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태종•이방원 제161편: 구종수 일당 처형
( 저잣거리에 내걸린 장밋빛 꿈 )
한양을 도읍지로 정한 태조는 조선의 법궁 경복궁을 짓고 궁궐 외곽에 성을 쌓아 4대문과 4소문을 완공하여 정도전으로 하여금 문을 명명케 한 것이 1396년(태조5년)이다. 태종 13년 풍수사 최양선이 장의동문과 관광방 동쪽 고갯길이 경복궁의 양 날개에 해당하는 지맥을 손상시킨다고 주청하여 창의문과 숙청문(肅淸門)을 폐쇄시켰다. 숙청문은 훗날 숙정문으로 개칭한 한양의 북대문이다.
창의문을 폐쇄하자 백성들이 불편을 호소했다. 도성에서 벽제를 거쳐 개성과 평양으로 가려면 돈의문(서대문)을 통과해야 했다.
창의문을 대체할 문을 이숙번의 집 근처에 세우려하자 관리들의 행차와 사신들이 내왕할 때 수레소리가 시끄럽다며 이숙번이 반대했다. 병조판서 때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문이 서전문(西箭門)이다. - <태종실록> 중
돈의문 근처에 또 하나의 문이 세워졌다. 인덕궁(경희궁) 서쪽이다. 먼 길을 돌아다니던 백성들은 그것도 감지덕지하여 정식명칭 서전문을 접어두고 새문(新門)이라 부르며 많이 이용했다. 오늘날 새문안과 신문로의 유래다. 하지만 위치가 부적절했다. 언덕길이라 짐을 실은 수레가 다니기에는 너무 힘들고 불편했다. 훗날 세종 조에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방치 상태에 있던 돈의문을 보수하여 이용하도록 했다. 서전문은 9년간 사용하고 사라졌다. 결국 국고를 낭비한 셈이 되었다.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서전문과 돈의문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한양 도성 4대문 중 유일하게 서대문이(돈의문)이 없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가 1915년. 도시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철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토록 위세를 떨치던 이숙번이 죄인의 몸으로 서전문을 통과했다. 서전문이 이 자리에 있게 한 장본인이다. 자신의 집근처에 문을 내게 했으면 먼발치에서 집이라도 쳐다볼 수 있으련만 장의동은 아득히 멀다.
잔뜩 벼르던 국문, 싱겁게 끝나다:
유배지 연안에서 압송돼온 이숙번은 즉시 순군옥에 투옥되었다. 한 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를 부렸던 이숙번이다. 허나 오늘의 이숙번은 모든 것을 포기한 초췌한 모습이다. 태종과 십 수 년을 동고동락했던 터라 임금이 진노한 색깔을 알고 있다. 이제는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급선무다.
병조에 국청이 마련되었다.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이숙번이 도착하기 전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 죄인이 사실을 토설하지 않으면 형문을 가해도 좋다는 임금의 내락을 받아둔 상태다.
드디어 국청이 열렸다. 순군옥에 갇혀있던 이숙번이 끌려 나왔다. 텁수룩한 모습이 흡사 털 빠진 한 마리의 호랑이 같았다. 죄인은 담담한데 오히려 심문관들이 긴장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한 때는 2인자로 통했던 이숙번이지 않은가
심문관들이 구종수와 구종지를 심문한 초계본을 들이밀며 질문했다. 한 때는 병조판서에 있던 사람이 추해지고 싶지 않아서 일까. 이숙번은 순순히 인정했다. 의외였다. 심문결과에 따라 생명도 위태롭다. 그런데도 이숙번은 범죄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다. 잔뜩 벼르던 국문이 싱겁게 끝났다.
좌부대언(左副代言) 이명덕,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 민의생이 이숙번의 죄상을 공초한 계본(啓本)을 가지고 태종 이방원에게 보고했다. 때맞춰 형조와 대간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구종수·이오방 등이 궁성을 넘어 들어갔으니 죄가 극형에 처해야 합당한데 전하께서 특히 관인(寬仁)을 베풀어 단지 결장(決杖)하여 귀양 보내는 것에 그쳤습니다. 이제 구종수 이오방의 부도한 죄상이 또 드러나서 관계됨이 지중하니 모두 극형에 처해야 마땅할 자입니다. 이숙번은 자신이 불충한 죄를 범하고도 특별히 상은(上恩)을 입어 생명을 보전하고 향곡(鄕曲)에 안치되었으니 근신해야 옳을 터인데 사삿일로 구종수와 사통하고 또 구종수의 간청을 들어 악한 마음을 품고 사실을 숨겨 조정에 계문하지 않았으니 그가 전심(前心)을 고치지 아니함이 분명합니다." -<태종실록> 중
"구종수·구종지·구종유와 이오방 등의 죄는 조율(照律)하여 계문(啓聞)하라." 이숙번에 대한 언급은 없다. 형조와 대간의 상소에 이어 의금부도사 윤수가 죄인들의 죄를 조율(照律)한 계본(啓本)을 태종에게 올렸다.
"구종수 일당은 모반대역(謀反大逆)의 율(律)에 비부하여 모두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재산을 몰관(沒官)하게 하소서."
"이승은 내 이미 채찍질하게 했으니 전라도 금구로 귀양 보내고, 진포는 충청도 덕은에, 김산룡은 음성에 금음동은 경상도 문경에 정속하고 모두 가산을 적몰하라. 김기는 약환(弱宦)이라 장(杖) 80대는 무리이니 60대로 하고, 소근동도 이와 같이 하라. 구종수·구종지·구종유·이오방은 참(斬)에 처하고 가산을 적몰할 것이며 이숙번은 함양에 자원 안치하라." 서릿발 같은 왕명이 떨어졌다. 대시수(待時囚)는 추분까지 살아 있을 수 있지만 구종수 일당은 부대시수(不待時囚)다. 즉시 처형 대상이다. 순군옥 담터에 형장이 마련됐다. 대시수는 새남터와 당고개 같은 외진 곳에서 처형하지만 부대시수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서 처형한다.
세자의 향응을 칭탁하여 도성을 휘젓고 다니던 구오방의 총수 구종수의 목이 피를 뿌리며 떨어졌다. 말 그대로 신수이처(身首異處)다. 기생을 끼고 향락에 젖던 팔이 축 늘어졌다. 여인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이 핏기를 잃었다. 순간이다. 이를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눈을 가리면서도 자꾸만 쳐다본다. 잘 나가던 아우와 함께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구종지와 구종유의 머리도 저잣거리에 걸렸다. 가야금을 잘 타던 이오방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더니만 이내 멈추었을 때 구경하던 백성들이 안타까워했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62편~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