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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8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요한 16,12-15
신성을 선물로 받는 법
며칠 전에 어떤 형제가 자기 가문 조상들의 무덤을 500개 관리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그분은 매우 열성적으로 말씀하셨지만, 저는 ‘왜 저런 고생을 사서 하실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많은 돈과 시간, 무거운 비석을 메고 오르내리며 넘어지는 모습을 보며 아내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며느리 자랑하기 시작하십니다. 장손을 낳은 며느리가 아이가 크면 가르쳐주겠다고 이 모든 것들을 시간 있을 때 아버님과 함께 가서 배우고 기록해 놓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장손이 이 일을 해야 하지만, 장손은 아직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중간에 누군가 그것을 이해시켜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님께서 오셔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얼마 전에 말씀드린 한 학급의 감동적인 사연을 떠올려봅시다.
발을 다쳐서 네 차례나 수술하고 반에 돌아왔을 때 선생님과 아이들이 반겨주지 않아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벤트였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준비해 준 케이크와 노래를 합창했고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누군가의 노력이고 피와 같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들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성령님의 역할은 누군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 전하며 이해시켜 주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한다면 예수님께서 성령님께 모든 것을 주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이해시키시기 위해 노력하셨기에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되신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이렇게 받아 전해서 이해시키는 역할을 하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 곧 신성을
주십니다.
하느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이해시키기 위해 성령님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느님 자녀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위의 형제님도 노후를 위해 준비한 땅이 조금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는 일을 이해하고 손자에게 전해주겠다는 며느리가 너무 예뻐서 모든 것을 며느리에게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결국 손자에게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에게 무엇인들 줄 수 없겠습니까?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더 높은 기도』 북 콘서트 때 세 분의 형제·자매가 제 책을 먼저 읽고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증언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영성의 단계를 알아서 무엇하냐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읽어야 하는 이유와 좋은 점을 조목조목 말씀하시며 신자들이 책을 많이 사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받은 모든 이익금을 그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정은표 씨도 아이들이 공부보다는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공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엄마는 아빠 편을 듭니다.
이때 남편은 아내에게 무엇을 주고 싶을까요? 다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때 자녀들도 마음의 평화를 찾고 좋은 성품과 능력의 자녀로 성장합니다.
성령처럼만 살면 하느님께도 배우자에게도 세상 상사에게도 사랑받고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원리를 이해합시다.
그래야 하느님 자녀가 되고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느님 자녀가 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드님께 모든 것을 주시고, 아드님은 성령님께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세 분 하느님은 모두 같은 ‘모든 것’,
곧 신성을 공유하시기 때문에 같은 하느님이 되십니다.
이제 우리도 성령님을 이해하게 할 수 있다면 그분의 신성을 받게 되어 같은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는 법을 잊지 맙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8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 16,12-15
진리 중의 진리, 궁극의 진리, 불변의 진리는 또 무엇입니까?
가끔 우리는 진리가 아닌 거짓, 허위를 접합니다.
때로 유명인사들의 거취에 대한 허위사실들이 순식간에 유포되어 입장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저도 며칠 전 한 신자로부터 한 선교사 신부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럴 리가 없는 데’하며, 즉시 펙트 체크를 했습니다.
당사자께서는 이미 부활하셔서 삼시 세끼 밥 잘 드시고 계신답니다.
이런 일까지 있었으니, 당신 명줄이 길겠다고 좋아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큰 혼란으로 몰고 가는 거짓, 허위, 헛소문들이 날개를 달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때로 이런 그릇된 정보가 부당한 공권력을 등에 업고, 진실인 양 공공연하게 유포되기도 합니다.
분명 거짓인데 그럴싸하게 포장되고 편집되어 일반화된 것을, 비판력을 상실한 관용 매체를 타고
진실인 양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 앞에 매일 펼쳐지는 세상만사, 다양한 사건 사고 들 앞에서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파악할 수 있는 정확한 식별력과 정보력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보면 분명 거짓이요 악인데, 사탄의 우두머리인데, 그럴싸하게 스스로를 포장해서 진리처럼, 예언자처럼 행세합니다.
아직도 두꺼운 가면을 쓰고 다니며 선량한 사람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 그릇된 지도자들과 사이비 교주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근원적, 태생적으로 나약한 우리 인간들입니다.
거짓과 헛소문 앞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늘 필요한 존재가 한분 계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진리, 진리 중의 진리, 궁극의 진리, 불변의 진리는 또 무엇입니까?
그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자체이시며,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신 생애 전체이며, 그분께서 선포하신 복음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 악이 기승을 부리는 이 세상이지만 그래도 이 진흙탕 같은 세상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 진리가 아닐까요?
때로 부담스럽고 때로 거추장스러운 내 이웃, 그래서 피하고 싶은 이웃이지만 그 사람 안에서도 엄연히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시고 하느님께서는 항상 그의 회개와 성장, 그리고 성화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계심이 진리가 아닐까요?
우리네 인생 여정에서 수시로 다가오는 갖은 고통과 시련, 유혹과 십자가가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의 진리, 이 구질구질하고 때로 꼬질꼬질한 인간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의 성령께서 활발히 역사하고 계신다는 깨달음의 진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무력하게도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 끝끝내 적대자의 폭력 앞에 저항 한번 하지 않으시고 돌아가신 수동의 예수님이시지만, 그 예수님께서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고 물리치시고 승리하리라는 깨달음의 진리, 십자가 길의 여정에서 처참했던 몰골의 바로 그분께서 참된 하느님이시며 우리를 영원한 불멸의 삶으로 이끌어 주실 구원자임을 깨닫게 하는 진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강론>
(2024. 5. 8. 수)(요한 16,12-15)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2-15).”
1)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줄 ‘새로운 가르침’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보충 설명’을 더 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을 충분히 준비시키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지금 너희는 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받았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온전히 깨닫게 되고 ‘온 삶으로’ 살게 됩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되고 ‘삶으로’ 실천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구원의 진리’, 즉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들’을 뜻합니다.
<‘진리’를 ‘예수님 자신’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해석하면, 예수님 말씀은, 성령을 받은 뒤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온전히 깨닫게 되고 믿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2)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 뜻을 깨닫고, 이해하고, 믿게 되었다는 말이 ‘성전 정화’ 이야기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9-22).”
루카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4-45).”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일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그 일도 ‘성령의 작용’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25-27.32)”
<‘마음이 타오르다.’는 ‘감동을 받다.’입니다.>
3)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라는 말씀은, 성령을 받는다고 해도, 당신이 가르치신 적이 없는 가르침을, 즉 ‘새로운 가르침’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 라는 선언입니다.
<우리 교회는 ‘공적 계시’는 예수님에게서 끝났고,
더 이상의 공적 계시는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뭔가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이(신앙인들이) 더 잘 이해하고 믿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일입니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성령을 받은 것으로 혼자서 착각하고 있는 것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성령이 아닌 악령을 받은 것입니다.
요즘에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사이비 종교 사람들이 그런 자들입니다.
그자들은 자기들이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선전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들을 말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자들은 성령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4) 교회 내부에서도 ‘사적 계시’가 논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을 체험하거나 성령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 교회는 그런 사적 계시 자체는 인정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또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이루어질 때에만 인정합니다.
사적 계시의 경우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거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계시가 아니라 사탄의 장난일 뿐입니다.
성령이든지 성모님이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사적 계시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신앙인’이 사적 계시를 의무적으로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