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Danceboy님이랑 같이 Military Tango라는 18분짜리 단편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황종원이라구 합니당. 전에 현철씨가 알바하실 땅게로들 찾는 공고에 이어 재공고까지 냈었는데, 신청률이 저조하여 제가 글을 남기게 됐슴다.
일단 일정을 말씀드리자면.. 10월 13일 현장리허설이 되겠슴다. 아침 9시에 출발해서 리허설 하고 서울 돌아오면 6-7시 될거구요. 글구 10월 20일 촬영이 되겠슴다. 이날의 경우 자세한 시간 일정은 아직 픽스되지 않았구요. 리허설 날은 준비된 안무 동작을 촬영 현장인 안성 부근의 폐교에서 연습할 겁니다.
에.. 일당은 하루에 4만원 되겠슴다. 영화 보조출연자들의 하루 일당이 이 정도로라서 이렇게 정했구요. 그리고 크레딧에 이름이 들어갈 겁니다.
어떤 씬에 땅게로들이 필요한가 말씀을 드리자면... 줄거리 중에서 대박이란 주인공의 환상씬이 있는데 여기에서 탱고를 잘 추시는 남자분 12명이 필요합니다. 걸리는 부분은 땅게로들끼리 몸을 부딪혀야 하는 건데요.. 이 부분은 시나리오를 직접 보셔야지 거부감이나 의문점들이 풀리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밑에 시나리오를 퍼다 놨구요.
마지막으로 영화 소개를 좀 드리자면... 멜로에 뮤지컬에 액션이 섞인 좀 독특한 내용입니다. 전에 시놉시스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동성애 코드가 밑에 깔려 있구요. 대박이란 흉폭하게 생긴 인물이 춤을 잘추고 곱상하게 생긴 섹시맨이란 인물에게 친한 형으로 접근합니다. 그런데 점점 "형" 선을 넘어서 이상한 감정과 관심을 보입니다. 섹시맨은 "형" 선을 넘어서려는 대박을 점점 냉정하게 대합니다. 그리고 급기야 교련시간의 1대1기마전을 벌이면서 둘이 끈적끈적한 애정 표현을 씨름인듯 춤인듯한 동작들에서 보이는 게 영화의 하이라이트구요.
제작의도랄까.. 그런건... 한국에서 사는 남자들의 억압된 자기 욕망에 대한 일그러진 자화상을 그리는 정도라고 해둘까요. 우리나라 남자들 군복이나 교련복 같은 유니폼 입혀놓으면 하고 싶은 거 꾹 참고 남자인 척 강한 척 하면서 살잖아요. 그런 사람들한테 탱고 바이러스가 전염되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금지된 욕망이 불쑥 튀어나오는 뭐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후반작업까지 종료한 뒤에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 내는 게 목표구요. 여기서 상을 타거나 좋은 평가를 받게 되면 단편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 일주일 정도 상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겁니다. 만약에 극장에 걸리게 되면 아르헨티나 탱고를 알릴 수 있는 기회도 될 수 있을 거 같구요.
좀 주저리주러리 길어졌네요.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
아울러 밑에 퍼놓은 시나리오까지 봐주시면 더욱 감사드리겠슴다.
아 그리고 생각 있으신 분들은 제 이메일로 연락주시면 되겠슴다.
안녕히들 계세요.
속눈썹이 길고 목도 긴 탓에 예쁘장하게 생긴 사내아이, 섹시맨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슬로우’ 화면 속에서 놈의 부어오른 얼굴 근육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고 일그러지고 시큰거린다.
섹시맨 (나레이션): 나는 원래 싸움을 잘하고 싶었다. 원투스트레이트.
순간, 프레임의 좌에서 원, 우에서 투, 마침내 좌우에서 한꺼번에 스트레이트가 작열해 섹시맨의 코에 꽂힌다. 섹시맨이 입은 교련복의 명찰, “석시만”이란 글자들 위로 핏방울이 튀고.
프레임 정상 속도로 돌아오면, 섹시맨이 처한 곤란한 상황이 한 눈에 보인다. 섹시맨을 옴짝달싹 못하게 붙들고는 주먹을 들이대며 킬킬거리는 레슬링복과 복싱트렁크. 그 둘이 물러서자 섹시맨은 ‘독서하는 모습의 소녀상’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나간다.
섹시맨: 들배지기
이번엔 씨름 삿바만 걸쳐맨 젖소 놈이 소녀상 뒤에 숨어 있다가 얼굴을 내민다. 섹시맨의 것으로 보이는 교련모를 약올리듯이 흔들다가 덤벼드는 섹시맨의 가랑이 사이에 다리를 집어 넣고는 들배지기 기술을 시도하는 씨름삿바. 허공에 들어올려져 바둥거리는 섹시맨.
섹시맨: 하필이면 합기도장이 길 건너, 양동에 있었다. 그래서 대신 배운 게--
섹시맨이 왼손으로 삿바를 움켜쥐고는 오른팔을 댄서처럼 휘저으며 180도 회전한다.
섹시맨: 춤이다.
모래 바닥에 착지하는 섹시맨의 뒷모습. 순간, 우리의 눈 앞으로 섹시맨의 뒷통수에 누군가가 락카로 조악하게 칠해 놓은 핑크색 하트 모양이 드러난다. 뒤에서 그 하트 모양을 보며 킬킬거리다가 섹시맨을 버려둔 석유통 사이에 매다꽂는 레슬링복. 이윽고 씨름 삿바와 복싱 트렁크까지 합세해 나뒹구는 섹시맨의 얼굴에 발 도장을 찍으려는 순간---
섹시맨의 얼굴 위로 누군가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씨름삿바, 복싱 트렁크, 레슬링복 하나 둘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공을 보더니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을 친다. 레슬링복 과 복싱트렁크가 그래도 용기를 내어 아야---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척 하다가 안되겠는지 뒤돌아 줄행랑을 놓고, 씨름 삿바는 교련모를 섹시맨의 머리에 고이 씌워주고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내뺀다.
끄응거리며 기름통 사이를 흐느적거리는 섹시맨의 눈 앞으로 툭 튀어나오는 솥뚜껑만한 손. 천천히 그 손 주인을 올려다보는 섹시맨.
거인사이즈의 빨간색 단화,
쫄티 같이 꽉끼는 교련복 상의,
‘김대박’이란 명찰 위로 조폭 스타일의 흉폭한 얼굴.
천천히 대박의 팔에 의지해 일어서는 섹시맨.
자기 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법한 대박과 마주서고 나서야, 섹시맨은 버려진 벽거울을 통해 대박이 등뒤로 숨긴 손에 ‘접개식의 주머니칼’이 쥐여져 있음을 알게 된다.
2. 수돗가에서 화장실 안으로 (밤)
미동도 않고 무언가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사내아이의 얼굴.
화면은 형체조차 구분이 안될 정도로 어둡다.
순간, 틱---
화면 밖에서 누군가가 라이타를 켜는 소리.
마침내 사내 아이의 얼굴이 드러난다.
퉁퉁 부어오른 코에 붙인 반창고, 섹시맨이다.
대박(OFF): 무슨 생각하냐.
라이타가 꺼지자 다시 어두워지는 화면.
CUT TO:
다시 라이타가 탁--- 켜진다.
담뱃불을 붙이는 중인 대박.
그 뒤로 수돗가에 기대어 돌아서 있는 섹시맨.
대박이 담배를 한모금 깊게 빠는 소리와 함께 다시 어두워지는 화면.
CUT TO:
길쭉하게 생긴 창틀을 통해 달빛이 날카롭게 스며드는 화장실 안.
대박은 콘크리트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고.
섹시맨은 출입구 쪽에 비켜서서 생각에 잠겨 있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쥐죽은 듯한 고요.
대박: 회 많이 먹어라. 그래야 살 붙는다.
섹시맨: ---
대박: 왜 말이 없냐. 또 엄마랑 누나랑 학교 와서 지랄할까봐?
섹시맨: 형이 나한테 왜 잘해주는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대박: 내가 동생이 없다. 그냥 형이 아끼는 동생 챙겨준다구 해둬라.
섹시맨: 딴 애들은 다 날 싫어하는데, 형만 왜 그래요?
대박이 섹시맨 쪽을 돌아보자 그의 눈 위로 떨어지는 가느다란 빛.
대박: 섹시맨. 남자가 뭐냐.
섹시맨: 예?
대박: 남자는.. 믿는거다, 응? 그냥 미련하게 믿고 속고 그렇게 사는 거다.
대박이 주머니를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내서 담배갑 던지듯 무성의하게 섹시맨의 발치에 던져 놓는다. 빛나는 금속성 물체, 주머니칼이다.
대박: 선물이다. 꼭 갖고 다녀. 니가 맞으면.. 내가 아프다.
섹시맨: 왜요?
대박: 아프면 아픈거지 말이 많냐.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
대박이 침묵을 깨고 일어나서 섹시맨을 본다.
대박: 너 춤은 어디서 배웠냐?
섹시맨: 누나 둘 다 무용을 해서요.
대박: 근데--- (다리를 들어 뒷차기하는 시늉) 이거 탱고 맞냐?
3. 며칠 후, 한옥 대문 앞 (오후)
단정하게 다듬은 대박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스포츠 머리를 젤로 힘겹게 세우고 아버지 또래나 쓸 법한 쾌남 로션으로 피부도 말끔하게 했지만, 그 타고난 흉폭한 스타일은 숨기기 힘든 게 사실이다. 자신의 흉폭함에 배반이라도 하듯 새빨간 장미다발을 코에 대고 눈을 감는 대박.
.
대박 (나레이션): 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건 춤이었다.
카메라 대박의 몸을 따라 천천히 틸트 다운되면,
첫번째로 눈에 띠는 건 액세서리라기 보다는 쇠사슬에 가까운 실버체인 목걸이다.
대박: 차차차.
그리고 고무풍선처럼 늘어났다 줄어드는 뱃살과 젖살을 두드러지게 할 뿐인 검정색 쫄티.
대박: 살사.
마지막으로 허리춤까지 촌스럽게 치켜올린 기지바지와 리본 장식 달린 구식 검정색 구두.
대박: 탱고.
대박의 검정색 구두가 탱고리듬을 탄다. 양발을 모으고 탱고의 홀드 자세를 갖추고는 슬로우-슬로우로 스텝을 밟다가 우측으로 턴하면서 원심력을 이용해 뒷차기를 한다. 이전의 태권도 발차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부드럽고 현란하다. 그렇게 신나던 스텝이 갑작스레 뚝 끊기고,
대박: 하필이면 양동엔 무도회장이 없었다.
대박 냄새를 음미하던 장미다발을 천천히 내리고는
비장한 얼굴로 솥뚜껑 같은 오른 주먹을 프레임 중앙을 향해 내지른다.
대박: 그래서 대신 배운 게 주먹질이다.
쾅쾅쾅— 소리도 요란하게 낡은 한옥대문을 두들기는 대박.
문이 살짝 열리며 섹시맨을 닮은 20대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내밀더니,
섹시맨의 누나: 누구 찾아요?
대박: 동생 좀.
누나: 시만이 나가고 없는데.
대박: 이거--
누나: 누구한테 주는 거예요? 나?
대박: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애매한 미소)
누나: 미친 새끼.
무슨 영문인지 대박을 노려보며 철문을 쾅 닫는 섹시맨의 누나.
그 바람에 철문 사이에 반쯤 끼어버려 목이 졸린 장미다발을 멍청하게 쳐다보는 대박. 온몸의 체중을 실어 장미 다발을 빼내려는데 장미 다발이 툭 꺾이며 두동강난다.
가시투성이 줄기만 남은 반쪽짜리 장미다발을 든 채 철문에서 한걸음 두걸음 물러서는 대박. 멍청한 혹은 당혹스럽던 얼굴이 이내 분노로 바뀐다. 대박, 한옥 대문의 담벼락 너머를 노려보다가 반쪽짜리 다발을 안으로 던진다.
화면이 담벼락 안과 밖을 반씩 비추는 극부감 앵글로 바뀌면,
섹시맨이 골프채를 들고 대문 밖을 주시하며 서 있는 누나의 감시 아래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있고, 대박은 우리 안에 갇힌 맹수처럼 담벼락 밖을 서성거린다. 발 옆에 떨어진 장미 줄기들을 힐끗 보다가 일어서는 섹시맨. 그런 섹시맨이 나갈 길을 막아서는 누나. 마침내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져버리는 대박.
DISSOLVE TO:
대박이 구부정한 등짝을 보이며 터벅터벅 멀어져간다.
그의 오른쪽 주먹에서 한방울씩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섹시맨네 한옥 문짝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다.
FADE OUT
4. 학교 정문 (아침)
FADE IN
이제 녹슨 간판 위로 ‘참다운 학교’라는 글자가 적힌 학교의 교문이 펼쳐진다. 교문 주위를 무질서하게 덮고 있는 수풀 덕분에, 그 뒤로 보이는 운동장과 학교 건물이 음침하게 보인다.
교문의 중앙에서는 군복 차림의 교련 선생, ‘사각턱’이 당구채에 기대어 짝다리를 하고 서 있고, 그 옆으로 선도부원 셋이 등교하는 교복 놈의 복장 상태를 날카롭게 훑어 본다.
1991년 어느날 아침, 교문 위에 걸린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흘러나오는 ‘새마을운동가’ 풍의 행진곡. 그 행진곡이 서서히 4분의 2박자의 경쾌한 탱고 음악으로 바뀌어가면서, 장난스럽게 떠오르는 타이틀, “Military Tango”.
5. 소운동장 (오후)
‘ㅅ’자 모양으로 접힌 쪽지를 펼쳐보는 교련복 소매. 쪽지에는 빨간색 매직으로 큼지막하게 “얘기나 하자 - 대박”이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는데, 그 아래 “답장”란이 여백으로 남겨져 있다. 교련복 소매의 주인공, 대박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진다.
우중충한 수풀에 둘러싸인 소운동장의 시계탑. 그 아래에서 교련복에 교련모까지 갖춰 입은 이십명의 빠박머리들이 좌측 끝 대박부터 우측 끝 섹시맨까지 고무소총을 들고 서 있다. 총검술을 배우는 교련시간 중인 것이다.
부욱-- 소리가 나게 쪽지를 구겨버리는 대박. 동시에 대박의 똘만이 ‘멍게’와 ‘덩어리’의 험악한 시선이 반대편의 섹시맨에게로 꽂힌다. 군복에 선글라스를 낀 교련선생, 사각턱은 그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련복 상의에 청바지를 하의로 걸치고 나온 복장불량자 놈의 엉덩이를 사정 없이 당구채로 때리고 있다.
사각턱: 찔러--- 총!
“하나”에 가상의 적을 찌르고는 “둘”에 받들어 총 자세로 민첩하게 돌아오는 빠박머리들.
정지한 대열 사이로 움직이는 물체라곤 흝날리는 모래먼지 뿐.
그 순간 대박, 멍게, 덩어리 셋이 게걸음으로 슬금슬금 움직인다.
반대편 섹시맨 쪽이 목적지인 듯한 눈치다.
교련선생이 매질을 멈추고 힐끔 뒤돌아 보자 숨바꼭질하듯 멈춰서는 대박 패거리.
사각턱: (갸우뚱) 찔러--- 총!
사각턱이 복장불량자 놈에게로 시선을 돌리면,
대박 패거리 다시 게걸음을 걷더니 마침내 섹시맨을 포위한다.
모자를 푹 눌러쓰는 섹시맨과 그 뒤에 서서 침을 찍 뱉는 대박.
다시 엉덩이 때리는 퍽퍽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신호로
덩어리가 섹시맨을 꼼짝 못하게 붙잡는 동안
멍게가 섹시맨의 교련모를 채어서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뒷통수의 하트를 손바닥으로 가리는 섹시맨.
그런 섹시맨을 지켜 보며 킬킬거리는 대박, 멍게, 덩어리.
엉덩이 때리는 소리가 멈추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싹 거둬들인다.
교련복 상의를 벗은 런닝셔츠 바람의 빠박머리 1열과 2열.
그 선두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사각턱이 돌아선다.
사각턱: 아야!
그와 동시에 트랙백하는 카메라. 각자 2인 1조를 이뤄 서로 마주본 채 으르렁거리던 이십명의 교련복들이 그 카메라의 움직임에 맞춰 자기 순서가 되면 각자의 파트너에게 엉겨붙는다. 군사훈련의 하이라이트, 1대1 기마전이 시작된 것이다.
1조에서 9조의 멍게와 덩어리까지 살 치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필사적으로 헤드락을 걸고 난리법석을 떠는데, 카메라가 제일 끝 대박과 섹시맨의 10조에 이르면 그 일사불란하던 호흡이 끊긴다. 섹시맨의 교련모를 장난스럽게 뒤집어 쓴 대박은 킬킬거리기만 하고, 섹시맨은 악다구니 오른 얼굴로 입을 앙 다물고 있다.
섹시맨: 줘요.
대박: 뺏어봐, 뺏어봐--
섹시맨: 코 땡겨서 맥주 못 마신다 그랬잖아요.
대박: 야, 온실 속의 화초. 남자가 뭐냐.
섹시맨: 속아도 믿고, 배신 당해도 믿고.
대박: 잘 기억하네. 근데 왜 나 안 믿어.
섹시맨: --
대박: 내가 맥주 마신다구 너 잡아 먹을 거 같어?
너네 누나한테 다리만 놔달라는 거 아냐. 사람 좀 믿어라, 이 년아.
섹시맨: 형 믿어요. 믿는데-- (힘을 주어) 알잖아요.
대박: (시선을 땅바닥으로 돌리며)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모자 가져가라.
교련모를 벗는 대박과 모자를 받으려고 다가오는 섹시맨.
순간, 멍게-덩어리조, 교련복 1-2조가 몸싸움을 벌이며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가고,
섹시맨이 그들 사이에 끼어 비틀거린다.
그 틈을 타서 대박의 표정이 돌변한다.
대박: 근데 이거 웃긴 놈 아냐. 니가 뭘 알어?
우리 까놓고 얘기해보자. 너 나 좋아하지? 그니까 누나한테
다리 놔주기 싫은 거지? 왜 이렇게 애정 표현을 힘들게 하냐, 응? 좋아한다면 좋아한다 말을 하셔야죠--
뜨악해하는 섹시맨을 보며 연신 킬킬거리는 대박.
하지만 그 발작적인 웃음은 이내 씁쓸한 미소가 되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7. 소운동장 (오후)
서로 양팔을 마주잡은 채 엉켜 붙어 힘겨루기를 벌이는 대박과 섹시맨.
이제 교련복들은 소운동장 주변의 잔디밭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사각턱도 복장불량자 놈을 잔디밭의 물레방아 탑으로 밀어부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의 교련모를 향해 향해 힘겹게 기어오르는 섹시맨의 팔.
대박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흘리다가 상체를 구부려 섹시맨을 쓰러뜨리려고 한다.
섹시맨의 허리가 반쯤 꺾이면서 팽팽하던 균형이 깨지려는데,
가까스로 왼발을 축으로 180도 턴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는 섹시맨.
대박, 다시 상체를 구부리다가 이번엔 섹시맨과 맞잡은 오른손을 떼어놓고는 섹시맨의 축이 되는 왼발 위에 자신의 발을 올려 못 움직이게 만든다. 그 바람에 턴을 할 수 없게 된 섹시맨은 왼손을 허우적거리며 비틀거리고,대박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데--- 왼손으로 대박의 요대를 나꿔채며 오똑이처럼 일어서는 섹시맨.
이제 자세가 에로틱해졌다. 작달막한 놈의 왼손이 큼직한 놈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서로 손과 손을 맞잡은 자세. 허공에 어색하게 떠 있는 대박의 오른팔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탱고 포즈다. 비틀거리는 교련복들의 한복판에서 있어서 그런지 유난히 튀어 보이는 탱고실루엣.
멍게: 형 뭐해요.
덩어리: 자세 쥐기는데 춤이나 한 판 쌔릴깝쇼?
멍게: 섹시맨, 뭐루 할까. 설사? 땅고?
“땅고” 소리에 맞춰 코브라처럼 치켜오르는 섹시맨의 다리.
섹시맨이 익숙한 탱고 스텝으로 대박을 밀어부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슬로우-슬로우로 시작되어 걷는 듯 하던 것이
차차 퀵-퀵으로 빨라지면서 탱고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 놀라운 에너지에 밀려 뒷걸음질치는 대박.
어어-- 하던 멍게와 덩어리도 점점 사색이 되어 딸려오고,
이제 기묘한 형태의 4인 탱고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운동장을 질주한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가장 위태롭게 되는 건 뭣도 모르고 대박 뒤에 서 있는 지라 나머지 3명의 체중을 혼자 지탱하고 있는 멍게다. 팔에 온 몸의 체중을 싣고 가까스로 섹시맨의 전진스텝을 멈추는 멍게. 그 순간, 탱고 댄서들이 방향 전환시 흔히 그러듯이 우측으로 단호하게 얼굴을 돌리는 섹시맨. 뭣도 모르고 고개를 따라 돌리는 대박, 멍게, 덩어리.
멍게: 뭐야. 우리 춤춘 거야?
덩어리: 이게 더위 먹었나.
덩어리의 꿀밤이 섹시맨의 머리로 향하는 순간, 섹시맨의 다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8. 잔디밭 사이 통로 (오후)
건너편 소운동장으로 이어지는 잔디밭 사이의 통로를 질주해가는 4인 탱고.
오른쪽으로 180도 회전하는 섹시맨.
그 덕분에 대박의 뒤에 있던 멍게가 떨어져 나가
잔디밭에서 나뒹굴던 교련복 1과 2를 덮친다.
그 옆에서 복장불량자의 밑에 빠떼루 자세로 깔려 있던 사각턱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3인 탱고를 보며 입을 쩍 벌리고.
이번엔 섹시맨이 좌측으로 턴을 하자,
힘겹게 붙어가던 덩어리도 떨어져 나가 국민헌장탑에 헤딩을 한다.
이제 더욱 가속도가 붙어 롤러코스터처럼 좁은 통로를 달려가는 2인 탱고.
9. 건너편 소운동장 (오후)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끼익 멈춰서는 섹시맨의 스텝.
그 순간까지 섹시맨의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가까스로 붙어온 대박은 숨을 연신 헐떡인다.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두 친구의 얼굴.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섹시맨과 대박.
먼저 기묘하게 관능미가 섞인 듯한 눈웃음을 짓는 섹시맨. 대박의 얼떨떨하던 얼굴에서도 가슴 속의 응어리가 녹아내리듯 엷은 미소가 퍼진다. 대박, 섹시맨이 언젠가 가르쳐줬던 기억을 떠올려 섹시맨의 허리를 감싸안는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섹시맨.
마침내 대박의 손가락이 섹시맨의 하얀 살결의 감촉에 닿고,
장미 냄새를 음미할 때 그랬던 것처럼 대박이 눈을 감는 순간 ---
섹시맨: 남자가 뭐냐?
눈을 뜨는 대박.
섹시맨이 처키인형처럼 손을 치켜든 채 웃음짓고 있다.
그의 손 안에서 번쩍거리는 물체, 대박이 준 주머니칼이다.
곧 이어 칼등이 대박의 얼굴에 망치처럼 내리꽂히고,
대박의 거대한 육체가 섹시맨의 발 아래 스르르 무너져내린다.
텅 비게 되는 화면.
FADE OUT
10. 대운동장 - 대박의 꿈속 무도회장 (밤)
FADE IN
낙엽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시꺼먼 이끼들이 피어난 운동장 바닥.
어디선가 슬로우풍의 절제된 탱고곡이 들려온다.
이윽고 극부감의 프레임 안으로 등장하는 교련복 악사 둘. 반대편에서 아코디언과 색소폰을 연주하며 비슷한 폼으로 등장하는 또 다른 악사 둘. 그들의 복장은 예비군처럼 풀어헤쳐져 있고, 몸짓은 탱고리듬을 음미하는 듯 절규한다.
마침내 교련복 4인 악단이 중앙에 정렬하면, 흐느적거리던 탱고 리듬이 행진곡 풍으로 바뀌고, 빨간 장갑을 낀 교련복 탱고족들이 쇠사슬에서 풀려나듯 빠르고 힘차게 프레임인 된다.
마침내 8쌍으로 불어난 교련복 탱고족들이 4인 악단 주위를 배회하면서 운동장은 모래바람이 휘날리는 성대한 무도회장으로 변해가고, 절정을 향해 치닫는 탱고행진곡.
그 무리들 가운데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대박-멍게와 섹시맨-덩어리 커플. 카메라 그들을 따라 서서히 하강하면, 대박이 덩어리에게 멍게를 던지고 섹시맨을 품에 안는다.
도망치는 대박-섹시맨과 그 뒤를 좀비처럼 쫓는 멍게-덩어리. 두 커플간의 간격이 점점 커지면서 가로등이 꺼지듯이 하나 둘 사라지는 4인 악단, 탱고족들, 멍게-덩어리 커플.
이제 텅 비게 된 운동장에서 대박과 섹시맨이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짓뭉갠 채 화면을 향해 다가온다. 그들의 고뇌를 음미하는 듯한 얼굴이 선명해지면서 희미해지는 탱고 음악.
11. 다시, 소운동장 (오후)
시퍼렇게 멍든 눈을 하고서도 마냥 꿈결을 거니는 듯한 눈을 하고 있는 대박. 마침내 자신의 얼굴에 작달막한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언젠가 섹시맨이 그랬던 것처럼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그림자의 주인공, 섹시맨은 대박의 꺼져가는 손길을 발로 짓뭉개고는
그의 머리 위에 얹혀진 교련모를 빼앗아 자신의 머리 위로 옮겨 쓴다.
교련모를 쓴 채 차려자세로 서는 섹시맨.부어오른 코를 연신 킁킁거리며 부동자세를 지키려 애쓰지만 숨이 가빠온다.
카메라 뒤로 빠지면, 사타구니가 발딱 선 채로 기절한 대박과 씩씩거리는 섹시맨을 번갈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멍게, 덩어리, 사각턱, 그리고 교련복들. 화석 같이 정지된 그 순간을 깨는 건 멍게와 덩어리다. 대박의 커져버린 사타구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어정어정 그리로 걸어가는 멍게와 덩어리.
이제 섹시맨의 코에서 코피가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그리고 주먹질 잘하는 놈을 팼다는 희열 때문인지,
그동안 이지메 당하느라 쌓여온 서러움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해로 인해 연인을 잃은 후회 때문인지,
섹시맨의 얼굴에서는 이질적인 감정들이 서로 싸움을 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