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륵륵>
미선은 열 때마다 버거운 미닫이문을 두 손으로 손잡이를 힘껏 부여잡고 열은 뒤 안방에서 부엌과 겸하는 거실로 나왔다.
오래된 미선의 허름한 집은 천장이 내려앉아 집안의 모든 미닫이문은 이렇게 두 손으로 힘을 들여 열어야 하기 때문에
여간 신경질 나는 일이 아니었다. 따뜻한 안방에서 막 나온 미선의 입에선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짙게 내뿜어 졌다.
도저히 같은 집안이라곤 말 할 수 없을 만큼 차가운 기운이 미선을 감쌌다. 미선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어 씻고 자르고, 볶고, 끓이고 한참을 시끌벅적하게 만들더니 조용하던 집안을 사람 내음이 나는 곳으로
바꾸었다. 냄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로 거실에 있던 찬장과 거울에 모두 김이 서렸고 부엌을 감싸던 차가운
기운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미선은 큰 주전자에다 싱크대 물을 가득 부어 힘들게 가스렌지로 옮겨 싱크대 위, 찬장에
보리와 결명자, 옥수수가 한데 섞여있는 예쁜 병을 꺼내 들어 뚜껑을 열고 한 주먹 꺼내어 주전자 안에다 솔 뿌려 넣는다.
그리고 제일 센 불로 올려놓곤 다시 힘들게 미닫이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의 구석에 자리한 앉은뱅이 화장대에 앉은 미선은 김이 서린 거울을 오른쪽에 놓인 티슈를 한 장 뽑아 스윽하고 닦는다.
닦은 티슈에는 먼지가 없다. 평소 미선은 남는 시간에 청소를 틈틈이 하기 때문에 먼지가 닦여 나올 리 없다.
기초화장을 하고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와는 맞지 않는 아주 밝은 파운데이션을 얼굴과 목에 꼼꼼하게 칠하였다.
화장대 서랍에서 립스틱을 꺼내어 솔에 묻히고 자신의 입술보다 더 도톰하게 라인을 넣어 마무리한다. 능숙한 화장,
수수해 보이던 미선은 화려하지만 싸구려 같은 느낌으로 변하였다.
나갈 채비를 다한 미선은 안방 문을 열고 나온다. 가스렌지에 올려진 주전자에서는 쉭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선은 가스렌지 불을 껐다. 조그만 밥상에다 좀 전에 만든 반찬과 냉장고에서 꺼낸 밑반찬으로 가득하다. 수저통에서
두 개의 숟가락과 두 짝의 젓가락을 꺼내 차려진 밥상 위에 올려놓는다. 부엌과 맞붙어 있는 현관에서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미선은 차려진 밥상을 한 번 걱정 어린 얼굴로 훑어보곤 현관문을 열고 밖에 나선다.
밖은 이제 해가 저물어 골목길이 낯설게 어두워진다. 조금씩 조금씩 골목길은 어둠에 잠기고 미선은 발길을 재촉한다.
마을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미선은 손목에 찬 시계를 한번 들여다보곤 미간을 찌푸린다.
"늦겠는걸..."
추위와 함께 찾아온 조바심으로 미선은 언 다리를 동동 굴린다. 5분이 지났을 즘 마을버스가 미선이 서있는
정류장으로 급하게 선다.
<끼익>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둔탁한 문여는 소리
<덜커덩>
마을버스에서 내리는 사람 중 주인집 남자인 준영이 내린다. 준영은 미선을 바로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출근하시나 봐요"
어둔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네"
대답하는 미선은 사이드미러로 언뜻 보이는 운전기사의 눈치를 본다. 그에 아랑곳없이 준영은 미선에게 말을 건다
"오늘은 출근이 좀 늦으시네요"
"네..."
"날씨가 많이 춥죠?"
"네"
미선은 더욱 초조해진다. 버스가 자신을 놔두고 떠날 것 같은 눈치다
"지욱하고 혜.."
창 사이로 운전기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넘어왔다.
"안 갈 거요!?"
"예..타요..죄송해요"
준영을 향해 목례를 하고 미선을 급하게 마을버스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은 미선은 밖의 준영을 향해 다시 목례를 한다.
밖의 준영도 씁쓸한 얼굴로 목례한다. 미선은 빨리 고개를 돌려 준영을 시선에서 떼어버린다
룸 샬롱 입구. 미선은 술이 거하게 취한 늙고 추한 늙은 손님의 팔을 어깨에 둘러매고 대리운전자에게 그 손님의 팔을 건넨다.
대리운전자는 인상을 찌푸리곤 뒷좌석으로 밀어 넣는다.
미선은 미소를 잃지 않고
"수고해 ...어딘지는 알지?"
"네 그럼"
그 사이 늙은 손님은 뒷좌석 창을 내려 흐트러진 모습으로 미선에게 손을 흔든다
"마담 담에는 꼭 나랑 2차 가는 거다 알았지?"
미선은 대답대신 손을 흔들며
"조심해서 가세요"
"엉? 대답 안해? 나 내린다."
대리운전자는 손님이 행동을 취하기전에 세게 엑셀레터를 밟아 출발하자 뒤에서 자세를 잡지 못한 손님은 뒷좌석 구석으로
꼬구라진다.
"꾸에엑"
대리운전자는 능청스레 뒤를 돌아보며
"어 손님 죄송합니다. 길이 얼었는지 미끄러졌네요 다치신 덴 없습니까?"
"너 이 자식"
미선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핸드백을 어깨에 맨다. 축 처진 어깨 때문에 핸드백은 수시로 미끄러져 내렸다.
웨이터와 같이 일하는 호스티스와 인사를 하고 나간다.
뒤에서 손님을 데리고 화장실에 가던 영미는 퇴근하는 미선에게 짓궂게 말을 건넨다
"지욱이, 혜원이 잘 지내?"
미선은 뒤돌아본다
"시간 나면 지욱이랑 혜원이 데려와라 보고싶다 응? 언니"
미선은 순간 눈빛이 살기를 띠며
"웃기지마"
영미는 움찔하며 손님과 가던 길을 간다
새벽3시가 넘어 미선을 태운 택시는 마을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린 미선은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내린다.
택시운전자는 인사치레로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유유히 택시를 몰고 좁은 비탈길을 벗어났다. 미선은 택시가 가는 뒷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다 커브길로 들어선 그때서야 눈을 때고 골목길을 향해 발을 옮긴다. 고개를 숙이고 익숙한 발걸음으로
걷는데 미선의 눈에 자신의 발보다 큰 샌달을 신은 남자의 발이 들어온다.
고개를 들어 샌달의 주인을 확인해보니 준영이다.
준영은 손목에 물건이 든 묵직한 검은 봉지를 매고 두 손을 잠바 안에다 꽂은 채 언 얼굴로 서있었다.
미선은 미안한 얼굴로 준영의 잠바를 잡고 끌다시피 앞서 나간다.
"안 이래도 되요"
"출근도 늦으시더니 퇴근도 늦으시네요"
미선은 잠바를 잡은 손은 더욱 힘을 주며 걸음을 재촉한다. 준영은 미선의 힘에 대항해 뒤로 무게중심을 옮겨 속도를 늦추었다.
"잠시만 요 이거 받아요"
준영은 검은 봉지를 미선에게 건넨다. 미선은 받아들고 봉지를 벌여 안을 들여다본다.
'야채 호빵'
"호빵 이네요"
"지욱이랑 혜원은 팥 호빵 안 좋아해요"
미선은 그 전날 산 전자렌지 옆에 놓여있을 팥 호빵이 떠올랐다.
"지욱이가 그래요?"
"그애들이 그런 말 할 애들이예요? 보면 알지..."
"...."
"춥죠 빨리 들어가요"
"...."
"지욱이랑 혜원이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나온다는 걸 간신히 말렸어요"
"고마워요"
미선은 뒤에 있는 준영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목소리만 듣고 대답한다
집에 들어온 미선은 안방부터 들어가 본다. 켜진 티비에선 하루종일 나오는 지겨운 유선광고방송이 나오고 있었고
지욱과 혜원은 나올 때부터 펴져 있는 이불 안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자고 있었다. 미선은 지욱과 혜원의 머리 밑에
베개를 넣고 흐트러진 이불을 펴서 드러난 아이들의 발을 덮어주었다. 화장대에 앉아 미선은 화장을 지우기 시작했다.
화장을 다 지웠을 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선이 현관에 나가보니 준영이 서있었다.
"무슨 일 이예요?"
"불꽃놀이 세트예요"
"이건 왜..."
"내일...아니 오늘 크리스마스잖아요. 혜원이가 크리스마스에 엄마랑 불꽃놀이하고 싶다고 그러더라 구요 그래서 집에 있던 거라"
'눈에 보이는 거짓말...'
"늘 신세만 지네요"
"아이들..자나보네요"
"예..."
"그럼 내일 아이들과 아니 오늘 즐겁게 보내세요"
미선은 손에 들려진 불꽃놀이세트를 내려다보며
"출근하기 전에 불꽃놀이를 하면 날이 밝아서 아이들이 재미없어 할텐데 준영씨가 같이 해주면 안될까요?"
미선은 준영의 눈치를 살피는데 준영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자신 뒤에 있다는 걸 알아채고 뒤를 돌아보니 아이들이 깨어
나와있었다.
"으음...엄마?"
"깼니?"
준영은 아이들에게 가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우리 나가서 불꽃놀이 할까?"
지욱과 혜원은 잠에 덜 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다세대 주택 옥상, 어째보면 단란한 가족 같은 분위기의 네 사람. 아이들은 양손에다 불꽃을 쥐고 천사가 된 마냥 양팔을
펄럭이면 날개 짓을 해대었다. 불꽃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꽃의 수명이 다할 때마다 아이들은 준영에게 달려갔다.
준영은 새로운 불꽃에다 불을 붙여 아이들의 손에 다시 쥐어주고는 아이들이 뛰어 노는 모습을 즐거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미선은 그런 준영을 흐뭇한 얼굴로 보았다. 그때 미선의 얼굴에 차가운 느낌이 확 와 닿는다. 미선이 차갑다고 말하기
전에 준영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소리로 외친다.
"눈이예요"
미선은 얼굴에 와 닿은 물질이 눈이란 걸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이였다. 준영은 불꽃놀이에 정신을 뺏긴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하늘에 대고 손을 모아서 기도를 하는 거야"
지욱이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준영에게 질문한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기도하는 거예요?"
"그럼~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릴 확률이 얼마나 낮은데 이런 특별한 날 아니면 언제 소원 빌어 보겠니"
미선을 내려다보며
"같이 소원 빌어요."
"전 됐어요 빌 것도 없고"
"설마.. 사소한 것이라도 하늘에 부탁해봐요"
미선은 하는 수 없이 어리석은 짓이란 걸 알면서도 그들과 같이 두 손을 모아 하늘에 대고 기도했다
"뭐 빌었어?"
준영은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지욱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내년에도 엄마랑 이렇게 불꽃놀이 하게 해달라고요"
혜원이도 이어
"전 바비인형 갖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뭐 빌었어요?"
한참을 조용히 있더니 힘들게 미선은 입을 열었다
"제발 문 열 때 소리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준영은 곰곰이 생각하다 박장 대소 하며 웃어댔다
"그건 하늘에다 빌 소원이 아니라 주인집에 빌 소원 아닌가요? 하하하하"
"듣고 보니 그러네요. 주인집아저씨 문소리 안 나게 해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지욱과 혜원도 미선의 옆에 붙어 두손 모아 기도했다
"제발 문소리 나지 않게 해주세요"
아이들의 목소리는 아주 진지했다.
준영은 마치 사이비 교주처럼 두 손을 아이들 머리에 얹으며
"너희들의 기도를 접수했노라 내일 즉시 이루어 질 것이다"
그렇게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그들은 눈을 처음 본 강아지처럼 신나게 옥상 위를 뛰어다녔다.
미선은 잠에서 깨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5시를 넘어가고 창 밖의 해는 저물어 창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미선은 얼른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았다. 나란히 잠든 지욱과 혜원이 몸부림을 치자 미선은 다시 이불을 펴
곱게 덮어주었다. 미선은 미닫이문을 열어 부엌으로 나갔다. 미닫이문에선 어떤 잡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열렸다. 미선은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어 씻고, 자르고, 볶고, 끓이기 시작했다. 그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선은 조심히 걸어 현관문을 열었다. 준영이 문앞에 서있었다.
"어우 배고파 맛있는 냄새가 나는걸?"
미선은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미안 밥 먹으려면 좀 기다려야 되는데...이제 일어났거든"
준영은 미선 앞에 무릎꿇고 앉아 미선의 배에 귀를 갖다댄다.
"요 녀석 얼마나 게으른 놈인지 매일 엄마보고 자재요"
"그러게 요즘 잠이 너무 늘었어"
준영은 미선의 입에다 살짝 뽀뽀하며
"사랑해~"
미선의 배에다가도 뽀뽀하며
"우리 애기도 사랑해"
안방 문이 열리며 지욱과 혜원이 울먹이며 나온다
"우리는 우리는~~"
"에구~우리 지욱이도 혜원이도 사랑해~"
준영은 아이들에게 뽀뽀세례를 퍼붓는다
"아 따거! 아빠 따가워~~그만해~~"
첫댓글 마음이따뜻해지는단편이네요!!잘읽고가요~잘쓰셨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