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 경계 모호해진 시대… 올해의 단어는 ‘참된’
美웹스터 선정… “탈진실 양상 반영”
스위프트는 ‘진정한’ 의미로 사용
검색량 2위 ‘딥페이크’… ‘X’도 상당《진위 판별 어려운 시대… 웹스터 선정 올해의 단어는 ‘참된(authentic)’
미국 사전 출판사인 메리엄웹스터가 올해의 단어로 ‘어센틱(authentic)’을 선정했다. ‘진정한, 참된, 진짜’ 등의 뜻을 지녔다. 인공지능(AI)으로 만든 딥페이크 이미지가 범람하고, 사실 여부가 중요하지 않은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 이 단어를 찾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메리엄웹스터 측은 “더 이상 눈과 귀를 믿지 말라. 참된 것이 무엇인지 물으라”고 조언했다. 》
미국의 유명 사전 출판사 메리엄웹스터가 27일(현지 시간) 2023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어센틱(authentic)’. ‘진정성 있는, 참된, 진짜’ 등의 뜻으로 딥페이크 확산, 탈진실 양상으로 인해 무엇이 참된 것인지 모호해진 시대를 보여주는 결과라고 외신들은 분석했다. 메리엄웹스터 홈페이지 캡처
미국의 유명 사전 출판사 메리엄웹스터가 27일(현지 시간) 2023년 올해의 단어로 ‘참된, 진정성 있는, 진짜’ 등의 뜻을 지닌 ‘어센틱(authentic)’을 선정했다. AP통신은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으로 인물 이미지와 영상을 실제처럼 합성하는 ‘딥페이크(deepfake)’가 유행하고 있는 데다 정치적 양극화 등으로 객관적 사실 여부를 중시하지 않는 ‘탈진실(Post-truth)’ 양상이 반영된 결과라고 풀이했다. 메리엄웹스터는 특정 단어의 조회수, 검색량 등을 통해 2003년부터 올해의 단어를 뽑고 있다.
메리엄웹스터는 어센틱의 검색량이 과거에도 많았지만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모호해진 올해 대폭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피터 소콜로프스키 선임 편집장은 “2023년 우리는 진실성에 위기를 겪고 있다”면서 “어떤 정치인이 실제로 이 발언을 했는지, 어떤 학생이 진짜로 이 논문을 쓴 건지 알 수 없게 됐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어센틱은 ‘자신의 인격, 정신, 성격 등에 충실한’의 의미도 있다. 올해 샘 스미스, 테일러 스위프트 등 세계적인 유명 가수들은 ‘진정한 자아’ 혹은 ‘진정한 목소리’를 추구하겠다며 이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도 올 2월 이 단어를 사용하며 각국 정치인과 기업 지도자가 스스로에게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CNN은 AI의 등장으로 조작된 이미지 등이 손쉽게 유통되면서 유명인과 유명 브랜드 등이 고유의 특징이나 진정성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고 짚었다.
올해 검색량 2위를 차지한 단어는 ‘딥페이크’였다. 또 소셜미디어 트위터가 머스크의 인수 후 이름을 바꾸면서 ‘X’의 검색량도 상당했다. 올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발발한 이스라엘과의 전쟁 당시 큰 피해를 입은 이스라엘의 협동농장 ‘키부츠(kibbutz)’의 검색도 급증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올해 4차례 형사 기소되면서 ‘기소하다(indict)’도 주목받았다. 올 2월 그래미상을 수상한 미국의 흑인 여성 배우 바이올라 데이비스가 에미, 그래미, 아카데미(오스카), 토니상 등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4대 상을 휩쓸었다는 의미로 이 상의 머리글자를 묶어 부르는 ‘EGOT’의 검색 또한 빈번했다.
김보라 기자
가짜가 판치는 세상… 올해의 단어 ‘authentic’
코로나 팬데믹이 가고 새로운 팬데믹이 시작됐다. 허위 정보의 대유행에 ‘가스라이팅’ 당할까 걱정하다 이젠 진위 구분이 어려워 ‘진짜’가 뭔지 찾아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 출판사인 메리엄웹스터가 팬데믹(2020년) 백신(2021년) 가스라이팅(2022년)에 이어 올해의 단어로 ‘진짜’ ‘참된’ ‘진정한’이란 뜻의 ‘어센틱(authentic)’을 선정했다. 인공지능(AI)이 만드는 딥페이크 시대 ‘진짜의 위기’를 반영한 단어다.
▷올해의 단어는 조회수와 검색량으로 선정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막말하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체포당하는 가짜 이미지가 확산될 때마다 ‘authentic’ 검색량이 증가했다. 미 국방부가 화염에 휩싸인 가짜 사진이 ‘속보: 펜타곤 근처에서 폭발’이라는 제목으로 유포됐을 때는 검색량뿐만 아니라 미 국채와 금값이 치솟고 뉴욕 증시가 하락했다. 가짜가 진짜 시장을 움직인 것이다.
▷요즘 전쟁은 가짜정보와의 전쟁이기도 하다. 특히 취재가 통제된 중동전에서 ‘온라인 병사’들의 암약이 활발하다. “이스라엘 총리 병원에 긴급 이송” “하마스가 이스라엘 아기들 참수”라는 속보가 전해졌지만 거짓이었다. 팔레스타인 국기를 든 축구 스타 호날두, 다섯 아이를 업고 안은 팔레스타인 아버지도 AI 합성물이었다. 이스라엘 기관에 따르면 전쟁 관련 소셜미디어 계정 5개 중 1개가 가짜다.
▷“거짓말이 지구 반 바퀴를 도는 동안 진실은 신발을 신고 있다”는 말이 있다(영국 소설가 조너선 스위프트). 실제로 자극적인 정보를 선호하는 소셜미디어의 보상 체계 탓에 가짜의 확산 속도가 훨씬 빠르다. 매사추세츠공대 연구진에 따르면 허위 정보가 트위터 사용자들에게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이 진짜보다 6배 빨랐다. 트위터를 인수해 회사명을 ‘X’로 바꾼 일론 머스크는 “소셜미디어에선 authentic해야 한다”며 사용자 인증 유료 서비스를 도입했지만 가짜정보 퇴치는 못 하고 ‘authentic’ 조회수만 올려놓았다.
▷거짓말도 인플레 법칙을 따른다. 통용될수록 가치가 떨어지고 진짜가 주목받는다. ‘잔인하도록 진실된’ 영국 왕실 얘기를 담은 해리 왕자의 자서전 ‘스페어’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가창력과 함께 “살찐 내 모습이 더 좋다”는 진솔함 덕분에 억만장자가 됐다. 65세 여배우가 처지고 주름진 몸으로 나오는 넷플릭스 영화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가 흥행한 한 해였다. 연출된 이미지 가득한 인스타그램에 질린 청년들이 보정 불가 프랑스 앱 ‘비리얼(Be real)’로 몰리고 있다. 내 눈도 내 귀도 믿을 수 없는 가짜 시대의 역설이다.
이진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