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9. 큐티
여호수아 4:14 ~ 24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관찰 :
1)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
- 14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가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 => 하나님은 요단강을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강하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수행하는 여호수아를 높이셔서 여호수아에게 권위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가 얻은 권위는 모세의 권위와 방불한 권위였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은 그렇게 여호수아를 강하고 담대하라 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강하고 담대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만을 위해서 요단강을 가르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단강을 가르시는 일을 통해서 원하시는 모든 일들을 성취하시고 있습니다. 그 중에 여호수아를 높이 세워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 15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하나님은 요단강 도강의 과정에서 계속해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마치 여호수아의 옆에서 코치하시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었지만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역사를 여호수아는 분명히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지는 모든 일들. 이 모든 상황들을 경험하는 여호수아는 보다 더 하나님 앞에 그 마음과 생각이 집중되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지도자로 집중되어지는 과정을 통과하게 된 것입니다.
- 16절 ~17절. “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 하신지라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에서 올라오라 하매” =>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여호수아는 명하고, 백성들은 순종하고 있습니다.
- 18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에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서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더라” => 요단강이 겹겹이 쌓여 있다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서 나와 육지를 밟게 되자 봇물이 터지듯 다시 쏟아져 흐르게 되었습니다. 언약궤가 육지로 나오자 요단강이 흐른 것은 요단강의 물이 다른 이유로 멈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는 것이 증거된 것입니다. “전과 같이”는 ‘그제’와 ‘삼(3)’이라는 히브리어의 합성어로 ‘삼일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간 머물고 있던 바로 그 때에 요단강이 넘실거리는 것을 보았을 때와 같이 도로 흐르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눈으로 본 증거를 생생하게 표현함으로 이 기사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변증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2) 길갈에 세운 열두 돌
- 19절. “첫째 달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 치매” => 여호수아는 이 역사적인 사건이 언제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기록에서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람의 이름이 분명하게 등장하면 그것은 신화가 아니라 사실의 기록이라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밟은 이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지 40년에서 만 4일이 모자라는 날이었고, 유월절 어린 양을 예비하는 날이었습니다(출 12:3). 여호수아는 정확하게 날짜를 기술함으로 유월절 규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첫째 달”은 히브리어로 '아빕월‘인데, '아빕'은 이미 익었으나 여전히 푸른 색깔을 띤 부드러운 보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모맥 거두는 시기'와 일치하는 시기로 오늘날 태양력의 3월 말이나 4월 초에 해당됩니다. 이 아빕월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니산월'이라 불리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땅으로 들여보내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서 유월절을 예비하고 지키게 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 성별된 민족임을 깨달아 알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깨닫고 있습니다.
- 20절. “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 이 행위도 하나님이 명하신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것에 세세하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갈”은 ‘굴리다’라는 말에서 파생되어 온 말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드디어 그 목적지인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함으로 애굽에서 겪은 노예의 수치를 모두 굴려버렸다는 뜻으로 이름지어진 곳입니다. 요단강 언덕으로부터 8km 가량 떨어진 길갈은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의 첫 야영지이자 가나안 정복 전쟁의 교두보가 된 곳입니다. 이후에 이 길갈은 가나안 정복 전쟁 뿐만이 아니라 사사시대, 초기 이스라엘 왕국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중심지로서 중요한 성읍이 되었습니다.
- 21절 ~ 22절.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 평평한 지역인 길갈에 세워진 열두 개의 큰 돌무더기는 누가보아도 이상한 것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손들이 이 돌의 원인을 묻게 만들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요단강을 가르시고, 그 땅을 마른 땅이 되게 하셔서 이스라엘로 지나가게 하신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하게 하라시는 것입니다.
- 23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 여호수아가 해석하는 요단강 도강 사건의 내막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말리시고 건너게 하신 것과 같은 차원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높이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한 확신있는 고백입니다.
- 24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 여호수아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까지 잇닿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땅의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며,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축복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는 저주가 있게 됨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고백입니다. “땅의 모든 백성”은 분명히 이스라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심이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이유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이러한 관점이 이스라엘에게 바르게 전수되었어야 했는데,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민족신으로 국한하여 생각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가르침 :
1) 여호수아는 이제까지, 또 앞으로도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그 순종함이 여호수아의 승리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순종은 또한 이스라엘의 승리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한 지도자의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순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지를 보게 됩니다. 나중에 왕으로 세워지는 사울과 또 다윗의 예를 보더라도 지도자가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그렇기 못하느냐가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를 가르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주님의 몸 된 교회도 동일한 프로세스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순종하는 지도자와 그 지도자를 따르는 이들은 흥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이 순종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따라 이용하는 지도자와 그 지도자를 따르는 이들은 망하게 됩니다. 순간적으로는 흥하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그 흥함은 잠깐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되이 따르는 지도자는 그렇기에 단기적인 관점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을 갖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여 년간 노예생활을 했던 수치를 홍해를 가르시고, 또 요단강을 가르시는 이적을 통해 길갈로 이끌어 내시면서 그 모든 수치를 굴려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그런 수치를 당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으신 분이 아니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서 그 필요를 참으시고, 견뎌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수치를 변하여 더욱 명예롭게 하시고, 높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당대 최강제국이었던 이집트를 박살내시며 이스라엘을 탈출시켜주신 것이고, 철기문명의 총아로 강력한 무장집단이 있던 가나안땅을 점령하도록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를 때 그런 일들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3) 길갈에 세워진 열두 돌은 그렇듯 이스라엘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이며, 후손들에게 대대로 가르칠 하나님의 큰 일에 해당되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심은 의미없는 행위가 아니라 대대로 이어져서 알려져야 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역사가운데 일하여주신 하나님의 열심을 통해서 깨닫게 되어지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도 투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주님의 역사가 나 자신에게 임하는 것을 기대하는 삶을 살아내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적용 :
1)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그 모든 수치도 굴려버리시고 흥하게 하십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손해 볼 것 같은 생각은 사실 잘못된 것입니다. 단기적으로는 그런 손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손해가 아닌 축복입니다.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2) 하나님이 길갈에 돌 열둘을 세워 자손들에게 신앙교육을 하라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들에 대해서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들에 대해서 민영, 찬영, 병조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먼저 내가 하나님과 동행한 흔적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간증을 하겠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고, 마땅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