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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한반도 분단 시대와 통일 운동의 전개
1. 8·15광복과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점령
4) 미군정의 농업 정책
해방 뒤 한국은 정치적 무질서와 경제적 혼란이 겹쳤다. 한국의 경제는 생산의 감소와 대량실업, 물가상승 등으로 혼란에 빠졌다. 일제의 식민지배하의 군수공업 중심의 비정상적인 경제 상태를 이루고 있었던 한국은 일본의 자본이 빠져나가고 기술인력이 부족해지자, 공업 생산이 줄어드는 등 경제적 구조에서 오는 타격을 면할 수 없었다. 북위 38도선으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자 북위 38도선 이남의 농업지대 및 경공업지대(輕工業地帶)와 북위 38도선 이북의 중공업지대(重工業地帶)가 분리되어 경제적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게다가 일본· 둥베이지구[만주]· 중국 등지로부터 귀국한 동포와 38도선 이북에서 38도선 이남으로 내려온 동포가 200만 명 이상이나 되었다. 공업생산의 감소와 외국과 38도선 이북에서의 동포의 대거 귀국은 1946년 11월 당시 남한 전체 실업자수가 약 100만 명에 이르게 되는 대량실업 사태를 불러왔다.
해방 직후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농민은 전체 농가의 51.6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고, 자작 겸 소작농의 비중은 34.6퍼센트였으며 자작농은 불과 3.2퍼센트였다(이호철,「농민운동」, 강만길 외, 『한국사 18· 분단구조의 정착 2』, 한길사, 1995, p. 224). 미군정은 일제 식민지배하에서 파괴된 농업 생산력으로 인해 발생된 식량문제· 토지 분배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농업정책을 펼쳤다.
토지개혁문제를 초점으로 하는 한국의 농업·농민 문제에 대한 미군정 정책의 기본 법령으로 1945년 9월 25일 「패전국 일인 재산의 동결 및 이전 제한의 건」(법령 제2호)이 최초로 제정되었다. 이 법령의 골자는 일본인이 한국에 남기고 간 “국공유재산을 미군정이 접수한다. 생활필수품· 토지 ·광산· 공장 등 일본인의 사유재산은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재산 거래를 허가한다.”는 것이었다. 토지개혁 문제를 포함하여 식민지 경제구조 재편을 미군정청이 직접 주도하겠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또한 사유재산의 보호를 제1원칙에 두는 자본주의체제의 이념에 입각하여 재편한다는 기본방향을 명백히 한 것이다(박혜숙, 「미군정기 농민운동과 전농의 운동노선」. 박현채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3』, 한길사, 1990, p.371).
미군정 당국은 「중앙식량규칙 제2호」(1946년 8월 12일)와 「개정 미곡 매매공가 급 법령 제105호」(1946년 8월 3일) 등 새로운 미곡수집 및 통제정책을 추진하였다(김종범, 『조선식량문제와 그 대책』, 돌베개, 1987). 미군정은 다른 물가는 그대로 두고 쌀값만을 통제하여, 38원이란 지나치게 낮은 공정가격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도시민의 식량위기를 고려하지 않고 미곡반입을 금지하였고 모리배 단속과 미곡수집에 실패함으로써 심각한 식량위기를 야기시켰다. 급증된 인구와 급락한 농업생산력, 그리고 현실과 괴리된 낮은 공정가격이 빚은 미곡소비 촉진과 미곡반입 금지로 말미암아 나타난 매점매석이 그런 상황을 크게 부채질했던 것이다.
-이호철,「농민운동」, 강만길 외,『한국사 18· 분단구조의 정착·2』, 한길사, 1995, pp. 224∼225.
미군정은 자유판매제가 쌀파동을 불러일으키자 배급제로 바꾸고 필요한 미곡(米穀)을 확보하려고 미곡공출제(米穀供出制)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원활한 식량 공급은커녕 쌀값의 폭등을 노리는 상인들의 매점매석(買占賣惜)[물건 값이 오를 것을 예상하여, 어떤 상품을 한꺼번에 많이 사 두고 되도록 팔지 않으려는 일]을 불러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소작료를 수확물의 ⅓ 이하로 정하고, 신한공사를 설치하여 이전에 동양척식회사에 소속된 토지를 관리했다. 미군정은 1948년 3월 신한공사가 관리하던 토지를 유상으로 분배했다. 철수한 일본인들의 토지를 소유하게 된 신한공사는 남한 전 토지의 약 13.4퍼센트에 해당하는 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한공사의 농지를 경작하는 소작농의 토지가 남한지역 총경지 면적의 27.7퍼센트 해당하였다. 더군다나 신한공사가 소유하게 된 토지는 모두 생산성이 높은 미작지대(米作地帶)에 집중적으로 위치해 있었다. 미군정청이 시행한 토지 분배 방식은 지주와 당시 국민의 77퍼센트를 차지하는 농민 모두로부터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또한 미군정은 일본인이 한국에 남기고 간 재산(적산)을 1943년 3월부터 불하했다. 주로 일제 때 기업가나 귀속업체의 관리인들이 일본인 재산을 차지하였다. 미군정의 귀속재산의 관리와 불하정책은 친일파들이 해방 뒤에도 경제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게 한 정책이었다.
논 이야기
채만식
(--- 전략---)
사람들이 나라 망한 것을 원통히 여길 때, 한생원은
“그깐놈의 나라 시원히 잘 망했지.”
하였다. 한생원 같은 사람으로는 나라란 백성에게 고통이지, 하나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또 꼭 있어야 할 요긴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나라라는 것을 도로 찾았다고 하여 섬뻑 감격이 일지 아니한 것도 일변 의당한 노릇이라 할 것이었다.
논 스무 마지기에서 열서 마지기를 빼앗기고 나니, 원통한 것도 원통한 것이지만, 앞으로 일이 딱하였다. 논이나 경우 일곱 마지기를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하릴 없이 남의 세토를 얻어 그 보충을 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남의 세토는 도지를 물어야 하는 것이라, 힘은 내 논을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들면서도 가을에 가서 차지를 하기는 절반이 못되는 것이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남의 세토를 소작 아니할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한생원네는 나라 명색이 망하지 않고 내 나라로 있을 적부터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경술년 나라이 망하고, 삼십육 년 동안 일본의 다스림 밑에서도 같은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그리고, 속담에 남의 불에 게 잡기로, 남의 덕에 나라를 도로 찾기는 하였다지만 한국 말년의 나라만을 여겨 그 나라가 오죽할 리 없고, 여전히 남의 세토나 지어먹는 가난한 소작농이기는 일반일 것이라고 한생원은 생각하던 것이었었다.
일본이 항복을 하던 바로 전의 삼사 년에, 공출이야 징용이야 하면서 별안간 군색함과 불안이 생겼던 것이지, 그 밖에는 나라가 망하여 없어지고서 일본의 속국 백성으로 사는 것이 경술년 이전 나라가 있어가지고 조선 백성으로 살 적보다 별양 못할 것이 한생원에게는 없었다. 여전히 남의 세토를 지어, 절반 이상이나 도지를 물고, 그 나머지를 천신하는 가난한 소작인이요, 순사나 일인이나 면서기들의 교만과 압박보다 못할 것도 없거니와 더할 것도 더할 것도 없었다.
독립이 된 이 앞으로도, 그것이 천지개벽이 아닌 이상, 가난한 농투성이가 느닷없이 부자장자 될 이치가 없는 것이요, 원·아전·토반이나 일본놈 대신에, 만만하고 가난한 농투성이를 핍박하는 「권세있는 양반들’이 생겨날 것이요 할 것이매, 빼앗겼던 나라를 도로 찾아 다시금 조선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조금도 신통하거나 반가울 것이 없었다.
원과 토반과 아전이 있어, 토색질이나 하고 붙잡아다 때리기도 하고 교만이나 피우고, 하되 세미(稅米: 納稅)는 국가의 이름으로 꼬박꼬박 받아가면서 백성은 죽어야 모른 체를 하고 하는 나라의 백성으로도 살아 보았다.
천하 오랑캐, 애비와 자식이 맞담배질을 하고, 남매간에 혼인을 하고, 뱀을 먹고 하는 왜인들이, 저희가 주인이랍시고서 교만을 부리고, 순사와 헌병은 칼바람에 조선 사람을 개 도야지 대접을 하고, 공출을 내어라 징용을 나가거라 야미를 하지마라 하면서 볶아대고, 또 일본이 우리 나라다, 나는 일본 백성이다, 이런 도무지 그럴 마음이 우러나지를 않는 억지춘향이 노릇을 시키고 하는 나라의 백성으로도 살아 보았다.
결국 그러고 보니 나라라고 하는 것은 내 나라였건 남의 나라였건 있었댔자 백성에게 고통이나 주자는 것이지, 유익하고 고마울 것은 조금도 없는 물건이었다. 따라서 앞으로도 새 나라는 말고 더한 것이라도, 있어서 요긴할 것도, 없어서 아쉬울 일도 없을 것이었었다.
(---중략---)
그 뒤 훨씬 지나서,
일인의 재산을 조선 사람에게 판다, 이런 소문이 들렸다.
사실이라고 한다면 한생원은 그 논 일곱 마지기를 돈을 내고 사지 않고서는 도로 차지할 수가 없을 판이었다. 물론 한생원에게는 그런 재력이 없거니와, 도대체 전의 임자가 있는데 그것을 아무나에게 판다는 것이 한생원으로 보기에는 불합리한 처사였다.
한생원은 분이 나서 두 주먹을 쥐고 구장에게로 쫓아갔다.
“그래 일인들이 죄다 내놓구 가는 것을, 백성들더러 돈을 내구 사라구 마련을 했다면서?”
“아직 자세힌 모르겠어두, 아마 그렇게 되기가 쉬우리라구들 하더군요.”
해방 후에 새로 난 구장의 대답이었다.
“그런 놈의 법이 어딨단 말인가? 그래, 누가 그렇게 마련을 했는구?”
“나라에서 그랬을 테죠.”
“나라?”
“우리 조선 나라요.”
“나라가 다 무어 말라비틀어진 거야? 나라 명색이 내게 무얼 해준 게 있길래, 이번엔, 일인이 내놓구 가는 내 땅을 저희가 팔아먹으려구 들어? 그게 나라야?”
“일인의 재산이 우리 조선 나라 재산이 되는 거야 당연한 일이죠.”
“당연?”
“그렇죠.”
“흥, 가만 둬두면 저절루, 백성의 것이 될 걸, 나라 명색은 가만히 앉었다, 어디서 툭 튀어나와 가지구, 걸 뺏어서 팔아먹어? 그 따위 행사가 어딨다든가?”
“한생원은, 그 논이랑 멧갓이랑 길천(吉川)이한테 돈을 받구 파셨으니깐 임자로 말하면 길천이지 한생원인가요.”
“암만 팔았어두, 길천이가 내놓구 쫓겨갔은깐, 도루 내 것이 돼야 옳지, 무슨 말야. 걸, 무슨 탁에 나라가 뺏을 영으루 들어?”
“한생원한테 뺏는 게 아니라, 길천이한테 뺏는 거랍니다.”
“흥, 둘러다 대긴 잘들 허이. 공동묘지 가 보게나, 핑계 없는 무덤 있던가? 저, 병신년에 원놈(郡守) 김가가 우리 논 열두 마지기 뺏을제두 핑곈 다 있었더라네.”
“좌우간, 아직 그렇게 지레 염렬 하실 게 아니라, 기대리구 있노라면, 나라에서 다 억울치 않두룩 처단을 하겠죠.”
“일 없네. 난 오늘버틈 도루 나라 없는 백성이네. 제에길, 삼십육 년두 나라 없이 살아 왔을려드냐. 아아니 글쎄, 나라가 있으면 백성한테 무얼 좀 고마운 노릇을 해 주어야, 백성두 나라를 믿구, 나라에다 마음을 붙이구 살지. 독립이 됐다면서 고작 그래, 백성이 차지한 땅 뺏어서 팔아먹는 게 나라 명색야?”
그러고는 털고 일어서면서 혼잣말로,
“독립됐다구 했을 제, 내, 만세 안 부르기, 잘 했지.”(1946.4.18.)
─채만식,「논 이야기」,『채만식전집 8』, 창작과비평사, 1989, pp.304∼325, passim.
광복 직후, 전라북도 군산 부근의 농촌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한생원이라는 인물을 주인물로 하여 농민의 삶의 터전인 논(농토)을 빼앗기고 애써 가꾼 미곡(米穀) 또한 지주에게 빼앗기는 농민, 그리고 국가와의 관계를 보여 주는 서사를 통해 역사의 모순에 망연자실한 농민의 이야기를 그린「논 이야기」는 채만식이 『협동』(1946년 10월호)[『해방문학선집』(종로서원, 1946년 12월) 재수록]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구한말(舊韓末), 주인공 한생원의 아버지는 어렵게 논을 장만한다. 한생원이 스물한 살 때 고을 원은 그의 아버지에게 동학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씌워 강제로 논을 빼앗는다. 일본인에게 농토를 수탈당하고 소작농으로 살아가거나 중국 둥베이지구(東北地區)[만주(滿洲)]로 유랑을 떠났던 일제 강점기에 한생원의 아버지는 소작농으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다가 죽는다. 세월이 흘러 8·15 해방을 맞았으나 한생원은 기쁘지 않았다.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하고 이지적이지 못한 그는 일본인들이 쫓겨가자 다시 농토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잇속에 눈이 밝은 사람들이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농장이나 회사의 관리자들과 한 패가 되어 가지고 일인들의 재산을 멋대로 처분하여 착복한다. 미군정청의 잘못된 농업 정책으로 해방 이후에도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는 농민의 삶을 비판하는 한생원의 아둔함과 이재(理財)의 어두움도 함께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논 이야기」의 대단원 부분에서. “독립됐다구 했을 제, 내, 만세 안 부르기, 잘 했지.”라는 주인공 한생원의 독백은 당대의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통념과는 다르다. 이 소설의 플롯을 잘 살펴보면 그가 왜 이런 언행을 하는지 수긍이 간다. 한생원과 그의 아버지가 구한말부터 8·15 해방 무렵까지 겪은 많은 사건들이 그의 태도를 동기화 하고 있는 것이다.
5) 미군정의 노동정책
미군정의 노동 정책과 노동운동
1946년 11월 1946년 11월 5∼6일, 서울의 중앙극장에 전국각지로부터 515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약칭 전평(全評)]를 결성하였다. 이 대회에서 3대 실천요강과 일반행동 강령 20개 항을 비롯한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 대회에서 채택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실천요강과 일반행동 강령은 다음과 같다.
실천 요강
① 조선의 완전 독립 즉 친일파∙민족 반역자를 제외한 진보적 민주주의에 입각하는 민족통일전선 정권의 수립에 적극 참가
② 민족자본의 양심적인 부분과 협력하여 산업건설을 함으로써 부족공황, 악성 인플레의 극복
③ 이와 같은 운동을 통해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고 노동자 대중을 교육 훈련하여 자체 조직을 확대 강화한다
일반행동 강령
우리는 현하 내외 정세에 즉응하여 명년도 정기대회까지 아래와 같은 일반적 행동강령을 결정한다.
1. 노동자의 일반적 생활을 보장할 최저 임금제도를 확립하라.
1.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라.
1. 성, 연령, 민족의 별(別)을 불문하고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을 지불하라.
1. 7일 1휴일제와 연 1개월간의 유급 휴가제를 실시하라.
1. 부인 노동자의 산전 산후 2개월간 유급 휴가제를 실시하라.
1. 유해 위험작업은 7시간제를 확립하라.
1. 14세 미만 유아 노동을 금지하라.
1. 노동자를 위한 주택, 탁아소, 오락실, 도서관, 의료기관을 설치하라.
1. 부인 노동자를 위한 공장설비(탁아소, 수유소, 환착소(煥着所)등)를 고용주 부담으로 즉시 실시하라.
1.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단체계약권을 확립하라.
1. 공장폐쇄, 해고와 실업은 절대 반대한다.
1. 일본 제국주의자와 매국적 민족반역자 및 친일파의 일체 기업을 공장위원회 (관리위원회)에서 보관하고 노동자는 그 관리권에 참여하라.
1. 실업, 상병(傷病), 폐질 노동자와 사망자의 유족 생활을 보장하는 사회보험제 를 실시하라.
1. 착취를 본위로 한 일체의 청부제를 반대하라.
1.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파업, 시위의 절대 자유
1. 18세 이상 남녀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라.
1. 농민운동을 절대 지지하자.
1.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하자.
1. 조선의 자주독립 만세!
1. 세계 노동계급 단결 만세!
─『금속노동조합운동40년사』,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2005, pp.13∼14(pdf).
전평(全評)은 결성대회에서 최저임금제의 확립, 8시간 노동제,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지급 등 20개조에 달하는 ‘일반 행동강령’을 제시했다. 해방 직후 아래로는 노동대중의 분출하는 요구를 대변했고, 위로는 좌파진영의 가장 강력한 대중조직으로서 미군정 정책과 대치해 나갔던 전평이 주도하는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그 막을 올린 것이었다. 결성 당시 전평은 그 산하에 215개의 지부(광산 제외)와 1,194개의 분회에 21만 7,073명의 조합원을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3개월 뒤인 1946년 2월 15일 시점에서는 235개의 지부 및 1,676개의 분회에 57만 4,479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정해구, 「미군정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국사편찬위원회(탐구당 번각 발행), 2013, pp. 236∼237 참조).
해방 직후 남한에서 노동운동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조직화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일제의 패망으로 야기되었던 사회경제적인 혼란에 기인한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공장 폐쇄, 조업 단축, 실업 및 전재민의 증가, 물가 앙등과 이로 인한 실질 임금의 감소 등 제반 혼란은 아래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노동운동이 분출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특히 공장 및 직장 폐쇄, 조업 단축 등은 노동자자주관리운동과 해고반대투쟁 그리고 퇴직금 요구 투쟁 등 자연발생적 노동운동을 야기하였다.
─정해구, 「미군정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국사편찬위원회(탐구당 번각 발행), 2013, p.237.
해방 직후부터 1946년 1월 중순 전평 지령 6호의 ‘산업건설운동을 중심으로 한 당면투쟁에 관한 지령’이 나오기까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추구했던 중심적인 노선은 ‘노동자공장관리운동’이었다. 노동자가 주축이 되어 공장을 관리하고자 했던 노동자공장관리운동의 시도는 이를 통한 좌익 세력의 영향력 강화에 대한 미군정청의 우려를 증대시켰다. 초기에 일본인의 사유재산에 대해 유동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던 미군정청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주도의 노동자공장관리운동에 직면하자 이제까지의 그들의 입장을 변경, 일제의 국공유 재산뿐만 아니라 일본인 사유재산까지 전면 접수하는 한편 이들의 관리를 자신들이 선정하는 관리인들에게 맡기는 정책을 취했다(정해구, 「미군정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국사편찬위원회(탐구당 번각 발행), , 2013, p.239∼241 참조).
조선군점령군사령관이었던 하지(John R. Hodge) 중장은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맥아더 극동사령관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미국은 한반도에서 소련이나 그 꼭두각시정권의 지배를 방지해야 하며, 따라서 미국의 적은 소련뿐만 아니라 한국내 좌익들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해방 직후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대중조직(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등)을 좌익정치세력의 정권장악을 위한 도구로써 생각하였다. 따라서 하지의 점령정책은 좌익정치세력뿐만 아니라 전평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부터 좌익에 대한 직접이고 노골적인 탄압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미군정은 소련과의 협조를 강조하는 미국무부내의 국제주의자들의 목소리가 강했던 점령 초기에는 이들과 소련의 비위를 거슬리게 할지 모르는 노골적인 탄압보다는 좌익의 활동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정권장악과 체제변혁을 막을 수 있는 지배방식을 택하였다.
─정영태,「노동운동」, 강만길 외,『한국사 18·분단구조의 정착 2』, 한길사, 1995, p.194.
조선공산당에 의하여 조직되고 조정되었던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는 미군정청에 정면으로 대항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양보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정세를 관망하면서 노동운동을 펼쳐갔다. 그러나 조선민주청년동맹(朝鮮民主靑年同盟)의 청년조직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양대 세력이었던 전평은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에 따라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46년에 들어서서 미군정의 노동정책과 농업정책에 항의하여 노동자 농민들의 불만과 시위가 빈발해졌다. 전평은 그들이 주도했던 노동쟁의 현장에서 아래로부터 분출했던 압력이 가중되고. 공장 및 직장에서의 갈등이 심화되자, 적극적인 파업 투쟁에 돌입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 노동조합 전국 평의회[약칭 전평]가 이끄는 노동계를 와해시키기 위하여 1946년 3월 10일 대한 독립 촉성 전국 청년 총연맹 회원들이 결성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大韓獨立促成勞動總聯盟)][약칭 대한노총]은 우파 노동 단체로 실질적인 모체는 1945년 11월 21일 조직된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이었다.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대한노총) 창립 선언문과 강령은 다음과 같다.
선언문
일제의 기반(羈絆)과 질곡 속에서 민주광복의 정기를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견골열혈(堅骨熱血)로 우리 노동자들은 해방된 단일민족으로서의 공존공생권을 갈망하며, 회천(回天)의 위업을 달성코자 총궐기하여 자주독립을 지향하면서 환의 작약하였다. 이에 우리는 모든 번잡한 이론을 타파하고 민주정치 하에 만민이 갈망하는 균등사회를 건설코자 전국적으로 이를 발휘토록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을 결성하여 일로 매진할 것을 정중히 선언한다.
강령
1. 우리는 민주주의와 신민족주의의 원칙으로 건국을 기함
1. 우리는 완전독립을 기하고자 자유노동과 총력발휘로서 건국에 헌신함
1. 우리는 심신을 연마하여 진실한 노동자로서 국제수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함
1. 우리는 혈한불석(血汗不惜)으로 노자간(勞資間) 친선을 기함
1. 우리는 전국 노동전선의 통일을 기함
─『금속노동조합운동40년사』,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2005, pp.18∼19(pdf).
이승만·김구·김규식·안재홍·조소앙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홍윤옥이 위원장을 맡은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은(대한노총)“일상적인 노동조합처럼 자본으로부터 독립되어 임금노동자들이 밑으로부터 자주적으로 상향조직한 것이 아니었고, 자본의 엄호하에서 임금노동자가 아닌 그들의 사용자들이 위로부터 하향적 지령을 내려 조직한”(윤여덕,『한국초기노동운동연구』, 일조각, 1991, pp.294∼295)것이었다.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가 사회주의를 이데올로기로 하여 혁명적 노조주의를 지향했다면,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은 자유민주주의를 이데올로기로 하여 반공적 노조주의를 지향했다,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은 반공을 기치로 내건 우익 청년운동의 성격을 띠고 우익진영 정치단체와 서북청년회·대한민청 등 우익 청년단체의 지원 아래 세력을 확장해갔다.
폭풍
김영석
(----전략---)
점심 시간이 되어 모두 식당에 모이자 김순희가 나무걸상 위에 올라섰다.
“여러분! 동무들도 보셨지만 이제 김귀득 동무가 공장장에게 머리채를 꺼들리고 마룻바닥에 쓰러진 걸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순희는 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장장은 어째서 조금만 수틀리면 우리에게 손찌검을 합니까? 우리를 뭘로 압니까?...... 우리를 짐승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소!”
하는 남자직공의 목소리가 들리자 김순희는 한층 기운을 얻었다.
“손찌검하는 건 그래두 약과입니다. ─그는 색마(色魔)에요! 공장장에게 정조를 유린당하고 나중엔 내쫒긴 동무가 세 사람 있습니다. ─누군지 아시겠죠. 고수자, 이영애, 김득실 이 세 사람입니다. ─우린 그와 같은 색ㅁ마에게 단연코 욕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백 명 여공의 며예를 위해서 그를 처단해야 합니다!”
“옳소! 처단해야 하오!”
다시 이러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을 내흔들고 말했다.
(---중략---)
도라꾸가 발동기를 소리내며 울기 시작했을 때였다. 벙어리들처럼 앉아 있던 종업원의 집단(集團)이 물결치듯 훌쩍 흔들리더니, 구슬을 쏟은듯이 흩어져선 모두 공장문을 향해 뛰어갔다. 도라꾸가 달려오다가 속력을 늦췄다.
그 모습이 필연코 귀득이다. 재빨리 뛰어가 속력을 늦춘 자동차 바퀴 밑에 벌떡 누웠다. 그러자 수십 명의 여공이 덮치기로 누웠다. 땅에 젖은 치마저고리는 흙바닥에 누워도 아깝지 않았다. 매를 맞으며 수수밥 한덩어리씩 얻어먹느니, 차라리 잡아 묶어가라는 기세였다.
“물러가지 않을 테야?”
경관이 도라꾸 운전대 지붕 위에 올라서서 피스톨을 아래로 겨누고서 부르짖었다. 그러나 종업원은 점점 더 덮칠 뿐이었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줄 알자 경관은 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일제히 포승줄을 풀러 도라꾸에 탄 종업원을 결박하여 모두 뛰어내리게 했다.
앞뒤에 피스톨을 든 경관이 서선 한데 뭉친 종업원들을 파헤치면서 공장을 나섰다. 그리고는 결박한 동무들을 두 사람의 경관에게만 지키게 하고 나머지 경관들은 피스톨을 휘두르며 문 밖으로 몰려나오는 종업원을 막고, 공장문을 잠궜다.
“우리는 공장 안에서 싸우자!”
누군지 이렇게 소리쳤다.
“동무들 석방될 때까지 싸우자!”
두 팔을 결박당한 채 공장 밖에 선 이두영은 흰 지렁이 같은 두 줄기 눈물을, 길게 자란 턱수염에까지 흘리고 있었다. 슬픈 눈물이 아니었다.
폭풍은 더욱 거세게 불 것이었다. 그러나 공장에 남은 동무들의 단결(團結)은 자기네가 석방될 때까지는 쉽사리 부서지지 않을 증거를 보았던 것이다! 두영은 자기도 모르는 채 동여메인 두 팔을 들어 휘저으며 소리높이 외쳤다.
“노동조합 성공 만세!”
그러자 문 앞에 모여선 사백 명 가까운 동무들이 아우성치듯 외쳤다.
“만세! 만세!”
“만세! 만세!”
경관 한 사람이, 지나가는 다른 도라꾸를 세웠다. 그러고는 결박진 동무들을 올려태웠다. 경관들도 올라탔다. 도라꾸는 다시 움직였다.
이두영은 도라꾸 위에 태연히 서서 차차 멀어지는 공장을 바라보았다. 공장문 앞이 포플라나무에 가려지고 공장이 멀리 떨어져갈 때까지 공장동무들의 만세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김영석, 「폭풍」, 신덕용 엮음, 『폭풍: 해방공간의 노동운동소설선집』, 시인사, 1990, pp. 11∼46, passim.
김영석이 『문학』(1946년 7월호)에 발표한 「폭풍」은 1945년말부터 시작한 미군정청의 관리인 제도를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가 묵인하고 ‘노동자공장관리’로부터 점차적으로 ‘산업건설운동’으로 방향전환을 하여 노동조건 개선, 해고 및 실업반대, 식량획득 투쟁 등으로 나가기 시작했던 시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방향이 공장관리를 통한 계급구조 재편이란 근본적 투쟁에서 극히 부 분적이고 노동자의 생활과 직결된 악덕 관리인에 대한 투쟁에로 압축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적 상황을 작품의 배경으로 하고 있는「폭풍」은 악덕관리인에 대한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과 이를 통해 얻어지는 집단의식의 재고로 나타난다.「폭풍」에서 주인공인 이두영은 애국화방공장 분회회원의 한 사람으로 직공에 불과한 존재이다. 그는 분회장인 조한복을 적극적으로 돕는 보조자로서 같은 분회회원인 김순희, 최창녀 등과 더불어 공장내의 노동자들을 상대로 계급의식의 고양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신덕용,「해방직후 노동소설의 현재와 전망」, 신덕용 엮음, 『폭풍: 해방공간의 노동운동소설선집』, 시인사, 1990, pp. 275∼276,
해방 직후 노동쟁의의 발생 원인을 보면 임금 인상이 123건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해고반대 63건, 감독자배척 20건이었다. 이 가운데 감독자 배척의 경우, 미군정청이 귀속공장의 관리인을 본격적으로 파견하기 시작한 1940년에 들어서면서 대거 발생했으나, 관리인제도가 기정사실화되는 1947년부터 급감했다(정영태, 「노동운동」, 강만길 외, 『한국사 18·분단구조의 정착 2』, 한길사, 1995, p.198 참조).
관리인의 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사에 발단하여 일어난 애국화방공장의 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을 그린「폭풍」은 현장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해방직후의 노동현장과 사회상황을 관념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내부적 모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주인물 이두영이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상황을 주체적으로 극복하고 노동자들의 집단의식의 고양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과정을 형상화한「폭풍」은“공장문 앞이 포플라나무에 가려지고 공장이 멀리 떨어져갈 때까지 공장동무들의 만세소리는 그치지 않았다.”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어 노동운동에 대한 신념과 승리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6) 9월 총파업과 10월 민중항쟁
9월 총파업
9월 총파업은 1946년 9월 23일 철도노동자들의 총파업에서 시작하였다. 철도노동자들은 월급제를 일급제로 변경하려는 미군정에 맞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정청은 철도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9월 24일 7,000여 명의 부산지구 철도노동자들이 열차운행을 중지시키고, 파업에 돌입했다. 9월 25일 서울에서는 경성철도공장 3,000여 명의 철도노동자들이 서울역 노동자들과 함께 용산기관구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어 출판, 체신, 교통, 전기, 금속, 광산, 해운, 운수, 화학, 식료, 섬유, 토건 등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에 속해있던 16개 산업별 노동조합원 25만 명을 포함한 3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목포, 전주, 삼척, 마산, 군산 등 산업 중심지역에서 파업에 참가하였다. 총파업 초기에 노동자들은 '식량배급','임금인상','해고반대' 등의 요구를 내걸고 총파업에 들어갔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조악 정치범 석방 등 정치적 요구를 내세웠다. 9월 30일 새벽, 미군정은 군대와 무장경찰, 그리고 서북청년회 대동청년회를 동원하여 서울 용산기관구에 있던 철도파업본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9월 총파업은 대구를 중심으로 10월 민중항쟁(10월 인민항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기관구에서 –남조선 철도 파업단에 드리는 노래
피빨[핏발]이 섰다 집마다 지붕 위 저리 산마다 산머리 우에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피빨[핏발]이 섰다
누구를 위한 철도냐 누구를 위해 동트는 새벽이었나 멈춰라 어둠을 뚫고 불을 뿜으며 달려온 우리의 기관차 이제 또한 우리를 좀먹는 놈들의 창고와 창고사이에만 느려놓은[늘어놓은] 철길이라면 차라리 우리의 가슴에 안해[아내]와 어린 것들 가슴팍에 무거운 바퀴를 굴리자
피로서 무르리라[물으리라] 우리의 것을 우리에게 돌리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생명의 마지막 끄나푸리를 요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느냐 동포여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다가서는 틀림없는 동포여 자욱마다 절그렁거리는 사슬에서 너이들[너희들]까지도 완전히 풀어놓고저[풀러놓고자] 인민의 앞재비[앞잡이] 젊은 전사들은 원수와 함께 나란히 선 너이들[너희들] 앞에 일어섰거니
강철이다 쓰러진 어느 동무의 소리가 바람결에 들릴지라도 귀를 모아 천 길 일어설 강철기둥이다.
며츨째이냐[며칠째이냐] 농성한 기관구 테두리를 지키고 선 전사들이여 불 꺼진 기관차를 끼고 옳소 옳소 외치며 박수하는 똑같이 기름 배인 검은 손들이여 교대시간이 오면 두 눈 부릅뜨고 일선으로 나아갈 전사 함마며 핏켙을 탄탄히 쥔 채 철길을 베고 곤히 잠든 동무들이여
피빨[핏발]이 섰다 집마다 지붕 위 저리 산마다 산머리 우에[위에] 억울한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승리를 약속하는 피빨[핏발]이 섰다
- 이용악. 「기관구에서-남조선 철도 파업단에 드리는 노래」,『문학』,1947년. 3월호,
9월 25일 서울에서는 경성철도공장 3,000여 명의 철도노동자들이 서울역 노동자들과 함께 용산기관구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용산기관구 농성자 수는 1만 3,000명이 넘었다. 총파업투쟁이 순수한 노동운동이라기보다는 노동운동을 앞세운 좌파세력의 정치적 도전이라고 판단한 미군정은 “총파업에 대한 물리적 분쇄에 나섯는데, 9월 30일 3천여 명의 경찰 및 우익청년들을 동원하여 용산철도파업에 대한 공격을 성공시켰고, 이는 총파업 분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정해구, 「미군정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국사편찬위원회(탐구당 번각 발행), 2013, p.250). 철도노동자들은 서울, 부산, 광주, 목포, 대구, 안동 등지에서 파업을 일으켰고, 경부선, 호남선, 전라선, 중앙선 등 모든 철도가 마비되었다.
「기관구에서-남조선 철도 파업단에 드리는 노래」(『문학』,1947년. 3월호)에서 9월 총파업 때 경성철도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노래한 이용악은 8·15해방 후 「거리에서」(『신천지』, 1946년 12월)·「빗발 속에서」(『신세대』, 1948년 1월) 등을 발표했다.
10월 민중항쟁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미군정은 좌파 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간부를 체포하거나 체포령을 내리고 미군정에 비판적인 기사를 게재하는 좌익계 신문을 폐간시키거나 정간 처분을 내렸다. 1946년 7월에 들어서서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좌익 세력에 대한 미군정청의 탄압에 맞서 타협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공세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결렬된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등 신전술을 모색했다. 1946년 9월에 부산의 철도노동자의 파업을 시작으로, 산업 전분야로 확산되어 전국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총파업은 10월 1일 대구역 앞에서 미군정 경찰이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의 대구 지역 조직이라고 볼 수 있는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가 주도하는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포하여 노동자 1명이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10월 1일 밤 8시쯤 조선공산당 대구시당 간부들과 파업투위 간부들이 중심이 된 좌익 진영 간부들은 원정(북성로 1가)의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실에서 비상대책회의를 긴급히 소집했다(정영진, 『폭풍의 10월』, 한길사, 1990, p.320 참조). 10월 2일 대구시민들이 대구부청과 경찰서를 포위하고 경찰의 사과와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며 점거하였다. 이후 대구시민들이 경찰과 우파 인사을 공격하여 사망자와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미군정은 대구지구(며칠 후 경북지구) 계엄사령관 포츠 대좌의 이름으로 대구 지구에 계엄포고령을 선포하고 진압에 나섰다.
포고 제1호
① 계엄령을 포고한다.
② 경찰이 치안을 유지할 것이다. 최후수단으로 군대가 사용될 것이다. 시민은 절대로 경찰에 복종하여야 한다.
③ 10명 이상의 집회와 회의를 금지한다.
④ 오후 7시부터 익조(翌朝) 6시까지 야간통행을 금지한다.
⑤ 화물자동차 등 제 운수기관의 사용은 식량배급에만 허가한다. 차(此) 이외 사람의 승용은 절대로 허가 아니한다. 만약 대구지역에서 차(此) 포고에 위반하면 자동차를 몰 수 할 것이다.
이상 5개조 포고에 완전한 협력을 요구한다. 치안은 즉시 재확립될 것이다.
─정영진, 『폭풍의 10월』, 한길사, 1990, p.372.
10월 7일, 미군정은 「포고 제6호」로 경상북도 달성군, 경주군, 영일군 지역에 대한 포고령을 발령하였다. 대구 민중항쟁에 이어 경상북도 민중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미군정은 경상북도 경찰 3천 명, 충청남도 경찰대 400명, 충청북도 경찰대 300명, 경기도 경찰대 400명을 투입했다. 뿐만 아니라 국방경비대 2연대와 34관구의 미군도 투입했고, 민간인 신분인 서울의 우익청년단도 투입했다. 미군정은 경찰서와 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를 점거하고, 경찰관· 군정(軍政) 관리· 우파 성향의 인물을 공격하는 민중들을 총과 칼 같은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했다. 미군정의 무력 진압으로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시민 수백 명이 사망했고, 7천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경찰 수십 명도 민중항쟁 진압 과정에서 사망했다. 대구에서 시작된 민중항쟁은 성주·칠곡·영천을 비롯한 경상북도의 19개 군으로 확산된데 이어 통영·진주·마산을 비롯한 경상남도 지역,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 경기도 서북부 지역, 강원도 동해안 지역, 전라남도 중북부 지역, 전라북도 전주 지역 , 해남을 중심으로 한 전라남도 남쪽 지역, 황해도 지역 등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발생했다.
대구 파업이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의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던 원인은 다음과 같다. 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미군정청이 강경좌파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강경좌파 세력이 ‘신전술’의 새로운 방침을 채택해 미군정청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② 대구· 경상북도 지역의 민중항쟁은 식량문제와 귀환동포의 열악한 처지 문제가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③ 대구· 경상북도 지역 좌파 세력의 유연하고도 강력한 영향력이 대구에서의 파업이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의 민중항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의 하나였다(정해구,「미군정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국사편찬위원회(탐구당 번각 발행), 2013, p.251∼255 참조).
10월 민중항쟁(10월 인민항쟁)의 결과 우익 세력이 역량을 강화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반면에 좌익 세력은 각 지역의 농민조합과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대중운동단체의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피신하면서 역량이 크게 위축되었다. 급기야 좌익 세력은 불법화되어 지하로 숨어들었다. 조선공산당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합당하여 남조선 노동당(약칭 남로당)을 결성했다. 10월 민중항쟁은 미군정의 정치·경제 분야 등의 정책에서 실패한 것을 비판하고 그 정책의 시정을 요구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으나 미군정의 정책을 시정하는 것에까지는 이어지지는 않았다.
필자 소개
김종성(金鍾星)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삼척군 장성읍(지금의 태백시)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및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4년 제8회 방송대문학상에 단편소설 「괴탄」 당선.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으로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어휘와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김종성 한국사총서 전 5권' 『한국고대사』(미출간), 『고려시대사』(미출간), 『조선시대사Ⅰ』(미출간), 『조선시대사Ⅱ』(미출간), 『한국근현대사』(미출간), ‘김종성 한국문학사 총서’『한국문학사 Ⅰ』(미출간),『한국문학사 Ⅱ』(미출간), 『한국문학사 Ⅲ』(미출간), 『한국문학사 Ⅳ』(미출간), 『한국문학사 Ⅴ』(미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 강사, 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경기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 강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