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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인생》 연재원고 3회 180228 送稿 200자 48매
망국의 역사 위에서 (3)
이 원 규
‘조선의 몬테크리스트 백작’ 이갑
구한말의 풍운아
19세기 초 대한제국이 망국의 벼랑으로 떨어져 갈 때 군복 입은 무관들이 어떤 길을 갔던가? 그들이 하나같이 나라를 살리려 몸을 던졌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 일본에 굴종하지 않고 한 몸을 던진 대표적인 무관이 이갑(李甲 1877~1917)이다. 그는 생애가 파란만장해 ‘조선의 몬테크리스트 백작’으로도 불린 풍운아였다
이갑은 고종황제 폐위에 반대해 친위쿠데타를 계획한 바 있고 1907년 해산된 군대를 부활시키려 분투했고 망명 후 해외에 사관학교를 세우려 노력한 일이 있지만 홍범도 · 김좌진 · 김경천처럼 무장투쟁에 나서 독립군부대를 지휘하지는 않았다. 독립운동은 정치운동, 교육 계몽운동 분야에 치중했다. 그러나 민족 모두로부터 가장 큰 신뢰와 존경을 받은 애국지사였다.
그는 이종혁 · 김석원 · 홍사익 · 지청천(본명 지석규) · 이응준 등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들의 십여 년 선배이자 스승이며 우상이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지도자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일본군 육군 중장까지 진급하고 태평양 전쟁 패전 후 전범이 되어 사형당한 홍사익, 광복군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대한민국 초대 육참총장을 지낸 이응준을 쓰려면 먼저 이갑을 이야기해야 한다.
짧았으나 굵었던 생애와 망명투쟁
이갑은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 출신이다. 본명은 휘선(彙璿)이고 아호는 추정(秋汀)이다. ‘이갑’은 일본 유학시절 군인을 지망할 당시에 바꾼 이름이다.
소년시절 그는 매우 영특했다. 만 11세 때인 1888년(고종 25) 무자 식년시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1874년생 만 응시할 수 있는데 나이를 속여 과거시험에 응시해 우등 합격한 것이다. 그것은 재앙을 몰고 왔다. 민 씨 일족으로 당대의 세도가였던 평안감사 민영휘(초명이 영준이어서 민영준이라고도 한다)는 이갑의 부친을 체포해 온갖 악형을 가하고 40경(耕)의 토지를 빼앗았다. 1경은 5천 평이니 20만 평에 해당된다. 부친은 고문의 후유증과 홧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집안은 몰락했다.
이갑은 가출해 유랑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한성으로 와서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했다. 민족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자강의식과 함께 정치의식에 눈을 떴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었을 때 죽마고우로서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형섭의 편지를 받았다.
김형섭의 권유로 일본행을 감행, 고학하며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한 끝에 육군사관학교 예비학교인 세이조학교(成城學校)를 다녔다. 1902년 12월, 26세 늦은 나이로 일본 육사에 입학했다. 김응선 · 김기원 · 유동열 등 7명의 조선인 동기생들이 관비유학생으로 지명되면서 운 좋게 그도 관비유학생이 되었다. 그들은 육사 15기, 이갑이 리더였다. 이갑은 1903년 11월 일본 육사를 졸업해 도쿄 주둔 근위사단 보병 제1연대에서 견습사관으로 복무하고 러일전쟁에 종군하여 근대 전투를 경험하게 되면서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대한제국 보병 참위(오늘의 소위와 같음)로 임명되었고 국내로 돌아와 대한제국 무관학교 학도대를 거쳐 무관학교의 예비과정인 육군유년학교 생도대장이 되었다. 그는 동기생들과 함께 썩어빠진 군부를 개혁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었고, 효충회(效忠會)라는 사조직을 만들어 강하게 결속했다. 그러나 조직명보다는 ‘8형제파’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갑은 처음부터 일본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장차 조국을 일본처럼 발전시켜야 한다고 여기며 롤 모델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승리 후 막강해진 일본과 반대로 점점 초라해지는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는 한성(서울) 원동(苑洞)에 살았는데 그의 집에 매일 저녁 우국지사들이 모여 토론을 벌였다.
1905년 여름 일본에 시찰하러 갔다. 일본은 그가 비범한 장교임을 알고 회유책으로 훈장을 주었다. 9월에 귀국해서는 정위(正尉 대위)로 승진했다. 이 무렵 이갑은
“이 원수를 갚아 달라”고 말하고 운명한 아버지의 한을 풀기로 결심했다. 육혈포(六穴砲)의 장탄구 6개에 실탄을 장전했다.
육혈포는 서부영화에 나오는 6연발 권총을 일본이 복사 제작한 무기다. 메이지(明治) 26년(1893)에 개발된 권총이라 하여 ‘26식 권총’이라 했는데 구경 9mm, 길이 23cm, 무게 904g, 유효사거리 100m의 제원으로 일본 포병공창이 제작했다. 1912년 <피스톨 강도>라는 일본 희곡이 조선 땅에서 번안되어 <육혈포 강도>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어 히트를 쳤다. 이후 육혈포라 불렀다. 100년이 지나 몇 해 전 상영된 <육혈포 강도단> 제목에도 사용되었다.
이갑은 새벽에 장교 정복을 차려입고 민영휘의 집을 찾아갔다. 민영휘는 정1품 보국(輔國)이며 부장(副將 오늘의 육군소장)이라는 군대 계급도 갖고 있었다.
“대감, 평안감사 시절에 빼앗긴 우리집 전답을 찾으러 왔습니다.”
민영휘가 거부하자 육혈포를 겨누었다. 민영휘는 혼비백산하여 옆방으로 피했고 중국 상하이로 피신했다. 이갑은 상하이로 쫓아갔다. 빼앗은 토지를 돌려줄 것, 그 후 수확한 곡물을 현금으로 계산해 지불하고 이자도 붙일 것, 조국에 속죄하는 뜻으로 학교 등의 사회사업을 할 것 등을 요구했다.
결국 모두 받아내고 3만 원을 덤으로 받았다. 그것으로 조용히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고 오성학교를 세웠다. 오성학교는 지금 광신정보고등학교로 맥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그렇게 재산을 쾌척했다,
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는 막대한 재산을 복수하는 일과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는 일에 썼다. 이갑은 나라를 위해 썼으니 더 윗길이며 노블리스 오블리제이다. 이런 의로운 청년장교에게 누가 감동하지 않으랴. 지도자들은 입이 마르도록 그를 칭송했다. 청년들은 우상으로 여기고 그를 따르려 했다. 군마를 타고 거리를 달리면 모두가 박수를 쳤다.
마침《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번안한 이상협의 소설《해왕성》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도쿄 유학생들은 원작 제목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조선의 몬테크리스트 백작’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도산 안창호와의 우정
그해(1905년) 겨울에 제2차 한일협약, 이른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참령(오늘의 소령)으로 승진한 이갑과 8형제파는 군대의 요직에 앉았다. 그들은 고종황제의 강제양위에 반대해 친일파 대신들을 격살하는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실패해 주모자는 처형당하고 나머지는 투옥되었다. 그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군대가 해산당했다. 석방되어 나왔을 때는 망국이라는 절망의 벼랑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갑은 비장한 각오로 합병만은 막아보려고 분투했다.
가슴속에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들끓고 있었다. 박은식 · 정운복 · 유동열 등 평안도, 황해도 출신 인물들과 함께 서우학회를 창립하여 구국교육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서우학회는 이동휘 등 함경도 출신들의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 서북학회가 되었다. 그에게는 민영휘에게서 돌려받은 재산이 있었다. 그것으로 서북학회 조직을 키우고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세웠다.
그 후 도산 안창호가 주도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들어갔다. 도산은 1878년생으로 이갑보다 한 살이 적다.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니 평안도 출신끼리라는 의리도 있었겠지만 신민회를 결성하며 의기투합해 둘도 없는 동지이자 친구가 되었다.
이갑은 정희(正熙)라는 이름을 가진 무남독녀가 있었는데 안창호가 수양딸로 삼을 만큼 둘 사이가 가까웠다. 아래는 내가 쓴 장편 논픽션 《마지막 무관생도들》의 한 장면이다.
그 무렵, 이 참령의 집에는 안창호 ․ 이종호 ․ 유동열 ․ 노백린 ․ 이동휘 등 애국지사들 이 드나들며 밀의를 했다. 의병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참령의 외동딸 정희를 귀여워하며 수양딸로 삼았다.
“허허, 도산 선생. 내 하나밖에 없는 딸을 수양딸로 삼다니요. 내 참 !”
이 참령이 그렇게 말하자 안 도산은 껄껄 웃었다.
“이보시오, 추정. 예쁘고 귀여운 걸 어찌하오?”
정희는 싫다고 하지 않았다. 머리가 영리해서 친아버지와 구별하기 위해 ‘도산아버지’라 고 부르며 선생의 무릎에 앉았다.
1908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과 장인환 의거가 일어났을 때 이갑은 앞장서 성금을 내놓고 의연금 모집에 나섰다. 다음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을 때는 공범으로 몰려 헌병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신민회는 1910년 3월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국내에는 한성의 전덕기, 평양의 안태국, 평북 이승훈, 황해도 김구가 남아 독립군기지 개척사업을 지원하고, 국외에는 미주 안창호, 연해주 이동녕, 북간도 이동휘, 서간도 이회영과 이시영, 최석하, 중국 베이징은 조성환이 맡고 이갑은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그를 맡기로 했다. 이갑이 러시아를 택한 것은 러일전쟁 종군 경험이 있고 뒷날 제2의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신민회원들은 그해 4월부터 망명길에 올라 산둥(山東)반도 칭다오(靑島)에서 모여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회담이 끝나자 그들은 연해주 해삼위((海蔘衛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다. 그곳에 도착하여 강제합병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재러 한인사회가 비분강개하는 가운데 9월에 망명투사들과 ‘해삼위회담’을 열었다. 그 후 이갑은 제정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그로 갔다. 러시아 외교관과 정치가들과 교류하며 적극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신문사를 찾아가 독립운동 협조를 호소하고 페테르부르그에 청년양성소를 만들어 청년교육에 착수하려 하였다. 침식을 잊고 고심하던 차에 유력한 후원자인 이범진 전 러시아 한국공사가 자결했다.
그는 충격에 빠졌다. 곤궁과 추위와 싸우며 과로까지 겹쳐 손가락에 마비증상이 오고 반신불구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한창 나이에 걸린 뇌졸중이었다. 안창호가 1911년 여름 시베리아에서 미주로 돌아가는 길에 찾아와 그를 끌어안고 울먹였다.
“추정, 그 단단한 몸이 이 지경이 되다니요. 어서 병을 고쳐야지 이걸 어찌합니까?”
안창호는 미국에 도착해 부인이 바느질품을 팔아 마련한 적금 300불과 《신한민보》 주필로 초청한다는 여행증명서를 보냈다. 이 돈을 받고 이갑은 안창호의 우정에 목 놓아 울었다.
이갑은 동포청년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독일로 가서 뉴욕 행 여객선을 탔다. 미국으로 가는 긴 여정을 견디기에 이갑의 체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오랜 항해로 인해 탈진했고 결국 뉴욕에서 상륙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발길을 돌려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 본부가 있는 치타로 갔다. 동포사회는 그를 열렬히 환영하며 지도자로 모셨다. 그의 독립운동의 열의는 병중에도 지칠 줄 몰랐다. 좀 더 온화한 곳에서 요양을 하고자 연해주로 갔다. 이동휘와 함께 광복군정부를 구상하며 분열된 동포사회를 하나로 결속시키고 제2의 러일전쟁에 대비한 전선을 갖추어 나가는 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북만주 무링(穆陵)으로 가서 투병했다. 이때 춘원 이광수가 찾아와 편지를 대필해준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갑은 그 후 다시 연해주 우수리스크로 갔고 거기서 투병하다가 사망했다.
이갑이 죽은 뒤에도 도산과의 우정은 이어졌다. 도산이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회복불능 상태로 출옥한 이후 이갑의 딸 이정희가 병구완을 하고 임종을 했다.
춘원과 주요한과 이기동의 글
많은 문사들이 이갑에 관한 글을 썼다. 이광수는 북만주 무링에서 편지를 대필한 일을 회고하는 수필을 썼고 주요한은 1964년에 90쪽 짜리 전기를 썼다. 1970년에는 서울대 박사과정 중에 있던 이기동 전 동국대 교수가 《신동아》 논픽션 공모에 <추정 이갑>이라는 글을 써서 당선하였다. 이 교수는 한국학연구원장으로 있다가 국정교과서 문제로 국회에 불려나가 진보계열의 젊은 국회의원들이 야단치듯 질문하자 고분고분하게 대답하지 않은 일로 이름이 떠올랐고 정권이 바뀌자 사임한 바로 그분이다.
파인 김동환이 발간한 《삼천리》 1933년 2월호에 <조선의 몽테크리스트 백작 이갑>이라는 글이 있다. 《삼천리》는 3년 전인 1930년에도 이갑에 관한 글을 여러 편 실었다. 7월호에 노백린인 쓴 한시 <조(弔)이갑군의 장서(長逝)>, 9월호 <해삼위와 이갑>, 10월호에 딸 이정희 탐방기 <아하, 아버지 이갑>, 11월호에 <인생의 향기 박영효와 이갑 관계> 등이다. 파인은 《삼천리》에 실었던 명문들을 1931년 《자유와 평화》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찍었다. 춘원 이광수의 <인생의 향기 알는(앓는) 이갑>은 <서백리아의 이갑>으로 제목을 고쳐서 실었고 일본육사 4년 선배인 노백린의 글도 <조(弔)이갑 군>으로 고쳐 실었다.
춘원 이광수의 <서백리아의 이갑>은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글을 ‘100년 후에도 읽힐 단편소설’이라고 한 서평과 함께 500원에 읽을 수 있다고 e-book을 안내한 것이 보인다. 그러나 이 글은 소설보다는 수필에 가깝다. 한 부분을 옮겨 본다.
(추정의 편지를 대필해주고) 나는 혼자 내 숙소에 누워서 지나간 하루 추정과 같이 하 던 일을 생각하고는, ‘추정의 속에는 조선이 찼다. 추정의 속에는 조선밖에 없다. 그는 그의 속에서 자기를 내어쫓고 그 자리에다 조선을 들여앉혔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애국 자란 이런 사람이로구나 하고 관념으로만 가지고 있던 것을 실물로 목격한 것을 기뻐했 다. 지금도 내 속에 기이심(己利心)이 발작할 때에는 추정의 웃는 모양이 나타나서 나를
격려해 준다.
나는 추정의 곁에 일 개월을 머무는 동안 여러 가지 아름다운 광경도 보고 이야기도 들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적자. 이것은 추정 자신의 이야기이다.
“도산(島山)이 미주에 건너가는 길로 돈을 미화 오백원을 보냈읍데다. 도산의 사정을 내가 다 아는데 웬 돈 오백원이 있어서 내 병 치료비로 이 적지 아니한 돈을 보냈는고 하고 매우 받기가 거북한 것을, 동지의 정성을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어서 받았지 요, 했더니 그 후에 알아보니까 도산이 본국 들어 와 있는 동안 도산 부인이 남의 빨래 를 해주고 벌어서 저축한 돈이라고요. 그러고는 도산은 어느 운하를 파는데 역부(役夫) 노릇을 하고 일공(日工)을 받아서 생계를 보탰다고요.”(『평화와 자유』, 삼천리사 1931).
참 가슴 뭉클한 이야기이다.
《평화와 자유》에는 그 외 권동진의 <이동휘의 청년시대> 홍명희의<자서전> 여운형의 <옥중에서> 설의식의 <헐려가는 광화문> 허영숙의 <나의 재혼관> 등 당대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읽을 만한 것들이 많았다. 판을 거듭할 정도로 많이 팔리자 결국 총독부로부터 금지도서 처분을 당했다.
이갑에 대한 글은 8·15 광복 후에도 이어졌다. 시인 주요한은 1964년 《추정 이갑》이라는 전기를 90쪽 분량으로 써서 출간했다. 한국 근대시 운동의 선구자인 시인이 평전 형태의 전기를 쓴 것은 특이하다. 두 사람은 특별한 관계였을까, 아니면 애국심과 실천궁행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을까? 내 판단은 후자이다. 주요한도 평안남도 평양 출신이고 추정이 사망한 뒤 도산 안창호를 따르며 흥사단 활동을 인연이 있었다.
주요한의 평전 자서(自序) 앞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추정 이갑 선생은 한말 신민회 시대에 효성(曉星 새벽별)처럼 빛나는 청년정치가요 교 육 사업가였다. 노일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사관학교를 나온 신지식의 청년사관으로서 한 성 무대에 나타난 그는 당시의 세도귀족 민보국(閔輔國 민영휘를 말함)과 대결하여 빼앗 겼던 전토(田土)를 찾으므로 세인의 경탄을 박(博)하였고 그 재물을 전부 희사하여 육 영사업을 일으키므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동지인 청년장교들과 합심하여 이윽고 한성의 정계를 주름잡아 진취적이고 개화적인 세 력의 중핵을 이루었고 미주에서 돌아온 도산 안창호와 의기투합하여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중략)
기미독립운동의 원천이 추정과 그 동지들의 행적과 사상에 연유함이 크다 할 것이다. 3·1 이후 연면히 계속된 신문화운동, 민족주의운동이 또한 그 뿌리에서 성장한 것이 틀림 없을진대 이로써 족히 그의 인물과 기여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추정 이갑》 1964, 민중서관)
외동딸과 사위 이응준
이갑은 슬하에 딸 하나만 두었다. 참령 시절, 그는 가출 소년이던 이응준을 거둬 자기집에 머물게 하고 독선생을 두어 가르친 뒤 보성학교를 거쳐 대한제국무관학교에 편입학시켰다. 독립전쟁에 몸을 던지라는 유지를 주었다. 이응준은 무관학교가 폐교되어 일본으로 가서 육군유년학교, 육사를 나와 임관했다. 그 무렵 북만주 무링에서 생명이 꺼져가던 이갑은 이응준에게 외동딸 정희와 결혼하라고 했고 이응준은 평생 은인인 이갑의 명을 받아 정희와 결혼했다.
이응준은 생도시절 뒷날 ‘백마 탄 김 장군’ ‘원조 김일성’이라고 불린 김광서(항일투쟁시 가명 김경천)의 지도 아래 동기생인 지석규(지청천) 홍사익과 더불어 항일무장투쟁을 하기로 맹세했으나 지키기 않았다. 대좌 계급까지 올라간 뒤 8·15 광복을 맞았고 아내가 애국지사 이갑의 외동딸이자 안창호의 수양딸이라는 사실이 후광이 되어 국군창설의 주역이 되었고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이정희 이응준 부부는 각각 《아버님 추정 이갑》(인물연구소, 1981)과 자서전, 《회고 90년》(선운기념사업회, 1982)를 써서 남겼다. 거기 이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다.
두 사람은 90세가 넘도록 장수하고 저 세상으로 갔다. 저승에서 사위를 만난 이갑이 내 외동딸을 풍파 없이 잘 데리고 살아줘 고맙다고 했을지, 왜 무장투쟁을 안했냐고 꾸짖었을지 상상해본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맙다고 하겠지만 이광수의 말대로 ‘마음속에 조선이 찼고 자기를 내어쫓고 그 자리에다 조선을 들여앉힌’ 이갑이고 보면 “이놈! 왜 조국을 배반했냐?”고 크게 꾸짖었을 것 같다.
이응준 장군에 대해서는 따로 한 편 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