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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斷俗寺) 가는 길
(부제: 내가 깨달은 수필)
문학기행을 따라 나섰다. 단속사 가는 길이다. 아름다운 글을 쓰는 분들을 가까이 하고픈 내 마음이 몸보다 먼저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길은 전 편이 하나의 수필이었다. 답사과정의 연결이 소설구성법의 순서를 따르고 있었고 절정에 이르러서는 꽃처럼 피어난 한편의 시가 또 그러했다. 대단원은 수필을 배우는 내가 장식해야 할 몫이었다.
차는 함양군 의안면 광풍루로 달려갔다. 빛과 바람의 누각이다. 서기어린 빛과 가슴을 씻어내는 바람은 불지 않았다. 금호강변의 오리 숲은 오리 한 마리 쉬기 어렵고 바라다보는 강 너머는 도시가 된지 오래다. 누각에 올라 빛바랜 단청아래 서니 보이는 풍광은 내 수필의 서두처럼 그럭저럭할 뿐이다. 잠시 옛 풍류객들의 기분을 가늠해 보고는 연암선생 사적비가 있는 의안초등학교로 갔다. ‘허생전’이나 ‘호질’의 이야기는 생각도 나지 않고 어릴 때 다닌 시골초등학교가 생각 났다. 눈물도 나지 않는 문상을 가서 억지로 곡을 하듯 사적비에 적힌 글들을 읽었으니 내용이 도무지 기억에 없다. “‘연암선생께서 안의 현감으로 재직 시 당신의 실학사상을 펼쳐 본 곳이다.” 대충 이런 글 같은데- 연암선생께 죄송하다.
후세 사람들은 선생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정립한다고 어렵게만 설명한다. 말을 아껴 한마디로 뜻을 전하는 게 바로 실용 아닌가.
“흑묘든 백묘든 쥐만 잡으면 된다.”
등소평은 이 한마디로 12억 중국인민을 깨우쳤다. 연암이 열하에서 읽어낸 실용을 부도옹은 한강에서 배워갔다. 단순 명료한 것을 달콤하고 복잡하게 설명하니 나라가 어지럽다.
“꿩 잡는 게 매다”
이렇게 한마디로 설명할 능력은 없는가. 수필에 조금씩 익숙해지니 나도 지식을 늘어놓고 수필인양 한다. 초기에 쓴 글들이 다 그러하다. 실사구시를 거부반응 없이 전하기 위해서 소설의 힘을 빌린 선생의 지혜에 감탄한다.
화재로 소실된 금천리 윤씨고가가 빨리 복구되길 바라면서 정여창선생고택의 문을 열었다. 선생께서 조선성리학맥에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었는지는 아는 바가 없지만 사랑채에 걸린 “충효절의(忠孝節義)”란 네 글자에 압도당하고 만다. 20여 년 전 남구미 IC근처에 있는 야은선생 묘소 가는 길에서 본 “지주중류(砥柱中流)”비의 글씨가 떠올랐다. 힘찬 글씨에 매료되어 사진을 찍어 왔었다. 두 글씨가 쌍벽을 이룰 만 하다. 서체도 비슷하고 붓의 흐름이 거침없다. 글의 내용과 글쓴이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고서는 결코 저런 글씨가 쓰여 질수 없다. 수필 또한 그러하다. 내 마음이 꾀죄죄한데 어찌 세상을 울릴 문장을 얻겠는가. 다시보고 또 보지만 내가 다다를 수 있는 깊이가 아니다. 벽에 붙인 종이가 자꾸 떨어져 나간다. 안타깝다. 누가 저 글씨를 돌에 옮겨 새겨 보존 했으면……, 이 댁에 저 글씨가 없었다면 붉은 칠을 하고 서있는 충신효자문의 격이 한참 떨어질 것이다. 나도 돌아가서 안과 밖이 다른 글은 정리를 해야겠다.
안채 마당에서 우물을 발견했다. 최근에 수필 한편을 쓰면서 우물보기를 소원했던 터라 무척 반가웠다. 뚜껑을 열어 보았다. 속은 지저분했지만 내 그리움이 거기 잠겨있었다. 행랑채 벽에는 물지게도 걸려 있었다.
여러 고가들을 방문한 탓으로 앞집도 뒷집 같은 단조로움이 전개되니 졸음이 오는데 점심시간이란다. 먹는 것 보다 즐거운 일이 있으랴. 단속사도 식후경이다. 잠이 달아나고 기분이 반전된다. 수필에도 이런 맛을 집어넣어야 하리라.
점심 식사 후 수필 낭송을 들었다. 읽는 맛과 듣는 맛이 또 다르다. 낭송하는 분의 심성이 작가의 마음에 더하여오는 때문이리라. 우리 수필이 더욱 발전해 나갈 영역이 영상(낭송)수필 분야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스쳐가면서 글에는 그 배경이 되는 심상이 중요하다는 깨우침을 얻는다.
다음에 들른 곳이 최 씨와 이 씨 고가가 있는 예담 촌이지 싶다. 옛 담장들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안과 밖을 나눈 담들에는 가지런한 멋이 있다. 골목길을 돌아드니 수필 “오래된 마을에서” H 선생이 돌담을 묘사한 글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손으로 드르륵 쓰다듬어본다. 그의 수필에서처럼 항아리 가지런한 종가의 부엌에서 반가운 누군가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쫒아 나올 것만 같았다. 명 수필 한편이 남긴 아름다운 향기를 실감한다. 그 집에서 디딜방아를 밟아보니 “먼 산보고 절을 하는 게 뭐고.” 하며 놀던 수수께끼가 생각난다.
다음은 단속사 정당매. 이 여행의 위기이자 절정이며 이번 여행의 함정이 있는 곳이다. 650살이나 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라 한다. 원 줄기는 부러져 나가고 시멘트로 덧씌워져 있었다. 나무 둘레를 한 바퀴 돌아본다. 저 나무에 무슨 신령한 힘이 있어 저리도 많은 후세문인들을 불러 모은단 말인가. 속세와 연을 끊은 절간도 무너지고 강회백의 문장하나 남아 있지 않은 그곳에- , 홀로 남은 매화 한 그루가 뿜어내는 향기가 정녕 무엇이더란 말인가. 사람들은 수령에 마음을 주었지만 내 마음은 오직 나무가 지닌 신령한 힘을 찾고 있었다.
많은 분들이 사진을 찍는다. 정당매를 배경으로 향기 높은 작품을 쓰신 선생님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다. 나도 그분들과 교류한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었지만 내 글이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니 차마 부끄러워 뒤로 물러나고야 만다. 어쩌다 권하는 분들이 있어 한쪽 편에 서서 얼굴을 내밀고는 작은 기념으로 삼았다. 그저 그런 느낌으로 정당매를 떠나는 길에 한 시골 농가에서 어미 소와 함께 외양간에 있는 어린 송아지를 만났다. 아! 송아지. 졸작‘소’가 생각나 카메라에 담아왔다. 내가 이제 송아지 한 마리에도 이리 감탄하다니-. 수필을 쓰고 달라진 내 모습에 내가 놀란다. 소의 눈은 언제 보아도 선하다. 이대로 끝나는 여행인 듯 하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한 것이 아니니 실망도 없다.
어슬렁 뒷짐을 지고 단속사 빈터 입구로 돌아나가니 작은 시비가 하나 서 있었다. 남명선생께서 사명대사에게 준 시를 새기어 놓았다. 최근에 세운 것이라 사람들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시비 앞에 서서 한참을 읽고 또 읽었다. 단속사 가는 길에 뭐가 있기에 회원들을 이리로 데려왔을까. 매화차 한잔 마실 곳도 없는 무너진 빈 절터에-. 잠시의 순간에 수없는 자문자답을 하며 스무고개를 푸는 아이가 되었다. 막 부화를 시작한 병아리가 껍질을 통하여 비치는 광명을 보고 밖으로 나오려 하듯 찰나의 긴장과 적막이 흐른 후 나는 비로소 한 생각을 잡아냈다.
‘오전에 만난 연암은 그 뜻을 소설에 담았고 지금 만난 남명은 그 마음을 시에 담았구나!’
이번여행의 진정한 절정에 오르는 순간이다. 내가 그동안 소설과 시 사이에서 수필의 위치를 몰라 번민해온 고민이 거기서 해결될 것 같았다. 내가 풀지 못했던 수많은 의문의 보따리들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잡은 것 같았다.( 이 부분은“단속사를 다녀와서”로 한 번 더 쓸 생각이다 )
“연암은 뜻(意)을 소설에 담았고 남명은 마음(情)을 시에 담았다.”
는 이 사실을 연암사적비 앞에서는 내가 몰랐다. 자신의 생각을 쉬이 전하고자 인간의 본성을 울리는 문학이란 형식을 취하고 있는 남명과 연암을 이해하면서 나는 여기서 오늘 여행의 앞과 뒤를 연결하여‘단속사 가는 길’전 과정을 하나의 수필이자 수필작법으로 읽어내는 행운을 잡았다. 그리고 소설과 시를 양손에 움켜쥔 수필의 위상을 깨치게 되었다.
수필하면 보드랍고 감성적인 글로만 알고 있었는데 박지원, 정여창, 남명, 유정 같은 거인들의 기상들뿐만 아니라 개미집에서부터 광대무변의 대 우주까지 무한대와 무한소의 영역을 넘나들며 내 마음이 미치는 깊은 생각을 소설과 시에서 사용되는 모든 작법, 나아가서 영상(낭송)까지 동원하여 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히 시와 소설이 부러워 할 무형식의 형식이 아닌가.
소설을 쓴 연암이 소설가가 아니고 시를 쓴 남명이 시인이 아니듯이 수필 그것은 결국 문학성이 뛰어난 사유이면서 문학적이지 않으면 도저히 표현하지 못할, 문학조차도 감동치 않고는 못 배길 깊은 깨우침을 전하는 방편인 것이다. 단속사 가는 길은 당연히 정당매가 조연이고 이 시비, 아니 이 시가 주연이다.
유정 산인에게 준다.
꽃은 조연(槽淵)의 돌에 떨어지고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이별하던 때 잘 기억해 두게나.
정당매(政堂梅) 푸른 열매 맺었을 때
의지가 강철 같으신 선생께서도 그리는 사람 있음에 산청에 몸을 둔 채 마음은 사명을 따라가고 있음을 본다. 유불이 상극이던 시절에 무엇을 두고 두 분이 끌렸을까. 노쇠한 남명이 청년 유정에게 무슨 부탁을 저리도 간절히 하였을까.주1) 그것도 속세와 절연한 단속사에서. 세인들은 매향에 끌려 단속사로 왔겠지만 대승거유는 지리산 남쪽에서 묻어오는 검은 구름을 보았으리라. 어지러운 나라에 가련한 생령들을 어찌할까 걱정하며 밤을 지새웠으리라. 이 시를 읽으면 매화 찻잔을 마주 두고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보면서도 어찌하지 못하는 늙은 남명과 그 가르침과 당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청년 유정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지금은 6월 초 곧 매실을 딸 때이다. 푸른 열매 맺히면 나는 또 누구를 기다려야 하나. 앞일을 내다보고서도 어찌하지 못하는 선생의 푸른 마음이 가슴을 후벼낸다.
마지막으로 남명선생께서 후학들을 가르친 산천재를 둘러보았다. 오늘 기행의 대단원이다. 산천재에서 바라보면 멀리 천왕봉이 보인다. 이제 이곳을 떠나려하니 나는 그만 남명을 두고 떠나는 유정의 마음이 된다.
‘멀리 있어도 곁에 있는 듯하고 아무 말 없어도 수많은 말들을 나눈 듯하다. 한 문장이 통하니 마음은 더욱 끌리는데 사람은 멀리서 볼수록 더욱 더 커 보이고 천왕봉은 멀어질수록 자꾸 작아 보인다. 방울소리 차가운 검기에 차마 가까이 할 수 없지만, 향원익청(香遠益淸)인데 정당매 꽃이 피면 어디선들 모르리까. 푸른 열매 맺기 전에 내 다시 찾으리라.’
한시(漢詩)를 지을 줄 모르니 이렇게라도 적어서 내 마음을 남명선생께 띄워 보낸다. 앎과 행함을 일치시켜야 천하를 감동시킬 문장을 얻을 수 있거늘-. 남명 앞에서니 한 없이 작아진다. 젊은 유정이 남명을 만나 크게 깨우쳤으리라.
단속사 가는 길에 눈을 뜨게 하시려고 대선배이신 J 선생께서 눈을 뜬 장님 얘기를 팜플렛에 담아 손에 쥐어 주셨는데 미련한 것이 그냥 종이로만 알고 어디다 두었는지 찾지를 못하겠다. 오로지 송구할 따름이지만 실천궁행한 인물들과 연암, 남명을 이해하면서 수필이 어떠해야 하며 또 어떻게 나의 뜻을 담아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되었다. 가까운 곳에 성철 스님 생가가 있었으나 일정에 없어 가지를 못했다. 스님의 조계종 종정 취임 법어가 수필인 듯 떠올라 옮겨 적어 본다.
⌜圓覺이 普照하니 寂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萬物은 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眞理가 따로 없으니 時會大衆은 알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종교를 떠나서 진실의 힘, 사유의 깊이, 안과 밖이 합일하는 전달의 능력이 雄渾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 수필가들에게 무엇을 써야 한다고 말하는 듯 들리지 않는가. 내가 어렴풋이나마 깨달았을 때는 여행은 이미 끝나 있었다. 영걸의 고장 경남 함양, 산청은 수필을 공부하는 분들이 꼭 한번은 들러야 할 곳이다. 문학 기행을 준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원고분량 200자 원고지 29.4매)
주1) 남명이 산천재를 지은 해가 1562년 명종 23년인바. 아마 이즈음에 두 분이 만났던 것 같다. 당시 선생의 연세가 61세였고 사명대사가 선생보다 43살 연하라 18세 쯤 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일어났으니 30년 후를 내다 본 것은 좀 무리 일 것 같고 혼란한 조정 사정에 나라가 망해가는 것은 아셨으리라 생각 된다. 43세 차이의 연령을 극복하고 마주 앉은 두 분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즐겁고 숨이 막힌다.
첫댓글 단속사, 산천재를 두루 다녀가셨군요. 제 고향이라. 정당매, 원정매, 야매가 있지요. 야매는 고가 안에 있어 보기 힘들지만 운때가 맞으면 볼 수 있어요. 원 나무는 고목이 되어 흔적만 있고 새 가지가 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 중 정당매가 그나마^^ 어릴 때 산천재에서 놀고 덕천서원, 세심정에서 놀았지요.^^ 구경 잘 하셨습니다. 고향은 옛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여전히 고향입니다.^^
아!
정말 훌륭한 고장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수필에 처음 발을 들인 그 때 단속사의 절 이름이 참 의미 깊게 다가 왔습니다.
속세와 인연을 끊는다는 말. 더 이상 세속적인 욕망에 집착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