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이 있습니다.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리시라” 사도신경에 의하면, 죽음은 심판이 아닙니다. 죽음을 저주라 단정할 수 없고, 살아있는 걸 복이라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 날과 그 때’에 ‘산 자’도 심판받고, ‘죽은 자’도 심판받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두렵습니다. 징벌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25:12)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5:30) “영벌에.. 들어가리라”(마25:46)
심판이라는 말 자체가 두려움을 줍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엄마 뱃속의 아이가 ‘그 날과 그 때’가 되면 양수가 터지는 사건을 경험하듯이, 모든 사람이 ‘그 날과 그 때’가 되면 심판을 경험합니다. ‘그 날과 그 때’ 있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의 시간은 인생의 깃발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깃발을 잡기 위해 가야합니다. 깃발을 잡자면 깃발을 보고 가야합니다. 바울도 깃발을 보고 가겠다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0~14) 깃발, 그것을 잡으려고 바울은 달려갑니다. 심판의 ‘그 날과 그 때’에 저주가 아니라 상을 받기 위하여 바울은 달려가겠답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잘 압니다. 토끼가 거북이보다 빠른 게 현실이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거북이가 토끼를 이깁니다. 이야기 속에서도 거북이는 토끼보다 느리지만, 깃발을 잡는 이는 거북이입니다. 토끼는 거북이를 보고 달렸고, 거북이는 깃발을 보고 걸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뒤돌아보면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깃발을 향하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심판의 ‘그날과 그때’를 깃발 삼아 날마다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깃발에는 문양이 있습니다. 태극기에 음양과 사괘가 있듯, 일장기에 태양이 있듯, 성조기에 별이 있듯, 깃발에는 문양이 있습니다. 심판의 ‘그날과 그때’ 잡게 될 깃발에도 문양이 있습니다. 우리가 잡아야할 깃발에는 어떤 무늬가 그려져 있을까요?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그려져 있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혹, 우리가 심판의 ‘그날과 그때’를 두려움으로 여기고 있다면, 이유가 있습니다. 심판의 ‘그날과 그때’가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있은 곳으로 가는 사람에겐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8) 심판의 ‘그날과 그때’를 향하여 달려가는 이에겐 두려움이 자리 잡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그려진 깃발을 향해 달려가는 자에겐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뭐, 지극히 작은 자를 깃발삼아 가는 거 좋은데, 이 세상에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너무 많고, 아픈 사람도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 세상을 구원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는 건, 그리스도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당신에게 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를 사랑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를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위대한 사업을 수행하는 것보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큰 사역을 해내는 것보다, 위대한 사랑을 품기가 어렵습니다. 길바닥같이 수많은 발길에 밟혀 굳어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가시를 잔뜩 품고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어떤 것도 뿌리내릴 수 없는 돌짝밭 같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그런 사람 한 명을 사랑한다는 것, 사람이 해내기 어렵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통해 보암직한 열매를 경험하기란 난망한 일입니다.(마13:3~7) 그래서 사랑에는 ‘고난’이 따릅니다.(딤후1:8)
어차피 인생은 고생입니다. 고생 아닌 인생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겪는 고생말고, 스스로 고난을 선택하면 어떻겠습니까? 옛날 죄를 범한 유대인들이 어쩔 수 없이 흩어져 난민이 되었다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경계를 넘어가는 제자가 되면 어떻겠습니까?(마28:16~19) ‘고생’을 겪기보다는 ‘고난’을 받고, 국경 밖으로 쫓겨 가는 ‘난민’보다는 경계를 넘어가는 ‘선교사’가 되는 것이 어떻습니까?
날마다 죽는 것 같은 ‘고난’을 받고, 날마다 경계를 넘나드는 ‘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고난이 있어 날마다 죽음만 같습니다. 죽음같이 힘들고, 죽음같이 어찌할 수 없는 일상 속에 있다면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 있는 겁니다. 생기발랄함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우물 속에 빠져있는 것 같은 우울함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물 속 개구리에게도 하늘은 보입니다. 우물 속 개구리가 보는 하늘이 작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바람이 불고, 하늘에 별이 움직이고, 하늘에 새가 납니다. 바람도 별도 새도 경계를 넘나드는 ‘제자’를 닮았습니다. 우물 속 개구리에게도 하늘은 흐릅니다. 심판의 ‘그날과 그때’를 향하여 흐르고 있습니다. 성령의 흐름 속으로 나를 던질 때, 구원받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