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함경도 사나이~손인호 2019동영상] 6~70년대 시골 비경으로 제작한 영상입니다 - YouTube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아들
마오안잉(毛岸榮)
강청 모택동 모안영 류사제
마오안잉(毛岸榮)
중국 국영 CCTV는
2010년 10월 20일
대하드라마 마오안잉
첫 편을 방영하였습니다.
화면 첫장면은
묘소를 찾은 늙은 여성을
클로즈업 합니다.
마오안잉의 부인
류쓰치(劉思齊, 유사제)입니다.
직접 출연하였습니다.
남편의 흉상(胸像)을
쓰다듬는 류쓰치.
1930년생,
결혼 1년 뒤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녀의 회상이 이어집니다.
“조국은 나날이 강대해지고,
인민들은 부유해지는데...
60년 전 당신은
작별인사도 없이 떠났습니다.
나는 매일 당신을 보고 싶었습니다...”
추모의 독백은
미망(未亡)의 한을 담았습니다.
마오안잉(毛岸英, 모안영)은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의
장남입니다.
두번째 부인인
양개혜(楊開慧)와의
사이에서 낳은
3형제 중 맏이입니다.
그는 6.25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에
자원입대하여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팽덕회와 함께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나 모안영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약 한 달 만인
1950년 11월 25일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서
미군 전투기(B-26) 폭격으로 전사합니다.
11월 24일
두대의 정찰기
P-61 Black Widows가 떠서
중국군의 위치를 탐지하였으며,
다음 날 정오에
4개의 네이팜탄을 투하하였고,
그중 하나가
모안영이 있는
동굴 근처에 떨어져
사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원인은 어처구니 없게도
김일성이 수고한다며 내려준
계란을 요리해 먹다가
새어나간 불빛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결혼을 한 지
1년 1개월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의 새까맣게 탄 주검을 안고,
팽덕회는 넋이 나갔습니다.
익명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모안영이
모택동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팽덕회는 모안영을 살리려고,
불타고 있는
진지에 뛰어들려고 했다가
부하들의 필사적인 만류로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모안영의 죽음을 안 주은래는
바로 모택동에게
죽음을 알리지 못하고,
3개월 이후에나
죽음을 보고합니다.
모택동과 그의 처 강청은
비통에 빠졌고,
모택동은 눈시울을 붉히며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더니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넋이나간 푸념을 했습니다.
모택동도
신혼 1년차인
며느리 류쓰치에게
아들의 죽음을
3년 뒤에나 알리게 됩니다.
팽덕회는
그의 시신을
중국으로 가져오려고 했지만,
모택동은 다른 인민군과
함께 묻히는 것이 도리라며
거절을 했고,
결국 그의 유해는
평안북도 회창군
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릉원에 묻혔습니다.
회창군은 평양에서 동쪽으로
100km정도 떨어져 있다고 함
회창군
대한민국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
마오쩌둥은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치가이자
혁명가이기 때문에
중국과 관련된 많은 자료에서
마오쩌둥의 이름을 쉽게 볼 수 있지만,
마오쩌둥의 장남인 마오안잉은
마오쩌둥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이름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오늘 기사에서는
마오쩌둥의 이야기보다는
마오안잉의 삶과
그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
마오쩌둥과 마오안잉
마오쩌둥은 살면서
뤄이씨우, 양카이후이,
허즈첸, 장칭
네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첫째 부인 뤄이씨우와는
자녀가 없었고,
결혼한 지 3년 만에
대장 질환을 앓다가
사망하였습니다.
이후 양카이후이와 결혼하여
세 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중 장남이
오늘 소개드릴 마오안잉입니다.
전체적으로 정리하자면
마오쩌둥은 네 명의 부인,
네 명의 아들,
세 명의 딸이 있었지만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번역가로 활동한 둘째 아들
마오안칭과
떠도는 루머로
이질에 걸려 3~4살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마오안롱을 비롯하여
정치적인 관여를 크게 하지 않았기에
많은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해집니다.
중국인민지원군
1950년 6월,
우리나라는 광복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한국 전쟁이라는
비극을 마주하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이
한국 전쟁은 1953년
한국휴전협정 이전까지
많은 사상자와 피난민을 만든
역사적으로 참혹한 전쟁이었고,
UN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이
한국 전쟁 중에 사망했다는 것인데요.
마오안잉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출병 이후
당시 사령관 역할을 맡았던
펑더화이의
러시아어 통역과
행정 업무를 하던 중,
미군의 공습을 받아
1950년 11월 25일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
마오안잉의 사망 이전에
마오안잉과 관련된 일화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중에 중국이 처음
한국전쟁에 참여하면서
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의 장남인
마오안잉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우려했지만,
마오쩌둥은
마오안잉 역시 한 인민의 아들로서
마땅히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며,
마오안잉의 참전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마오안잉의 사망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해외 파병 중 전사한
중국군은 현지에 묻힌다는
전통을 깨지 않겠다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다른 전사자들과의 형평성이
깨진다며
마오안잉의 시신을
가져오지 않도록 명령했다고
알려졌고,
마오쩌둥의 업적을 떠나
이 행위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킨
올바른 지도자의 모습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마오안잉과 유송림
마오안잉은
1949년
유송림과 결혼했습니다.
결혼한 지 1년 만인 1950년
마오안잉은 전쟁 중에 전사하였고,
유송림을 안쓰럽게 여긴
마오쩌둥이 그녀를 소련으로
유학 보내주고,
유학을 마친 후에는
계속 재혼을 권유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유송림은 1962년
공군 지휘관과 재혼했고,
마오쩌둥은
그녀가 결혼한 이후에도
그녀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녀는 재혼 후에도
마오쩌둥의 아내이자
4인방 중에 한 명인
장칭에게
문화대혁명 시기에
맹공격을 받는 등
정치적, 사회적으로
자주 거론되며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장칭의 세력이 없어짐에 따라
그 공격의 여파가 줄어들었고,
유송림은 2019년
현재 90세의 나이로
살아 있으며,
재혼한 이후에도
몇 차례 북한에 있는
마오안잉을 찾아
성묘했다고 전해집니다.
드라마 마오안잉에서의
마오안잉과 유송림
2010년
중국 CCTV는
마오안잉이 사망한 지 약 60년 만에
그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제작,
방송하였습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마오안잉 역할을 맡은
남자 주인공은
우리에게 흔히 우블리로 알려져 있는
배우 추자현의 남편 우효광입니다.
드라마에서는
마오안잉과 유송림의 이야기가
많이 거론되며,
실제로 남편을 그리워하는 장면에
유송림이 직접 출연하며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중국과 북한의 정상회담 이후
두 국가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면서
북한 내에서도
드라마 마오안잉을 방영해주는 등
드라마 마오안잉은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던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여준다는
평을 받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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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아들 마오안잉(毛岸榮)
靑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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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7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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