 보이는 것은 수치로 생각했습니다. 룻기4:7-8 옛적 이스라엘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무를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신을 넘겨주는 행위는 소유권을 포기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확정 이로써 룻은 비록 이방여인이지만 라헬 레아와 함께 이스라엘을 세운자로 칭송된다. 이슬람신전 그리심산 간디의 묘지올라갈 때 신을 벗었다. 이슬람신자는 신전에 들어갈 때 발을 씻는다.
履 신 이{리}; ⼫-총15획; [lǔ]
신, 신다, 밟다
歷 지낼 력{역}; ⽌-총16획; [lì]
지내다, 지나가다, 뛰어넘다, 건너뛰다, 지내온 일, 겪은 일
書 쓸 서; ⽈-총10획; [shū]
쓰다, 글씨를 쓰다, 기록하다, 글자, 문자, 글씨, 서법(履歷書)
모세는 호렙산에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불을 체험하게 됩니다. 거룩한 현현입니다. 주님은 불로 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이력서를 스펙이라고 한다. 스토리 그의 역사 스펙을 넘어서 스토리로 믿음의 이야기로 가야 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러 하나님을 만나고자 할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선곳은 거룩한땅이니 네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란 땅을 밟고 다니는 수단이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더러운 것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외식된 모습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보면 나 자신의 모습이 아닌 짜여진 모습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무위자연 [無爲自然] - (없을 무, 할 위, 스스로 자, 그럴 연말뜻은 인위적인 손길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을 가리키는데,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태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한 속세의 삶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삶을 가리킬 때도 사용합니다. 따라서 안빈낙도(安貧樂道), 안분지족(安分知足), 단사표음(簞食瓢飮) 과 같은 표현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와 비슷하면서도 뜻은 전혀 다른 표현이 있습니다.
내삶에 아무것도 들이지 마라 단아하게 단순하게 단단하게의 삶
우리는 주님앞에 나아갈 때 조심하고 더욱 거룩성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위선과 거짓과 감투와 허울을 모두 내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곳을 들어갈 때 신을 벗지 않고 들어가는 것은 강도나 도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남에게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을 벗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가식과 허물과 모든 체면치례를 벗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큰 은혜를 허락하여 주실것입니다.
모세는 그의 가진 경험과 그리고 그가 가진 지위와 자기생각과 자기주장과 모든 것을 다 내어놓았습니다. 자기 혈기와 자기힘도 내려놓았습니다. 오늘 교회에 올 때 우리는 내생각 내경험 내의지를 모두 다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와 평강을 반드시 허락하여 주실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고백하기를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가 산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모두 못박았노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에 말하기를 빌립보서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화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심령으로 새롭게 되고 이세상풍조 구습을 벗어버려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더러운 옷 죄악을 벗기고 새옷을 입혀주시겠다고 스가랴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스가랴3;4 여호와께서 자기앞에 선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죄악을 제거하여 버렷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신을 벗으라는 것은 세속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세속적인 가치관이 들어와사는 안됩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이란 맘몬주의 그리고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성 분열의 세속적인 것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인간의 주장이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 거룩하신 주님앞에 우리의 신도 벗고 우리의 옷도 더러운 옷도 다 벗어버리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에게 거룩함을 허락하여 주시고 새옷을 입혀주시고 더욱 새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주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교우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뒤를 좇으라
여호수아 3:1-6 / 전병금 묵사
김기선의 "즐거워라 택시 인생"이라는 수필집을 보았습니다. 그는 IMF 관리체제 아래서 좋은 직장에서 강제퇴직을 당하고 직장을 찾다가, 마땅한 직장을 찾지 못하고 택시운전을 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택시회사에 가보니, 자신처럼 좋은 직장을 다녔던 사람들이나, 그런대로 괜찮은 사업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형편이 어려워 나온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선배 기사들에게 자판기 커피를 한 잔씩 돌렸습니다. "이 신입생이 선배님들한테 커피 한 잔씩 대접할 테니 많은 지도 바랍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이렇게 신고식을 치룬 김기선씨는 배정받은 택시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비록 폐차 직전의 낡은 소나타 택시였지만, "이제 이것이 내 사무실이다"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택시를 몰고 얼마 가지 않아서 한 사람이 손을 흔들었습니다. 첫 손님이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첫 손님을 태우고 목적지를 향해서 가던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미터기도 꺾지 않고 한참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하면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이 내린 후로는 한참이 지나도 손님이 들지 않았습니다. 택시를 잡으려는 듯 서 있는 사람은 많이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손을 들어 차를 세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초조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미터기를 보고 또 깜짝 놀랐습니다. 아까 손님이 내리고 나서도 미터기를 꺾은 채로 운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벽 캄캄한 길에 빈차 표시등도 켜놓지 않았으니 누가 택시를 세우겠습니까?
그렇게 실수 투성이로 첫날을 보내고 나니, 새벽에 택시를 몰고 나섰을 때 솟아올랐던 의욕은 이제 바닥까지 떨어져버렸습니다. 공원 근처에 차를 세우고 벤치에 앉아 아내가 챙겨준 빵을 꺼내 먹는데, 자기도 모르게 한 숨이 나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옆에서 누군가 "목이 멜텐데 이거라도 마셔가며 쉬세요"하고 커피 한 잔을 내밀었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공원을 청소하던 환경 미화원 아주머니가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한 잔을 들고 있었습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커피를 받아든 김기선씨는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울적한 기분은 싹 가시고 어깨에 기운이 솟는 걸 느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맛이 최곱니다."
정말 그렇게 맛있는 커피는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비록 자판기 커피였지만 지금껏 맛본 그 어느 호텔 커피숍의 커피보다도 달고 그윽했습니다. 그는 다시 택시에 올라 힘차게 시동을 걸었습니다. 미터기와 빈차 표시등을 확인하고 안전띠를 단단히 맸습니다. 그리고 힘찬 목소리로 "출발 준비 끝!" 하고는 인생 후반전의 첫날을 다시 힘차게 출발했습니다.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인해 우리 주변에는 김기선씨처럼 하루 아침에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에도 경제적인 문제, 건강의 문제로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도 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데, 주님의 자녀인 우리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때로는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김기선씨는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탓하며 절망 속에 주저앉지 않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다시 일어났습니다. 비록 첫날부터 실수를 연발하여 의기소침해지기도 했지만, 환경미화원이 건넨 커피 한 잔으로 다시 용기를 내어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왜 모르고 계시겠습니까? 다만 하나님께서는 넘어진 아이가 스스로 일어나길 바라며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처럼 우리가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굴하지 않고 다시 힘차게 출발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따뜻한 자판기 커피 한 잔에도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도우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비교할 수 없는 위로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오늘 여호수아 또한 요단강 앞에서 낙심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르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에게도 다시 일어나 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풍성하게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야 합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자리를 이어받은 여호수아는 20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과중한 책임을 위임받고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싯딤'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일단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 앞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단강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막막했습니다. 본래 요단강은 그렇게 큰 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 앞에 다다른 그 시기는 모맥을 거두는 시기로써, 헤르몬산에 쌓인 눈이 녹아 내려와 홍수시의 한강처럼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일단 싯딤을 떠나 요단강 앞에 다다른 여호수아는 거기서 3일을 머물렀습니다.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수 3:1) 그 3일 동안 여호수아는 자기 나름대로 배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렸습니다.
보통 우리는 위기가 왔을 때 우왕좌왕하면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만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때를 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 그렇게 구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우리에게 주실 축복을 두 배로 내려 주시기 위해서 오래 기다리게 하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단번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인류를 구원하시면 되는데, 구약시대 4000년 동안이나 오래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입니다.
요단강 앞에서 기다리며 기도하는 여호수아에게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응답은 너무나도 큰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수 3:7)
여호수아는 모세의 종이었고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여호수아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신뢰받는 지도자로 인정받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싯딤'에 머무르지 않고 요단으로 나아갈 때,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크게 들어 써 주실 것입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수 3:3)고 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기도 합니다. 즉, 언약궤를 따르라는 것은 하나님의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순서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앞에 가셔야 합니다. 우리가 앞서 가면 안됩니다. 우리의 감정이 앞서가고,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앞서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앞서가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야 합니다.
이는 마치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양들과 같습니다. 양은 앞에 가는 목자만 좇아가면 먹을 것이 풍부한 풀밭에도 갈 수 있고, 물을 마실 수 있는 시냇가에도 갈 수 있습니다. 목자만 따라가면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만 따라가면 부족함이 없는 인생 길을 걷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따라가면 하나님이 다 준비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밟아 보지 못한 그 황무지에 승리의 깃발을 꽂는 분이십니다. 홍해가 갈라지게 하시고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만들어서 그 백성을 건너게 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의심하기 일쑤입니다. 그 분의 뒤를 따라보지도 않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그 분만 따르면 우리의 인생길은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 살게 되는데 언제 그 분을 외면하니 인생길이 언제나 광야같고 풍랑이 일렁이는 요단강 같습니다. 만사가 안됩니다.
우리는 성전건축이라는 주님의 길을 함께 걷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교회를 향해 성전 건축의 길을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속기도와 재산의 십일조 운동을 통해 그 길을 열심히 뒤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힘들어 보이고 부담스러워 보이지만, 일단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상하지 못했던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넘으로써 약속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교회가 성전 건축이라는 요단강을 건너게 될 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우리에게 넘쳐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의 마지막까지 인도하십니다.
드디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요단강을 건너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이르는 대로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들 보다 먼저 요단강으로 들어갔습니다(수 3:14). 그런데 이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물에 발을 담그자마자, 요단강이 마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닥까지 말라버린 요단강을 유유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다 건널 때까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강 가운데 굳게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수 3:17).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요단강 한 가운데 서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거기에 서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 보다 앞서서 가시면서 우리의 인생길을 마른 땅으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요단강 한 가운데 서셔서 지켜주신 것처럼, 우리 인생 여정이 다할 때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려운 일을 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위기, 건강의 위기, 가정해체의 위기를 만나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때에도 우리는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얼마 전 한신교회의 이중표 목사님이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반포의 어린이 놀이터에서 창립예배를 드린 지 30여년 만에 한신교회를 한국교회의 주목 받는 교회로 성장시킨 이중표 목사님은 시대의 참 목자로 사신 분입니다. 그는 이미 30대에 암 수술을 했고, 그후로도 4번이나 수술을 하셨지만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인생을 마무리 하셨습니다. 몰핀주사로 엄청난 고통과 싸우던 마지막 시기에도 평생을 자신과 동행해 주신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이 세상을 떠나면서도 "오 주여 감사합니다. 할렐루야"하고는 주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이 마지막까지 삶으로 고백하신 것처럼, 우리 주님은 우리의 마지막까지 함께 하십니다. 지금 뿐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 떠날 때도 함께 하십니다. 아니 저 세상에서도 함께 하십니다. 이러한 넘치는 사랑을 주신 주님께 우리는 그저 감사할 것 밖에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길을 막았던 요단강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장애물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그 강을 건널 수 없을 것 같이 보입니다. 성전 건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워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계속 '싯딤'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요단강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기도한 여호수아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거세게 흐르는 강물에 발을 디뎠던 것처럼, 담대하게 하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강물이 마르고 그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 믿음의 길에서 끝까지 승리할 수 있도록 주께서 우리 가운데 굳게 서 계실 것입니다. 그 주님을 의지하고 모두 함께 힘차게 요단강을 건너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