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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특집
낙타와 말 걸기
김양숙
참 이상도 하오 도시 곳곳에 낙타가 출몰하다니 신호등은 여전히 건재한데 건널목을 사이에 두고 맞닥뜨리는 낙타의 눈빛은 붉은 등으로 흔들리고 있소 결국 건널목을 건너지 못한 길은 사막 쪽으로 흐를 것이오
꿈과 현실의 경계에 놓인 사막의 능선만을 바라보는 낙타를 본 적이 있소 봉인된 서로의 관계 속 마지노선에는 주장을 위한 주장이 난무하는 깃발들이 즐비했소 목젖 너머로 넘겨야 할 주장의 크기는 재단하기 어려워 높은 빌딩 쪽으로 키를 돌렸소 그러나 빌딩 안에는 또 다른 낙타가 있었소 우린 그 낙타의 생존에 대해 무책임해지고 싶었소
낙타의 행적을 쫓아 잠속으로 들어가면 잠 밖에서만 존재하는 꿈이 있소 그대가 버린 나에 대하여 내가 버린 그대에 대하여 서로의 마음을 토막 내며 페이지를 넘기던 시절 낙타의 눈썹 위에서 불던 폐허의 바람을 잘라내어 미라지*에게 건네주고 낙타의 말로 해설을 달아주고 싶었소
갈기갈기 찢어진 바람이 구호가 되어 빌딩 숲으로 숨어들었소 그러나 바람이 찢어지는 이유는 묻지 않기고 했소 대신 잠 밖에서만 존재하는 꿈으로 또 다른 성을 쌓기로 했소 이제 낙타의 속눈썹으로 읽어내던 순수는 사라지고 없소 동결된 영혼으로 만들어진 미라지만 사막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을 뿐 사막은 오래전 바다를 끌고 다니던 영토였다는 진실을 부인하지 않소
빌딩 사이로 숨어 다니는 바람에 살이 차오르면 모래가 연주하는 미래를 읽어야 했소 사라진 시간만을 기억하는 사막의 숭고함에 경의를 표하는 이들은 봉인해제 후 모래로 사라지는 시간의 순례자였소
누군가의 등에 낙타의 발성법으로 말을 뱉는 계절은 영원한 건기였소 목젖 너머로 넘기던 물살의 횟수를 이합집산의 상징이었다고 믿고 싶진 않았소 그건 단지 쟁점의 문제였다고 말하고 싶었소 아우성치는 골목에는 균열된 시각들이 존재하오 이들은 경계를 그어 놓고 땅 따먹기 하는 장기판 앞에서 간극이 전하는 진실을 외면해야 했소 그건 무너지는 관계를 바라보는 목도의 순간이 그곳에 있었음을 인식해야 함이오 닳고 닳은 시간만 기억하는 사막의 숭고함은 늘 모래시계 속에 갇혀 있소
오랫동안 바람이 자라는 소리가 골목에서 들려왔소 색맹을 가진 개들을 풀어줄 차례인거요 늑골 밑 수런거리는 피를 지닌 바람은 개와 닮았기 때문이오 개들은 별자리의 살갗을 들추고 들어가 골짜기마다 이빨 자국을 남기고 영역표시라고 엄지를 세울 것이오
팽팽하던 익명의 쟁점을 놓아 버리자 빌딩숲에서 자라던 촛불은 바람이 굴러가는 쪽으로 발을 내밀고 완강해지기 시작했소 점점 사막화 되어 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부둥켜안아야할 말들이 굴러 다녔소 목적어를 두고 돌아 나오는 골목에는 거품이 일었소 거대한 빌딩 유리에 비친 여러 색깔의 거품이 세상을 씻어줄 수가 있을까, 낙타의 구호가 휘어진 세상을 펼 수 있을까 물어보고 싶었소 투명성을 찾아 고통을 자처하는 이들이 있는 곳이 현장임을 나중에서야 알았소 이제 제 뼈를 부비며 닳고 있는 언어들이 사막에 닿으면 낙타는 마른 내장을 흔들어 눈물을 슬어낼 차례인 거요
*미라지[mirage] : 신기루라는 뜻
고래, 겹의 사생활
자신이 베어낸 파도를 등에 지고 내륙 깊숙이 들어온 고래가 비취색 살냄새를 그리워하오 피가 도는 비린내를 찾아 떠난 극지의 바다 떠돌던 유빙의 행적은 이미 사라지고 없소 바다 위에 종족의 문양을 그리는 고래의 꼬리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나를 끌고 가오
여덟 살 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간 해안가 검은 바위 위 고래가 한 마리 누워 있었소 처음 본 고래였소 실눈 사이의 비취색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커다란 바위로 믿을 뻔했소 아이는 고래의 눈 속에 다른 세상이 있고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눈을 감고 있다고 믿었소 그리고 고래는 와글거리며 다가오는 발자국들의 영혼을 건너다닌다고 믿었소 그때 아버지는 말해 주었소 고래의 관은 파도였다고 바다 속에 뼈를 묻는 종족들은 거친 파도 앞에서 순해지는 법이라고 그래서 고래는 마지막 순간까지 북해를 닮은 비취색 바다를 갈망한다고 그 후 우리 집 앞 바다는 비취색으로 빛났소
고래의 고향 바다의 숲은 형언하기가 어렵소 가끔씩 바다 속에 잠겨 숲의 관람자가 되어 고래의 노래를 들어보고 싶었소 심해까지 보내는 고래의 노래는 오묘하오 고래는 긴 음절의 노래를 즐겨 부르오 고래의 노래에 주석을 달고 싶어진 나는 목관악기가 내는 소리를 배웠소 몸 안에서 제일 큰 통을 울리며 서툴지만 음절을 길게 끌었소 고래는 극지 가까이 도착하면 유빙 사이에서 깨어진 햇발을 은밀하게 즐기기도 하오 완강하게 버티는 빙벽쯤은 넘어 갈수 있다고 믿는 순간이 있었소 그러나 50분 또는 한 시간이라는 제약이 목줄을 누르오 가속들을 어깨 위에 얹고 바다 위에 유빙처럼 뜬다는 것이 힘든 일이란 걸 알았소 그게 바다에서 생을 마감하는 종족들의 숙명이란 걸 알았소 그림자 대신 물살을 낳는 고래의 몸에서 느리게 긴 음악이 흘러나오면 일가를 이루었다는 신호로 들었소 이제 더 이상 목관악기의 소리는 자라지 않았소
항해할 때마다 희망을 끌고 다니는 고래처럼 내륙에서 죽음을 찾아다닌 사내의 무덤을 찾아 나설 것이요 사내가 남긴 유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섬이 되었다고 들었소 섬 깊숙이 감춰두었던 문장들을 꺼낼 계절이 오면 가마우지 자세로 뱉어내야만 하오 제일 먼저 뱉어낸 건 갈색 눈동자였소 삼킨 순서에 따라 나온다는 걸 깜박했소 몇 번째 삼켰는지 헷갈리기 시작했소 비취색 눈동자라고 생각하고 뱉었는데 사라졌던 고래잡이의 시간이었소 고래잡이 시간이 되면 사내의 심장 안쪽에는 늘 뜨거운 바람이 분다고 했소 형이상학에서 형이하학으로 내려가는 경계에서 가끔씩 허리통증을 느꼈다고 했소 그게 살냄새를 그리워하는 증세란 걸 몰랐다고 했소 그때마다 환부를 도려내던 사내의 모험담을 들으며 자란 파도가 있었소 바다에는 늘 파도가 무성하오 바다 속의 숲 또한 무성해질 거요
웃자란 파도가 고향집 마당에 착시현상으로 다가오면 또 다른 사내는 바다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 나가고 다 자란 아이는 뒷산에서 할미꽃을 꺾어 사내가 가는 길에 뿌릴 거요 그림자보다 물살에 현혹될 때가 많은 사내의 모험담은 도시에서 계속 자랄 거요 고래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경건해야 하오 이제 숲을 떠나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 변주되는 고래의 모험담을 관람해야 할 차례인 거요
여행이란 내 안의 것들을 버리는 일이다
건강한 몸과 긴 시간 그리고 만만치 않은 돈. 이번 여행은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행복했다. 지구의 반대편으로 12,097km를 14〜15시간 동안 날아가 집을 부린 낯선 도시. 처음 도착한 멕시코시티는 서울과의 시차는 14시간이었다. 멕시코시티에 도착해서 1박을 하고 시차가 적응되기도 전 다시 4시간 30분을 날아서 또 다른 도시인 쿠바의 아바나로 옮겼다. 하루 종일 일정에 매달려 쫓아다니다 물먹은 솜이 되어 숙소로 돌아오면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다른 도시로, 다시 다른 아침이 되어 눈 뜨기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중남미[멕시코, 쿠바,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7개국을 17번의 비행기를 타고 옮겨 다닌 것이다. 날마다 반복되던 일상을 벗어나 전혀 다른 도시에서 다른 아침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수없이 행해오던 삶의 편린片鱗들에서 벗어나 어느 날은 멕시코였다가 어느 날은 쿠바였다가 어느 날은 페루의 리마였다가 그러기를 38일 일생의 꿈이며 오랫동안 내 안에 숨겨 놓았던 버킷리스트인 중남미 여행.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잉카의 전설 마추픽추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비가 오면 하늘 아래 똑같은 하늘을 펼쳐놓는 우유니 소금사막에 나를 비춰보고 싶었다. 기원전 300년경에 그렸다는 나스카의 지상화를 가까이서 확인하고 싶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멋진 설산을 가슴에 두르고 싶었다. 피츠로이의 가슴에 안긴 카프리 호수처럼 깊숙이 안기고 싶었다. 푸른빛을 몸에 새기고 누워있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앞에 두고 누군가를 위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파타고니아에서 시속 100km로 달려오는 남극의 성난 바람에 맞서보고 싶었다. 우수아이아에서 세상 끝 바위섬에 서 있는 빨간 등대의 불빛을 보고 싶었다. 남극 바다를 향해 물수제비를 날리고 싶었다. 몇 달이 걸려 도착할지도 모를 엽서를 세상 끝 노란 우체통에 넣고 돌아와 하염없이 기다리고 싶었다. 이제 모두 이루었다. 너무 행복했다.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엘 아테네오 서점에서 한강 작가의 에스파냐 번역본인 『채식주의자』를 한 권 샀다. 예술가의 거리이며, 탱고의 발상지인 라 보카 지구에서 끈적이는 스텝으로 치명적 슬픔을 표현하는 댄서들을 보았다. 세상의 모든 물을 끌어다 부서지는 이구아수의 물과 함께 부서지고 싶었다. 이제 행복하다는 말밖에….
누군가 여행이란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일이라고 했다. 낯선 곳에 서면 내 안에 있던 낯선 내가 밖으로 표출되는. 즉 여행이란 낯선 곳에서 벌거벗은 나를 만날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기회인 것이다. 그리고 낯선 곳에서 만나는 또 다른 나를 기록하는 일이 글 쓰는 사람의 직무일 것이다. 모든 사물을 낯설게 봐야 하는 시인으로서 낯선 것들을 기록한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젊었을 때 여행을 가면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마음과 눈에 특히 카메라에 많이 담아 오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중남미 여행을 결정하고 난 뒤 나를 뒤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중남미는 오래전에 버킷리스트에 오려 놓고 많은 고민을 했던 곳이다. 모든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20여 년 전에는 꿈속에서조차 꿈을 꿀 수 없는 곳이었다. 우선은 경제적인 것이 마땅치 않았고 직장에서 장기간인 40일 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었고 어지럼증을 앓고 있어서 건강이 받쳐주지 못했었다. 그러나 늘 가슴 한쪽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중남미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방송 다큐에서 보았다. 80세를 넘긴 어머니의 평생소원이 히말라야를 오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히말라야를 오르던 감동적인 광경을 보면서 “그래 나도 꿈은 꿀 수 있지”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하며 먼 날로 미루어 놨던 중남미. 막연하게나마 마지막 여행지로 정해놓고 고민을 많이 했던 곳이기도 하다. 어지럼증이 있는 나로서 여행지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내 인생과 바꿀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 여행 도중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중남미 어느 도시에서 나의 마지막을 부탁을 해도 될 만큼 나는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했는가? 라는 여러 질문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런 질문 앞에서 서면 한없이 초라해지고 머릿속이 복잡해지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고 마음 깊이 숨겨놓았던 중남미였다.
이번 여행을 결정하는 순간 나는 지구 밖에 서 있는 느낌으로 가슴이 고동쳤다. 그리고 여행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지금의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이며 지금의 나는 여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내 안에 오랫동안 쌓여 있던 것들을 버리려고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내 안에 쌓아놓고 여러 이유로 버리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것들을 대서양이 부서지는 어느 바닷가에 버리거나 페루의 어느 모래 산에 묻어버리고 싶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 안에서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 나를 되돌아보았다. 여러 가지가 많지만 특히 오랫동안 내안에 둥지를 틀고 있는 나와 너라는 이항적 사고에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我執과 상대를 자기중심주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편견이었다. 아집我執이란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자기만을 내세우는 것을 말한다. 즉 긍정적으로 쓰이는 고집固執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아집이 강한 사람들의 특성을 보면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타인과의 소통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편견이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생각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는 태도로 이 또한 소통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돌아보면 내 중심적 사고에서 출발하는 편견과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스스로 상처를 받은 적이 많았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인 우유니 소금사막에 나를 비춰보았다. 편향적인 견해를 가진 나와 매사에 내 것이 최고라며 아집으로 똘똘 뭉쳐있던 나의 젊은 날이 보였다. 편견과 아집의 대명사처럼 살았던 젊은 날을 우유니 소금사막에 묻었다. 소금에 절여지며 숨죽어가는 편견과 아집이 보였다.
편견과 아집의 결이 삭은 나는 어떤 나일까?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나는 또 다른 여행을 꿈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