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길 인생 – 아팔레치안 트레일
정식 은퇴를 하고
그동안 띄엄 띄엄 여러 구간들을
간헐적으로 짤라서 걸어 보았던
아팔레치안 트레일에
일정과 기약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나그네가 되어 인생 길을 연상하며 걸어 봅니다.
한참 땀흘려 오르다가 지쳐 기대어 본 나무에게서
정적과 침잠을 느끼는 가 싶은 순간에
나무가 내게 가만히 말을 걸어 옵니다.
"Hello, there...What took you so long to be here..."
인적이 완전히 끊어진
산속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이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반갑기만 합니다.
마치 오래전 유럽 유학시절에
고국 사람 그림자만 봐도
눈물이 나올 정도로 반가웠던 것처럼
사람곁을 떠나서야 사람 귀한 줄을 아는가 봅니다.
처음 만난 사람의 처음 내뱉는
두서너개의 짦은 문장만으로도
그 사람의 매너와 지성과 심지어 취향등을 대충 감지할 수 있지요?
사회적 동물로서 축적된 각인된 기능이겠지요?
“How was your trail?” (인사치례)
“How long have you been in the trail?”(정보의 교환)
그리고 더 통한다 싶으면
정말로 어려운 질문을 툭 무심한 척 던져 봅니다
“Why are you here?”(호기심과 조언)
내가 나 자신에게 해봐도 어렵고 황당하기까지한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의외로 쉽게 농담반 진담반 기꺼이 응답해줍니다.
“My mom just passed away”
“I just got divorced”
“I lost my job“
“I am (have) just retired”
“It is on my bucket list” 등등…
년전에 아들놈이 막바지 학위준비를 중단하고
세계일주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화만 내고 선듯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을
낮설고 외진 곳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쉽게 대화를 주고 받게 되는
아이러니를 여러분들도 많이 경험했겠지요?
가까운 사람보다 낯선 사람에게 더 솔찍하게 할 수 있는 대화…
마치 카트만두호텔 로비에서 몇년 전에 만난
예쁜 여행자의 미소 담긴 질문에
내가 왜 여기에 무었을 하러 왔는 지에 대해 잊어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하게끔 해주기도 한 경험이 있읍니다.
How가 아닌 Why…
한마디로
새로운 어떤 전환을 모색하려고
시간과 장소를 바꾸어 보는 행위의 일부일 지도 모르지요.
아마도 정확하고 명쾌한 해답을 기대하는것
자체가 모순일 지도 모르지요.
나의 대답은 어떤 것이냐구요?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요?! ^^
“Well, just to get some fresh air”
아니면,
“I just have to do something and this trail happens to be it…”
“Because it’s there!”
Sounds awfully familiar?
푸하하하
우리 인간의 본성중에
조언을 기꺼이해주는 특성이 있지요.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기능자들이 초보자들에게
고승들이 수련자들에게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모습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정겨운가요?!
하지만 문제는
조언을 해주는 즐거움에 비해 그 조언의 질이지요.
년전에 사별한 내 절친 심장전문의는 환자 하나 하나 대할 때마다
자신의 진료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이 없음을 호소하곤 했지요.
또우리 회사 파트 타임 원로 변호사도
매 재판마다 승패에 대한 긴장과 우려로 몸을 망쳤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창조 예술부분이나 완숙한 연주자들에게서도
흔히 듣는 말이 있지요.
바흐나 리스트, 섹스피어와 세르반테스, 호머와 이솝등등의 경우처럼…
이제 이해할 만 하니까 나이가 들어 더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다는 말…
다른말로 수많은 전문 직종의 예가 아니드라도
삶에 대해서 완숙한 '인생 전문가'는 찾아보기 어렵다란 말이지요
우리 모두 아마튜어의 삶을 영속적으로 살아갑니다.
득표나 여론으로 행해지는 대의 민주주의도 당연히 그러하지요.
다수나 대중이란 단어는 미성숙과 무지와 추종을 상징하기도 하지요.
해서 이들은 조작된 뉴스에 쉽게 흥분하고,
자신이 속한 작은 회원제에 목을 메달고
교회나 정부의 방침에 맹종하게 되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요.
해서 소크라테스의 모순 논리나,
베이컨의 평생의 부조리 타령이나,
그리고 에라스무스의
‘바보짓에 대한 찬양(The Praise of Folly)’에서
여전히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깊고
다수의 무지와 횡포에 대한 심각한 경고를 하고 있지요.
랄프 에머슨의 ‘사회와 고독, Society and Solitude’ 은
더없이 좋은 충고를 주는 에세이인 것 같습니다.
“If solitude is proud, so is society vulgar”
고독이 자만이라면, 사회는 집단 오만적이라서
그 사이를 오가면 갈팡질팡하는 삶이 우리들의 현실인 게지요.
모든 인간(온작 직종의 전문가들을 포함해서)들은
항상 두려워하는 미숙련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We all are timid and unskilled spectators!
이제 정식으로 은퇴를 한 적지않은 이 나이에
내가 배우고 체험한 것으로
아이들에게, 후배들에게, 젊은이들에게
약간의 기교와 허식외에는
진실로 진실로 가르쳐 줄것이 별로 없군요.
대부분의 나의 경험은 자기 방어나 과시용이지,
진리를 추구했던 경험이 턱없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고요.
고작해야 옛 현자들이나 선인들의 말씀을
되풀이하는 맥없는 메아리들이지요.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와 선생과 이웃들을 관측하던 시야를 더 넓혀서
여행과 고독과 배우자와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그 와중에 하게되는 몇 안되는 진실에 대한 ‘대화,Dialogue’는
바로 삶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되지요.
자기 자신에게 조차 하지 못하는 말을 누군가에게
할 수 있다는 ‘관계’를 맺게 되면서 인간은 마침내 성숙하게 되지요.
경험에도 두 종류가 있지요?
한 종류는 자기방어적(You are you and I am I)이고
다른 종류는 개방적(You and I and more)고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는 것!
살아가면서 가장 원하는 게
누군가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게끔 해주는 것이라면
그게 바로 종교이든 부모이든 친구이든
자신을 믿어준 자의 힘 덕분이지요.
아랍의 어느 시인이 우정의 진면목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지요.
“천명의 친구를 가진 자는 단 한명의 믿을 만한 친구가 없고,
단 한명의 적을 가진 자는 어딜가나 온통 적을 만난다!”
다른말로
현명한 인생 동반자를 가진 자의삶은
두배에서 십배이상의 가치 있는
삶을 산다는 말처럼....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간단히 요약하자면
불완전한 인간이 긴 인생 여정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사람들중에
특별한 관계를 맺게되는 동반자(배우자, 친구, 스승,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의
진솔한 대화가 참으로 소중하다는 말이지요.
완숙한 삶을 추구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면
우리가 영위할 수 있는 삶의 진정한 주제는
경이( Wonder)와 축제( Celebration)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삶이 가진 심오한 비밀이란 것이
말이 통하는 사람과 경험을 서로 나누는
축배를 드는 경이로움이 삶의 참된 결정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선 무었보다도 건강에 유념하십시다.
건강은 삶의 제 일 순위이며 법칙이니까요.
삶의 특성을 굳이 말하라면
무진장한 특권( A Boundless Privilege)라고 결론지울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이 무진장한 특권을 누리려면 건강해야한다는 조건이 따르지요.
건강한 삶에는 무진장한 가능성이 주어지지만
만약에 병약해지면 모든 가능성을 잊어버리게 되는 불공평함이 존재합니다.
삶의 첫번째 법칙은 영육의 ‘건강’이지요.
병약함은 삶이 주는 모든 풍요를 앗아가는
살인마( A Cannibal)같아서 모든 것을 앗아가니까요.
건강할 때 삶은 제대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는 말이지요.
해서 무조건 건강합시다.
긴 글의 요점은 딱 세가지:
건강과 믿음과 대화입니다.
온 삭신이 아프드라도 건강한 정신을 잃지맙시다
그리고 자신을 믿어주는 자를 항상 곁에 두시고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들과
더불어 사는여생을 기원합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