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7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
요한 16,5-11
예수 승천은 아버지의 역할을 명확히 드러낸다
저는 본당에서 모든 일을 신자들이 알아서 하기를 바라고 큰 방향만 제시합니다.
그러면 신자분들은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동안 일일이 지시만 받아오던 삶에 익숙해져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가장 편하지만, 동시에 가장 힘들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지시해 달라고. 그러면 제가 하는 노력의 효과가 반감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가 반드시 있다고 확신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보면 무서운 아버지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무서운 아버지들 밑에 자라는 아이들은 주눅이 들어있습니다.
엄마를 그리워해서인지 아이가 엄마 젖처럼 부드러운 것만 찾아서 소의 등골을 날로 먹는 것은 좋아하지만, 밥은 먹지 못합니다.
혹은 돈은 벌어주지만, 아이들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아버지도 나옵니다.
아이들은 숨을 못 쉽니다.
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면 아이들이 엇나갈까요? 아버지의 관심은 엄마의 관심보다
아이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이 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돈으로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돈을 버는 이가 직접적으로 아이들에게 말할 때 그 무게는 엄마가 하는 말보다 훨씬
큽니다.
아이들도 엄마가 자신에게 주는 밥이 아버지의 돈으로 차린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엄마가 잔소리해도 어차피 같은 아버지의 돈으로 사는 사람으로 여기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말은 그 무게가 사뭇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르침과 재정적 도움을 어머니는 자신의 것으로 녹여서 자녀들에게 줍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그것으로 성장합니다.
반면 어머니의 역할을 배제한 채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직접 관여하면 자녀들은 성장을 멈춥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게 더 낫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어머니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땅에 살며 자녀를 키웁니다.
반면 아버지는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 마음이 평안합니다.
아버지는 밖에서 돈을 벌 때 자녀들에게 평화를 주고 어머니는 땅에서 자녀들과 머물 때 평화를 줍니다.
평화를 빼앗기면 자녀는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예수님은 이제 교회라는 어머니에게 우리를 맡기고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서양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사라져주는 것이다.”
히틀러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세상에서 가장 포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몸은 자랐지만, 사랑의 마음은 자라지 못했던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을 때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였습니다.
엄한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란 고흐는 언제나 주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떠나가자 숨어있던 예술 본능이 깨어났습니다.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늘에, 어머니는 땅에 머물며 자녀를 키워야 하는 이 신비를 가정이나 성당에서
적용하지 못하면 우리가 키우려는 자녀의 열매는 낭패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역할을 되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7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 16,5-11
보호자 성령의 현존과 동반을 굳게 믿으십시오!
요즘 우리가 봉독하는 사도행전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 용맹한 주님의 군사로 거듭난 사도들의 놀라운 행적을 계속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변화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이상 그 어떤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습니다.
그 어떤 박해나 위협에도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복음과 관련해서 한 번만 더 입 뻥끗했다가는 더 이상 안 봐주니, 입을 다물라고 해도, 사도들은 더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참다못한 행정관들은 바오로와 실라스의 옷을 찢어 벗깁니다.
맨살 위로 엄청난 매질을 해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은 깊은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도망을 칠까봐, 발에는 차꼬를 채웠습니다.
그 처참한 모습에 간수는 혹시나 죽었을까봐, 가끔씩 이봐요, 살아있어요? 하고 확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정이 될 무렵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지막지한 매를 맞아 정신이 혼미할 상태 속에서도 두 사람은 어떻게든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 기를 쓰면서 안간힘을 다해 주님을 찬미하는 송가를 불렀습니다.
큰 목소리로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잠시후 주님께서 그들의 모습에 탄복을 하시고 응답을 주셨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사도들이 탈옥한 것으로 알고 품고 있던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바오로가 만류하였습니다.
놀라운 광경 앞에 넋이 나간 간수는 즉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려 물었습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아주 간결하게 대답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사람의 지성이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놀라운 광경, 그 배경에 대체 무엇이 있었을까요?
성령의 굳건한 현존과 활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 복음도 성령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한없이 나약한 우리들, 겁쟁이들인 우리지만, 보호자 성령께서 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고,
우리 인생 여정에 동반하심을 굳게 믿는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두려움을 기꺼이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적대자들이 아무리 우리를 협박한다 할지라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눈과 마음과 지성을 밝혀 주시면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의로움인지를 명확히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6주간 화요일 강론>
(2024. 5. 7. 화)(요한 16,5-11)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 16,5-11).”
1)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승천’에 대한 암시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라는 말씀은, “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슬퍼하기만 하느냐?” 라는 꾸중입니다.
예수님께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물은 제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앞의 13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물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3,36).”
14장에는 토마스 사도의 질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왜 가시는지 알고 싶어 했는데, ‘이별의 말씀’이 계속되면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슬픔에 점점 더 깊이 사로잡힌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8-19).”
제자들은 다시 오겠다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거나 흘려들었을 것입니다.>
2)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라는 말씀에서, ‘진실’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계시’를, 또는 ‘특별한 가르침’을 뜻합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는, “내가 떠나도 너희의 이로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떠나지 않는 것은 너희에게 해롭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로움’은 ‘구원의 은총’을 뜻합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라는 말씀은, “내가 떠나도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실 것이고,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떠나야만 성령께서 오신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의 당신은 떠나시지만,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떠나심’은 ‘이별’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뒤에도 ‘성령을 통해서’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슬퍼한 것이 아니라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0-53).”
3)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성령을 받으면 너희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생각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고, 너희는 그 생각을
바로잡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1)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거스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2) 박해자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생각했지만, 제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예수님의 의로우심’을(죄 없으심을) 증명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의로우신 분’이라는 말은, ‘죄 없으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3) 박해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죄인이 심판받은 일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제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탄과 그것의 하수인들을 심판한 일이다.” 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죽음의 세력인 사탄을 물리치고 정복한 일이기 때문에, 사탄을 심판한 일이고,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죽인 박해자들을 심판한 일이기도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