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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개요
- 언 제 : 2021. 11. 3(수)
- 누 가 : 무공수훈자계룡지회 50명
- 어 디 : 황토현전적지 / 전북 정읍시 덕천면 소재
- 날 씨 : 맑음
답사정보
황토현전적지
사적 295호인 ‘황토현전적지(黃土峴戰蹟地)’는 1894년 궐기(蹶起)한 농민군이 관군과의 싸움에서 크게 이긴 곳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입니다.
야트막한 언덕인데요,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마을과 이평면 도계마을 사이에 위치합니다.
주변에 관련 유적들이 분포되어있습니다.
1963년 농민군 승전을 기념하는 ‘동학혁명기념탑’이 최초로 세워졌고, 1973년 갑오동학혁명의 근인(近因)이 되었던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를 이평면 하송리 ‘예동’마을에 세웠습니다.
1981년엔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의 ‘전봉준’생가(사적 293호)를 보수했습니다.
이후 황토현전적지기념관(1983년)과 ‘전봉준’동상(1987년)도 건립되었습니다.
매년 5월 11일에 ‘갑오동학문화제’가 열립니다.
내년 5월 완공을 목표로 대대적인 기념공원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답사여정(앨범)
무공수훈자계룡지회 2021년 후반기(1차) 전적지답사
가을이 익어갑니다.
근데 역병(코로나) 훼방으로 일상이 헝클어지면서 너나없이 점점 무기력해져 갑니다.
올해도 그냥 넘기나 했는데, 무공수훈자계룡지회에서 전적지답사행사를 준비했습니다.
‘With corona‘시대라 해도 노약자들이 많은 공동체이기에 확실한 거리두기를 시행합니다.
버스를 2대나 제공한 집행부의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무척 반갑네요.
전북 정읍하면 우선 내장산이 떠오르지만, 동학농민혁명의 발생지기도 합니다.
그곳에 반봉건과 반외세의 시대적 과제를 담아냈던 ’황토현전적지‘가 있습니다.
자유 민권을 위한 반봉건 항쟁으로 시작한 농민항쟁은 점차 일본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한 민족자존의 반외세 항쟁으로 변했습니다.
평등, 자유, 자치의 원칙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경제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삼았으나 결국 양반계층과 그들이 끌어들인 외세에 의해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 숭고한 뜻은 항일의병항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궁금했었는데, ’황토현전적지‘를 방문하게 되어 기쁩니다.
전적지답사의 하이라이트(^^)인 오찬시간을 시간관계상 정읍에서 먼저 갖습니다.
끼리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달콤한(?) 자리입니다.
갑오동학농민혁명
역사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부터 들립니다.
사발통문을 비롯한 동학관련 유물들이 알차게 전시된 곳입니다.
농민혁명 110주년에 맞춰 지난 2004년 5월에 문을 열었던 곳인데, 기념공원 확장공사로 주변이 어수선합니다.
직원을 대신하여 해박하신 ’이정현‘지회장님의 해설이 곁들여집니다.
갑오동학농민혁명(甲午東學農民革命) -.
1894년(고종 31년) 3월 20일 일인데요, 역사적인 날입니다.
제폭구민(除暴救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의 기치를 내걸고 농민들이 일어났지만, ‘동학란(東學亂)’ 또는 ‘동비(東匪)의 난(亂)’으로 비하(卑下)되기도 했습니다.
1950년대까지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동학농민봉기의 역사적 의의가 반봉건과 반외세의 민족운동으로 평가되며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기념공원이 완성된다는 내년 봄쯤 다시 찾아야 될 것 같네요.
고부농민봉기
1892년 전북 정읍의 한적한 농촌 ‘고부(古阜)’에 새로운 군수 ‘조병갑’이 부임합니다.
영의정 ‘조두순’의 서질(庶姪)로 여러 군(郡)을 거치면서 가렴주구(苛斂誅求)로 농민들의 원(怨)을 사던 인물이었습니다.
농민봉기 불씨는 조선말에 한양조정 세도가와 줄을 대며 탐관오리의 전형을 보여주던 ‘조병갑’의 탐학(貪虐)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한재(旱災)에도 면세는커녕 도리어 농민들로부터 높은 국세징수와 함께 온갖 죄명(불효, 음행, 잡기, 불목)을 씌워 재물을 약탈했습니다.
또 기름진 ‘배들’평야에 불필요한 보(洑)를 쌓고, 인근 ‘태인’군수를 지낸 제 아비의 공덕비를 세운다며 농민들을 강제로 부리며 새로운 세금을 징수 착복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진정서를 냈지만, 오히려 고을대표를 잡아들여 곤장을 치며 옥에 가뒀습니다.
무자비한 보복에 마침내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는데요, 훈장(訓長) ‘전봉준’을 내세워 몽둥이와 죽창을 들며 목숨 건 무력봉기를 감행합니다.
관아의 무기를 빼앗고, 옥문을 열어 무고하게 갇힌 백성들을 풀어줬습니다.
그리고는 내친김에 ‘배들’평으로 내달려 수탈의 상징이었던 ‘만석’보까지 허물어 버립니다.
1894년 1월 10일의 일이었는데요, 동학농민전쟁의 첫 단계로 불리는 ‘고부민란’ 혹은 ‘고부농민봉기’의 전말(顚末)입니다.
높이 쳐든 항쟁의 깃발
‘고부’에서의 봉기(蜂起)에 놀란 조정은 서둘러 새 군수(‘박원명’)를 임명하고, 수습할 안핵사(按覈使)로 ‘이용태’를 파견합니다.
허나 ‘이용태’의 무자비한 진압에 반발한 농민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인근 백산(白山)에 모여 본격적인 항쟁을 준비합니다.
보급에도 편리한 백산은 삼국시대에 쌓은 성(城)까지 있는 요새였습니다.
4개항의 행동강령과 창의격문(倡義檄文)을 각처에 보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은 ‘전봉준’은 당시 동학접주(東學接主)였던 ‘손화중’, ‘김개남’과도 연합합니다.
농민군과 동학조직이 합해져 지도부가 구성됨에 따라 봉기는 혁명으로 전환됩니다.
‘고부’관아 무기고를 탈취하여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稅穀)을 농민들에게 돌려줍니다.
1894년 4월 동학농민군은 파죽지세로 호남지역을 장악했는데요, 당시 농민들이 외쳤던 혁명정신은 크게 확대되어 경상과 충청지방까지 번집니다.
혁명전쟁의 분수령 황토현전투
항쟁본부가 있는 백산에 모인 농민들이 1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항쟁의 깃발을 높이 쳐든 농민군은 총대장(‘전봉준’)과 총관령(‘손화중’, ‘김개남’)으로 지휘체계를 갖춰 ‘금구’관아를 습격합니다.
농민군의 봉기소식이 전해지자 크게 놀란 ‘전주’감영(監營)은 군사 8백과 8백여 보부상으로 군대를 편성하여 진압작전에 나섭니다.
마침내 1894년 4월 6일 ‘황토현(黃土峴)’에서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치열하게 계속된 첫 전투에서 농민군은 크게 승리하고, 정부군은 75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무참히 패배합니다.
전력의 열세에도 영민한 지휘아래 대의로 무장한 농민군은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반면 보부상까지 동원하여 급조된 전주감영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투는 동학혁명의 분수령이 되었는데요, ‘고부’에서 일어난 소규모 농민봉기가 한반도 전역을 휩쓴 초유의 농민전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기충천한 농민군은 조선왕조의 본향(本鄕)이자 호남지역의 중심지인 ‘전주’로 입성하여 혁명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열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황토현전적지는 동학농민혁명의 가장 찬란한 봉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싸움터에 서린 농민군의 거친 숨결
농민군은 정부와 맺은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에 따라 전라도지역(53개)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며,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개혁정치를 추진합니다.
그러나 급박한 국제정세로 국정은 점점 혼란에 빠지자 9월 중순경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를 내걸고 다시 봉기합니다.
본격화된 일본침략에 맞서 ‘전봉준’ 휘하의 남접농민군과 ‘손병희’ 휘하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전국각지에서 용감히 싸웠으나 애통하게도 공주의 ‘우금치’전투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대패합니다.
결국 ‘금구’전투를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모두 진압되고, ‘전봉준’도 피신 중 부하의 밀고로 1894년 12월 체포되어 1895년 3월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부패정치를 바로 잡아 정의롭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동학농민혁명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하지만 당시 농민군이 부르짖은 민주(民主), 자주(自主), 평등(平等)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은 우리민족의 독립운동과 민주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 오호통재(嗚呼痛哉)라~!”
동학농민혁명과 전봉준
‘전봉준’은 왜 동학혁명을 꿈꿨을까요?
몸이 왜소하여 ‘녹두(綠豆)’라 불려 훗날 녹두장군이란 별칭까지 얻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부친(‘창혁’)이 ‘고부’향교 장의(掌議)를 지냈으나 부패관리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죽임을 당합니다.
훗날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은 것도 부친의 영향으로 보인다고 하네요.
30대에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경천수심(敬天守心)의 충효를 근본으로 삼는 동학(東學)에 심취합니다.
‘고부’지방의 접주(接主)로 임명되자 동학의 사회개혁원리로 부패관리를 몰아내는 시정개혁을 도모합니다.
일본침략에 맞서다가 끝내 생을 마감합니다.
그 숭고한 삶이 우러러 보입니다.
[때를 만나서는 하늘과 땅도 힘을 합하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그의 절명시(絶命詩) 앞에서, 눈물 한 방울 뚝 떨어뜨립니다.
30만 동학농민군
조선조 말, 19세기 후반은 어쩜 민란(民亂)의 시대였습니다.
안으로는 오랜 동안 누적된 봉건적 모순들이 곪아 터지고, 밖으로는 도도히 밀려드는 외세 앞에 나라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탐관오리들의 착취와 횡포는 힘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을 극단으로 내몰아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봉기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우리역사에 엄청난 무게로 기록된 동학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된 ‘고부’민란도 사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난 수많은 민란 중 하나였습니다.
한적한 시골에서 일어난 소규모 농민봉기가 어떻게 한반도 전역을 휩쓴 초유의 농민전쟁으로 확산되었을까요?
인내천(人乃天) -, 사람이 곧 하늘입니다.
1894년 한반도를 뒤덮었던 민초들의 꿈은 끝내 좌절되었지만, 뜨거운 피는 아직도 켜켜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중항쟁인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
민중이 주체였던 동학농민혁명정신은 이후 3.1, 4.19, 5.18, 6,10으로 이어집니다.
근래 촛불까지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으나,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진 않습니다.
수구꼴통(^^)이라서 그럴까요? ㅎ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이념을 극복하고, 사랑과 배려가 가득한 진정한 ‘대동세상의 꿈’을 그려봅니다.
황토현전적지
다시 ’황토현전적지(黃土峴戰迹地)‘로 이동합니다.
황토로 덮인 해발 70m 정도의 구릉(丘陵)인데요, 조용한 시골 전원풍경들이 드넓게 펼쳐지는 나지막한 언덕입니다.
기념탑이 있는 언덕까지 고즈넉한 솔밭 따라 휴식과 산책도 즐길 수 있습니다.
혁명당시에도 ‘태인(泰仁)’과 ’고부(古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죠.
1976년 황토현전적지로 지정된 후 1981년 사적 295호로 승격되었고,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답니다.
걸음이 느려집니다.
빈곳과 빈곳 사이가 공간(空間)입니다.
사람은 공간을 채우며 살다가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다가 그 흔적이 남으면 기억이 되고, 기억이 쌓이면 역사가 됩니다.
그 공간에 동학(東學)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적지
들어섭니다.
전적지를 관람하려면 3개의 문을 통과해야 됩니다.
제세문(濟世門)을 거쳐 보국문(輔國門)으로 들어서자 넓은 마당이 펼쳐지는데요, 기념관과 제민당(濟民堂)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왼손에 격문(檄文)을 들고 세상을 향해 포효()咆哮하던 ‘전봉준(全琫準, 1855~1895)’ 동상이 있었다는데, 안타깝게도 친일작가(‘김경승’)란 굴레가 씌워져 철거됐습니다.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강재구’, ‘김구’, ‘김유신’, ‘정몽주’, ‘안창호’, ‘이순신’, ‘안중근’, ‘맥아더’상을 조각했던 분이라는데...
15억의 예산을 들여 새로 건립할 예정이랍니다.
반드시 넘어야할 일본이지만, 과연 이런다고 극일(克日)이 될까요?
착잡한 마음으로 구민사(救民祠)에 위패로 모셔진 동학농민혁명참전 희생제위께 머리를 숙입니다.
가을햇살이 참 좋습니다.
동학혁명기념탑
언덕에 우뚝 서있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甲午東學革命記念塔)‘을 향합니다.
연륜이 묻어나는 훈훈한 고색(古色)이 유적느낌을 풍깁니다.
농민존재와 역할이 미미하던 시절이라 탑명에 농민이 빠졌다지만, 최초로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네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 -.
나라를 도와 국정을 보살펴 편안케 하고, 포악함을 물리쳐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하자는 의미입니다.
전서체의 ’보(輔)‘자가 건립당시 안보를 강조하던 시대상황의 영향으로 ’보(保)‘자로 바뀌었다는 게 특이하네요.
농민전쟁의 실패와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불렀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비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노랫말에 나오는 파랑새는 그의 성인 전(全)자를 풀어 ‘팔왕(八王)’새라 한데서 유래했다죠.
그 절절한 함성과 함께 처절한 노래가 귓가에 맴돕니다.
황토현전적지 소고
천천히 내려옵니다.
재(峴)라지만 사실상 평지나 다름없는데요, 붉은 흙 둔덕과 밭이 강한 인상을 줍니다.
몇몇 기념조형물들 사이로 성난 농민들의 함성과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127년 전 녹두의 함성이 울렸던 황토현전적지 -.
민초들의 울분이 들꽃이 되어 피어났습니다.
낡은 봉건제도를 개혁해 사람답게 사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외세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항거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와 숭고한 정신이 스며듭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들이 보여준 개혁정신과 민족자주정신은 민족독립운동 전개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봄날 ‘배들’들판을 쩌렁쩌렁 울렸던 녹두장군의 고함과 민초들의 거친 숨소리도 들었습니다.
그 시대에 농민으로 태어났다면, 과연 봉기에 참여했을까를 자문해봅니다.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든 황토현전적지 답사였습니다.
선운사
돌아오는 길에 시간여유가 있어 고창 ‘선운사(禪雲寺)‘를 잠시 들립니다.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인데, 단풍이 참 예쁘네요.
[어쩌지요, 가을이 간다는데
무수한 낙엽의 말, 귀에 들리지도 않아요.
가을 숲엔 온통 공허한 그리움만 남아, 마음은 천지사방 흩어지네요.
열정도 잠시 묻어야 할까 봐요.
잠시라면 괜찮을 텐데, 마음 동여맬 곳 없네요.
어쩌지요, 가슴 저린 말들 쏟아 놓고 가을이 간다는데
잠시 고개 묻을 그대 가슴이라도 빌려야겠네요] ('김용화')
어느 가을이든 겨울을 만납니다.
그러나 건너는 길목마다 울음을 삼키는 이들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더 아름다운 날이었기를...
모두가 더 행복한 매일이었기를...
화려한 계절 안으로 우리 모두의 단단한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삭풍 부는 겨울을 생각하며 매무새 다집니다.
에필로그
밥 먹고 헤어집니다.
화창한 가을날 콧구멍에 바람 좀 쏘였습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답답합니다.
“♪~ 아 ‘테스’형~! 세상이 왜이래~♬“
대선정국으로 접어드니 온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어지럽습니다.
어쩜 그동안 반목을 부추겨 이득을 취하려는 정치세력들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지난달 ‘노태우’대통령 국가장(國家葬) 때 ‘인순이’가 불렀던 조가(弔歌)가 막혔던 귀를 뚫어줬습니다.
‘손에, 손잡고~!’
진정 그렇게 되는 게 힘든 걸까요?
[대통령은 전문지식에 앞서 정상적이고, 안정된 인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국민의 안녕은 물론 생사까지 가를 수 있는 국정의 최종판단은 절대 감정적, 즉흥적, 공격적, 편파적으로 내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합니다.
수고하신 임원진께 감사드립니다.
후기가 좀 늦어졌는데요, 갑자기 집안에 울 일이 생겨 다녀오느라 그랬습니다.
모두들, 늘 승리하세요~♡
토욜(11. 6) 아침에 갯바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