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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지역에서 모두 38기의 철 생산 또는 철제품 제작활동과 관련된 노적이 확인되었으며 노의 내벽과 바닥면의 구조는 고대 제철로의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유적은 낮은 구릉의 작은 골짜기를 이루는 경사지를 이용하여 한정된 공간에 다양한 노적이 밀집해 있었다. 또한 제련에서 단야까지 일련의 공정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규모와 형태에 있어서도 장방형의 대형 상형로를 비롯하여 원형로, 방형로, 장방형로 등 다양하게 조사되었다.
노의 구조적인면에서는 경사지를 이용하여 간단한 기초시설을 한 지하식과 반지하식이 확인되었다. 특히 A-4, 8, 9호와 B-4, 5호 노에서는 외곽에 ㄷ자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내부에 노를 축조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연대는 노적과 동일한 시기의 퇴적층에서 출토된 고배, 개배등 토기류를 통해볼 때 대체로 3세기터 5세기까지 이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철 생산활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유래 및 설화
진천 석장리유적은 고대국가 형성과정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철생산의 양상을 밝히는 중요한 유적으로서 국립청주박물관에 의해 1994년에처음 발굴,조사되었다.
층별형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충청도(忠淸道)에 "신라진평왕시(新羅眞平王時) 만노군태수(萬弩郡太守) 김서현지처만명(金舒玄之妻萬明) 임신20월생자(妊宸20月生子) 명왈유신(名曰庾信) 장태어현남15리(藏胎於縣南十五里) 화위신(化爲神) 인호태령산(因號胎靈山)자신라시(自新羅時) 치사우춘추강향행제(置祠宇春秋降香行祭) 고려인이불혁(高麗因而不革) 본조태종무인(本朝太宗戊寅) 영소재관행제(令所在官行祭) 속칭태산(俗稱胎山)"이라하여 신라(新羅)때부터 장군의 태(胎)가 묻힌 태령산(胎靈山) 아래 사당을 건립하고 국행제(國行祭)를 지내오다가 조선태종(朝鮮太宗)때부터 관행제(官行祭)로 치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뒤 임진(壬辰) 병자(丙子) 양란시 병화를 입어 폐허가 된것을 철종(哲宗) 2년(1851) 백곡(柏谷) 가죽리(嘉竹里) 죽계사(竹溪祠)자리에 계양모(桂陽廟)를 건립하였으며 1926년 도당산(都當山)에 길상사(吉祥詞)를 재건하고 1975년에 정화사업을 실시하여 자금의 규모를 갖추었다 .
본전은 "흥무전(興武殿)으로 콘크리트조 기와집, 정면5간, 측면2간, 주심포(柱心包)8작집인데 그 안에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으며 바깥 뜰에는 1957년 세운 "흥무대왕신성비(興武大王神聖碑)<이 선근(李宣根)이 글을 짓고 김만희(金萬熙)씀>와 안뜰에는 1976년에 세운 "김유신장군사적비(金庾信將軍事蹟碑)<이 은상(李殷相)글 김 충현(金忠顯)> 그리고 입구에는 같은해에 세운 "길상사중건사적비"(吉祥祠 重建事蹟碑) <조 건상(趙建相)글. 이 상복(李相馥)씀>가 있다.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만노군태수(萬弩郡太守) 김서현(金舒玄)의 아들로 진천(鎭川)에서 출생. 진평왕(眞平王) 31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娘臂城)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押梁州)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善德女王)때 상장군(上將軍)이 되었고 진덕여왕(眞德女王)때는 백제(百濟) 12성을 함락하여 상주 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오르고 무열왕(武烈王) 7년 상대등(上大等)으로 당군(唐軍)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하고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되었으며 한수(漢水) 이북의 고구려땅을 수복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였고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이원 아트 빌리지
건축가 원대연 교수가 이월면 미잠리에 정착해 살면서 만든, 미술관을 주제로 한 복합 문화 시설이다.
5천여 평 규모에 미술관과 아트숍, 아틀리에, 세미나실, 휴게실 등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멋들어진 소나무와 이국적인 스타일의 건물, 그리고 너와 지붕의 조화가 환상적이며, 건물과 건물 사이에 미로처럼 만들어진 골목길과 정원을 걷는 느낌도 좋다. 문화 공연과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야외 행사장이 있으며, 책을 읽으며 차를 마실 수 있는 휴게실도 있다.
매월 원대연 교수의 <세계 건축 여행> 특강과,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2005년 한국건축가협회상(베스트 7)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설안내
크고 작은 6개의 방으로 되어 있는 전시실
세미나 및 강의 시설과, 소규모 공연이 가능한 목련뜰 중정
아트숍과 공방 그리고 골목길
야외 공연 및 다목적 행사가 가능한 야외 행사장 (500명 수용 시설)
차와 음악 그리고 책이 있는 휴게실
백여 종이 넘는 야생화와 소나무숲 그리고 정원과 사잇길
운영안내
관람 시간 : 오전 10시 30분 ~ 오후 5시 30분
입장료 : 일반 5,000원 / 어린이(12세 이하) 3,000원 / 단체 (20인 이상) 20% 할인
김유신탄생지 및 태실
나이 15세 되던 609년(진평왕 31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상장군(上將軍), 무열왕 7년(660년)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군(唐軍)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668년)하고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되었으며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다시 찾아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여 흥무대왕 으로 추봉되었다.
지금의 계양(桂陽) 마을 입구에 장군터(태수 관저가 있던 곳)라 불리워지는 곳에 1983년에 유허비(遺墟碑)를 건립하였으며, 이 곳에서 북동방향 500m 지점에는 태수 관저에서 사용했다는 우물터 연보정(蓮寶井)이 현존하고 있으며 무술 연습과 말달리기를 했다고 전해오는 치마대와 태실은 해발 461.8m의 산정상에 원형으로 석축이 있고 그 주위에 경사면을 에워싼 길이 216m, 높이 1-1.3m규모의 석축이 산성처럼 드리워져 있으며, 우리 나라 태실의 최고형식에 속하는 중요 유적이다.
유래 및 설화
김서현(金舒玄) 장군은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장군(將軍)으로 가락국(駕洛國)의 시조(始祖)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세(世)손이며 장군(將軍) 무력(武力)의 아들이고 김유신(金庾信)의 아버지이다. 일명(一名) 소연(消衍)이라고도 하였으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시조(始祖)인 가락국(駕洛國)의 마지막 구해왕(仇亥王)(혹은 구형(仇衡)이라고도 함)이 532년(新羅 法興王19)에 나라를 들어 신라(新羅)에 부항(附降)하고, 아버지 무력(武力)은 신주(新州)(廣州)도(道) 행군총관(行軍總管)이 되었으며, 554년(진흥왕 15)에 백제(百濟)의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沃川)을 공격하여 왔을 때 적을 막아 성왕(聖王)을 전사(戰死)시켰으며 적군 일만여 급을 베는 공을 세웠다. 김서현(金舒玄)은 벼슬이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粱州諸軍事)에 이르렀으니 소판(蘇判)은 잡찬이라고도 하여 진골(眞骨)만이 받을 수 있는 직위로 신라(新羅)에서 가락국(駕洛國)의 왕실(王室)에 진골(眞骨)의 대우를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량주제군사(大梁州諸軍事)란 중국식(中國式)인 벼슬 이름으로 이는 금관가야(金官伽倻)를 포함한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일대의 지방군주(地方軍主)를 말하는 것으로 그의 본 고향의 군정관(軍政官)이라 하겠으니 정책적인 배려라고 할 것이다.
처음에 김서현(金舒玄)이 진흥왕(眞興王)의 아우인 입종(立宗)의 아들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우연히 기회에 길에서 만나 눈짓으로 꾀어 중매도 없이 결합하였다. 金舒玄이 만노군(萬弩郡)(鎭川) 태수(太守)가 되어 만명(萬明)과 함께 떠나게 되었다. 숙흘종(肅訖宗)이 그제야 비로소 자기 딸이 야합한 것을 알고 딸을 미워하며 다른 집에 가두고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벼락이 그 집 문간을 때리니 지키는 사람이 놀란 틈을 타서 만명(萬明)은 들창문으로 빠져나와 드디어 서현(舒玄)과 함께 만노군(萬弩郡)으로 갔다. 혈통(血統)을 존중하는 엄격한 신라왕실(新羅王室)이었지만 이 사랑은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것으로 인연하여 서현(舒玄)이 높은 벼슬과 중한 직책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맡게 된 것도 이 뒤의 일이라고 하겠다. 김서현(金舒玄)이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熒惑)(火星)과 진성(鎭星)(土星) 두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만명(萬明)도 신축일(辛丑日) 밤에 한 동자(童子)가 금갑(金甲)을 입고 구름을 타고 당중(堂中)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 후에 임신하여 20개월만에 아기를 낳았다. 이름을 지으려고 할때 부인(夫人)에게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庚辰日) 밤에 길몽(吉夢)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경진(庚辰)으로 이름을 하여야 하겠다.
그러나 예법에 일월로 이름을 짓지 않는다 하니 지금 경(庚)은 유자(庾字)와 서로 같고 진(辰)과 신(信)과 소리가 서로 가깝다. 더구나 옛날 어진 사람에게도 유신(庾信)(中國 北周의 사람)이라고 했으니 어찌 그렇게 이름하지 아니하랴?"하고 드디어 이름을 유신(庾信)이라 하였다.
지금 진천(鎭川)에는 김유신(金庾信)의 태(胎)를 묻은 태령산(胎靈山)(吉祥山)이 있다. 뒤에 양주총관(良州總管)이 되어 여러번 백제(百濟)와 싸워 공을 세우고 629년(眞興王 51)에는 고구려(高句麗)의 낭비성(娘臂城)을 함락시켰다. 이 때에 아들 김유신(金庾信)도 종군(從軍)하였다.
김서현(金舒玄)의 딸 문희(文姬)는 뒤에 김춘추(金春秋)의 부인이 되었으니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비(妃)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첫댓글 가볼만한 곳이 많이 있네요.
삼국시대 흐름과 사진 내용들 너무 훌륭하고 감사합니다 ..... 수고많으셨습니다.... 가보고 싶네요....
수선화님 우리 여행 갈 때 같이 가셔요.
모두 가보고 싶은 곳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