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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6.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묵상글 ( 10/15 22:30, 05:15, 05:35.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반 이전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4시 ~ 05시반,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
* 가능하면 위와 같이 할 계획이나 개인 형편으로 그리 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오늘 묵상글 공유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 10/15 22:30 )
- 김찬선 신부님: 05:1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35 추가.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아직.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계속 여부도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11월 대림시기(11/29) 이후 12월 중순 아니면 , 그 이전이라도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할 계획이오며
카페는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킬 계획이기에, 2)의 회원분이나 제가 가끔 묵상글을
올릴 수도 있을 경우를 감안, 묵상글 뜨락은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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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6.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6370
2026.10.15 21:05
2026년 10월 16일 금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2,1-7
먼저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경고하십니다.
누룩은 아주 조금이어도 반죽 전체를 부풀립니다.
위선도 그러합니다. 작게 시작되지만
어느새 사람 전체를, 공동체 전체를 물들입니다.
그런데 위선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골방의 속삭임도 언젠가 지붕 위에서 들립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위선의 가면을 쓸까요?
두렵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두려움’을 다루십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 그분께서 우리를 ‘벗’이라 부르십니다. ―
“육신밖에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두려움을 녹이는 가장 다정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참새는 그 시대 가장 값싼 것의 대명사였습니다.
다섯 마리가 겨우 두 닢 ― 하나는 덤으로 얹어 주는 셈입니다.
그 ‘덤으로 얹힌 한 마리’조차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십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얼마나 자상한 사랑입니까.
세상은 사람을 숫자로 세지만,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의 머리카락을 세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고백했듯,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마치 ‘단 한 사람뿐인 것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오늘 기억하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가
바로 이 사랑의 증인입니다.
그녀는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타오르는 예수님의 심장을 보았습니다.
가시에 둘러싸였으나 여전히 타오르는 심장 ―
“보라, 사람들을 이토록 사랑한 이 마음을.”
우리를 세세히 아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마음입니다.
친절·선행 주간의 눈으로 보면
여기에 친절의 뿌리가 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가면을 쓰고 남을 계산합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이토록 사랑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가면을 벗고 이웃에게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친절은 하느님의 방식을 닮습니다 ―
사람을 뭉뚱그리지 않고, ‘한 사람’을 세세히 헤아리는 것.
이름을 기억하고, 사정을 묻고, 작은 것을 알아채는 사랑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워 위선의 가면을 쓰지 않는가?
나는 하느님께서 나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다는 것을 믿는가?
나는 사람을 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대하는가?
나의 친절은 세세하고 자상한가?
주님,
두려움에서 나오는 위선의 가면을 벗게 하소서.
저를 세세히 아시고 사랑하심을 믿게 하시고,
저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상히 헤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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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6.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97?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15. 19:59
하느님 안에서 발견하는 참된 보금자리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모습이 되셨고, 그분 안에서 그들은 참된 보금자리를 찾았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집으로 돌아감(귀가)!
하느님 안에서 발견하는 참된 보금자리
2026년 10월 15일 목요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축일
신학자 윌리 제닝스(Willie Jennings)는 부모님이 가정 안에서 들려주신 이야기들을 통해 자녀들에게 하느님 안에서의 평안과 공동체적 귀속감을 심어주셨음을 회상합니다:
제 어머니 메리는 흙을 존중하는 법을 저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남부 출신의 많은 흑인 여성들처럼, 그녀는 땅을 자기 영혼처럼 깊이 알고 계셨습니다. 저는 늦게 태어났습니다. 열한 자녀 중 막내로, 남부가 아닌 북부에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그것은 흑인들이 짐 크로우 법 아래 지쳐 일자리를 찾아 북부 도시로 향하며, 차가운 공기 속에 삶을 다시 심었던 '대이동'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즈에서 태어나, 매년 봄이면 뒷마당의 작은 정원에서 어머니 메리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거기 흙 가까이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삶과 역사, 그리고 희망을 더 깊이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 아이보리 제닝스는 모두 훌륭한 이야기꾼이셨습니다. 그분들은 이야기를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줄기처럼, 미시시피 강의 흐름처럼 쏟아내셨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사람과 장소, 농담과 사건, 속담과 설교, 논쟁과 옷차림, 음식과 식사, 몸의 일부와 기도까지 크고 작은 조각들을 모두 품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담아낼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내게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도록 내어 맡기며, 반복해서 듣는 가운데 마침내 그들의 역사적 의식의 흐름 속에서 나 자신을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메리 제닝스와 아이보리 제닝스는 예수님 안에서 참된 집을 발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상황 속에서 그들을 지탱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놀라운 이야기 속에는 몇 가지 주제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마치 물줄기의 흐름을 결정짓는 커다란 바위처럼, 그 주제들은 모든 이야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아이보리와 메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단순히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보리와 메리, 그리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직물 속에는 하느님-사람이신 예수님께서 깊이 짜여 들어와 계셨습니다. 그분은 단순히 정통성을 보여주는 표지가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이루는 형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부모님이 들려주신 자기 삶의 이야기와 너무도 긴밀히 엮여 있어서, 저는 오랜 세월 동안 성경 속 인물과 친척들을, 성경 속 죄인과 우리 주변의 죄인들을, 성경 속 고통의 장소와 부모님의 고통의 장소를 구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성경 속 희망과 부모님의 실제 희망을 분리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성경을 알고 계셨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 세상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아프리카계 미국 공동체에서는 죽음을 "home-going", 곧 집으로 가는 길이라 부릅니다. 단순히 "집에 간다"(going home) 것도 아니고, "귀향"(homecoming)도 아닌, "home-going"이라는 고백입니다. 저는 그 표현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 Kathy S.
Reference
Willie James Jennings, The Christian Imagination: Theology and the Origins of Race (Yale University Press, 2010), 10—11.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내적 성소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가 누구인지와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을 밝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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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6.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16 03:54
- 두려움 없이 사랑하는 주님의 벗들
어제까지의 복음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에 대한 불행 선언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불행 선언 때문에 앙심을 품고 어떻게든지 주님을 옭아매려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시며 두려움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이런 표현을 하십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참 따듯하고 고맙습니다.
우리도 제자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도 그렇게 불러주시면 우리는
주님의 벗이라는 자의식을 그에 걸맞게 가져야겠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나의 벗이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개뿔 무슨 벗이야! 하고 말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것은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벗의 지위를 우리가 걷어차는 불행이겠지요.
어제 주님을 적대시하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를 불행하다고 하셨는데
우리도 그분 벗의 위치로 오를 기회를 걷어차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요,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을 적대시하는 자들과 결국에는 같아지는 것이지요.
이와 달리 어제 축일을 지낸 성녀 데레사는
어제 성무일도 독서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도 좋은 벗이고 그렇게도 훌륭한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곁에 계신다면
무슨 일도 견디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분은 늘 도와주시고 견고케 해주십니다.
필요할 때 돌보아 주시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그분은 참되시고 성실하신 벗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벗이시고
우리가 그분의 벗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주님의 사랑을 사랑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잘 이해하지 않으면 모순처럼 들리는 말씀을 하십니다.
두려워하라고 하셨다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니까 우리보고 두려워하라고 하시고 또 두려워하지 말라고도 하시는 것인데
그것은 하느님은 두려워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물론 폭군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지요.
너무도 사랑하고 너무도 존경하는 그런 두려움이고,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헤아리시는 하느님 사랑을 믿기에
다른 사람은 일절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너무도 사랑하고 존경하면 그 사랑을 잃을까 겁나는 두려움이고,
그것만 두렵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두려움이며,
하느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에 완전 의탁하기에 다른 두려움은 없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너무 두려움에 관한 얘기만 했는데
주님의 벗은 무엇보다 사랑하는 존재이고,
두려움 없이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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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6.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98?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16. 05:22
하느님 사랑의 빛이 들어오는 우리의 빈틈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저마다 자기가 지닌 삶의 배경과 마음 상태, 편견, 경험과 함께 그 성경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무섭게만 듣고, 희망을 찾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달리 말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상처와 두려움을 가지고 말씀을 듣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문화적 배경이나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합니다. 때로는 기분이나 상황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내 삶을 복음에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대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 혹은 비웃음을 두려워합니다.
언젠가 어떤 글에서 자전거를 탈 때 길 위의 작은 돌멩이에만 시선을 두면, 오히려 그 돌에 부딪힐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눈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작은 돌멩이 하나에만 시선을 두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글을 쓴 사람의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길 전체를 바라보면 돌멩이를 자연스럽게 피해 가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글을 천천히 더 읽어 내려가다 보니 그 글을 쓴 사람이 의도한 바는 단순히 자전거를 타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우리의 삶과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 삶도 자전거를 탈 때와 마찬가지로 시선을 작은 것에 두지 말고 전체에 두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사람들의 평가나 비웃음과 같은 작은 장애물에만 마음을 두면 그곳에 걸려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길, 곧 참된 방향을 바라보면 작은 장애물은 자연스럽게 지나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벗이라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이사야 41,10).
그래서 참새 한 마리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하나까지 세고 계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라고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덧없는 판단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 앞에서 진솔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비밀은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만, 그분은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여 주십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결점이나 부족함마저도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며 우리를 끌어안아 주신다는 사실에 우리는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의 하느님께 온전히 시선을 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약점들을 그 사랑의 힘으로 넘어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힘만을 믿을 때 우리는 오히려 이것에 걸려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죽을 때까지 빈틈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체인 하느님께 시선을 둘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빈틈들이 바로 하느님 은총의 빛을 받아들이는 작은 창문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빈틈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빈틈들을 받아들여 주시고 그 빈틈들을 통해 당신 사랑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빈틈'을 가지고 살아가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길 전체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전체인 하느님, 완전한 사랑의 하느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참된 자유와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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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6.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6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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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의 우정 1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는 삶 (260924. 01:38)
http://www.ofmkorea.org/ofmkfb/585549
그리스도와의 우정 2 말씀에 굴복하는 자유 (260929. 05:37)
http://www.ofmkorea.org/ofmkfb/585739
그리스도와의 우정 3 그리스도가 다시 태어나는 자리 (261008. 05:18)
http://www.ofmkorea.org/ofmkfb/586084
그리스도와의 우정 4 기도와 삶의 경계가 사라지다. (261011. 02:12)
http://www.ofmkorea.org/ofmkfb/586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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