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부자 왕문충이 고향인 하북성 조강현 대영진 작약촌에 돌아가 촌간부로 되여 촌민들의 환영을 받고있다. 왕문충이 고향에 돌아온지 한개월 남짓한 사이 작약촌에는 근본성적인 변화가 일어나고있다.
열의로 들끓는 공사현장
11월 12일, 기자가 조강현 대영진 작양촌에 갔을 때 가는곳마다 채색기 펄럭이고 우르렁거리는 기계소리가 진동하며 열의충천하여 일하는 촌민들의 모습을 볼수가 있었다.
길가에서 일하던 한 촌민은 왕문충이 촌에 돌아와 촌지부서기로 된후 자기돈으로 촌에 우물을 파고 길을 수리하였고 촌민들도 적극적으로 동원되여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을 냈다면서 촌민들이 자동적으로 낸 돈도 3만원에 달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들 촌의 600여명 인구중 매일 의무로동에 참가하는 사람은 2~300명으로 로인과 아이들도 시간만 있으면 일손을 도와준다고 말했다.
불도젤 옆에 서있던 왕문충은 기자에게 《이제 길을 다 수리하면 이쪽에는 공업구, 저쪽에는 당지부, 촌위원회를 건설하고 또 저쪽켠에는 학교, 유치원을 건설할것입니다……》라고 자신감에 넘쳐 말했다. 벽에 걸어놓은 5~10년 전망계획도는 촌민들의 아름다운 래일을 제시하고있었다.
고향을 건설하려는 웅심 품고 귀향
편벽한 곳에 자리잡은 작약촌은 교통이 불편하며 원근에 소문난 가난한 촌으로 지어 촌민들의 생활용수마저 보증할수 없었다. 촌에 있는 유일한 한갈래의 흙길은 맑은 날에는 사람들을 먼지투성이로 비오는 날에는 흙탕물 투성이로 만들기가 십상이였다.
왕문충은 올해 46세이며 1984년에 입당하였다. 촌으로 돌아오기전 그는 북경 아보로에서 6개 모피브랜드를 경영, 고정자산이 억원을 초과하는 전국에 이름있는 모피거두였다. 올 8월, 작약촌발전을 위해 골머리를 앓던 진당위, 진정부 지도자들과 촌민대표들은 왕문충을 찾아가 상업계의 총아인 그가 고향사람들을 빈곤에서 해탈하고 치부하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정부를 위해 곤난을 해결해주기를 바랐다.
어려서부터 작약촌에서 자란 왕문충은 촌의 정황을 익숙하게 알고있었다. 그외 왕문충이 북경에서 눈코뜰새없이 보내면서 위장병을 앓고있었기에 안해는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것을 견결히 반대해나섰다. 그러나 고향사람들의 간절한 요구를 거절할수 없고 또 촌을 위해 일해보려는 웅심을 굳힌 그는 안해에게 제때에 약을 먹고 신체를 돌보겠다고 보증하고는 올 9월 21일, 결연히 진당위의 임명을 접수하였다.
한달남짓 사이 촌면모 일신
왕문충이 금방 왔을 때 촌에는 집체자금이 없었으며 빚만해도 3만원이 있었다. 왕문충은 촌에 오자마자 10만원을 기증하여 가로등 25개를 가설하여 온 마을이 환해지게 하였고 15개 골목입구에 쓰레기장을 건설하여 촌이 깨끗해지게 하였다. 10월 10일에는 340메터 깊이의 우물을 파고 무탑전자동급수설비를 가설하여 집집마다 24시간 쉼없이 흘러나오는 수도물을 마시게 하였다. 그후 왕문충은 또 60만원을 내놓아 촌에서 길을 닦는데 사용하도록 하였다.
50여세에 나는 로당원 대풍의는 아이가 많은데다 안해까지 중풍을 맞다보니 어렵게 살았다. 왕문충은 그의 손에 1000원을 쥐여주었다. 74세에 나는 고독한 로인 왕화춘이 이 몇년래 줄곧 초불로 조명했다. 왕문충운 460원으로 그의 집에 전기를 가설해주었다. 촌을 위해 뛰여 다니고 마을 사람들을 생각해주는 왕문충을 보면서 촌민들은 《왕문충은 우리의 훌륭한 촌간부이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있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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