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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북한의 국경을 가다(상) ■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
북한 함경도 홍수피해(UN제공 사진) 2010년 5.24조치 이후, 특히 올해 2월부터는 급속한 냉전으로 말미암아 남북의 교류 물길이 완전히 통제되었다. 그래도 무엇인가 해야 할 것 같아서 지난 여름, 태풍으로 수해를 입은 북한의 국경지역을 다녀왔다. 지난 10월 15일~20일까지 두만강에서 백두산 그리고 압록강 국경지대를 경유하였다. 최근 북한의 국경을 조망하고 그 아픔을 공유하면서 향후 새로운 국면에서의 교류와 협력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글쓴이>
가을은 풍요로운 계절이다. 그런데 올 가을의 한반도는 온통 아수라장이다. 남한은 박근혜 대통령 등 정치로부터 난장판을 넘어 쑥대밭이 되고 있다. 북한은 태풍이란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더 어수선하다.
조중러 3국 접경지대 전경
황량함만 남아 있는 두만강의 하구 UN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에 따르면, 함북지역 수해는 50~60년 만에 최악의 상황으로 함북 연사군, 무산군, 회령시 등 홍수에 주택 2만여 채 이상이 파손되고, 수백 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는 《조선중앙TV》(2016.9.11) 보도를 공개했다. 또 북한 주재 상주조정관실(UNOCHA)에서 지난 9월 16일자로 공개한 ‘2016년 함경북도 합동실사보고서’에 의하면, “무산군 5만 가구 이상, 연사군과 회령시에서 각기 1만~5만 가구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연합뉴스》(2016.9.17)에 따르면, “북한 매체인〈내나라〉는 함북도 지구를 휩쓴 이번 태풍으로 인한 큰물(홍수) 피해는 해방 후 처음이 되는 대재앙이라면서 두만강 유역에 관측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려 두만강이 범람하였다. 이로 연사군ㆍ무산군ㆍ회령시ㆍ온성군ㆍ경원군ㆍ경흥군과 나선시 일부지역이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사망과 실종을 포함해 인명피해는 수백 명에 달하며 68,900여 명이 집을 잃었고, 11,600여 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주택 등 29,800 여 채가 피해를 입었으며 생산 및 공공건물 900여 채도 손상을 입었다”고 보도를 했다. 조중러 3국 접경표지(중국 양해각)
지금, 두만강 유역의 북녘 사람들은 가을걷이를 하기는커녕 당장 먹고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라고 한다. 태풍 피해로부터 한 달이 경과된 두만강에는 두 갈래의 풍경이 연출되었다. 중국 쪽에서는 포클레인, 트럭 등 대형 중장비가 동원되어 피해복구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지만, 두만강 북쪽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다. 비록 중국에서 본 두만강 넘어 북한이지만 “왜 이리 조용할까?”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일부 언론에서 다룬 것처럼 북한의 주민들이 모두 어디로 갔을까. 조ㆍ중ㆍ러 3국 접경지대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중국 측의 양해각(踉海閣) 전망대에서 본 두만강의 하구는 가을 석양에 비친 황량함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두만강 하류 국경의 석양 이 삼각지대의 교통로인 조로다리(朝俄大橋)는 북한 나진시의 두만강선 두만강역에서 러시아 하산역(Хасан вокзал)을 잇는 유일한 철교이다. 조로철교는 1951년 9월 28일 문을 열고, 2013년 9월 13일에는 철도 보수공사와 준공을 가진 바 있다. 러시아 측의 크라시키노 세관를 거치게 되는데, 철로 세관은 여객용보다는 화물 전용 트레인으로 주로 목재, 대두유, 생수 등을 통관한다고 한다. 이곳 3국지대 인근에는 도문다리와 함께 북한과 중국 국경을 잇는 두만강의 주요 교역로인 원정ㆍ권하다리가 있는데, 훈춘 방천의 권하동과 북한 두만강시 원정리를 연결하고 있다. 두만강 나루터 표지석(도문시) 이곳, 조로다리는 2001년 한·북·러 양자간 정상회담으로 합의되고 2008년 이후에 중단되었지만, 남북한 종단철도(TKR)과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연결사업 때 가장 주목을 받은 곳이다. 동북아 물류 허브 건설과 함께 해상운송 등 물류시스템의 효율적인 재편을 위한 극동지역 개발과 유라시아 교통기반 구축의 전략거점이기도 했다. 지금은 북한쪽에서 러시아로 넘어오는 철도 물동량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조로다리를 통행하는 차량이나 기차는 한나절동안 구경할 수가 없었다.
이곳의 큰물피해는 10월 중순까지도 곳곳에다 흔적을 남겨놓았다. 태풍이 만든 크고 작은 물웅덩이가 강변을 따라 여러 군데나 생겼고, 큰물이 흘러간 곳에는 수많은 잔해들이 강변나무들을 모두 휘감고 있었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따라 권하, 방천, 밀강, 도문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두만강 상류인 북한 최대 노천광산이 있는 무산군 일대까지 피해를 입혔다고 전한다. 국경선을 따라 설치되었던 북측의 철조망이 거의 소실되거나 파손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국내 언론인 《연합뉴스》( 2016.11.1)는 “대규모 홍수피해로 국경 지역 철조망이 유실돼 현지 주민들의 탈북사건이 잇따르자 북한 당국이 함경북도 수해지역에 대한 주민등록 재조사에 착수했다”라고 보도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서 함경북도의 “보안서(경찰)에서 수해지역 주민들에 대한 인원파악에 착수했다”면서 “홍수에 떠밀려 사망했는지 아니면 탈북했는지 생사를 알 수 없는 주민들도 많아 보안서에서 주민등록 재확인을 하는 것”이라고 전해지기도 했다. 남양-도문다리 떠오르는 김동환의 <국경의 밤>
직접 바라보면서, 또 누구라도 두만강 변에 선다면 1925년 3월 발행된 김동환(金東煥)의 첫 시집인 『국경의 밤』을 떠올리게 된다. 일제강점하의 춥고 불안한 국경마을을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비참한 생활을 그린 우리나라 문학사의 최초 근대 서사시인 〈국경의 밤〉을 통해 국경지대 유역민의 참담함 했던 시절과 우리 민족에게 불어 닥친 비운을 엿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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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유원지 앞 두만강 모습 국경지역 방문 이튿날에는 도문으로 이동했지만, 훈춘 방천에서 못 탔던 두만강 유람선을 또 타지 못했다. 지난 홍수 때 중국 측에서 무리하게 유람선을 띄웠다가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 여파로 인해 이번에도 유람선에 오르지 못했다. 2000년대 중반 중국 측이 관광지역으로 만든 도문의 경우, 유람선 외에도 관광용 뗏목을 타고 직접 두만강변을 체험할 수도 있었다. 맞은편 북한의 남양과 연결된 도문ㆍ남양 다리는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구분되어 북·중 중간지점 경계선까지 갈 수 있도록 개방했던 곳이기도 하다. 도문 유원지에서 본 북한의 남양은 흐린 날씨로 인해 더 희미하고 뿌옇게 보였다. 온기가 전혀 없는 마을 풍경에다 안개까지 시야를 방해하여 아쉬움이 더 컸다.
이런 아쉬움은 조선 철종 12년(1861)에 발행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실린 용당(龍堂)의 기운에 기원한 까닭일까? 이 용당은 함경도 종성읍치 아래쪽에 있는 안원천(安原川)에 자연히 생긴 다이아몬드 모양의 안원보(堡) 기슭에 세워졌던 안원사(祠)의 부속건물인데 제사 올리던 사당 오른편쪽에 있었다. 특히 이 용당은 봄과 가을 두 차례씩 두만강에 제사를 지내던 두만강 신사(神祠)였다. 조선에서는 이곳을 북청(北瀆)으로 지정하였으며, 사전(祀典)에 중사(中祀)로 기록하였다. 중국 고대의 『주례(周禮)』의 영향을 받아 “예조에서 산천의 사전(祀典)제도를 올렸다”고 한다. 『당서(唐書)』, <예악지(禮樂志)>를 보면, 악(嶽)·진(鎭)·해(海)·독(瀆)은 중사(中祀)라 하였다. 또 조선시대부터 두만강에는 강안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고건원사(古乾原社)ㆍ고아산사(古阿山社) 등을 두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도 조선의 진보(鎭堡)가 두만강 변으로 전진 배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두만강 홍수로 인한 흔적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휑하던 조로철교와 원정ㆍ권하다리와는 달리 북측 남양과 중국 도문을 잇는 도문다리는 연일 물동량이 늘어나 좀 다행스러웠다. 철근, 시멘트 등 물건과 건축자재를 꽉 실은 차는 북측 남양으로 텅 빈 차량은 도문을 통해 중국으로 나오고 있었다.
최근 북한 당국이 올해 말 추진한다는 ‘200일 전투총화’에서 함경북도 수해복구 지원 수량으로 평가한다는 내부지시를 하달함에 따라 중국산(産) 시멘트 수입량이 늘었다는 소식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국내의 《데일리NK》(2016.11.1)에 따르면, “최근 무역회사들이 200일 전투총화로 (평양의) 려명거리 자재보장과 함께 수해복구 지원물품 마련이라는 이중 과제부담이 지워졌다”는 고충스런 볼멘소리까지 나왔다고 전했다. 북한 회령인근 지역 이런 북녘의 현장 소리와 더불어 중국 두만강변에서 바라보는 북측의 산은 민둥산이고 들녘은 나락 한 톨 건질 것 없는 허허벌판이고 자연재해까지 덮쳐서 더 깊은 생채기를 안고 있다. 이미 불어오기 시작한 동장군에 오늘 하루의 배고픔까지 겹친 북녘주민들의 슬픔은 눈물조차 마를 지경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주민들의 짙은 그림자는 오롯이 철조망 건너편으로 미련이 되어 전달되었다. 가수 고 김정구가 1938년에 발표한 대중가요처럼 ‘눈물 젓은 두만강’은 오늘도 주민들의 피눈물이 되어 검은 흙빛을 머금고 흐르고 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국내의 다른 가수들에 의해 여러 차례 불러진 이 곡 가사를 뇌리에 새기며, 두만강 건너편 만주벌판 용정촌으로 발길을 옮겼다. 일제에 대항하여 조국을 위해 싸우다 사라져간 독립투사인 임을 상상하면서 간도로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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