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9월15일 토. [(백)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제1독서 히브 5,7-9
복음 요한 19,25-27
◈ [서울]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2018년 나해 9월14일 토.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제주도 한림 읍사무소에 가서 전입신고를 했습니다. 3개월 있는
동안이지만 제주도 도민에게 주는 혜택이 있다고 해서 신고를
했습니다. 숲과 공원의 무료입장이 가능한 곳이 있다고 합니다.
항공권과 승선권도 할인 혜택이 있다고 합니다. 크지는 않지만,
혜택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이 좋은 일입니다. 요즘 젊은 분들은 각종
할인 혜택을 받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영화도, 책도, 음식도,
숙박도 할인 혜택을 받는 방법을 찾아서 이용하는 것을 봅니다.
예전에 전입신고하면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주민 센터에서는
환영의 작은 선물을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관내에 있는 각종
편의 시설, 박물관, 기념관 등에 대한 안내 책자도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성당에서도 전입신고를 하면 성당에 대한 안내를 해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성당 홈페이지를 소개해 주고, 신자들이 하는
사업장을 소개해 주고, 신부님이 방문 할 수 있도록 약속을 잡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면 어떤 혜택이 주어질까요? 우리의 주님이신
성체를 몸에 모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 병자성사를 청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혼인 서약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큰 혜택이 6개월에서 1년 교리만 받으면
주어집니다. 한번 세례를 받으면 갱신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호가
새겨지기 때문에 본인이 원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습니다. 본인이 원하면 전
세계 어디에서도 신앙인으로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집니다.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회에는 없고 성당에는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제대 뒤편에 있는 십자가상입니다. 요즘은 ‘승천, 부활’의 십자가상도
있지만, 대부분의 성당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시작되었음을 잊지
말자는 다짐입니다. 성당 양옆 벽면에는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의 길은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따라서
지고 가는 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시고, 승천하셨으며, 천주의 모친이 되셨지만, 많은 고통을
간직하고 사셨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의 고통을 ‘성모칠고’라고
이야기합니다. ‘괴로움을 당하리라는 시몬의 예언을 들었을 때,
이집트로 피난 갈 때, 예수를 잃고 찾아 헤맬 때, 십자가를 진 예수를
만났을 때, 못 박혀 죽은 예수 앞에 섰을 때, 십자가에서 예수의
주검을 내렸을 때와 묻을 때 겪은 고통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이 당신의 어머니십니다.’ 사랑을 받던 제자는
이제 성모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다고 성서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고통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와 같습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과 갈등, 고통과 절망을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우리는 힘들지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면 우리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희망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고난으로 순종을 배운다
2018년 나해 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고난으로 순종을 배운다>
복음: 요한 19,25-27
‘실락원’을 쓴 밀턴은 매우 다정다감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당파 부자의 가정에서 성장한 매리라는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매리는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친정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밀턴의 청교도적인 삶이 싫었던 것입니다.
“나는 풍요롭고 자유분방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밀턴의 엄격한
청교도적 삶은 견딜 수가 없다.”
밀턴은 인내심을 갖고 아내를 기다렸습니다. 2년 후, 매리는 밀턴에게
돌아와 눈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당시 매리의 가정은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습니다. 반면 밀턴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밀턴의 이 불행한 신혼시절은 ‘실락원’을 집필하는데
결정적인 소재가 됐습니다. 자신의 낙원을 잃음으로써 비로소 명작을
완성한 것입니다.
아이가 자꾸 불에 손을 갔다 대면 그것이 뜨겁다는 것을 조금 느끼게
해 주는 게 좋다고 합니다. 불이 뜨겁다는 것을 느껴야 다시 손을
갖다 대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이는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갑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순종은 자신을 죽이는 고통을
수반합니다. 고난을 싫어한다면 순종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순종을 위해 유익합니다. 우리가 지금 잘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고통의 열매입니다. 고난을 통해 배운 것들입니다.
두 발로 일어서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입으로 하는 말 한 마디까지
모두 고난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아픔 없이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아기는 부모님께 순종하기 위해 수천 번의 엉덩방아를 찧습니다.
고통을 두려워하면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고난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고난에 더 익숙한 사람이 더 순종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더 순종을 잘
할 수 있다면 그만큼 큰 영광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속자의
어머니가 되는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아드님도
힘드시지만 성모님도 힘드십니다. 아들은 눈에 보이게 못 박히시지만
어머니는 눈에 보이지 않게 못 박히십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을 받을
수 있도록 고난에 잘 훈련된 분이셨기에 이 고통을 잘 견뎌내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순종하셨습니다(루카 2,34-35 참조). 순종하지 않는 것은 그 백배의
더 큰 고통이 따르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모 마리아는 불순종의 고통을 알지 못하십니다. 우리는
시련으로 순종을 배우지만 성모 마리아가 우리와 다르신 것은
불순종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으셨음에도 죽기까지 순종할 줄
아셨다는 데 있습니다. 죄를 짓지도 않고 그 죄에서 오는 고통을 알기
때문에 순종한다면 그 믿음은 대단히 크다 할 것입니다. 순종은
그래서 믿음입니다.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아멘!’
하셨습니다. 이 순종이 당신 영혼이 칼에 찔리는 고통을 가져왔지만,
‘아멘’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큰 행복임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순종이었습니다.
고난을 겁내면 순종은 불가능합니다. 순종도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고통스러운 것과 덜 고통스러운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뿐입니다. 다만 불순종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에
순종의 고통을 택하는 것입니다.
높은 바위에서 메말라 가는 바다 가재가 있습니다. 그 바다 가재에게는
바다로 되돌아가기에 충분한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가기 위한
고통을 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바닷물이 자신에게
되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만일 바닷물이 되돌아오지 않으면
그 바다 가재는 그곳에서 말라 죽고 맙니다. 그러나 조금만
노력한다면 바다 가재는 자신의 1미터 앞에서 넘실대는 파도에
도달해서 살 수 있습니다.
순종은 덜 고통스러운 것으로 큰 만족을 얻을 수 있고 불순종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더해집니다. 나에게 오는 고통만 잘
묵상해보아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순종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불순종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복음: 요한 19,25-27: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어제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다. 교회는 그 다음 날인 오늘을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념한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에 지내는
이유는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였음을 드러낸다. 이 축일이
오늘로 확정되기 전에는 성지주일 전 금요일에 행해지기도 하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있어서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에서부터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순간까지 어머니로서의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신 성모님의 모습이다. 우리가 작은 마리아가 될
때, 또 다른 구원의 협력자로서 하느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마리아는 자신의 삶을 항상 그 영혼을 찌를 것이라는(루가 2,35)
시메온의 예언된 예리한 칼에 대한 전망 속에서 살았다. 이 칼이 바로
그의 십자가이다. 이는 이미 파스카 축제 후에 성전에 남아있던
예수를 잃어버림으로 시작되었다(루가 2,41-52). 그리고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에 또한 마리아도 어떤 모습으로 예수께서
가져오신 보편적 형제애를 이룰지를 배우기 위해 당신의 “학교”에서
형성되어야 했다. 그것은 항상 “얻기”위해서 “잃어버림”의 삼위일체적
역동성에 더욱 이끌 것이다.
마리아의 생애에서 절정의 그리고 더욱 고통스러운 순간은 그녀가
십자가의 발 앞에 있으면서 예수의 외침을 들을 때였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가장 큰 잃어버림의 순간이다. 십자가 밑의 마리아의 고통은 아들의
고통과 일치한다. 아들의 외침은 당신이 전적으로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일치를 재건하기 위해 인간적 조건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께 대한 영원한 응답의 반향이다.
마리아의 침묵의 외침은 당신 아들의 버림에 대한 피조물의
메아리이다. 이 순간에 그녀의 참 정체성이 실현되었다. 당신 아들의
“동반자”가 되도록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셨고, 이제 처신한 것이
무엇인지 깊은 곳까지 계시되었다. 마리아는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아들에게 주어진, 아들이 자신의 버림받음으로 실현할 구원된 새로운
인류와 피조물의 가시적 표징으로 예수 앞에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승리에서 또한 자신을 떼어놓아야 한다. 그분은
마리아를 더 이상 어머니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또 마리아는 가장
위대한 보물, 그녀 안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첫 번 잉태의 결실인
아들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지상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행위는 실제로
마리아의 모성을 다른 아들, 전 인류를 대표하는 요한에게로 옮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6-27). 요한복음이 가리키듯이 마리아에게는 요한과 함께
십자가의 발 앞에 있음으로써 두 번째 잉태가 실현된다. 그녀의 고통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쇄신되고 예수가 된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마리아는 이제 당신의 아들을 잃어야 하는
아픔까지 겪으신다. 아들이 죽는 것보다도 이제 다른 아들을 가지시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잉태라는 것이다. 그로써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로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심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관계에서 형성되는
관계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 3,35)라는 말씀의 확인이라고 하겠다. “자기 집에"라는 표현은
단순히 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말한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든 삶을 함께 했다는 의미이다.
“모셨다”라는 표현은 제자가 마리아에게 모든 것을 개방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마리아와 제자 사이에 새롭게 맺은 가족관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더욱 마리아의 삶을 본받고,
이 어머니의 고통을 우리도 함께 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참된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며 도우심을 구하도록 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과 하느님의 시간
기다리기!
2018년 나해 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과 하느님의 시간 기다리기!
교회는 어제와 오늘, 연이어 우리를 고통과 십자가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로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으며
못박히신 십자가를 묵상하는 하루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십자가
밑에서 끝까지 혼절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내신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억합니다.
오랜 세월 노력해온 우리의 신앙생활, 우리의 영성생활이 제대로 가고
있는가 아닌가, 확인해 볼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은 바로
고통과 십자가가 찾아오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사실 고통과 십자가를 일부러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히 청했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오 복음 26장 39절)
그러나 살다보면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십자가가
있습니다. 백번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사건, 난 데 없이
다가온 정말 원치 않은 불행, 이유가 없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런 신비로서의 십자가 앞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1.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긍정적 수용.
2. 하느님의 시간 기다리기. 이 두 가지입니다.
현대 영성 안에서 더 이상 사서 고생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요즘엔 그런 분들이 없을 것 같은데 과거 수도자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자기 전에 밤마다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자신을
학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 안에서는 원치 않은 고통과 십자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고 가르칩니다. 열심히 운동하고, 올바른 식습관으로 식사하고,
근심걱정 물리치고, 그래서 건강하게 이 세상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 대신 기다리다보면, 또 이 세상 살아가면서 나이를 조금씩 먹어
가다보면 하나 둘 원치 않은 십자가들이 찾아옵니다. 그때 난데없이
다가온 십자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십자가라고 여겨지면, 그때 그간
쌓아 오신 실력을 발휘하시면 됩니다.
십자가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로 여기고, 그 십자가를 통해 영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계기로 삼는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 영성의 핵심입니다.
자세히 주변을 살펴보면 사방이 고통 덩어리요 십자가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매일이 기적이요 매순간이
은총입니다. 만사가 축복이요, 세상은 온통 수많은 감사꺼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혹독한 고통과 무거운 십자가 속에서도, 수많은 축복과 감사꺼리를
헤아리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영성생활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9월15일 토.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7)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어머님이 서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이별하고 십자가에서 다시 일어서는 우리의 삶입니다.
생명과 십자가는 하나입니다.
어머니는 십자가에서 집을 짓습니다.
감출 수 없는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비통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깊어갈수록 고통도 깊어갑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삶은 분명 십자가의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희생 없이는 새날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새날 새하루처럼 매일매일은 십자가의 선물입니다.
십자가의 어머니가 십자가의 아들을 낳으셨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십자가로부터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란 십자가처럼 어머니가 되는 고통의 신비입니다.
작은 마리아가 되시는 모든 어머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우상을 만들지 말라
2018년 9월15일 토요일
오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신명기 4장 26절 말씀에 “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리라 전멸될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존경과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일을 계속적으로
합니다.
심지어 모세의 형이었던 아론이 그렇게도 하나님을 잘 믿고 모세의
말을 잘 듣다가 시내 산에 기도하러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 사람들을 선동해서 금은패물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에게 절을 하고 춤을 추는
것을 봅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고 남자나 여자나 어떤
짐승의 형상이나 새의 형상이나 곤충의 형상도 어족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했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걸핏하면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이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을 때 우상을 섬기는 자로 판명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자로 증거자가 되십시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어머니의 고통을 거울로 삼아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요한 19,25-27)
어머니의 고통을 거울로 삼아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 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이제 모든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모든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이제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의 잉태를 예고 받지만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시대상황으로 볼 때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루가1,38). 그리하여 한동안, 약혼한 요셉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이라고 오해를 받으셨습니다(마태1,19).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 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누우실 한 평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구유에서 해산을 해야 했고(루가2,7) 또한 이집트로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율법에 따라 출산 후 40일만에 정결례를 거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하면서 시므온의 예언을 접하게 되었는데
“품에 안긴 아기가 많은 사람들의 반대 받는 표징이 되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가2,34-35)이라는 고통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실현을 30년 이상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축제 때에는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건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라고 하여 “이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며”
(루가2,41-52) 그 구원의 때를 기다리셔야 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사실을 알렸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2,4) 라고 외면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일찍 남편 요셉을 잃고 홀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했거늘 아들도 집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
버려졌습니다.
어느날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았으나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듯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3,33-35)라는 말을 흘려 들어야 했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새로운 자녀관계를
맺어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끝내는 피에
엉긴 아들을 무릎에 눕혀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부활의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 뒤늦게 알아야 했던 어머니는 인간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통에 묻혀버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셨습니다. 성모님에게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
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께 온전히 희생을
바쳐야겠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교부 푀멘).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성모통고 신심은 14세기 초에 나타났으며 복음서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신심은 처음에 예수께서 올리브동산에서 피땀흘리시는
장면에서부터 수난 전체로 묵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성모 칠고로 발전되었다. 또한 '성모 칠고'
신심이 보편화되면서 점차 수많은 묵상과 기도문 그리고 시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심을 더욱 고취시켰다.
복음서에 근거를 둔 '성모 칠고'는 다음과 같다.
1.시메온의 예언 (루가 2,34-35)
2.이집트로 피난가심 (마태 2,13-21)
3.삼일 동안 예수를 잃으심 (루가 2,41-50)
4.갈바리아로 오르심 (요한 19, 17)
5.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 (요한 19,18-30)
6.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심 (요한 19,40-42)
7.예수, 무덤에 묻히심 (요한 19, 40-42)
예수님의 수난이 곧 성모님의 고통이라 할 수 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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