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대원
분야 : 전시
기간 : 2026.08.06.~2026.11.08.
시간 : 화, 목, 금, 일요일 10:00-18:00 / 수,토요일 10:00-21:00 / 휴관일: 1월1일, 매주 월요일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요금 : 미정
문의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02-2022-0600
전시 소개
이대원(1921-2005)은 김환기, 박수근, 장욱진, 천경자와 더불어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10대에 이미 조선미술전람회에 3차례 연이어 입선하였고, 36세에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총 19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나 이대원의 작품세계를 미술사적으로 고찰한 연구나 전시는 미흡하였다. 주로 ‘과수원’을 그린 풍경화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초기 화업은 당시 한국화단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해방 이후 한국미론의 형성과 반도화랑 운영, 홍익대학교 총장 역임 등 한국미술계 전반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작품 형성 배경과 시대적 맥락을 함께 짚어보고 이대원 작품의 전형인 과수원 그림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면밀하게 그려냄으로써 이대원의 삶과 예술을 입체적으로 재조명한다.
이대원(李大源)
서양화가
생애
이대원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으나 예술에 뜻을 두고 법학도의 길을 접었던 열정으로 생(生)과 자연에 대한 찬미를 화폭에 담아왔다. 그는 생명력 넘치는 자연의 감동과 생의 즐거움을 화사한 색점들로 화면 가득 채운다. 작품 <농원>에서처럼 무수한 원색의 점들이 속도감과 생명력을 한껏 발산하며 생의 환희를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재료나 기법은 서양적일지 모르나, 전통회화의 기본이 되는 선과 점, 전통자수의 색감을 바탕으로 자연과 깊이 교감하는 우리 고유의 정서를 표출해 왔다. 홍익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약력
1938년~1940년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1945년 경성제국대학 법학과 졸업
1967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1967∼86년)
1972년 홍익대학교 초대 미술대학장(1972∼74년)
1973년 국민훈장모란장
1975년 UNESCO 한국위원회 위원
1978년 중화민국 중화예술원 명예철학박사
1980년 홍익대학교 총장(1980∼82년)
1981년 성균관대학교 명예철학박사
1982년 살롱 토론토 출품(프랑스)
1987년 한국박물관회 회장
1988년 5·16민족상
1989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91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9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1995년 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
예술활동
이대원은 일반 서양 유채화가 보여주는 그림 내용과는 달리 애써 우리네의 미감이 깃든 건축 구조물이나 소재에 집착하게 되고 또 그러한 내용에 맞는 표현방법을 모색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소나무가 있는 고궁담과 같은 화제도 그런 맥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1956년~1957년 미국과 유럽을 여러 달 여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그 곳의 당대 미술을 직접 접하면서 우리나라 미술의 높은 조형감각과 예술성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구체적으로 높이게 되었고 그같은 좋은 미술문화 전통을 자기 나름대로 어떻게 현대라는 시점에서 이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이 작가의 그림에서 그동안 잊어버린 고유한 미감을 되찾으며 또한 그러한 미감을 통해 그의 그림을 통해 그의 그림을 다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1960,70년대 중기의 평온에서 이와 같이 근래에 와서는 보다 동적이고 표현적인 방향으로 그 방향을 바꾸고 있다. 거칠 만큼의 색필선은 개별적인 대상의 형태감을 넘어서서 화면을 크게 지배한다. 중심적인 요소로서 부각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노력과 시도도 보기에 따라서는 자연의 힘과 그것에 의해 가득찬 기운을 담고 있는 공간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보다 중요한 문제로 전환하는 그의 예술적 과제에 연관된다는 점을 알 수 있겠다.
대표작품
<감나무>(1963) <담>(1963) <산>(1964) <농원>(1996)
평론
이대원은 현대 한국 화단에서 출중하고 예외적인 인물이다. 그의 세대의 화가들 중에서 그는 사실상 전적으로 서양 미술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며, 또한 서양 미술에서 그의 작품과 기법의 영감을 발견했다. 그는 유럽과 미국을 여행한 경험이 많으며 이러한 여행을 통해서 많은 나라에서 저명한 인사들과 친분을 맺고 있으며 필자도 그런 인사의 한 사람임을 행복하게 그리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서양 미술과의 심오한 접촉 또는 서양 미술의 목적과 수단은 그의 비전의 구조적인 계속성을 전혀 변경시키지 않았다. 그의 동료들 대부분이 1950년대와 1960년대라는 중대한 시기에 구상화를 버리고 모노크롬이나 미니멀리즘의 경향이 있는 추상화를 선택했으나 이대원은 자연과, 풍경과, 산과 들, 그리고 연못을 그리는 화가로 남아 있었다. 필자는 10여 년간 그의 그림을 접하면서 그의 작품에서 괄목할 만한 조형언어의 구사를 눈여겨 보았다. 이대원은 빛을 그린다기보다는 오히려 빛을 데생한다. 그는 선과 점의 조직을 사용해서 그것으로부터 그의 붓은 색채를 가지고 형태의 윤곽을 그려낸다. 나무는 이대원이 즐겨 그리는 소재이다. 나무가 전체 조형언어 체계의 원형(Archetype)을 구성한다. 화가의 조형언어는 나무가 가지를 치며 성장할 때와 동일한 유기적이며 생물학적인 리듬과 같이 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채색된 표현의 수액(樹液), 즉 우주의 기(氣)를 조작하는 은유(隱喩)가 된다. 빛의 서예가는 기를 그리는 매혹적인 고양(高揚)을 표현한다. 화가의 조형언어가 온화한 색조로 발전하면 그 결과는 이상하게 타오르는 불길 같은 양상을 띠게 된다. 나무들이 산이 되는 것이 그러한 경우인데, 그것은 청색과 녹색의 미묘한 혼합의 문제로 이 혼합은 노란색과 빨간색과 오렌지색의 발광의 반향을 상쇄하는 것이다. 채색된 선과 점의 조형언어는 모스식 부호(Morse Code)로 끊임없이 삶의 즐거움을 회화적인 찬송가로 그리게 만든다. 원색에 의해서 구현된 선과 점은 필자가 오늘날의 회화에서 보고 느끼는 가장 생동감 있고 감동적인 표현의 하나를 구성한다. 우리 서양 사람들은 삶의 리듬속에 혼재하는 색채의 폭발 앞에서 ‘점묘화법’과 ‘야수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피상적인 것이 틀림없고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이대원의 나무들은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속기법의 순수한 산물로 그것은 한국수묵화의 위대한 전통에 속하는 것이다. 이대원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성장해서 꽃이 피는 나무들과 풀들이 그려내는 기(氣)의 자연스러운 서술을 보는 데 그는 대단히 민감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러한 결정론에서 위대한 우주의 조화를 안은 정신적인 즐거움의 내재적인 힘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조화는 또한 공자(孔子)의 교훈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림의 목적은 우리들을 육체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행복이라는 평화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고 그 세계는 화가의 자연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구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더더욱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자연계의 유기적인 속도에 자신들을 적용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 그는 우리가 숨을 쉬듯이 그림을 그리고, 그는 우리가 황홀한 석양을 바라다보며 미소짓듯이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우리가 바라다보는 빛의 투명함을 간직하고 있다. 이대원의 작품을 보면 우리는 그의 풍경화의 정경 저편에 있는 기분이다. 그의 그림의 독특한 테마인 우주의 심오한 본질 속에는 삶의 즐거움이 듬뿍 아름답게 투영되어 있다. 이러한 교훈에는 국경이 없으며 그것은 범우주적인 정서의 진솔한 공증(公證)이다. - 삐에르 레스타니
작가의 글
“산, 농원, 나무, 연못은 어린 시절 그곳에서 뛰놀며 자연의 경이로움에 처음 눈떴던 나의 우주였습니다. 무덤 옆에서 피어나던 털이 보송보송한 할미꽃, 언덕 위 파밭에서 피던 파꽃…. 이런 기억들이 나이 들수록 더 생생해지는 것은 신기합니다. 내 그림의 빛깔들이 점점 밝아지고 또 즐거운 느낌을 주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점점 동심으로 돌아가 자연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 <계간미술>, 1986년 봄호, ‘작품소재에 관한 작가 자신의 견해’
관련도서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이대원>, 금성출판사, 1977
법대 나온 엘리트, 화가 되고 홍대 미대학장·총장까지
국민일보 기사 입력일 : 2022-02-27 21:57
[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31) ‘농원’의 화가 이대원
환한 봄날의 농원. 화살이 대지에 내리꽂힌 듯 짧은 선묘가 반복되는 원색의 화면에 생명력이 출렁거린다. ‘한국적 표현주의 화가’ 이대원(1921∼2005)의 ‘농원’ 연작은 미술시장 경매에서 꾸준히 인기를 누리는 스테디셀러다.
그런 그가 일제강점기 화가를 꿈꾸던 부잣집 자제들의 필수 코스였던 동경미술학교 등 미대 근처도 가지 못한 독학파라는 점은 놀랍다. 하지만 초등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국민 화가’ 박수근(1914∼1965)과는 차이가 있다.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나온 엘리트이기 때문이다. 둘의 공통분모는 아카데미즘의 상투성에 젖지 않은 독창성이다.
이대원은 경기도 파주 사람이다. 그림 속 농원은 봄이면 사과꽃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이면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달리던 고향 파주의 과수원이다. 그는 연못이 있고 주변에 나지막한 산이 있어 밝고 따듯한 정기가 감도는 농원을 별세할 때까지 소유했다. 그래서 “나를 알려면 파주 농원을 가봐야 해”라고 생전에 말하곤 했다.
상경해서 청운공립보통학교(청운초등)에 다니며 5학년 때 일본인 교사로부터 유화를 배웠다. 바로 옆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복고교)에 진학했는데, 이곳엔 한국 첫 프랑스 유학파 화가 이종우와 동경미술학교 출신인 일본인 사토 구니오가 미술교사로 있었다. 특히 사토는 동시대 서구 미술인 입체주의와 피카소를 가르칠 만큼 개방적인 스승이었다. 그런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이대원은 경복고 시절인 1938년과 39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거푸 입선했다. 근대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장욱진(1917∼1990) 유영국(1916∼2002) 심형구(1908∼1962) 권옥연(1923∼2011) 등이 선배거나 후배였다. 그들처럼 이대원도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유학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꿈이 꺾였다.
결국 법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극동기업을 창건했다. 열정은 어쩔 수 없어 ‘일요화가’로 살던 그는 1957년 동화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그때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 마침 56년 하버드대 세미나 참석을 계기로 미국과 독일 등지를 여행할 기회를 가졌던 그는 현지의 주요미술관을 둘러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한국적이며 동양적인 고유성을 지닌 현대회화를 창조하겠다’고 결심했다. 저명한 한국화가 심산 노수현(1899∼1978) 문하에서 서예를 배우고 중국 화보인 ‘개자원화전’을 혼자서 따라 그렸다.
동양화의 기법을 서양화에 적용한 그림은 그렇게 탄생했다. 동양화에서 나무와 산, 바위를 그릴 때 쌀알같이 작은 점을 겹쳐서 찍는 기법인 미점준(米點峻)을 차용했고 삼원법(고원 평원 심원 등 세 시점이 합쳐진 풍경 묘사법)도 구사했다. 동시대 화가들이 항아리, 달, 매화 등 소재주의에 그친 것과 달리 동양화의 기법을 서양화로 ‘번역’한 것이다. 청전 이상범은 이대원의 작품을 “서양물감으로 그린 동양화”라 불렀다. 서구의 비평가는 “화려한 색채를 추구하는 이대원의 작품의 출발점에 수묵화의 세계가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라고 감탄했다.
평생 천착한 ‘서양화의 동양적 현대화’의 실험 무대가 농원 연작이다. 처음 서양화의 점묘법을 연상시키던 점묘는 후기로 갈수록 선묘로 바뀌었다. 수묵을 연상시키던, 가라앉은 색은 충만감과 환희가 넘치는 원색으로 바뀌었다. 선과 색이 주는 율동감, 그 율동감이 풍기는 환희가 농원 역작의 매력이다.
이 짧은 선묘의 겹침은 어디서 영감을 얻은 걸까. 일본의 다데하다 아기라 교수는 파주 농원에 있는 아틀리에를 찾아갔을 때 이대원이 조선 자수 컬렉션을 보여준 경험을 이야기했다. 바느질을 통해 가는 실을 무수히 겹쳐서 면을 메우는 방식, 이대원의 회화에선 그런 자수가 연상된다.
이대원의 탁월함은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은 데 있다. 해방 이후 미술계가 사실주의 경향의 국전 중심 제도권 미술과 재야 청년 작가들의 앵포르멜(끈적거리는 추상화)로 양분됐을 때 그는 어느 길에도 속하지 않았다. 70년대 중반 이후 몸담은 홍대의 교수들이 단색화(단색의 추상화)를 이끌 때도 그는 표현주의적 구상 회화를 했다.
세상은 그의 회화를 사랑했다. 80년대 군사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의 사저에도 ‘농원’이 걸려 있었다. 이건희 컬렉션에 이대원의 작품이 포함됐음은 물론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하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 명작전’에는 경성제2고보 재학시절인 38년 그린 ‘북한산’이 나왔다. 학생시절에 그린 작품인데도 예민한 색채감각과 자유로운 붓놀림에서 탄탄한 기량이 엿보인다. 이대원에게 선과 색은 형태를 재현하는 수단 이상이다. 그는 선과 색을 통해 ‘관조하는 산’이 아니라 ‘에너지를 가득 담은 산’을 표현한다. 선과 색을 통해 내면을 표출하는 표현주의, 색면을 통해 리듬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야수주의가 동시에 느껴진다. 60년대 이후 동양화의 현대화를 모색하면서도 율동적인 선과 강렬한 색의 대비에 대한 선호는 타고난 기질처럼 이어졌다.
그의 삶도 그림 속의 선과 색처럼 환하다. 귀족적이고 온화한 태도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는 59년부터 한동안 상설화랑인 반도화랑을 운영한 특이한 경험이 있다. 화랑은 휴전 이후 서울로 환도한 정부가 외국 손님을 접대하는 호텔과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보수공사를 거쳐 54년 개관한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안에 있었다. 원래는 아시아재단이 소유해 김환기 장우성 윤호중 이대원 등 작가들로 꾸려진 운영위원회에 맡겼지만 작가들 간 화합이 잘 안되고 적자를 면치 못하자 이대원에게 넘겼다. 인품이 좋아 주변에서 추천하는 데다 멋쟁이이고 5개 국어를 구사하는 점 등이 고려됐다.
당시 화랑 직원으로 채용됐던 박명자는 9년간 반도화랑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70년 현대화랑을 차렸다. 박수근 그림이 외국인들에게 인기 있었는데, 사람 좋은 이대원은 외국인 컬렉터들을 이끌고 박수근의 창신동 자택으로 ‘투어’를 가곤 했다. 박수근에게 미국 컬렉터가 보내온 편지가 있으면 번역해주고 영문 편지를 대신 써주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대원은 65년부터 홍익대에 출강했고 67년에는 이곳 교수가 됐다. 하지만 미대를 나오지 않은 비주류에다 당시 유행하던 추상미술이 아닌 구상미술을 하던 그는 처음엔 외서강독교수로 채용됐다. 그런 그가 화단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된 계기는 75년 현대화랑 개인전을 통해서였다. 점원 박명자가 차린 현대화랑이 어느새 한국 최고 화랑이 돼 있었던 것이다.
이대원은 홍익대 초대 미술대학장을 거쳐 작가출신으론 드물게 총장도 지냈다. 정년퇴직 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까지 맡았다. 지인인 고고학자 김원룡의 말대로 ‘가장 팔자 좋은 사람’이 됐다. 화가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누릴 수 없었던 길이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초하의 연못 ,1940년 캔버스에 유채, 73x81cm, 호암미술관 소장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