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명분도, 거창한 애국심도 없다.
오직 니 내 사랑하나라는 무심한 질문 하나만 남겨둔 채 전쟁터로 떠나버린 남편을 만나기 위해 한 여인이 총탄이 빗발치는 생지옥으로 뛰어든다.
천만 감독 이준익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수애, 정진영, 엄태웅, 정경호가 열연한 2008년 개봉작 영화 님은 먼곳에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비극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시선의 전쟁 드라마다.
한 여인의 지독한 집념과 여정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은 물론, 억압받던 여성이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묵직하게 그려냈다.
1971년, 시골 여인 순이(수애)는 가부장적인 시어머니의 등쌀에 밀려 군대에 간 남편 상길(엄태웅)의 면회를 주기적으로 간다.
하지만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고 있던 상길은 순이에게 언제나 차갑기만 하다. 어느 날 상길은 순이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후 돌연 베트남 전쟁터로 자원입대해 버린다.
아들을 찾아오라는 시어머니의 모진 다그침과 갈 곳 없는 현실 속에서, 순이는 남편의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직접 베트남행을 결심하는 엉뚱하고도 무모한 발걸음을 뗀다.
무작정 베트남으로 갈 방법을 찾던 순이는 돈을 벌기 위해 눈이 먼 기회주의적 밴드 마스터 정만(정진영)을 만나 사기꾼 기질 다분한 위문공연단에 합류한다.
순이는 써니라는 예명을 쓰고 위문공연단의 보컬이 되어 미군과 한국군 부대를 돌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화려한 무대처럼 보이지만, 그 뒤편은 매 순간이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베트공에게 붙잡히는 등 지독한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따뜻한 심성의 베이스 연주자 용득(정경호)을 비롯한 대원들과 의지하며 순이는 오직 남편을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참혹한 공포를 정면 돌파한다.
위문공연단과 순이는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 끝에 마침내 상길이 속한 최전방 격전지에 도달한다.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교전으로 초토화된 생지옥 속에서 순이는 미군 사령관 앞에서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필사적으로 노래를 불러 헬기를 얻어 탄다.
마침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처참한 골방에서 살아남은 남편 상길을 발견한 순간, 순이는 말없이 다가가 상길의 뺨을 연거푸 세 번 후려친다.
통곡하는 순이 앞에 상길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그런 남편을 내려다보는 순이의 묵직한 얼굴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의 엔딩에서 순이가 상길의 뺨을 때리는 명장면은 단순한 배신감의 표출을 넘어선 거대한 서사적 선언이다.
이는 가부장제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과 무책임한 남편이 지운 삶의 무게에 대한 통렬한 저항이다.
남성이 만든 폭력의 집약체인 전쟁 한복판에서 순이는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닌,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능동적인 주체로 성장했다.
남편이 던졌던 이기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생지옥을 뚫고 온 그녀의 발걸음과 뺨을 때리는 행위 자체로 완벽하게 증명된 셈이다.
결국 상길이 순이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그녀의 강인함과 숭고한 집념에 대한 굴복이자 반성이다.
타이틀인 님은 먼곳에는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베트남의 남편을 뜻하기도 하지만, 당대 사회에서 도달하기 힘들었던 부부간의 진정한 소통, 그리고 전쟁이라는 광기 속에 상실되었던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단아함의 대명사였던 배우 수애는 이 작품에서 강인한 여인 써니로 완벽하게 변신해 인생 연기를 펼치며 작품의 메시지를 단단하게 지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