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갈현동 470 — 1번지 세인주택 앞」
아리랑 슈퍼 알전구가 켜질 무렵 저녁이 흰 몸을 끌고 와 평상에 앉는다. 그 옆으로 운동화를 구겨 신고 사과 궤짝 의자에 앉아 오락 하는 아이의 얼굴이 불빛으로 파랗다. 저녁은 가만히 아이 얼굴을 바라보다. 작은 어깨 위로 슬며시 퍼져간다. 가로등이 켜지자 화들짝 놀란 저녁이 또 가만히 웃는 동안에도 아이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가 빨갛게 익었다가 다시 하얗게 질렸다. 갑자기 세상은 저녁 아닌 것이 없는 저녁이 되었고, 골목 끝은 해 지고 난 후의 들녘처럼 따뜻하다. 골목길을 따라 불이 켜진다. 낮에 보았던 살구나무에 달린 살구들처럼 노랗게 불 켜진 골목을 따라 집들도 불을 켜는 동안 나는 집 앞에 앉아 수학학원 간 딸애를 기다린다. 불빛은 얼마나 따뜻한가. 그림자를 보면 알 수 있지. 감추고 싶은 것 다 감추고, 아니, 더는 감출 수 없는 몸을 보여준다는 것은. 나는 때로 그렇게 따뜻한 불빛에 잠겨 한 마리 물고기가 된다. 우리 집에도 불이 켜졌다. 딸아이가 불빛을 따라 헤엄쳐 올 것이다.
◈ 시_ 이승희
이승희(1965~ )는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1997년에 《시와사람》으로, 1999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등이 있다.
◈ 낭송_ 김동훈 - 배우. 연극 '시동라사', '행복한 가족' 등에 출연.
◈ 출전_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문학동네)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김태형
이승희, 「갈현동 470 1번지 세인주택 앞」을 배달하며
어떤 지명들은 기억을 소환하는 장치이지요. 몸 담아 살았던 과거의 장소들을 떠올리는 것은 쓸쓸한 일이지요. 장소들이 육화된 친밀성이 휘발되어버린, 아주 창백한 그림자와도 같이 가슴을 아리게 하는 기억들을 머금기 때문이지요! 기억으로 호명된 장소와 현재적 삶 사이에는 엄연한 ‘간격’이 있습니다. 이 시가 제시하는 “갈현동 470 1 세인주택 앞”이라는 지명은 현재의 것, 아직은 과거 속으로 잠겨들기를 거부하는 장소지요. 저녁이 옵니다. “아리랑 슈퍼 알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세상에는 “저녁이 아닌 것이 없는 저녁”이 날개를 접고 내려앉네요. 이 저녁에 사과 궤짝 의자에 앉아 오락에 열중하는 소년과 수학학원 간 딸애를 기다리는 애비가 서 있네요. 막 과거로 진입하려는 이 골목 속으로 “딸아이가 불빛을 따라 헤엄쳐”오겠지요. 이 저녁 풍경은 곧 지상의 가장 따뜻한 온기를 지닌 채 과거를 향하여 쏟아지고 말겠지요.
문학집배원 장석주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