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레판토 해전의 배경
1537-38년 사이에 오스만 투르크와 베네치아를 주축으로 하여 스페인, 포르투갈, 말타, 피렌체 등의 기독교권 연합 함대가 지중해 동부의 해상권을 두고 Preveza에서 맞붙었다. 기독교 연합함대는 갤리선 308척을 포함하여 함선 600여척과 병력 6만명이 참전하였고, 오스만 투르크 함대는 갤리선 122척과 2만명의 병력이 참가하였다. 프레베자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크에게 기독교 연합 함대가 패배하자 베네치아는 매년 23만 6000ducat의 금화를 무역을 보호해주는 명목으로 오스만 투르크에 납부한다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지중해의 제해권은 오스만 투르크에게 넘어갔다.
합스부르크가의 Karl 5세(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로데스 섬에서 축출당한 St. John 기사단에게 말타 섬을 주었고,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아프리카 북부의 트리폴리에 대한 통치권도 주었다. 그는 이들을 이용하여 기독교 국가들의 생명선인 시칠리 해협을 지키도록 하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슐레이만 황제는 말타 섬을 장악하기 위해 1565년 세인트 존 기사단을 육상과 해상에서 공격하였다. 그러나 세인트 존 기사단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으로부터 원정군이 도착할 때까지 잘 견딤으로써 슐레이만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66년 9월 슐레이만 황제가 사망하자 쌀림 2세가 제위를 이었다. 쌀림 2세는 키프러스에 대해 관심이 컸다. 키프러스는 원래 베네치아의 소유였는데, 베네치아는 이 섬을 보유한다는 명목으로 오스만 투르크에 세금을 내고 있었다. 쌀림 2세는 바로 이 키프러스 섬을 소유하기를 원하고 있었고, 1565년 말타 섬에서의 패배를 만화하고 싶어했다. 1569년 9월 13일 키프러스 섬에 있던 베네치아의 화약 공장이 폭발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베네치아 함대가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쌀림 2세는 키프러스 섬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여 1570년 4월 베네치아에 사절을 보내 키프러스 섬이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였으나, 베네치아는 이 주장을 일축하였다. 투르크는 이에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하여 1570년 8월 키프러스의 Nicosia와 Famagusta를 점령하였다. 베네치아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기독교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출전 : 김주식, <서구해전사>(연경출판사, 1997)
2. 레판토 해전의 경과
당시 베네치아는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정 체제를 유지하던 다른 국가들로부터 기피의 대상이었고, 이탈리아의 해양도시국가들은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의 원조 요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만 교황 Pius 5세가 사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독교 국가의 군주들에게 성전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 결과 로마 교황과 스페인,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반투르크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신성동맹국은 1570년 늦여름 크레타 섬에 함선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기독교 연합함대는 초기에는 지휘 계통이 통일되지 못하여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곧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인 Don Juan(스페인식으로는 돈 후앙)을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지휘 계통을 통일하였다. 돈 후앙은 24살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무어인의 반란을 진압할 때 스페인의 함대를 지휘한 경험을 쌓은 바 있었다.
기독교 연합함대는 1570년 8월 25일 시칠리 섬의 Messina에 집결하였다. 총 병력은 육군 3만명과 해군 5만명이었고, 함선은 갤리선 208척, Gallias선 6척, Galleon선 26척, Frigate과 Brigantine선 76척 등 모두 316척이었다. 이 함대는 3개 전단으로 나누어졌다. 갤리선 90척과 갈레온 등 대형범선 24척, 브리간틴 50척으로 구성된 스페인 함대는 Giobanni Andrea Doria가 지휘를 맡았고, 갤리선 106척, 갈레아스선 6척, 갈레온 2척과 프리깃 20척으로 구성된 베네치아함대는 Sebastian Venierro가 맡았다. 그리고 갤리선 12척과 프리깃 6척으로 구성된 교황 함대는 Antonio Colonna가 지휘를 맡았다.
당시 스페인 왕이자 오스트리아의 왕이었던 펠리페 2세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참전하기는 했지만, 자국의 함대가 베네치아를 원조하는데 동원되기 보다는 아프리카 북부의 Barbary 해안의 무어인 해적을 공격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스페인 함대는 가급적이면 전투를 회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돈 후앙은 이에 반대하였고, 연합 함대의 청년 귀족들과 병사들도 돈 후앙을 지지하였다.
연합함대는 9월 15일 메시나를 출항하여 Corufu로 향하였다. 그런데 베네치아의 노장인 Venierro 휘하의 함대에서 스페인 보병과 베네치아 해군 사이에 난동이 발생하였다. 베니에로가 스페인 병사 3명을 즉결심판으로 교수형에 처하자, 돈 후앙은 이를 베니에로가 자신의 권한을 침해한 것으로 간주하여 지휘관 회의에 베네치아인을 참석시키지 않았다. 결국 베니에로가 돈 후앙에게 지휘권을 침해하지 않겠다고 확약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한편 투르크 함대는 메시나에 집결중인 기독교 연합함대를 방해하기 위해 키프러스를 함락시킨 뒤 아드리아해로 항진하였다. 투르크 함대는 아드리아해 일대를 약탈한 뒤 베네치아에 근접하였으나, 결국 코린트만으로 귀항하고 말았다.투르크 함대는 연합 함대의 움직임에 대항하기 위해 9월 27일까지 함대를 레판토로 집결시키도록 했다. 투르크 함대는 갤리선 210척, 갈레온 40척, 소형함선 20척과 병력 7만 5000명으로 구성되었다. 투르크 함대는 무어인, 그리스인, 시리아인, 이집트인 등으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함대에 비해 소속감과 동질감 면에서 결속력이 강하였다. 투르크의 함대사령관은 Ali Pasha였다. 알리 파샤는 자신이 중앙 전대를 지휘하고, 우익은 Mahomet Sirocco에게, 그리고 좌익은 Uluch Ali에게 맡겼다.
10월 7일 양 함대는 Cape Schropha(후에 피의 곳으로 불림) 인근의 레판토에서 조우하였다. 연합함대는 3개 전대로 나뉘어 중앙 전대는 갤리선 64척으로 구성되어 돈 후앙이 직접 지휘하였고, 갤리선 54척으로 구성된 우익 전대는 도리아가, 그리고 갤리선 53척으로 구성된 좌익 전대는 Barbarigo가 지휘하였다. 그리고 갤리선 30척은 예비전대로서 후위에 배치하여 Santa Cruz가 맡았고, 갈레아스는 중앙과 좌익 전대 앞에 각각 2척씩 배치하고, 나머지 2 척은 우익과 후위 전대 사이에 배치시켰다.
이에 맞선 투르크 함대는 갤리선 95척으로 구성된 중앙전대는 알리 파샤가 직접 지휘하였고, 갤리선 93척으로 구성된 좌익 전대는 알 리가, 그리고 갤리선 54척으로 구성된 우익 전대는 시로코가 각각 지휘하였다.
10시부터 좌익전대인 연합함대의 바바리고와 투르크의 우익전대인 시로코가 맞붙었다. 바바리고는 진형을 흩뜨리지 않으면서 1시간동안 격전을 벌였으나, 바바리고가 눈에 화살을 맞았고, 지휘권을 이어받은 그의 조카도 전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바리고 전대는 시로코의 전대를 해안으로 밀어 부쳐 시로코에게 중상을 입혔다. 지휘관을 잃은 시로코 전대는 지리멸렬하였다. 레판토 해전에서 양 함대가 입은 손실의 대부분은 이 전투에서 발생하였다.
중앙 전대간의 전투는 약 30여분 뒤에 시작되었다. 돈 후앙이 타고 있던 기함 Realegh호의 현측으로 알리 파샤가 지휘하는 투르크 함대가 돌진해 왔다. 연합함대의 레알레흐 호가 알리 파샤에게 점령되려는 찰나에 콜로나의 기함이 알리 파샤의 함선에 소총을 난사하였다. 연합함대는 위기를 벗어나자 알리 파샤의 함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알리 파샤를 전사시켰다. 이에 투르크의 중앙 전대도 많은 피해를 입은 채 후퇴하고 말았다.
한편 외해 쪽에서는 도리아와 울루치 알리간에 복잡한 양상으로 전투가 전개되었다. 도리아는 울리치 알리의 행동에 따라 외해로 크게 반원을 그리면서 우회하였다. 이는 연합함대의 좌익과 중앙 전대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울리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리아 전대의 주력 부대인 말타 기사단의 함선과 베네치아 갤리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말타 기사단은 울리치의 갤리 7척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아 3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사망하였다. 이때 후위의 예비대를 지휘하고 있던 산타 크루즈가 도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합세하였으며, 얼마 가지 않아 돈 후앙의 함대가 도착하였다. 그러나 울리치는 말타 기사단의 깃발을 휘날리며 프레베자로 후퇴하였다. 출전 : 김주식, <서구해전사>(연경출판사, 1997)
3. 레판토 해전의 결과
레판토 해전에서 기독교 연합함대는 8만 4000명 가운데 1만 5000명이 사망하였고, 갤리선 12척을 상실했고, 갤리선 1 척은 투르크 군에게 나포되었다. 이에 대해 투르크 군은 총 병력 8만 8000명 중 3만명이 전사하였고, 8000명이 포로가 되었고, 투르크 함대의 노수 1만 5000명이 기독교도 노수들이 해방되었다. 투르크 함대의 갤리선 113척이 침몰되었고, 117척이 나포되었다.
기독교 연합함대가 투르크 함대를 패퇴시킬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1) 교황의 노력과 열의에 자극받아 여러 국가가 기독교라는 공통된 믿음 아래 집결하였다. 2) 돈 후앙의 탁월한 지도력. 레판토해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갈레아스선 6척은 베네치아 소속이었다. 돈 후앙은 갈레아스는 각 전대의 3/4 마일 앞에 각각 2 척씩 배치하였고, 각국의 갤리선도 함께 편성하였다. 이는 반복하기 쉬운 각국의 병사들을 단결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3) 예비전대를 적절히 활용했다.
한편 투르크 함대가 패배한 원인도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1) 연합 함대의 갈레아스로부터 포격에 압도당함으로써 초전에 혼란에 빠졌다. 2) 지휘관이 절대적인 존재였던 투르크로서는 지휘관의 전사로 함대 전체가 지리멸렬했다. 3) 울루치 알 리가 초전의 기동을 오판하여 도리아의 해동에 넘어감으로써 중앙 전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알리 파샤를 구원할 수 없었다.
레판토 해전은 갤리선을 주력선으로 한 최후의 해전이었고,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벌인 최후의 해전이었다. 이 해전이 일어난 지 17년 뒤에 일어난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영국간에 해전에서는 범선과 함포간의 전투가 주류였다. 그러므로 레판토 해전은 해전의 역사상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가름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은 Cervantes는 “이 전투로 전 세계는 해상에서 투르크의 적수가 없다는 말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얻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쌀림 2세는 레판토 해전에 대해 “이교도가 수염을 태운 것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투르크는 유럽의 기독교권에서 철수하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출전 : 김주식, <서구해전사>(연경출판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