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복음이 전하는 예수는 매우 상식적이며 심오하고 건강하다. 일체 신화적 윤색이 없으며, 기적이나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의존이 없다. 도마복음의 예수는 아시아대륙의 아시아적 가치를 구현한다. 동‧서회통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서구문명과는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하고 사고한 인간이었다. 예수의 인성을 거부하는 자는 기독교의 이단이다.
예수의 인성은 도마복음 속에서 매우 정교한 언어로 그리고 매우 점잖은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도마복음에 관한 모든 가능한 출전을 동원하여 도마복음을 해설한다. 우선 도마복음 구절과 관련된,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 그리고 바울의 서한을 독자들이 비교적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모조리 다 인용하여 상세한 주석을 가한다.
그리고 당대의 관련된 메소포타미아문명권의 자료들, 구약자료들, 그리고 『숫타니파타』 등의 초기불전자료, 유교‧노장철학자료 등등 역사적 예수의 상(像)을 바르게 그릴 수 있도록 만드는 모든 자료를, 개방적인 자세로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기독교는 이제 바울이 제시하는 기독론‧부활론이라는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케리그마를 원점으로 고집할 수가 없다. 앞으로 오는 복잡다단한 정보의 세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본래적 모습인 예수운동(Jesus Movement)의 정체를 다원적으로 파악하여 기독교의 교리를 업그레이드시킬 필요가 있다.
앞으로 모든 신학논쟁에 있어서 도마복음은 배제할래야 할 수 없는 결정적 “함수”가 되어버렸다.
2007년, 2008년 2차에 걸쳐 도올의 학설을 검증하기 위하여 감리교신학대학 대강당에서 열린 신학대토론회에서도 신학자들은 “불편한 진실이지만 개방적 자세로 수용하면서 한국신학을 새롭게 발전시켜야 할 시점”이라고 견해를 모았다.
도마복음이 만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국면을 외면하는 자는 시대에 뒤떨어질 뿐이다.
도올은 말한다: “나는 동‧서의 대표경전으로서 『논어 한글역주』 전3권과 『도마복음 한글역주』 전3권을 완성하였다. 내가 『도마복음』으로부터 받은 충격은 스물한 살의 나이에 『노자』로부터 받은 충격만큼이나 강렬했다. 『도마복음 한글역주』는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감당하기 어려웠던 영적 투쟁이었다.”
원광대학교 석좌교수 도올 김용옥이 행한, 전3권에 이르는 도마복음주석작업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가장 방대한 작업이며, 구미신학계에서도 그 유례를 볼 수가 없다.
그는 114개의 파편의 주제상관도표까지 그려가면서 종전의 신학논의에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고 있다. 이 책은 도올의 스승 허혁, 그리고 허혁의 스승 요아킴 예레미아스와 루돌프 불트만에게 헌정되었다.
도올 “한국 기독교, 신약성서 다시 편집하라"
도마복음’에서 보는 예수 진면모 논쟁
동양학자 도올 김용옥 박사와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재캐나다 신학자 오강남 교수,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정강길 연구실장이 기독교에 대한 금기 없는 토론을 벌였다.
2010년 6월 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인터넷방송국 후즈닷컴(hooz.com)에서였다.
<문화방송>과 <교육방송>에서 도올특강을 만든 류종헌 대표가 설립한 이 방송국 개국을 맞아 가진 좌담회였다. 특히 개신교 교단에선 외경으로 금서 취급하는 <도마복음>을 펴낸 도올과 오강남 교수의 만남이어서 현 <신약성서> 안에선 만날 수 없는 예수의 진면목을 두고 벌인 논쟁이 백미였다. 1945년 이집트 나일강 상류 사막 절벽에서 발견된 초기 기독교 문서 <도마복음>을 연구한 도올은 최근 <도마복음 한글역주> 세권을 완간했고, 오 교수는 지난해 도마복음 해설서인 <또다른 예수>를 펴낸 바 있다.
[1부] 도올-김경재-오강남 <도마복음> 논쟁(영상제공: 후즈닷컴)
[2부] 도올-김경재-오강남 <도마복음> 논쟁(영상제공: 후즈닷컴)
이 자리에서 원로 신학자이자 목사인 김경재 교수는 종교학자들이 예수의 종교적 영성과 치유, 선지자 등 다른 면모보다 ‘지혜자이자 철학자 예수’만을 강조한다거나 ‘바울의 신비체험을 폄하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하지만 도올은 “한국 기독교가 너무 신비주의에만 빠져 합리와 상식이 결여됐다”며 “‘죽은 예수와 부활한 예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진짜 예수’를 만나기 위해 <신약성서>를 다시 편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먼저 도올이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정통 교리의 터부를 깨는 자신에 대해 “한국 교회 목사들이 ‘길 잃은 양’이라고 한다”고 언급하자 김 교수는 “‘맞는 말 아니냐”고 말해 논쟁에 불을 붙였다.
도올은 “공관(마태·마가·누가)복음서에서 ‘길 잃은 양’이라고 한 것은 초대교회에선 한명이라도 이탈자가 생기면 문제가 많아 데려와야겠기에 그런 것”이라며 “<도마복음>에선 크고 아름다운 한마리가 무리를 떠나 드디어 자기 길을 찾아간 것으로 본다”고 반박했다. 도올은 “이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서 가라’고 했던 불교 <숫다니파타>의 비유와도 일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올은 “<도마복음> 2장을 보면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중단하지 마라’ ‘찾으면 고통스러우리라’ ‘그때 너는 모든 것을 얻으리라’고 했다”며 “초기 교회공동체에선 ‘오면 축복을 받는다, 그런데 왜 안 오느냐’고 하는데 <도마복음>은 축복이 아니라 고통이 오고 고통을 겪고 나면 세상이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게 된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오 교수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도 갈매기 조너선은 무리를 떠난다”며 “모든 영웅신화의 기본이 바로 떠남이고, <도마복음>은 이를 찬양한 것”이라고 부연설명했다. 오 교수는 “어떤 종교든 표층만을 보는 이들이 있고, 심층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있는데 기독교는 2000년 역사에서 지난 1600년간 심층을 거의 무시했다”며 “하나하나가 선불교의 공안(화두)과 같은 의미를 지닌 <도마복음>을 통해 기독교의 심층을 회복하면 불교의 심층과도 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공관복음은 ‘나를 따르라, 나의 제자가 되라. 나를 배우라. 나를 믿으라’고 하는데 <도마복음>은 ‘깨쳐라, 깨달아라, 네 속의 하나님을 찾아라. 네 속의 하나님이 바로 너다’라고 기존 성서에서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예수를 보여준다”고 밝혔다.
도올은 “동양의 노자, 장자를 압도할 만한 것들을 담고 있는 경전들을 왜 기독교에서 포기하느냐”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어 김 교수가 도올이 ‘지혜자로서의 예수’만을 강조한다고 한 데 대해 도올은 <도마복음>을 빌어서 “예수에 대해 어디서든지 밥을 나누는 공동식사와 누구든지 치료해주는 의료선교와 초기불교 수행자보다 더 치열하게 무소유하는 정신과 인간, 특히 여성 등 약자들을 배려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혁명적인 사회실천가로 보았다”고 에둘러 설명했다.
도올은 “송나라의 주자도 유교에서 ‘천지의 별’이라는 공자의 4서(논어·맹자·대학·중용)를 마음대로 편집할 권한이 있었는데, 기독교의 불행은 아타나시우스가 정경(현재의 구약과 신약성서)을 발표한 뒤 모든 것을 막아버린 데 있기에 마틴 루터는 신약 27서 체제에 반기를 들었어야 했다”며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서 신약성경이 왜 재편집이 안 되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도 “함석헌 선생은 ‘종교란 좋은 보석을 보관하는 궁궐이 아니라 거목이 자라는 것과 같다’고 했다”며 “살아 있는 종교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인데, 완결된 것으로만 보려 해 기독교의 놀라운 생명력을 젊은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도올이 바울의 케리그마(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선언이나 ‘부활론’에 대해 부정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며 “바울의 다메섹 체험이 개인적 환각에 불과했다면 30년간 지중해 일대를 다니며 놀라운 창조적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었겠느냐”고 물었다.
도올은 “영적인 몸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바울의 부활 메시지에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멘다는 것인데 현대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메는 사회적 실천은 외면한 채 죄악을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 교수도 “요즘은 십자가를 지는 대신 십자가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고 꼬집었다. 정강길 실장은 “신비주의는 초자연주의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기에 초자연주의와 신비주의는 구분돼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도올은 “존 듀이가 <코먼 페이스>(공동신앙)란 책에서 썼듯이 신앙은 이제 합리적으로 해석돼 상식이 공유돼야 서로 소통되고 인류에 희망이 생긴다”고 말했다.
첫댓글 위의 지적과 관련하여, 기억하기님이 올린 [불교를 말한다 !] 게시판 174번글 [어리석음(부제-: 불자가 본 기독교... 그리고 불법) (방문객님 글)]에서도 다뤄지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좀 다른 관점으로, 다음의 점도 한번 생각해 보시죠... 일일이 적자면 아주 길어질텐데, 가능한한 간략히...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도 불교와 같습니까? 그리고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왜곡했나요? 기록에 따르면, 바울은 신비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 그의 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죠. 신앙의 깊이는 물론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일에서도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그런데 어떤가요? 바울이, 도마 복음의 내용을 몰랐을까요?
또한 도마 복음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 복음서의 하나일 뿐입니다. 어느 복음서보다 더 상위에 있을 까닭이 없어요... 무슨 뜻인가? 해석은 말이죠... 종합적으로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대승불교는 사성제 내지 상좌불교를 함유한다"는 말을 했었죠? 동시에 "사성제 내지 상좌불교만 열심히 파고 들어도 화엄까지 나온다"는 지적도 한 바 있습니다. 즉 모든 복음서를 조화롭게 고려한 해석이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은 경우, 심지어 텍스트의 문구 몇 가지만 가지고 말을 만들면...치기 어린 해석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체계적 해석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허긴 꼴리는 대로, 뭐 하나 만들 자유도 있나?
게다가 구약까지 고려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복음서만으로 해석할 수도 엄어요... 왜 그런가? 예수의 출현 자체가, 예수 스스로 긍정했듯, 구약에 나오는 예언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헬레니즘... 헬레니즘 전통에서는, 비의적 지식과 관련한 비밀 결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피타고라스학파나 스토아학파등도 비밀결사의 하나입니다. 또한 특히 근동 지역은, 황야 내지 동굴에서 홀로 수행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격리된 상태에서의 홀로 수행은 샤마니즘의 전승이라고 할 수 있어요. 부처님 당대의 사문들이 숲에서 거주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의 본글에 나오는 "길 잃은 양"의 비유 말입니다. 비유는, 쓰기 마련이예요...
소위 공관 복음에 등장하는 [길 잃은 양]의 비유의 뜻은 자명하구요. 도올이 인용한 도마복음의 [무리를 떠난 "크고 아름다운" 한마리]의 비유의 뜻도 자명합니다. 도올이 인용한 도마복음의 해당 비유는, 공관 복음에 나오는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는 것]과 거의 유사한 뜻입니다. 그런즉, 동일 소재를 사용한 별개의 비유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는, 무리를 떠나 홀로 황야나 동굴에서 수행하는 고대 근동의 전통과도 일치합니다. 이러한 근동의 전통은, 훨씬 후대라고 할 수 있는 마호멧에게서조차 발견됩니다. 기록을 보면, 마호멧도 동굴 수행을 했어요... 이러한 전승은, 비밀결사의 전승과 함께, 중세 유럽 수도원에서도 발견되요.
중세 유럽 수도원에서도 발견된다... 홀로 소위 묵상하는 것, 소위 내부로의 침잠... 이러한 전승이 기존 기독교에 이미 있습니다. 공관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기독교에 이미 있는 거예요... 내부로 침잠하는 경우, 하늘을 만나죠... 불교에서 여러 선정들은, 동시에 여러 하늘들입니다. 샤마니즘에서부터 이미 그래요... 기독교의 유일신이, 우리 눈에 보이는 구름 위에 있는게 아니예요... 있다면, 내적 하늘에 있어요... 고대인들이 구름 위에 하늘나라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까? 그야 말로, 어리석은 생각이예요. 구름 위로 치솟은 높은 산들 많습니다. 고대인들이 보기에도,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엄어요... 그게 아니란 말이죠.
다만 고대인들은 내적 하늘과 외적 하늘을 엄격하게 구별하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내적 하늘이 외적 하늘이고, 외적 하늘이 내적 하늘이었던 거예요... 오히려 내적 하늘이 더 본질적인 하늘이라고 파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늘은 이미 하나의 상징이었던 겁니다...
황야 내지 동굴에서 홀로 수행하는 것은, 일종의 고행입니다. 그리고 구약을 보면...노아도 하나님이 역사했을 때, 두려워 하죠? 기록에 따르면, 마호멧도 처음에는 두려워 합니다. 고대 근동의 예언자들은, 거의 두려워 해요... 압도되는 거죠... 하지만 받아들이고는, 경이를 느낍니다. 창세기를 봐도...자아를 인식하고, 아담이 두려워하죠?
우리는 어떤 텍스트와 관련하여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가집니다. 그리고 구체적이고 특정한 해석의 채택은, 여러가지 조건에 따릅니다. 얼마나 순수할 수 있는가? 여러 텍스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무관한 텍스트등의 관념들이 행사하는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는가? 이는, 믿음에 달려 있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텍스트를 보다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해당 텍스트가 등장하는 시대적 문화적 배경을 알고 있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무관한 텍스트의 영향력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관련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한 거예요. 그리고 순수하게 관련 텍스트들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 저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믿음이 없어요. 저는 불자입니다. 하지만 "무엇의 드러남에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그 만큼의 식과 함께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무엇을 행함에 다른 것을 섞지 않으려는 노력은 합니다. 그래서 불교가 아닌 것, 예로 기독교를 바라 볼 때에도...어느 정도 순수할 수 있어요... 함부로 섞지 않습니다... 그리고 체계적 종합적 관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그런가? "무엇의 드러남은 조건에 따른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저는 불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에게 기독교를 가르칠 생각이 엄어요... 기독교는 기독교인의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으로서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이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불교라고 상황이 다르지도 않아요. 게다가 기독교의 많은 문제점은...기독교인이 기독교를 몰라서라기 보다는, 기독교인이 오랜 세월 왜곡된 기독교를 믿어서라기 보다는, 기독교 스스로의 장점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측면은, 불교 역시 마찬가지예요... 보통 사이비 교주가, 전통도 제대로 모르면서 부정하고, 텍스트의 극히 일부분만을 내세워 혹은 괴상한 텍스트를 발굴하여 치기어린 해석을 하죠.
첫댓글 위의 지적과 관련하여, 기억하기님이 올린 [불교를 말한다 !] 게시판 174번글 [어리석음(부제-: 불자가 본 기독교... 그리고 불법) (방문객님 글)]에서도 다뤄지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좀 다른 관점으로, 다음의 점도 한번 생각해 보시죠... 일일이 적자면 아주 길어질텐데, 가능한한 간략히...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도 불교와 같습니까? 그리고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왜곡했나요?
기록에 따르면, 바울은 신비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 그의 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죠. 신앙의 깊이는 물론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일에서도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그런데 어떤가요? 바울이, 도마 복음의 내용을 몰랐을까요?
또한 도마 복음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 복음서의 하나일 뿐입니다. 어느 복음서보다 더 상위에 있을 까닭이 없어요... 무슨 뜻인가? 해석은 말이죠... 종합적으로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대승불교는 사성제 내지 상좌불교를 함유한다"는 말을 했었죠? 동시에 "사성제 내지 상좌불교만 열심히 파고 들어도 화엄까지 나온다"는 지적도 한 바 있습니다. 즉 모든 복음서를 조화롭게 고려한 해석이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은 경우, 심지어 텍스트의 문구 몇 가지만 가지고 말을 만들면...치기 어린 해석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체계적 해석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허긴 꼴리는 대로, 뭐 하나 만들 자유도 있나?
게다가 구약까지 고려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복음서만으로 해석할 수도 엄어요... 왜 그런가? 예수의 출현 자체가, 예수 스스로 긍정했듯, 구약에 나오는 예언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헬레니즘... 헬레니즘 전통에서는, 비의적 지식과 관련한 비밀 결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피타고라스학파나 스토아학파등도 비밀결사의 하나입니다. 또한 특히 근동 지역은, 황야 내지 동굴에서 홀로 수행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격리된 상태에서의 홀로 수행은 샤마니즘의 전승이라고 할 수 있어요. 부처님 당대의 사문들이 숲에서 거주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의 본글에 나오는 "길 잃은 양"의 비유 말입니다. 비유는, 쓰기 마련이예요...
소위 공관 복음에 등장하는 [길 잃은 양]의 비유의 뜻은 자명하구요. 도올이 인용한 도마복음의 [무리를 떠난 "크고 아름다운" 한마리]의 비유의 뜻도 자명합니다. 도올이 인용한 도마복음의 해당 비유는, 공관 복음에 나오는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는 것]과 거의 유사한 뜻입니다. 그런즉, 동일 소재를 사용한 별개의 비유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는, 무리를 떠나 홀로 황야나 동굴에서 수행하는 고대 근동의 전통과도 일치합니다. 이러한 근동의 전통은, 훨씬 후대라고 할 수 있는 마호멧에게서조차 발견됩니다. 기록을 보면, 마호멧도 동굴 수행을 했어요... 이러한 전승은, 비밀결사의 전승과 함께, 중세 유럽 수도원에서도 발견되요.
중세 유럽 수도원에서도 발견된다... 홀로 소위 묵상하는 것, 소위 내부로의 침잠... 이러한 전승이 기존 기독교에 이미 있습니다. 공관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기독교에 이미 있는 거예요... 내부로 침잠하는 경우, 하늘을 만나죠... 불교에서 여러 선정들은, 동시에 여러 하늘들입니다. 샤마니즘에서부터 이미 그래요... 기독교의 유일신이, 우리 눈에 보이는 구름 위에 있는게 아니예요... 있다면, 내적 하늘에 있어요... 고대인들이 구름 위에 하늘나라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까? 그야 말로, 어리석은 생각이예요. 구름 위로 치솟은 높은 산들 많습니다. 고대인들이 보기에도,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엄어요... 그게 아니란 말이죠.
다만 고대인들은 내적 하늘과 외적 하늘을 엄격하게 구별하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내적 하늘이 외적 하늘이고, 외적 하늘이 내적 하늘이었던 거예요... 오히려 내적 하늘이 더 본질적인 하늘이라고 파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늘은 이미 하나의 상징이었던 겁니다...
황야 내지 동굴에서 홀로 수행하는 것은, 일종의 고행입니다. 그리고 구약을 보면...노아도 하나님이 역사했을 때, 두려워 하죠? 기록에 따르면, 마호멧도 처음에는 두려워 합니다. 고대 근동의 예언자들은, 거의 두려워 해요... 압도되는 거죠... 하지만 받아들이고는, 경이를 느낍니다. 창세기를 봐도...자아를 인식하고, 아담이 두려워하죠?
우리는 어떤 텍스트와 관련하여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가집니다. 그리고 구체적이고 특정한 해석의 채택은, 여러가지 조건에 따릅니다. 얼마나 순수할 수 있는가? 여러 텍스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무관한 텍스트등의 관념들이 행사하는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는가? 이는, 믿음에 달려 있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텍스트를 보다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해당 텍스트가 등장하는 시대적 문화적 배경을 알고 있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무관한 텍스트의 영향력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관련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한 거예요. 그리고 순수하게 관련 텍스트들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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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믿음이 없어요. 저는 불자입니다. 하지만 "무엇의 드러남에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그 만큼의 식과 함께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무엇을 행함에 다른 것을 섞지 않으려는 노력은 합니다. 그래서 불교가 아닌 것, 예로 기독교를 바라 볼 때에도...어느 정도 순수할 수 있어요... 함부로 섞지 않습니다... 그리고 체계적 종합적 관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그런가? "무엇의 드러남은 조건에 따른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저는 불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에게 기독교를 가르칠 생각이 엄어요... 기독교는 기독교인의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으로서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이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불교라고 상황이 다르지도 않아요. 게다가 기독교의 많은 문제점은...기독교인이 기독교를 몰라서라기 보다는, 기독교인이 오랜 세월 왜곡된 기독교를 믿어서라기 보다는, 기독교 스스로의 장점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측면은, 불교 역시 마찬가지예요... 보통 사이비 교주가, 전통도 제대로 모르면서 부정하고, 텍스트의 극히 일부분만을 내세워 혹은 괴상한 텍스트를 발굴하여 치기어린 해석을 하죠.
재미있는것이 보통 불자들은 기독교의 믿음을 우습게보고 믿음없는 불법에 골돌하는거죠
예로 달사님이나 태산님같은 그런종류의 알맹이없는 불교를 한다는거죠
불교도 종교고, 신심으로 출발해서 신심으로 끝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