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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 2-85 (115)
《태공(太公)의 위기》
그러자 한신의 주위에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일시에 들고 일어나 바위와 통나무들을 연방
굴려 내리는 바람에, 산상을 기어 오르던 초군 병사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항우는 이런 광경을 지켜 보며,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갈았다.
"저놈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다. 나 혼자서라도 달려 올라가 저놈을 물고를 내고야 말겠다."
하고 몸소 산상으로 달려 오르려고 하였다.종리매가 급히 달려와 말고삐를 움켜 잡으며 간한다.
"폐하 ! 한신이 저렇듯 방자하게 구는 것은, 폐하를 노엽게 만들려는 수작이 분명합니다.
오늘은 일단 후퇴했다가 후일을 기약하셔야 합니다."
"저놈을 그냥 내버려두고 가다니, 무슨 소리를 하느냐 ! "
"폐하께서 산상으로 올라가시기만 하면 적은 철포와 화전(火箭)을 빗발치듯 퍼붓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가 종리매의 말을 듣고,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리려니까, 적은 항우가 도망가는 눈치를 채고
일시에 화전을 빗발치듯 퍼부어서, 산 전체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항우는 불을 피하여 급히 하산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얼마를 달려 내려오노라니까,
이번에는 적장 누번이 한무리의 군사들과 함께 앞길을 가로막으며 외친다.
"역적 항우는 어디로 가느냐 ! 목숨이 아깝거든 이 자리에서 항복하라."
항우는 악이 받칠 대로 받쳤다. 그리하여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며 누번에게 달려들었다.
"이놈아 ! 너는 역발산 기개세의 항우를 못 알아 본다는 말이냐 ?"
항우와 누번은 정면으로 싸우기 시작했다.그러나 누번은 항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누번이 항우와
7, 8합을 겨루다가 항우의 철퇴를 맞아 말에서 떨어져 버리려는 바로 그 순간, 이번에는 멀리서 부터
시무와 왕릉이 비호같이 달려오며,"항적(項賊 : 항우의 본명)은 죽지 않으려면 항복하라 ! "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한신은 군사들을 어떻게나 용의 주도하게
분산해 배치해 놓았는지, 항우가 가는 곳마다 한나라 군사들이 몰려 들었던 것이었다.
항우는 눈물을 머금고 또다시 쫒기는 수밖에 없었다.얼마를 쫒기다 보니 날이 저물어 달빛이
훤히 밝은데, 산골짜기의 강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강물은 깊고 세차게 흘러서 그냥 건널 수는 없었다.
(아아 ! 앞은 강이 가로막고, 뒤에서는 적이 추격해 오고... 나는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 )
항우는 강물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였다.
그러자 그때, 이번에는 엉뚱한 방향에서 한 무리의 군사들이 자신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
"네놈들은 누구냐 ?"항우는 자신도 모르게 전투 태세를 갖추며 외쳤다.
그러자 두 명의 장수가 가까이 다가오며,"폐하 ! 저희들은 주은과 환초이옵니다. 폐하께서
쫒기신다는 소리를 듣고 폐하를 도우려고 급히 달려왔사옵니다."
"오오, 그대들이 이곳에 나타날 줄은 정말 몰랐구나. 고맙다, 고마워 ! "
항우가 부하 장수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항우는 주은과 환초가 거느리고 온 5천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또다시 도망을 치는데,
날이 밝아서 보니 광무산에는 가는 곳마다 한군의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항우는 그 광경을 보고 눈물을 머금고 주은에게 말한다."나는 오늘날까지 여러 천명의 장수들과
3백여 회의 대전을 치러 왔지만, 한신처럼 용병술이 능한 장수는 처음 보았다."
그 말에 주은이 대답한다."한신은 폐하와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리할 자신이 없으니까, 계획적으로
우리를 산속으로 유인하여 복병 작전을 썼을 것이옵니다.그러니 여기서 지체하시다가는 또다시
당하시게 될지 모르오니, 이곳을 빨리 벗어나시어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재기를 노리셔야 하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산을 돌아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어느 산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홀연 깊은 숲속에서 한 무리의 군사들이 또다시
함성을 울리며 들고일어나며,"항적은 어디로 도망을 가느냐 ! 네 목위에 얹은 하나도 쓸데 없는
대가리를 우리에게 빨리 바쳐라 ! "하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외쳐대는 것이 아닌가?
항우는 하도 여러차례 당하는 일이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공격 태세를 갖추며,"네놈들은 어떤 놈들이냐 ?"하고 고함을 질렀다.
두 명의 장수들이 저만치서 말을 우뚝 멈춰 서더니,"우리들은 한나라의 대장 주발과 주창이다.
우리들은 한왕 전하의 어명을 받들고 네 놈의 머리를 가지러 왔노라 ! 그러니 너는 아무 소리 말고
목아지를 길게 내밀어라 !"하고 징그러운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항우는 이제껏 듣지 못했던 너무나도 모욕적인 말에 울화가 불끈 치밀어 올라서,
"이놈들아 ! 네놈들의 목은 내가 잘라 주겠다 ! "하고 외치며 폭풍같이 덤벼 들었다.
그러자 주발과 주창은 2, 3합쯤 싸우다가 날쌔게 쫒겨 달아난다.워낙 지독한 욕설을 들은 항우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서 이들을 맹렬히 추격해 가는데 돌연 또다시 철포 일발 소리가 나더니
이번에는 사방에서 복병들이 들고 일어나 항우를 에워싸고 총공격을 가해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근흠과 노관이 거느린 복병이었다.여기서 양군은 일대 혼전을 벌였다.
그러나 한나라 군사들은 사전에 매복하고 지형을 익혀두는 등, 사전 전투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으로
초군은 지리멸렬 참패를 면치 못했다.항우는 적장 근흠과 노관에게 각각 깊은 상처를 안겨 주기는
하였으나 결국은 도망치는 그들을 붙잡지는 못하였다.
결국 항우는 이들을 계속하여 쫒지 못하고 다시 말머리를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달려가면 달려가는 대로 어디선가 계속 화살이 날아와 항우는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다.
이러면서 20여리를 쫒겨 가니, 항우를 따라오던 주은과 환초도 무수한 상처를 입고
항우앞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항우는 발을 구르며 탄식한다.
"내 한평생을 전야에서 살아왔지만, 이렇게 당해 보기는 처음이었다."마침 그때,
계포와 종리매가 한무리의 군사를 거느리고 쫒겨 왔는데, 그들 역시 5천여 명이던 군사가
1천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항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오늘은 일단 본진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내 조만간에 한신이란 놈에게 오늘의 설욕을 갚고야 말겠다."
한편, 한신은 완승(完勝)을 거두고 나자, 즉시 한왕에게 달려가 승전 결과를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한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원수의 신출 귀몰한 작전이 아니었던들 어찌 이와 같은 승전을
거둘 수가 있었으리오. 이제 앞으로 항우는 <한나라 군사>라는 말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져서
감히 싸우지를 못할 것이오."한신이 다시 아뢴다."모든 것이 대왕 전하의 천위(天威)의 덕택인줄
아뢰옵니다.그러나 항우를 이번 싸움에서 완전히 패망시키지 못한 것은 천추의 유한이오니,
이 기회에 항우를 계속 공격하여 초나라를 완전히 평정하도록 허락을 내려 주시옵소서."
한왕이 즉석에서 대답한다."나는 원수만 믿겠소. 원수는 모든 계획을 뜻대로 수행하여 주시오.
나는 빨리 천하를 통일하여 모든 창생들을 도탄 속에서 하루 속히 구해 주고 싶은 생각뿐이오."
그리하여 한신은 토초작전(討楚作戰)을 또다시 세밀하게 세우기 시작했다.
항우가 광무산 전투에서 참패하고 본진으로 돌아와 병력을 점검해 보니, 이번 전투에서 손실된
병력은 무려 10만여 명이나 되었다.그뿐만이 아니고 계포, 우자기, 환초, 주은 등 혁혁한 대장들이
모두 중상(重傷)을 입어 당분간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항우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한신이란 놈, 어디 두고 보자 ! 내 조만간 반드시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그리하여 그날부터 모병운동(募兵運動)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군사들의 훈련을
계속하였다.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돌연 비마가 달려오더니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폐하 ! 한신이 변방 제후(邊方諸侯)들을 규합하여 50만 대군을 이끌고 또다시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어쩌면 내일쯤은 이곳까지 도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승상 소하는 영양성과 성고성으로 군량을 날라 오는데, 그 수량이 어찌나 많은지, 함양에서
영양성과 성고성에 이르는 길에 우마차(牛馬車)의 꼬리가 백 여리에 이르고 있습니다."
항우는 이같은 보고를 받고 기가 막혀 항백과 종리매를 급히 불러 상의한다.
"우리는 군량도 부족하고 병력도 넉넉하지 않은데 한신이란 자가 50만 대군을 다시 몰고 쳐들어
온다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그러자 종리매가 대답한다.
"우리가 한왕의 부모를 볼모로 잡아 두고 있으니, 내일이라도 그들과 대진(對陣)하게 되면,
태공을 이용하여 흥정을 하는 것이 상책일 것 같사옵니다.""흥정을 하다니?
어떤 흥정을 한다는 말이오 ?""태공을 그들에게 보여 주면서, 만약 철군을 하지 않으면 태공을
팽살(烹殺)하겠다고 엄포를 놓으십시오.
그러면 제아무리 유방이라고 하여도 철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항우가 다시 말한다.
"태공을 죽여 버리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오. 그러나 태공을 죽여 버리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잔악 무도한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니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려.
그 문제는 두고 보기로 합시다."
바로 그 다음 날, 한신이 초군 본진 30리 밖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항우는 어쩔 수가 없어 태공 내외를 마상에 결박을 지어 가지고 일부러 적진 앞으로 끌고 나왔다.
말할 것도 없는 무언의 시위였던 것이다.한왕은 진중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소리 내어 울며
참모들에게 말한다."내 일찍부터 천하를 도모하기에 바빠 부모님께 효도를 한 일이 없었소. 그런데
오늘 양친께서 저렇게 고초를 당하시는 것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구려.
그러니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서는 차라리 철군을 하는 것이 어떻겠소 ?"
진중의 장수와 병사들은 한왕의 애타는 심정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한왕이 울면서 <부모님을 구출하기 위해 철군을 하겠노라>말하는 바람에, 어느 누구도
숙연히 고개만 숙일 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그러자 장량과 진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대왕께서는 조금도 상심하시지 마시옵소서. 항우는 우리 군사들을 철수시키려고 지금 엄포를 놓고
있기는 하지만, 태공 내외분을 절대로 죽이지는 못하옵니다.천하의 대세가 거의 결정되어 가는
이 중요한 판국에, 주공께서 이런 약한 말씀을 하시면 어떡하시옵니까 ?"
한왕은 마상에 결박되어 있는 부모를 멀리 바라보며 다시 말한다.
"항우가 태공 내외분을 죽이지 않는다고 무엇으로 보장할 수 있겠소. 천하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님을 참혹하게 돌아가시게 하는 것은 자식으로선 차마 할 수 없는일이오."
장량과 진평이 다시 품한다."대왕께서는 항우의 술책에 현혹되셔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항우는 우리
군사들을 철수시키기 위해서 어쩌면 가마솥에 기름을 끓이면서 태공을 팽살하겠다고 엄포를
놓을지도 모르옵니다.그런 경우에도 조금도 놀라지 마시고, 항우에게 이러저러하게 말씀하시옵소서.
항우는 결단코 태공을 죽이지는 못하옵니다."
그러면서 장량은 한왕에게 자세한 대책을 들려 주었다. 바로 그때 일선 부대장이 급히 달려오더니,
"초패왕이 대왕 전하와 직접 대화를 나누자는 전갈을 보내 왔사옵니다."하고 알린다.
그 말을 듣고 장량이 한왕에게 품한다."신이 한신 장군을 시켜 경계를 삼엄하게 할 터이온즉,
대왕께서는 안심하시고 항우와 대화를 나누도록 하시옵소서."
그리고 한신을 시켜 군사를 사방에 배치하게 하였다.
이윽고 한왕은 항우 앞에 당당히 나타나, 장량이 일러준 대로 항우에게 큰소리로 외친다.
"초패왕은 나의 말을 들어 보시오. 그대는 이미 궁지에 몰려있어서, 어차피 항복을 아니 할 수가
없게 되었소. 순순히 항복해 온다면 나는 초왕의 지위를 자손 만대에 이르도록 보살펴 주겠소.
그러나 나의 선의를 무시하고 끝까지 싸우려고 한다면 오늘중으로 당신의 머리를 베어 버리고
말겠소."항우는 그 말에 크게 격분하며,"이놈아 ! 너는 나를 어디까지나 모욕할 작정이냐 ! "
하고 외치며 맹수같이 한왕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번쾌, 관영, 주발, 왕릉이 한왕을 엄호하면서 싸움을 가로막았다.
그리하여 한바탕 백병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홀연 일발의 포소리를 신호로 여기저기서
한나라 군사들이 들고일어나 항우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이 아닌가 ?
항우는 좌충 우돌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항우는 과연 천하의 맹장이었다. 한나라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다가, 호랑이 같은 네 명의 대장들로부터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면서도
항우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이리저리 막아내며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은 인해전술(人海戰術)로 항우를 생포하려고 수천 명의 군사들이 일시에 함성을 내지르며
새까맣게 덤벼오는 것이 아닌가 ?항우가 제아무리 용맹스러워도 벌떼처럼 사방에서 몰려오는
수천 군졸들을 한꺼번에 죽여 버릴 수는 없었다.그리하여 말머리를 돌려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는
그때, 아군인 주란, 주은, 계포, 종리매 등이 1만여 군사들을 몰아쳐 항우 앞으로 나오며 적병들을
닥치는 대로 후려갈기는 것이었다.결국 이날의 싸움은 피차간에 이렇다 할 승부 없이 끝나 버렸다.
종리매가 본진으로 돌아와 항우에게 품한다."오늘은 실패로 끝났지만, 내일도 태공을 끌고 나가
흥정을 다시 한번 해보시옵소서. 그러면 한왕은 반드시 철군에 응할 것이옵니다.
그래서 적들이 철군한다면, 우리는 팽성으로 돌아가 군사를 대대적으로 양성해 가지고 후일을
도모해야 합니다."항우는 그 말을 옳게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장량과 진평은 태공을 구출해 올 계획을 여러모로 골똘히 강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장량은 초나라 출신의 포로들 중에서 제법 똘똘해 보이는 자를 한명 골라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만약 내 말을 잘만 들어 준다면 나는 너를 크게 출세시켜 주겠다. 너는 그럴 생각이 있느냐 ?"
포로가 크게 기뻐하며 대답한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사오나, 대인께서 하명을 하시면 어떤 일이라도 해내겠습니다."
"네게 부탁하려는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저 초나라의 상서령(尙書令)인 항백 장군에게
내가 보내는 편지를 무사히 전해 주면 되는 일이다.너는 본시 초나라 군사이기 때문에 초나라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니냐. 어떻게 하면 아무도 모르게 항백 장군에게 편지를 전해 줄 수
있을지 한 번 생각해 보아라."포로는 그 말을 듣고 더욱 기뻐하며 말한다.
"그런 일이라면 식은죽 먹기보다도 쉬운 일이옵니다. 대인께서 편지를 써 주기만 하시면,
저는 그 편지를 남모르게 무사히 전해드릴 뿐만 아니라 답장까지 받아 가지고 오겠습니다."
장량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뻤다. 그리하여 항백에게 보내는 밀서를 써주면서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이 편지를 다른 사람이 보면 큰일날 것이니, 품속에 깊이 품고 가거라."
"염려 마시옵소서. 저는 결코 어리숙한 놈이 아니옵니다. 무슨 재주를 부려서라도 항백 장군께
직접 전달해 올리겠습니다."
이리하여 초나라의 포로는 상금까지 미리 챙겨 받고 싱글벙글 하면서 초나라로 떠나갔다.
포로는 장량의 밀서를 품고 국경을 넘다가 초나라의 경계병에게 체포되어 버렸다.
경비관이 포로에게 묻는다."네 놈은 한나라에 포로가 된 놈이 분명해 보이는데 무슨 재주로
살아 왔는냐 ?"포로가 대답한다."저는 한군에게 잡혀 있다가 겨우 도망을 쳐서 돌아오는 길이옵니다.
저의 부모님이 항백 장군님과 친분이 있으신 관계로 저는 항백 장군님을 모시고 있던 몸이오니,
저를 원대 복귀(原隊復歸)시켜 주시옵소서."경계관은 문제의 인물이 <항백 장군의 직속 부하>라는
소리에 그만 기가 죽었다. 그리하여 다음날 그를 항백 장군에게 인계해 버리고 말았다.
항백은 휘하의 많은 군졸들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문제의 포로가
자신의 부하인 줄로 알고, 한나라의 사정을 이렇게 물어 보았다.
"네가 한나라의 포로가 되었다가 무사히 탈출해 왔다니 매우 기특하구나. 그래 혹시 너는 장량이라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느냐 ?"항백은 친구 장량이 전쟁통에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였던 것이다.
포로가 대답한다."장량 대인은 한나라 군사(軍師) 로서, 제가 장군님의 부하였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자 장군님 말씀을 많이 하시면서, 저를 각별히 동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저를 은밀히 부르시더니, <너만은 특별히 돌려보내 주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고국에 돌아가면 나의 편지를 항백 장군에게 꼭 전해달라> 하시면서 이런 편지를
주셨습니다.포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품속에서 장량의 편지를 꺼내 보였다.
항백이 편지를 펼쳐 보니, 그것은 틀림 없는 장량의 필체로 쓰여진 자기에게 보내는 편지가
분명하였다. 편지의 사연은 이러했다.<나 장량은 옛 친구인 항백 장군에게 글월을 보내오>
그 옛날 한왕께서 장군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게 된 은공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오.
그 후에 나는 부귀와 공명에 뜻이 없어 오랫동안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하던 중에 인후(仁厚)하신
한왕께서 천하를 도모하시면서 기어코 나의 도움을 요청하시기에, 나는 다소나마
도움이 되어 드리고자 지금은 한나라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정세를 보건데, 항왕은 한왕의 군사를 철군시킬 계획으로 태공을 팽살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는 중입니다.만약 장군이 계시면서 태공을 팽살시켜 버린다면, 개인적으로는 장군은
장인과 장모님을 잃게 되는 것이고, 크게 보아서는 후일에 한왕께서 천하를 통일하셨을 때,
장군은 손위 처남인 한왕을 어떤 면목으로 대할 수 있으오리까.
그리하여 장군께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부탁하오니, 인륜에 반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태공을 팽살하는
일만은 장군께서 막아 주시옵소서.만약 그렇게 해 주신다면 장군께서는 사위의 도리를 하시게
될 것이고, 한왕께서는 후일에 그 은공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저 역시 우정으로서 장군에게
간곡히 부탁드리옵니다. <장량 올림>
항백은 장량이 보내온 밀서를 읽어 보고 포로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너는 그냥 돌아 온 것이 아니라 장량의 밀명을 받고 온 것이 아니냐 ? 모든 것을 숨김 없이 이실직고
(以實直告)하여라."포로가 대답한다.
"실상인즉, 장량 군사께서 편지를 주시면서 <답장을 꼭 받아 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항백은 그 말을 듣고 얼굴에 희색을 띠며,"알았다. 그러면 내가 답장을 써 줄테니, 장량 군사에게는
아무도 모르게 전해야 한다."하고 즉석에서 답장만 써 주는 게 아니라, 노자(路資)까지 두둑이 주고
국경을 넘어가는 특별통과증까지 발부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포로는 한나라로 무사히 돌아와 장량에게 답장을 전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2-86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