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교육부 학생들이 스쿨링에 참가해서 거둔 큰 수확 중 하나는
전국 각지의 학우를 알게 된 일이었다. 연락처를 주고받고, 나중에
편지나 전화로 서로 격려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가까운 지역에 사는 학생들끼리 함께 공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통신교육부 학생 대부분이 혼자 교과서를 읽고 학습하며 리포트를
쓰고 시험을 치러야 하는 통신교육을 과연 제대로 끝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쿨링에 참가해 자상하고 친절한 강의를
들으며 더 깊이 이해하고, 게다가 친구도 생겨 모두 자신감과 희망을 품고
학문에 힘쓸 수 있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썼다.
"인간은 타인과 교류하지 않으면 또 타인의 작용을 받거나, 타인에게
작용하지 않으면 자기를 완성하지 못한다."
우정이라는 연대를 맺음으로써 개인이 지닌 용기와 힘을 발휘할 수 있다.
9월부터 11월까지는 일요일 등 휴일에 추계스쿨링이 열렸다.
한꺼번에 휴가를 받지 못해 하계스쿨링에 참가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휴일에 열리는 스쿨링에서 학점을 취득할 수 있었다. 강의는 오전9시에
시작했다. 날도 채 밝지 않은 시간에 일어나 두 세시간이나 걸려서
오는 학생도 있었다.
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하고 야간열차나 심야버스를 타고 지방에서
오는 학생도 있었다. 쌓이는 피곤을 감당하기 어려워 우는 소리를 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같은 처지에서 열심히 도전하는 학우를 만나면
힘을 얻었다.
10월 3일에는 첫 추계시험을 치렀다.
학생들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도쿄에 있는 소카(創價)대학교를 비롯해
홋카이도, 미야기, 아이치, 오사카, 히로시마, 후쿠오카 등 전국 18곳에서
시험을 치렀다. 시험에 도전하는 통신교육부 학생들의 표정은 어느 시험장
에서도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배우고 도전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향상심에는 고귀함이 있다.
10월 10일 일요일인 이날도 스쿨링이 열려, 각지에서 모인 통신교육부 학생들이
진지하게 배우고 있었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오후부터 소카대학교를 방문해
여자부대표연수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통신교육부 학생들이 모였다는 말을
듣자 수업 후에 함께 기념촬영을 하자고 제안했다. 신이치는 창립자로서
아주 잠깐이라도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는 장을 마련하고 싶었다.
사진은 소카대학교에 있는 마쓰카제합숙소 계단에서 찍었다.
신이치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부디 몸을 소중히 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졸업할 수만 있다면 그 무엇보다
기쁘겠지만, 얼마나 열심히 끝까지 노력하며 공부했느냐가 중요하니까요.
배우면 배운 만큼 자신에게 재산이 됩니다. 마음으로나마 여러분의 노력을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신이치는 기념촬영이 끝난 후, 통신교육부를 담당하는 교직원들에게 의자를 권하며
간담을 나눴다. 그리고 마치 간청하는 듯한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통신교육부 학생들은 우리 소카대학교의 자랑이자 보배입니다. 모두 고생하며
배우고 있습니다. 정말 훌륭합니다. 그런 사람 중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뛰어난
인재가 나오는 법입니다. 아무쪼록 교직원 여러분은 학생 한사람 한사람을 진심으로
소중히 대하기 바랍니다."
사람은 시련을 겪으며 생명을 단련해야 비로소 밝게 빛난다. 그러므로 달리 생각하면,
통신교육부 학생들은 자기를 빛낼 수 있는 최고의 환경에 있다고 해도 좋다.
간담을 나누는 열명 남짓한 교직원 중에, 검은 테 안경을 쓰고 고개를 특히 더 크게
끄덕이는 청년이 있었다. 그해 봄에 통신교육부 인스트럭터(첨삭 지도원)로 채용된
사에 가즈시였다. 사에는 이발사로 일하며 정시제(定時制) 고교에 이어 대학교
통신교육부와 야간대에서 배운 후, 대학원 석사와 박사 과정에 진학한 청년이었다.
그러니만큼 신이치의 심정을 잘 알 수 있었다. 그 심정이 가슴 아플 정도로 와 닿았다.
사에 가즈시는 성장 과정이 복잡했다. 1943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료고쿠에서 일본요릿집을 경영했지만, 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없으며
아무것도 모른 채 자랐다. 사에는 여동생이 둘 있었다. 여동생들은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지만, 사에는 유소년기를 지바에 있는 조부모 슬하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가 요릿집을 그만두고 도쿄 조후에 있는 이발소를 구입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사에도 그곳에서 어머니와 여동생들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으로 비행을 저질렀다. 자주 싸움을 일삼았으며
여러 차례 체포 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찾으러 갔다. 사에는
"우리 집은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너라도 잘 해야지 … …."하고 말하는 어머니에게
내뱉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건 자업자득이잖아!"
1958년 어머니가 창가학회에 입회해 신심(信心)을 시작했다.
아들의 장래를 염려했기 때문이다. 사에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용학교로 진학했다.
비행은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는 열심히 창제에 힘썼다. 사에는 어머니가 자기 때문에
기원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부아가 치밀었고, 어느 날인가는
뒤에서 기타를 치며 방해했다. 어머니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가만히 아들의
얼굴을 쳐다봤다.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깊은 슬픔이 담긴 눈이었다.
사에는 시선을 돌렸다. 마음이 쓰라렸다. 자기가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기원이 통하지 않을 리 없다.
기원은 대우주마저 움직인다.
1960년 사에는 이발사 면허를 취득해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해에 신심도 시작했다.
그러나 불법(佛法)에 공감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어머니에게 몹시 폐를 끼쳤기에
효도한다는 마음으로 신심 권유를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래도 남자부 선배를
따라 학회활동을 시작했다. 청년의 사명을 힘주어 말하는 선배를 보며 감동을 받았다.
사에는 열여덟살이 되던 봄에 친구의 권유도 있어 정시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정시제 고등학교 4학년이던 1964년 6월의 일이었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제7회
대학부총회에서 소카대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사에는 그 소식을 게재한
세이쿄신문을 읽었다.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그 대학에서 세계평화를 위해
기여하는 대인재를 육성하고 싶습니다. 그때는 여러분 중에서 위대한 불법을 근저로 한
각 전문분야의 훌륭한 교수가 나와 교단에 섰으면 합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즉 세계의 대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 그 대학에서 열심히 노력하기를 부탁드립니다."
사에는 평소 학회 남자부 선배들이 "기원으로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는 신심이다."
라고 하던 말이 떠올라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이 신심은 반드시 기원이 이루어
진다는데 정말일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 같은 사람도 진지하게 기원하면 소카대학교
교수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됐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지만, 정말 그렇게 되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차피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열심히 신심에 힘쓰는 어머니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어머니는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그럼 될 수 있다마다. 단단히 제목을 부르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될 수 있고말고!"
어머니의 목소리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표정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사에는 자신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어머니의 말에 기뻤다.
사람은 '자기를 믿고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자각했을 때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좋아, 해보자!' 사에는 이렇게 결심했다. 스물두살에 정시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주오대학교 통신교육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통신교육부에서 학점을 취득하는 일은 사에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리포트도 생각만큼 잘 써지지 않았고, 언제쯤 대학을 졸업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사에는 고민 끝에 어머니에게 야간대로 옮기고 싶다고 상의했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괜찮지 않겠니. 한번 정한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해내야지. 신심근본으로 후회 없는 청춘시절을 보내려무나."
사에는 어머니의 격려에 힘을 얻어 야간대로 옮겼다. 하지만 일을 해야 하므로 제대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날은 이발소의 정기휴일인 월요일 뿐이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월요일의 남자'였다. '과연 나는 이대로 학업을 지속할 수 있을까.
정말 대학 교수가 될 수 있을까… ….' 사에는 대학부 하계강습회에 참석했을 때,
어서강의를 담당한 간부에게 어려운 상황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보았다.
담당간부는 엄하게 지도했다. "방금 들은 말에서는 진심으로 현재 처한 상황에 맞서
싸우겠다는 결심이 느껴지지 않는군요. '힘들다, 큰일이다.'라는 마음에 지고 있지
않습니까. 힘들기 때문에 꼭 해내겠다는 의욕이 보이지 않아요. 제목을 끝까지 불러서
나는 이렇게 학업을 성취했다고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신심이
아니겠습니까!" 몹시 날카롭고 매섭게 응석을 지적당한 느낌이었다.
강습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대학부장이 사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까 지도한 담당간부가 야마모토 선생님에게 보고를 드렸는데, 선생님이 휘호를
써 주셨어요." '용기'라는 글자였다. 사에는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참으로 자신에게 부족한 점은 용기라고 생각했다. 이 순간 사에의 일념이 변했다.
그러자 반드시 이기겠다고 도전하는 마음이 용솟음쳤다.
일념전환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꾸고, 모든 것을 변혁하는 원동력이 된다.
필사적인 일념은, 역경이라는 바위를 부순다.
사에는 이발사라는 직업상, 강의를 모두 들을 수 없었기에 친구에게 노트를 빌려가며
열심히 공부해서 주오대학교(야간)를 졸업했다. 그리고 고마자와대학교 대학원
법학연구과에 진학했다. 또 공부한 성과를 시험해 보려고 행정서사와 공인중개사 등
자격증 시험에 도전해 합격했다. 대학원 시절에도 학비를 직접 마련했으며
가족을 위해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계속 이발사로 일했다.
1976년 4월, 소카대학교에 통신교육부가 개설되자 사에는 첨삭지도원으로 채용됐다.
사에는 통신교육부 건설에 힘을 쏟았고, 훗날 교수가 됐다.
'소카대학교 교수가 되고 싶다.'는 정시제 고교생의 꿈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다.
굳게 결심하고 강성하게 기원하며 부단히 노력하면 꿈은 이뤄진다.
아니 반드시 이룰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신앙을 한다.
도다 조세이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은 '구도의 태양'이다. '지혜의 보물창고'다.
그리고 '영원한 청춘의 마음'이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추계스쿨링에 참가한 통신교육부 학생들과 기념촬영이 끝나자
교직원들과 간담을 나누며 거듭 이렇게 염원했다.
"통신교육부 학생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알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가족처럼 격려하기 바랍니다. 이 통신교육이 성공하면, 창가 민중교육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문이 열립니다. 이 점에 소카대학교를 설립한 큰 뜻이 있습니다."
교직원들은 이렇게 결심했다.
'통신교육부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뛰어난 인재를 많이 배출하자!
모든 면에서 일본 제일 그리고 세계 최고의 통신교육부를 구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